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공방 일지 정리, 다은과 작업대 점검』
나는 일지를 받친 판을 작업대에 내려놓았다. 다락에서 가져올 때 감쌌던 천을 풀자 모서리에 붙은 먼지가 떨어졌다.
다은이 들고 있던 컵을 옆 탁자로 옮겼다.
“여기서 펴도 돼?”
“잠깐만. 밑에 종이 깔게.”
나는 포장지를 펼치고 그 위에 판을 올렸다. 다은은 의자를 끌어오다가 멈췄다. 바닥에 남은 가죽 조각을 주워 쓰레기통에 넣은 뒤 앉았다.
“토요일에 찾은 게 이거야?”
“응. 다락 서랍에 있었어.”
면끈을 풀고 천을 젖혔다. 접힌 자리에 먼지가 모여 있었다. 다은이 붓을 내밀었다.
“열쇠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부터 정리하려고. 다른 공책도 있어서.”
다은은 더 묻지 않고 장갑을 꼈다. 나는 휴대폰에 찍어 온 사진을 띄웠다. 일지를 자꾸 벌리는 대신 화면부터 보여 줬다.
『서은숙 님 시집, 등 갈이. 손녀 나경이 첫 실밥.』
다은이 화면을 확대했다.
“네가 처음 고친 책이야?”
“처음 실로 꿰맨 책.”
“이걸 아직 갖고 계셨어?”
“책 주인은 돌아가셨고, 아들이 가지고 있었어.”
다은이 나를 봤다. 나는 화면을 끄지 못한 채 휴대폰 옆면을 쥐었다.
“우리한테 시집 맡겼던 분 있잖아.”
“강 실장님?”
“응.”
다은의 손이 작업대 위에서 멈췄다.
나는 화면을 돌려 내 쪽으로 가져왔다. 일지에 적힌 이름과 날짜가 다시 보였다.
“어머니 책이래. 내가 고칠 때도 공방에 왔었대.”
“넌 기억나?”
“안 나. 난 책만 보고 있었나 봐.”
“그래서 그분이 알아봤어?”
“나중에 이름 듣고 알았대.”
다은은 장갑 끝을 당겼다. 질문을 더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내가 먼저 사진을 넘겼다. 앞뒤 장까지 찍어 둔 화면이 지나갔다.
“할아버지가 내가 다시 꿰맨 것까지 적어 놓으셨어. 여긴 실 굵기 바꾼 거.”
“네가 풀고 다시 했어?”
“구멍이 안 맞았거든.”
“지금도 안 맞으면 퇴근 안 하잖아.”
나는 대답 대신 일지 밑에 받침을 하나 더 넣었다. 표지가 벌어진 채로 놓이지 않도록 높이를 맞췄다.
다은이 일지 옆에 둔 봉투를 밀어 줬다.
“그 얘기 듣고 어땠는데?”
나는 붓을 내려놓았다.
“내가 모르는 걸 그 사람만 알고 있었다는 게 싫었어.”
“말했어?”
“응. 다음부터는 혼자 정하지 말라고.”
“잘했네.”
짧은 대답이었다. 다은은 내가 얹은 받침이 기울지 않았는지 살폈다. 손을 넣어 고칠 필요가 없자 그대로 거뒀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월요일 아침부터 이 표정은 아닌 것 같고.”
“무슨 표정인데.”
“풀 바른 책 위에 누가 컵 올렸을 때.”
나는 옆 탁자로 옮겨 둔 컵을 봤다. 다은이 손을 뻗어 더 안쪽으로 밀었다.
◈
일지를 덮고 나자 다은의 휴대폰이 울렸다.
다은은 화면을 확인한 뒤 뒤집어 놓았다. 곧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집어 들어 짧게 답을 보냈다.
“급한 일이야?”
“이제 알았나 봐.”
“뭘?”
“어제가 무슨 날이었는지.”
나는 일지 사진에 붙일 파일 이름을 적다가 고개를 들었다.
“기념일이었어?”
“응. 저녁 먹자고 해 놨는데 친구들이랑 밥 먹는다고 하더라. 내가 무슨 날인지 물었더니 일요일이래.”
다은이 장갑을 벗어 작업대에 내려놨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서?”
“그냥 잘 먹으라고 했어.”
“말하지 그랬어.”
“그러게.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기억 못 하는 걸 확인하고 싶었나 봐.”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다은은 이번에도 바로 보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포장지 자투리를 모았다. 책을 싸고 남은 종이 중에 눌린 자국이 없는 것을 골랐다.
“지금 사과하는 거 아니야?”
“사과하고 오늘 만나자는데, 나 오늘 풀 걷어 내야 돼.”
