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오늘 일정: 드레스숍 방문, 경란 여사와 예복 고르기』
주원이 보낸 문자는 예약 안내 아래에 남아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유리문 안에서 직원이 다가와 문을 열었다.
“윤나경 고객님이시죠?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경란은 창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탁자에는 손대지 않은 차가 놓여 있었다. 나는 코트 단추를 풀며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늦지는 않았어. 내가 먼저 왔지.”
경란은 내 신발에서 가방까지 보고 옆자리를 가리켰다. 갈색 가죽 가방을 내려놓자 직원이 코트를 받아 갔다.
“주원 씨는 못 온다고 연락받았어요.”
“호텔에 일이 있대. 오늘은 내가 보면 돼.”
직원이 드레스 사진을 펼쳤다. 경란은 종이를 넘기며 몇 군데를 짚었다.
“이런 건 빼 주세요. 어깨가 너무 드러나고, 이건 장식이 많네요.”
나는 맞은편에서 사진을 돌려 보았다. 경란이 넘긴 장에 허리를 조이지 않는 드레스가 있었다. 손가락을 얹자 경란이 먼저 다음 장을 펼쳤다.
“입으면 생각이 달라져. 사진으로는 몰라.”
“이것도 입어 보고 싶어요.”
직원이 멈췄다. 경란은 내가 짚은 사진을 보고 찻잔을 들었다.
“나중에. 먼저 골라 둔 것부터 보자.”
직원은 사진 옆에 표시했다. 나는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 반지는 오늘 손가락에 끼고 왔다. 가방 손잡이를 잡을 때마다 안쪽 금속이 손바닥에 닿았다.
“날짜는 더 미루면 안 돼.”
경란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 아버님도 공장 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신 건 알지만, 우리도 준비할 게 있어.”
“아버지는 결혼 준비 때문에 공장 일을 하시는 게 아니에요.”
경란은 직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준비해 주세요.”
직원이 물러난 뒤 경란이 내 가방 위에 놓인 손을 보았다.
“여기서 그런 말까지 해야겠니.”
“아버지 일과 제 결혼은 나눠서 말씀해 주세요.”
“나눌 수 있으면 좋겠지.”
경란이 찻잔 받침을 바로 놓았다.
“그런데 네가 우리 집에 들어오기로 했잖아.”
나는 가방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직원이 돌아와 안쪽을 가리켰다.
“준비됐습니다. 이쪽으로 오실까요?”
경란이 먼저 일어났다.
◈
탈의실 안에는 의자와 거울이 있었다. 직원이 드레스 자락을 펴 놓는 동안 나는 반지를 빼서 가방 안주머니에 넣었다.
첫 드레스는 허리 양옆에 장식이 붙어 있었다. 직원이 등 쪽 끈을 당기자 숨을 들이쉬던 배가 멈췄다.
“조금만 느슨하게 해 주세요.”
“이 정도 괜찮으세요?”
“네. 지금이 좋아요.”
커튼을 열자 경란이 의자에 앉은 채 나를 올려다봤다. 직원이 발밑의 자락을 펴 주었다.
“조금 더 들어가야겠는데. 허리가 남잖아요.”
경란의 말에 직원이 내 쪽을 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앉아 보고 정할게요.”
드레스 자락을 모아 의자에 앉았다. 허리 장식이 갈비뼈 아래를 눌렀다. 등을 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건 오래 입기 어렵겠어요.”
“본식 때 계속 앉아 있을 것도 아닌데.”
“서 있다가 앉기도 해야 하니까요.”
직원이 내 옆에 무릎을 굽혔다.
“안쪽 받침을 조정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허리선은 그대로라 다른 디자인도 보시는 게 좋겠어요.”
경란은 입술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끈을 풀자 직원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불편하셨어요?”
“조금요. 말씀해 주셔서 고마워요.”
다음 드레스에는 소매가 있었다. 손목을 굽히자 안쪽 솔기가 피부에 쓸렸다.
작업할 때 입는 옷이었다면 바로 벗었을 것이다. 나는 소매를 조금 당겨 보다가 손을 내렸다.
밖에서 경란의 통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보고 있어.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일 봐.”
