FAZER LOGIN『오늘 일정: 팔순 잔치, 종료 후 22층 회의실』
“어느 회의실이요.”
내가 묻자 주원이 몸을 바로 세웠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오른쪽. 불 켜 놓으라고 할게요.”
“직원은 부르지 마세요.”
주원은 내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몇 걸음 떨어져 있던 이헌이 다가왔다. 주원은 삼촌에게도 같은 말을 전했다.
“먼저 가 계셔도 돼요. 난 할아버지 배웅하고 올라갈게.”
“주원아.”
“여기서 하지 말자니까요.”
손님이 다가와 결혼을 축하했다. 이헌은 직원이 밀고 오는 수레를 피해 물러났다.
석진이 회장을 모시고 입구로 가고 있었다. 손목시계를 본 뒤 주원을 불렀다.
“주원아, 차 준비됐는지 확인해라.”
“네, 아버지.”
주원이 나를 돌아봤다.
“나경 씨도 아버님 먼저 보내 드려요. 밖에 추우니까 오래 서 계시지 않게.”
나는 가족석으로 갔다. 아버지는 외투를 입고 있었다. 소매 안에서 접힌 셔츠를 펴 드리자 아버지가 팔을 조금 들었다.
“피곤하지?”
“아빠가 더 피곤하지. 차 오면 바로 타요.”
“주원이가 병원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잘 챙기는구나.”
나는 외투 단추를 잠그려던 손을 내렸다. 아버지가 직접 단추를 끼웠다.
“날짜도 정했으니 준비할 게 많겠다.”
“그 얘기는 집에서 해요.”
“그래. 오늘은 늦었지.”
아버지 차가 떠난 뒤에도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 유리문 너머에서 주원이 회장이 차에 오를 때까지 문을 잡고 있었다.
이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갔다.
◈
22층에 내리자 복도 끝 회의실 문이 열려 있었다. 이헌이 문 옆에 서 있었다. 셔츠 소매는 내려져 있었고 재킷 단추는 풀려 있었다.
“아버님은 가셨어요?”
“네.”
나는 문 앞에서 멈췄다. 안에는 긴 탁자와 의자가 있었다. 탁자 가운데 생수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먼저 들어가요.”
이헌이 길을 비켰다. 어깨 사이가 20cm쯤 벌어졌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가 의자를 뺐다. 이헌은 맞은편이 아니라 옆쪽 자리에 앉았다. 의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문은 그대로 열려 있었다.
이헌이 탁자 위에 놓인 내 손을 봤다. 약혼반지가 천장 등을 받아 빛났다. 나는 손을 무릎으로 내리지 않았다.
“아까 단상에서.”
이헌이 말을 멈췄다.
“제가 고개 저은 거 봤죠?”
“봤어요.”
“일어나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알아요.”
복도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났다. 이헌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비어 있는 의자를 한 번 더 봤다.
“제가 할 말은 제가 할게요.”
“막지 않을게요.”
이헌은 탁자에 올려 두었던 손을 거뒀다.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주원이 문 앞에 나타나 우리 자리를 살폈다. 웃고 있지는 않았다.
“둘이 먼저 시작했어요?”
“아직.”
이헌이 답했다.
주원은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손잡이를 놓은 뒤에도 잠깐 그 앞에 서 있었다.
주원은 우리 맞은편에 앉았다. 탁자 가운데 있던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가 뚜껑을 살폈다. 뜯지 않은 병이었다.
“물이 이것뿐이네.”
주원이 병을 내 쪽으로 밀었다.
“마셔요. 아까도 안 마셨잖아.”
“주원 씨는요.”
“나는 아래서 마셨어요.”
병은 내 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멈췄다. 나는 당겨 놓되 열지는 않았다. 주원은 빈 탁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가 이헌을 봤다.
“삼촌부터 하실래요?”
◈
“네가 본 대로야.”
이헌의 대답에 주원이 의자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잘못 봤다는 말은 안 하시네요.”
“그런 말 안 해.”
“언제부터예요?”
나는 생수병에서 손을 뗐다.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요.”
“내 약혼녀하고 내 삼촌이잖아요. 물을 수는 있지.”
“저한테 물으세요. 제 일도 되니까.”
주원은 입술 안쪽을 잠깐 물었다.
“그래요. 나경 씨. 언제부터예요?”
나는 주원의 얼굴을 봤다.
“주원 씨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건 오늘 처음 안 게 아니에요.”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닌데.”
“날짜를 듣고 바뀐 것도 아니고요.”
“그럼 단상에서 말하지 그랬어요.”