다은이 자기 앞에 쌓인 책을 가리켰다.
나는 그중 맨 위의 책을 가져왔다.
“이건 내가 할게.”
“그거 한다고 바로 나갈 건 아니야.”
“나가라고 안 했어.”
잘라 놓은 종이를 가져와 작업대에 폈다. 다은이 내 손을 내려다봤다.
“뭐 하게?”
“꽃.”
“갑자기?”
“꽃도 못 받았을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나는 종이를 접어 모서리를 맞췄다. 접지칼의 둥근 부분으로 선을 눌렀다. 다은이 턱을 괴려다 장갑을 벗은 손부터 닦았다.
접힌 종이를 펴서 반대쪽으로 돌렸다. 꽃잎이 될 부분을 안으로 넣고, 끝을 조금씩 벌렸다. 다은의 휴대폰이 또 울렸지만 이번에는 둘 다 보지 않았다.
“너 이런 건 언제 배웠어?”
“할아버지 기다릴 때. 남은 종이가 많았으니까.”
“나는 기다리면 과자 먹었는데.”
“너도 만들래?”
“내가 접으면 네가 다 고쳐야 하잖아.”
나는 종이를 한 장 더 밀어 줬다.
“고치지 않을게.”
다은이 종이를 집었다. 내가 접은 선을 보고 따라 하다가 모서리를 맞추지 못했다. 손을 뻗으려던 나는 접지칼만 가운데 놓았다.
“이걸로 눌러.”
“여길?”
“응. 손톱으로 하면 종이 벗겨져.”
다은은 입술을 다물고 선을 눌렀다. 내가 만든 꽃을 옆에 세워 놓자 자기 것도 펴 봤다. 꽃잎 하나가 안쪽으로 접혀 있었다.
“내 건 왜 이래.”
“밑을 잡고 그 부분만 꺼내 봐.”
다은은 한참 만에 꽃잎을 빼냈다. 나는 남은 종이를 말아 줄기를 만들었다. 풀을 바른 끝을 잠깐 누르고 꽃 아래에 끼웠다.
“됐다.”
꽃을 내밀자 다은이 받아 들었다. 한 번 돌려 보고는 작업대 모서리의 빈 실통에 꽂았다.
“이건 안 시들어서 좋네.”
다은은 휴대폰을 들어 꽃 사진을 찍었다. 화면을 몇 번 누른 뒤 내려놨다.
“뭐라고 보냈어?”
“꽃 받았다고.”
“누구한테 받았냐고 묻겠네.”
“윤 사장님이라고 썼어. 질투할 틈도 안 줬다.”
다은이 웃었다. 나는 다은이 접은 꽃에 줄기를 끼웠다. 다은은 그 꽃을 내 쪽 실통에 꽂아 줬다.
◈
점심을 먹고 돌아오니 작업대 위의 꽃이 먼저 보였다.
나는 앞치마를 매고 다은이 남겨 둔 책을 펼쳤다. 굳은 풀을 조금씩 걷어 내자 종이 묶음 사이에 끼어 있던 실이 드러났다. 끊을 실과 남길 실을 나눠 두었다.
다은은 맞은편에서 일지 사진을 정리했다.
“이 사진은 흐려. 다시 찍을까?”
“원본 펴기 전에 불러 줘.”
“응.”
한동안 칼이 받침에 닿는 소리만 났다. 나는 풀 조각을 털어 내고 책을 덮었다.
“다은아.”
“응.”
“말하면 달라질까 봐 안 한 적 있어?”
다은이 화면에서 눈을 뗐다.
“무슨 말을?”
나는 끊어 낸 실을 손끝으로 모았다. 쓰레기통에 버린 뒤에도 손을 털었다.
“계속 보고 싶다는 말.”
다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작업대 사이에 놓인 의자를 빼서 내 옆에 앉았다.
“강 실장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은의 시선이 내 목에 걸린 실로 내려갔다. 앞치마 위로 약혼반지가 조금 나와 있었다. 나는 반지를 안으로 넣지 않았다.
“그럼 주원 씨는?”
“알아.”
다은은 바로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작업대에 놓인 칼을 칼집에 넣었다.
“잘하는 일이라고 말해 달라는 건 아니야.”
“그 말은 못 해.”
“알아.”
“그런데 네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는 들을게.”
나는 빈손을 무릎에 올렸다.
주원의 차 안에서 앞차 번호판을 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눈 밑이 검었고, 신호가 바뀌어도 잠깐 출발하지 않았다. 삼촌을 다치게 하지 말라는 말을 할 때도 앞을 보고 있었다.
“거리를 두려고 했어. 내가 안 만나면 덜 어려워질 것 같아서.”