잠깐 뜸이 생겼다.
“내가 같이 있는데 뭘 또 물어.”
통화가 끝나자 내 휴대폰이 울렸다. 의자 위에 둔 화면에 주원의 이름이 떴다.
『불편한 건 안 된다고 해. 엄마 눈치만 보지 말고.』
나는 옷을 받쳐 든 직원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하고 있어요.』
답을 보내자 곧 문자가 왔다.
『잘하고 있네.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 그치?』
나는 화면을 끄려다가 다시 들었다.
『드레스 고르는 것과 결혼에 동의하는 건 같은 일이 아니에요.』
이번에는 답이 바로 오지 않았다. 나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직원에게 팔을 내밀었다.
◈
2번째 드레스의 어깨선을 잡던 직원이 핀을 놓쳤다.
작게 부딪히는 소리가 난 뒤 직원이 몸을 숙였다. 핀은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허리 아래 망사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직원이 핀 머리를 잡으려 하기에 나는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직원의 손이 멎었다. 핀 끝에 실 한 가닥이 걸려 있었다. 그대로 당기면 망사에 줄이 생길 자리였다.
“제가 봐도 될까요?”
“죄송합니다. 움직이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빼 드릴게요.”
“끝이 걸렸어요. 이쪽에서 풀어야 해요.”
나는 허리를 굽히려다가 멈췄다. 옷 때문에 손이 닿지 않았다.
“거울 앞 의자 좀 당겨 주시겠어요?”
직원이 의자를 가져왔다. 나는 자락을 받쳐 앉고 망사를 무릎 위에 올렸다. 경란이 커튼 밖에서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핀이 걸려서요. 곧 나갈게요.”
나는 핀 머리를 손끝으로 받쳤다. 망사를 당기지 않고 핀이 들어간 쪽으로 조금 밀었다. 끝에 걸린 실이 느슨해졌다.
“여기만 받쳐 주세요. 팽팽하게 잡지 마시고요.”
직원이 두 손으로 망사를 받쳤다. 나는 손톱 끝으로 실을 비켜 놓고 핀을 돌렸다. 구멍을 넓히지 않도록 들어온 방향을 따라 뺐다.
손바닥에 핀을 내려놓은 뒤 망사를 폈다. 직원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살폈다.
“자국이 안 났네요.”
“올이 끊어진 건 아니었어요.”
나는 핀을 건넸다. “이런 일을 하세요?”
“종이랑 책을 고쳐요.”
“그래서 손이 안 떨리셨구나.”
나는 무릎 위에 남은 자락을 내려다봤다.
“떨릴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놓고 기다려요.”
커튼이 조금 열렸다. 경란이 틈으로 안을 봤다.
“직접 빼고 있었어?”
“실이 걸려 있어서요.”
“그냥 직원에게 맡기지.”
직원이 허리를 숙였다.
“제 실수였습니다. 고객님이 도와주셨어요.”
“옷은 괜찮고요?”
“네. 손상 없습니다.”
경란은 더 묻지 않고 물러났다. 직원은 내 등 쪽을 여미기 전에 손을 닦았다. 나는 거울로 어깨선을 확인했다.
이 드레스는 허리는 편했지만 팔을 올릴 때 소매가 당겼다. 커튼 밖으로 나가 양팔을 조금 들어 보이자 경란이 이마를 짚었다.
“누가 결혼식에서 그렇게 팔을 드니.”
“제 몸에 맞는지 보는 거예요.”
나는 팔을 내렸다. 직원이 소매 안쪽에 손가락을 넣어 여유를 살폈다.
“수선할 수 있는 부분이에요. 표시해 둘게요.”
경란은 대답 대신 탁자에 놓인 사진을 넘겼다.
“다음 것 입어 보자.”
◈
직원이 마지막 옷을 가지러 나간 뒤 휴대폰을 확인했다. 주원의 답은 없었다. 대신 이헌에게서 짧은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작업실에 있어요?』
나는 의자에 앉아 답을 썼다.
『드레스숍이에요. 경란 여사님하고요.』
전송한 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경란은 직원에게 예식장 통로 길이를 설명하고 있었다.
잠시 후 화면이 켜졌다.