“회장님 생신 자리였어요. 아버지도 계셨고요. 두 분 얘기를 거기서 꺼낼 수는 없었어요.”
“두 분이요?”
주원의 눈이 이헌에게 갔다가 돌아왔다.
“삼촌이랑 나?”
“네.”
“나는 삼촌하고 묶이고 싶지 않은데.”
이헌이 상체를 조금 숙였다.
“주원아. 나한테 할 말은 나한테 해.”
“하고 있잖아요.”
주원은 손가락으로 재킷 단춧구멍을 만졌다.
“삼촌은 나 보면서 무슨 생각 했어요?”
“미안하다.”
“그 말이면 끝나요?”
“아니.”
이헌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네가 화낼 일인 거 알아. 그렇다고 윤나경 씨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둘 수는 없어.”
“둘 수 없다니. 삼촌이 정해요?”
“제가 정해요.”
내가 말하자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나는 가방을 옆 의자에 내려놓았다. 탁자 아래에서 발을 모으고 주원을 똑바로 봤다.
“제가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예요. 실장님이 대신 정한 게 아니에요.”
주원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문밖으로 사람 둘이 지나간 뒤 주원이 물었다.
“그럼 해윤은요?”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 얘기를 조건으로 꺼내지 마.”
“삼촌한테 묻는 거 아니에요.”
주원은 내 대답을 기다렸다.
“아버지한테 갚아야 할 돈은 그대로예요. 날짜 정한 날 파혼하겠다고 하면 아버지가 상환 기한부터 확인할 텐데.”
“그건 제가 아버지와 의논할 일이에요.”
“나경 씨 아버님은 아직 모르시잖아.”
나는 생수병을 잡았다. 손바닥에 병 옆면의 홈이 눌렸다. 주원이 그 손을 보고 말을 멈췄다.
나는 뚜껑을 돌렸다. 봉해 둔 고리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병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여기 오라고 한 거예요? 빚 얘기하려고?”
“아니요.”
주원은 팔을 탁자 위에 올렸다.
“결혼식까지 조용히 지내요.”
이헌이 먼저 물었다.
“무슨 뜻이야.”
“오늘 본 거, 아버지한테 말 안 할게요. 대신 결혼식까지 아무 일 없는 걸로 해요.”
“아무 일 없는 게 뭔데.”
“지금까지 하던 대로요. 집에서 부르면 오고, 준비하자는 거 준비하고.”
나는 병뚜껑을 내려놓았다.
“둘이 만나지 말라는 뜻도 있겠네요.”
“그걸 꼭 내 입으로 들어야 해요?”
“주원 씨 조건이니까 정확히 말해요.”
주원은 빈 의자를 봤다. 나와 이헌 사이에 있는 의자였다.
“따로 만나지 마요. 연락도 하지 말고. 적어도 내가 두 사람을 찾아다니게 하지는 말아 줘요.”
이헌이 의자 팔걸이에서 손을 뗐다.
“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
주원의 손이 멎었다.
“그 얘기는 왜 나와요.”
“해윤 대출 서류부터 확인해. 네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야.”
“지금 삼촌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 약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도 알아야지.”
주원은 셔츠 깃 안으로 손가락을 넣었다가 뺐다. 넥타이가 조금 옆으로 돌아갔다.
“알고 싶지 않아.”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원은 곧 고개를 들었다.
“알면 내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적어도 같은 조건을 내걸지는 않겠지.”
“삼촌은 할 수 있는 게 많아서 좋겠네요.”
“주원아.”
“나는 오늘 일을 말 안 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나는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병뚜껑을 내 쪽으로 가져왔다.
“말하지 않는 대신 결혼 날짜까지 가만히 있으라는 거잖아요.”
“네.”
“그날이 오면요?”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도 손님이 있고, 양가 어른이 있고, 준비한 사람들이 있겠죠. 오늘보다 더 많을 거고요.”
“그때 얘기는 그때 해요.”
“오늘도 그렇게 단상에 올라갔어요.”
“주원 씨가 정한 날짜를 제 앞에서 발표했어요. 의논했다고도 했고요.”
주원은 눈을 내렸다.
“그건…….”
“제가 조용히 있으면 동의한 걸로 쓰지 마세요.”
주원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내렸다.
“그럼 당장 아래로 내려가서 말할래요?”
“아직 주원 씨 얘기를 듣고 있어요.”
“내 얘기는 했잖아요.”
“왜 결혼식까지인지 안 했어요.”
주원은 입을 다물었다. 탁자 아래에서 주원의 구두 앞코가 한 번 움직였다.