“그분한테 그렇게 말했어?”
“만나지 말자고는 했어. 혼자 확인할 일이 있다고만.”
“진짜 이유는?”
“못 했어. 무섭다는 말은 하기 싫었어.”
다은이 작업대 위의 실통을 제자리로 돌려놨다. 꽃잎이 책에 닿지 않도록 바깥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분이 싫어진 건 아니고?”
“아니.”
대답이 빨리 나왔다. 다은은 내 얼굴을 보고 다시 물었다.
“그럼 네가 덜 힘들려고?”
나는 무릎 위에서 손을 폈다.
“그것도 있어.”
“그것도?”
“그 사람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좋아해서 그렇게 됐다는 말을 들을까 봐.”
말을 마친 뒤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가로 가서 프레스기 손잡이를 확인했다. 아침에 조인 그대로였다. 밑에 받친 판도 움직이지 않았다.
할 일이 없어서 다시 돌아왔다. 다은은 내가 비운 의자 옆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네가 없는 데서 결정될 일도 있겠지.”
“응.”
“그걸 전부 네가 막을 수는 없잖아.”
나는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그 사람한테도 내가 알아도 되는지 혼자 고르지 말라고 했어.”
다은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나는 이유도 말 안 하고 안 만나려고 했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다은은 내 앞에 있던 꽃을 손가락으로 건드렸다. 덜 접힌 꽃잎이 조금 벌어졌다.
“그럼 지금 말해. 나한테 말고.”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 이헌의 이름을 찾고도 바로 누르지는 못했다.
“뭐라고 시작하지.”
“그것까지 내가 접어 줘야 해?”
다은이 자기 작업대로 의자를 밀고 돌아갔다. 나는 휴대폰을 쥔 채 웃었다가 입술을 눌렀다.
◈
전화를 걸었을 때 이헌은 바로 받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귀에서 내리려다 다시 댔다. 수신음이 몇 번 더 이어진 뒤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경아.”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통화 괜찮아요?”
“네. 지금은 괜찮아요.”
나는 작업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다은은 책을 돌려 놓고 풀을 걷어 냈다. 칸막이가 없는 작업실이라 멀리 가도 목소리는 들릴 거리였다.
“일지 정리하고 있어요. 다은이랑.”
“손상된 곳은요?”
“표지 안쪽부터 손봐야 해요. 오늘은 사진만 더 찍으려고요.”
“내가 할 일이 있으면 말해요.”
나는 창틀 위에 놓인 붓을 집었다가 내려놨다.
“그거 말고 할 얘기가 있어요.”
이헌의 대답이 멈췄다. 전화기 너머에서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한 번 났다.
“듣고 있어요.”
“수장고에서 일 끝내던 날, 당분간 따로 만나지 말자고 했잖아요.”
“네.”
“혼자 확인할 일이 있다고 한 거, 그게 다는 아니었어요.”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내렸다. 골목을 지나던 사람이 건물 번호를 확인하고 옆 가게로 들어갔다.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무서워서요.”
이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안 만나고, 연락 줄이고.”
나는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이헌 씨한테 말도 안 했어요.”
“지금은요?”
나는 돌아서서 작업대를 봤다. 실통에 꽂힌 꽃 아래로 다은이 접다 남긴 종이가 있었다.
“보고 싶어요.”
칼이 받침에 닿는 소리가 멎었다. 다은이 책을 들고 창가 반대편으로 갔다. 나는 목소리를 더 낮췄다.
“안 보고 싶은 척은 안 할래요.”
전화기 너머에서도 잠깐 아무 소리가 없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며 앞치마 주머니에 빈손을 넣었다.
“나도 보고 싶어요.”
이헌이 말했다.
나는 입술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건물 아래에서 문 닫는 소리가 났다.
“오늘 오시라는 말은 아니에요.”
“알아요.”
“일하고 있어요. 저도 마무리할 거 있고요.”
“그럼 끝나고 연락해도 돼요?”
“네.”
대답하고도 전화를 끊지 않았다. 이헌도 그대로였다. 나는 먼저 창가에서 돌아섰다.
“이제 일할게요.”
“다치지 말고요.”
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작업대에 놓았다. 다은은 옮겨 간 자리에서 책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아 일지 사진을 다시 띄웠다.
“다은아, 이쪽 받침 좀 잡아 줘.”
다은이 와서 판의 끝을 잡았다. 나는 천을 걷고 표지를 받쳤다. 휴대폰을 들어 글씨가 기울지 않게 화면을 맞췄다.
사진을 찍으려는데 알림이 떴다.
주원이었다.
『토요일에 웨딩드레스 보러 가. 엄마랑.』
(49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