『알았어요. 끝나면 연락해요.』
나는 그 문장을 읽고 입력창을 눌렀다.
보고 싶다는 말은 쓰지 않았다. 커튼 하나 건너에서 경란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경아, 다음 옷 준비됐다.”
“네.”
나는 쓰던 글자를 지웠다. 휴대폰을 가방에 넣으려는데 화면이 다시 켜졌다.
『옷은 직접 골라요. 오래 입을 거니까.』
나는 휴대폰 옆면을 쥐었다. 가방 안주머니에는 주원과 맞춘 반지가 있었다. 화면을 끈 뒤 반지가 있는 쪽의 지퍼부터 닫았다.
“아까 말씀하셨던 옷이에요.”
직원이 들어오며 말했다. 처음 사진에서 내가 짚었던 드레스였다. 앞에는 장식이 없었고 소매 끝에만 천이 한 겹 더 붙어 있었다.
“이것도 입어 보게 해 주시네요.”
“사진에 표시해 뒀어요.”
직원은 내 발 앞에 자락을 펼쳤다.
옷을 갈아입고 허리선을 맞췄다. 직원이 등 쪽을 잠근 뒤 물었다.
“어떠세요?”
나는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났다. 팔을 굽혀 가슴 앞에 올려도 소매가 당기지 않았다.
“괜찮아요.”
“거울로 보실래요?”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목 아래가 조이지 않았고, 치맛자락을 잡지 않아도 발을 옮길 수 있었다. 왼손 검지의 굳은살로 소매 안쪽을 만졌다. 거친 솔기가 없었다.
직원이 뒤에 달린 천을 바로잡았다.
“여기만 길이를 맞추면 되겠어요. 신발은 지금 높이로 하실까요?”
“조금 낮은 것도 신어 볼게요.”
커튼을 열고 나갔을 때 경란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발판 앞에 멈췄다.
“이번 건 편해요.”
경란이 고개를 들었다.
탁자에 내려놓던 휴대폰이 받침 모서리에 걸렸다. 경란은 손을 그대로 둔 채 나를 보았다. 직원이 자락을 펴고 물러설 때까지 말이 없었다.
“너무 단순한가요?”
내가 묻자 경란이 휴대폰을 탁자 안쪽으로 밀었다.
“아니.”
“저는 이쪽이 좋아요.”
경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앞까지 와서 어깨에 붙은 실밥을 떼었다. 손끝에 남은 실을 직원에게 건네고 한 걸음 물러났다.
“뒤로 돌아 봐.”
나는 천천히 돌았다. 거울에는 경란의 옆얼굴이 보였다. 진주 귀걸이 아래로 귀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직원이 낮은 신발을 가지러 갔다. 나는 발판에서 내려와 경란 옆에 섰다.
“이 옷으로 수선할까요?”
경란은 내 손을 보았다.
“반지는?”
“잃어버릴까 봐 가방에 뒀어요.”
“사진 찍을 때는 껴.”
나는 대답하고 가방 쪽으로 갔다. 반지를 끼우려는데 경란이 먼저 말했다.
“나는 내가 고른 걸 못 입었어.”
반지를 손가락 끝에 건 채 돌아봤다.
“결혼식 때요?”
“시어머니가 골라 주셨어. 목이 여기까지 올라왔지.”
경란이 자기 목 아래를 짚었다.
“먹을 것도 조심하라고 해서 아침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어. 옷에 묻히면 안 된다고.”
나는 반지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끝나고는 드셨어요?”
“사진 찍고, 인사하고. 집에 가니까 밤이더라.”
“주원 씨 아버님은요?”
경란은 내 소매를 보다가 손을 거뒀다.
“손님들하고 따로 식사했지.”
직원이 신발을 들고 돌아왔다. 경란은 말을 멈추고 의자를 당겨 주었다. 나는 앉아서 신발을 바꿨다.
낮은 굽을 신으니 치맛자락이 바닥에 닿았다. 직원이 밑단을 접어 표시하는 동안 경란은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때 사진이 아직 있어. 다들 잘 나왔다고 해.”
“여사님도 보세요?”
“가끔.”
경란이 내 어깨 너머의 거울을 봤다.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싶었는지는 아무도 안 묻더라.”