“사진도 너였지.”
이헌이 물었다. 주원이 고개를 들었다.
“주차장에서 찍은 거. 우편함에 넣은 쪽지도.”
나는 생수병에서 손을 뗐다. 수장고에서 짐작 가는 사람이 있다던 이헌의 말이 떠올랐다.
주원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사람 시켜서 찍었어요. 쪽지는 내가 넣으라고 했고.”
“왜요?”
“약혼식 전날 밤에 봤다고 했잖아요. 그날부터 사람을 붙여 뒀어요.”
주원이 내 쪽을 봤다.
“12월 말에 아버지 쪽 부지 서류가 움직였어요. 그 전에 내 약혼녀 사진이 돌면 호텔에서 잘리는 건 나예요.”
“결혼식까지도 같은 이유예요?”
주원은 대답하지 않고 넥타이를 바로 했다.
◈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우리 셋이 동시에 문을 봤다. 주원은 의자를 뒤로 밀지 않은 채 대답했다.
“누구세요.”
“사용 중이신 줄 몰랐습니다. 정리해 드릴까요?”
문손잡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복도에서 수레 바퀴가 짧게 굴러가는 소리가 났다.
“괜찮아요. 끝나면 연락할게요.”
“네, 부사장님.”
나는 생수병을 탁자 가운데로 조금 밀었다. 직원의 발소리가 문 앞에서 멀어졌다.
주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목소리 높여 봐야 직원들만 곤란해져요.”
“누가 높였는데.”
이헌의 말에 주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나경 씨. 오늘 집에 가서 아버님한테 말씀드릴 거예요?”
“그걸 주원 씨한테 약속할 생각은 없어요.”
“당장은 하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조건이에요?”
주원은 손바닥을 탁자에 붙였다. 손톱 끝에 크림이 조금 남아 있었다. 케이크 초를 바로 세울 때 묻었다.
“둘 다.”
나는 휴지통 옆에 놓인 종이 냅킨을 한 장 꺼냈다. 탁자 위로 밀어 주자 주원이 나를 봤다.
“손에 묻었어요.”
주원은 손을 뒤집어 보고 냅킨으로 닦았다. 닦은 종이를 접은 뒤에도 버리지 않았다.
“내가 싫어진 건 알겠어요.”
“싫고 좋고만으로 말하지 마세요.”
“삼촌은 좋잖아.”
이헌이 주원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나는 먼저 대답했다.
“네.”
종이를 접던 주원의 손이 멈췄다. 나는 이헌을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대답으로 제 얘기가 다 끝나는 건 아니에요. 저는 해윤 서류를 확인할 거예요. 잘못된 건 바로잡을 거고요.”
“그래서 삼촌이 도와주는 거예요?”
“그 일은 내가 먼저 시작했어.”
이헌이 말했다.
“윤나경 씨한테 책임 돌리지 마.”
“삼촌 책임 없다고 한 적 없어요.”
주원은 의자를 뒤로 뺐다. 다리 끝이 바닥을 긁었다. 일어나지는 않고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렸다.
“둘이 여기서 나만 빼고 얘기하는 거, 좀 그만하면 안 돼요?”
나는 벌렸던 입을 다물었다.
주원은 닦은 손톱을 엄지로 문질렀다.
“결혼식 전까지는 아버지한테 말 안 할게요. 그건 내가 지켜요.”
“저희가 따로 만나면요?”
주원이 나를 봤다.
“내가 모르게 해야겠죠.”
“그건 약속이 아니에요.”
“나도 약속받은 거 없잖아요.”
나는 가방을 들었다. 이헌이 따라 일어나려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그대로 앉았다. 주원은 우리 둘을 번갈아 봤다.
“조건에 동의한 건 아니에요.”
내 말에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일도 제가 정해요. 주원 씨가 대신 연락하지 마세요.”
“나도 오늘 들은 얘기 생각할 시간은 줘야죠.”
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 물병은 손에 들었다. 문까지 가려면 주원의 의자 뒤를 지나야 했다.
이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원아, 잠깐 남아.”
“셋이 하던 얘기잖아요.”
주원도 일어났다. 내 앞을 막지는 않았다. 의자를 탁자 안으로 밀어 넣고 냅킨을 집었다.
나는 문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주원이 뒤에서 불렀다.
“나경 씨.”
손잡이를 내리기 전에 돌아봤다. 주원은 쓰레기통에 냅킨을 버린 뒤 재킷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아, 그리고 그날 밤 31층 바 CCTV, 나한테 있어.”
(42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