나는 무릎 위의 손을 폈다. 직원이 표시를 끝내고 일어났다.
“한번 걸어 보세요.”
발판을 돌아 거울까지 걸었다. 밑단이 발에 걸리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자 직원이 수선할 곳을 종이에 적었다.
경란은 내게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이게 제일 낫다.”
“저도 이게 좋아요.”
“그럼 이걸로 해.”
“오늘은 수선할 곳만 적어 주세요. 결정은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직원이 펜을 멈췄다. 경란이 나를 봤다.
나는 자락을 놓고 경란 앞에 섰다.
“옷은 마음에 들어요. 그래도 오늘 바로 정하지는 않을게요.”
“주원이가 골라도 된다고 했잖아.”
“주원 씨한테도 따로 이야기할게요.”
경란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 닿았다.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 뒤 경란이 직원에게 말했다.
“기록만 해 둬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고 옷걸이를 챙기러 갔다.
나는 거울 앞에서 한 번 더 팔을 움직였다. 소매 끝이 손목 위로 올라왔다. 직원이 돌아오며 아까 핀을 뺀 자리를 보여 줬다.
“다시 봤는데 정말 괜찮아요. 감사해요.”
“다행이네요.”
나는 웃으며 손을 내렸다. 경란이 거울 속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입가에 남은 웃음을 거두고 돌아섰다.
경란은 의자 등받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이헌이 엄마도 그렇게 웃었어. 그러다 죽었지.”
(50화 끝)
『오늘 일정: 11월 4일 화요일, 해윤 이사회』편지를 넣을 보존 봉투를 접었다.마지막 줄의 이헌 이름까지 한 번 더 읽고 편지를 봉투에 넣었다. 작업대에 놓인 주주명부 사본에는 내 이름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제 회사 도장을 받아 온 서류였다.다은이 내 가방 옆에 확대경을 놓았다.“이것도 가져가. 서류 본다며.”“오늘은 글자 읽으러 가는 건데.”“작은 글자는 글자 아니냐.”나는 확대경을 천집에 넣었다. 가방 안쪽에는 주식 증서 사본과 오늘 회의 자료가 있었다. 원본은 작업실 서랍에 두고 잠갔다.다은이 내 소매에 붙은 실을 떼었다.“전화 못 받아도 돼. 손님한테는 내가 말할게.”“급한 건 문자 줘.”“알았어. 밥 거르지 말고.”가방을 들자 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이헌에게 온 문자였다.『공장에 먼저 와 있어요. 투자 검토 자료만 전달하고 나갈 겁니다.』나는 답장을 쓰다가 멈췄다. 편지에 적힌 일을 물어볼 때마다 이헌은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오늘은 그 말을 꺼낼 시간이 없었다.『끝나고 연락할게요. 회의는 제가 들어갈게요.』답은 내가 계단을 내려가기 전에 왔다.『네. 기다릴게요.』◈공장 계단에는 젖은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난간을 잡고 올라가자 염 반장이 걸레를 밀고 있었다. 작업복 바지 끝이 젖어 있었다.“밑에서 손 씻고 올라온 놈이 물을 흘렸어. 조심해.”“제가 할게요.”“오늘 여기서 네 일은 이게 아니잖아.”염 반장이 걸레를
『오늘 일정: 11월 1일 토요일, 엄마 상자 열기』열쇠가 반 바퀴쯤 돌다가 멈췄다.나는 힘을 빼고 상자를 식탁 안쪽으로 당겼다. 놋쇠 자물쇠 아래로 가루가 떨어졌다. 아버지가 행주를 가져오자 빈 접시를 내밀었다.“여기에 놔주세요. 가루부터 볼게요.”“녹슨 거냐?”“먼지예요. 억지로 돌리면 안에서 부러질 수도 있어요.”아버지는 행주를 접시 옆에 내려놓았다. 어제 회의에서 받아 온 일정표가 그 옆에 있었다. 부지 의향서 제출 칸을 펼쳐 놓았지만, 아버지는 상자를 가져온 뒤로 그쪽을 보지 않았다.나는 가방에서 붓을 꺼내 열쇠 구멍을 털었다. 호두나무 뚜껑에는 손잡이가 없었다. 모서리가 닳은 자리에 손을 대자 검은 자국이 손톱 아래 묻었다.“이거 어디 두셨어요?”“장롱 아래 칸. 네 엄마 옷 있던 데.”“가끔 꺼내 보셨어요?”아버지가 접시를 조금 밀었다.“꺼내기만 했다.”열쇠를 살짝 들어 돌렸다. 안쪽에서 짧은 소리가 났다. 나는 잠금쇠를 빼 접시에 놓았다.아버지 손이 뚜껑 앞으로 왔다가 멎었다.“내가 열어도 되겠니.”나는 상자를 아버지 쪽으로 돌렸다.“네.”뚜껑을 열자 접힌 앞치마가 나왔다. 어깨끈 한쪽에 매듭이 있었다. 아버지는 매듭을 만지지 않고 앞치마 밑에 손을 넣었다. 천에 싸인 도구들이 함께 올라왔다.실패가 먼저 굴렀다. 내가 손바닥으로 막자 아버지가 빈 밥그릇을 가져왔다.“거기 넣어. 떨어지겠다.”그릇 안에 실을 옮겼다. 누런 실 끝이 실패에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이헌의 시선이 내 앞에서 멎었다. 나는 탁자 끝에 둔 젖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고개를 들었다.탁자 건너 석진이 금색 손목시계를 봤다.“이유를 물었다.”이헌은 나를 보던 눈을 석진에게 돌렸다.“해윤 부지 건으로 내부 감사를 요청합니다.”석진의 안경 너머 눈이 가늘어졌다. 경란은 무릎 위에 모았던 손을 풀었다. 내 옆의 주원은 의자에 등을 붙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결혼 반대 이유가 감사라고?”“이 결혼을 전제로 부지 관련 절차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절차부터 확인해야 합니다.”“해윤이 빚을 갚지 못해서 협의하는 거다.”“대출이 늘어난 과정과 부지 매각 절차를 함께 확인해 주십시오.”회장은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탁자에 닿는 소리가 났다.“앉아서 해라.”이헌이 앉았다. 내 맞은편에서 비어 있던 의자가 탁자 쪽으로 당겨졌다. 서류철 사이로 이헌의 접은 소매가 보였다.나는 손수건을 탁자 가장자리로 옮겼다. 물을 먹은 모서리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그걸 왜 지금 꺼내니.”경란이 이헌을 봤다.“애들 결혼 준비하는 자리잖아. 회사 일은 회사에서 하면 되지.”“방금 형님이 해윤 부지 서류 일정을 결혼 준비에 넣으셨습니다.”석진은 웃으며 앞에 놓인 종이를 넘겼다.“일정이 겹치니 확인한 거야. 결혼식 전에 복잡한 일 끝내 주겠다는 뜻이고.”“누구에게 복잡한 일입니까.&rdqu
『오늘 일정: 10월 31일 금요일, 서진 본가 가족 회의』가방 안주머니의 열쇠가 손톱에 걸렸다. 나는 작은 고리를 눕히고 지퍼를 닫았다. 아버지에게 받은 지 3일째였지만 상자는 아직 열지 않았다. 남의 집 현관 앞에서 꺼낼 물건도 아니었다.아버지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도착하면 연락해라. 서류는 가져오고.』나는 도착했다는 답을 보내고 휴대폰을 넣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이 가방을 받으려 했다.“제가 들게요. 안에 볼 게 있어서요.”직원은 실내화를 내려놓았다. 복도 안쪽에서 주원의 목소리가 들렸다.“왔어요?”주원은 통화를 끝내고 검정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흰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엄마가 드레스 사진부터 보자고 하실 거예요. 싫은 건 싫다고 해요.”주원이 먼저 복도를 걸었다. 나는 계단 옆 거울 앞에서 코트 단추를 풀었다. 백금 반지가 안감에 걸려 손을 멈췄다. 반지를 돌려 끼우고 코트를 벗었다.문 하나 건너 이헌의 목소리가 들렸다.“자료는 모두 같은 걸로 주십시오.”나는 코트를 직원에게 건네고 가방 끈을 고쳐 잡았다.◈회의 탁자는 식당에 놓여 있었다. 접시 대신 서류철과 물잔이 자리마다 있었다. 경란은 탁자 끝에서 꽃 사진을 고르고 있었다.“늦진 않았구나. 앉아.”“안녕하세요.”회장은 창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닫던 손이 잠깐 멎었다.“아비는 좀 어떠냐.”“공장에 나가세요. 무거운 건 안 드시고요.”“그래야지.”회장은 내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아버지와 저녁』아버지는 집에서도 제안서를 식탁 위에 놓았다. 작업복만 벗었을 뿐 공장에서 신었던 양말은 그대로였다.“손 씻고 와. 밥은 됐어.”“아버지는요?”“이것만 보고.”아버지가 돋보기를 올렸다. 낮에 장갑에 걸려 접힌 귀퉁이가 펴지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에 걸고 서류에서 냄비 받침을 떼어 냈다.나는 제안서를 찬장 쪽으로 옮겼다. 아버지는 붙잡지 않았다.부엌에는 무를 삶는 냄새가 났다. 뚜껑 가장자리로 간장이 튀어 있었다. 가스 불을 줄이려는데 아버지가 돋보기를 벗었다.“건드리지 마. 더 졸여야 돼.”“거의 다 된 것 같은데요.”“속까지 간이 들어야지.”냉장고에 종이 한 장이 자석으로 붙어 있었다. 엄마 글씨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적어 둔 반찬 만드는 법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손을 씻고 종이 아래를 들여다봤다.간장을 넣는 줄 옆에 내가 어릴 때 그은 연필 자국이 있었다. 종이 끝은 들추지 않았다. 기름이 밴 곳은 손대면 부서질 수 있었다.“이거 보고 하신 거예요?”“네 엄마 하던 거.”아버지가 냄비 뚜껑을 열었다. 무 한 조각을 젓가락으로 찌른 뒤 불을 껐다.◈식탁에는 무조림과 김, 두부가 놓였다. 아버지는 내 밥그릇부터 채웠다. 내가 주걱을 받으려 하자 밥솥 쪽으로 몸을 돌렸다.“그릇이나 가져가.”나는 밥그릇을 양손으로 받았다. 아버지가 마주 앉을 때까지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냄비에서 무를 덜자 국물이 접시 밑으로 흘렀다. 아버지는 식
『오늘 일정: 10월 28일 화요일, 해윤 공장 방문』공개할 날을 정한 지 3일 뒤, 나는 공장 마당에 세운 차 안에서 달력의 금요일 칸을 다시 눌렀다. 가족 회의라고 적힌 일정 아래에 내가 덧붙인 글이 있었다.『먼저 말할 것. 혼자 정하지 않을 것.』저장 단추를 누르자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운전석 쪽에 서 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문을 열었다.“왜 안 들어오고 있어.”“작업실에 연락했어요.”“다은이는 손 좀 어떻대?”“아직 무거운 건 못 들어요. 예약도 줄였고요.”아버지는 내 가방을 받아 주려다 종이 가루 묻은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나는 가방을 어깨에 걸었다. 안에는 이헌이 보내 준 투자 제안서가 있었다. 서진그룹 로고가 없는 서류였다. 공장에 오기 전 작업대에서 읽고, 모르는 항목에는 종이를 끼워 두었다.아버지는 마당으로 먼저 들어갔다. 지게차가 지나가자 나도 바닥의 선 바깥으로 물러섰다.공장 문 안쪽에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바깥에 쌓인 종이 묶음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모서리가 젖은 묶음 하나는 따로 빠져 있었다.“저건 왜 밖에 있어요?”“반품 들어온 거. 안쪽까지 봐야 해.”나는 천 끝을 조금 들었다. 겉장 아래로 물 자국이 이어져 있었다. 마른 곳부터 떼면 가장자리만 찢어질 종이였다.“위에서 누르지 마세요. 붙은 채로 굳겠어요.”아버지가 천을 다시 덮었다. 나는 끈이 풀린 쪽을 묶었다.마당 입구에서 차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아버지의 손이 천 위에서 멎었다.검은 세단 옆에 이헌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