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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창고 다락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8 17:00:00

『오늘 일정: 할아버지 공방에 남은 물건 확인』

나는 이름 아래에 놓인 종이 조각을 옆으로 옮겼다. 눌려 있던 글씨가 드러났다.

『서은숙 님 시집, 등 갈이. 손녀 나경이 첫 실밥.』

마지막 글자 옆에 할아버지가 짧게 선을 그어 뒀다. 작업을 끝내고 책을 돌려줬다는 표시였다.

나는 이헌의 손에 들린 손전등을 봤다. 불빛이 일지 한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어머니 이름 맞죠?”

“네.”

“시집도요?”

이헌이 빈손을 무릎 위에 놓았다.

“내가 가지고 다니는 책이에요.”

나는 일지를 조금 더 펼쳤다. 책등을 누르지 않도록 아래에 접은 천을 받쳤다. 글씨를 다시 읽어도 의뢰인 이름은 그대로였다.

그 시집을 작업실에서 살폈을 때, 등 안쪽에 남은 구멍을 본 적이 있었다. 간격이 맞지 않아 한 번 풀었다가 다시 꿰맨 자리였다.

“제가 고친 거네요.”

“네.”

“알고 있었어요?”

이헌이 손전등을 서랍 가장자리에 내려놓았다. 불빛이 비스듬해졌다. 내가 놓친 줄이 있는지 보려고 몸을 숙이자 이헌이 빛의 방향을 고쳐 줬다.

“약혼식 날 알았어요.”

나는 일지에서 손을 뗐다.

아래층에서 상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할머니가 수량을 다시 말해 줬다. 나는 그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날 제 이름을 듣고요?”

“윤나경이라는 이름하고, 할아버지한테 일을 배웠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것만 듣고 어떻게 알아요?”

“여기 온 적이 있으니까요.”

일지 위로 내려갔던 내 손이 멈췄다.

이헌은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나를 봤다.

“어머니가 맡겨 두고 못 찾아간 책이 있었어요. 어머니 짐을 정리하다 맡긴 표를 보고 찾으러 왔어요. 그때 당신을 봤고요.”

나는 서랍 앞에 앉은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바지 무릎에 먼지가 묻어 있었다. 털지 않고 손바닥만 펴서 올려놨다.

“제가 열여섯일 때요?”

“네. 나는 스물둘이었고요.”

공방에 드나들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책을 맡기러 오는 사람은 많았지만, 찾으러 오는 사람과 꼭 같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누가 왔는지보다 무슨 책을 가져왔는지 먼저 물었다.

그때의 나는 더 그랬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저는 기억이 안 나요.”

“계속 아래를 보고 있었어요.”

“뭘 하고 있었는데요?”

이헌이 내 손을 잠깐 봤다.

“바늘을 들고 울고 있었어요.”

나는 왼손 검지를 엄지로 눌렀다. 굳은살이 박인 곳이었다.

“그 책 때문에요?”

“실을 잘못 넣었다고 했어요.”

할머니도 같은 말을 했다. 울면서 바늘을 놓지 않았다고.

나는 일지의 날짜를 확인했다. 봄이었다. 엄마가 쓰던 앞치마를 할아버지가 내 키에 맞춰 접어 준 무렵이었다.

“등을 갈면 구멍을 다시 잡아야 해요. 종이 묶음마다 높이가 달라서요.”

말하고 나니 이헌에게 작업 설명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할아버지가 혼내셨어요?”

“아니요. 다른 책부터 해도 된다고 하셨어요.”

그 말은 기억났다.

할아버지가 바늘꽂이를 내 쪽에서 멀리 밀었다. 나는 바늘을 달라고 손을 뻗었다. 새로 뚫은 구멍보다 먼저 찔렀던 자리가 눈에 들어와서, 자꾸 실을 풀었다.

“제가 안 하겠다고는 안 했겠네요.”

“내가 해야 한다고 했어요.”

나는 일지 옆에 놓인 쪽지를 정리했다. 종이 끝을 맞추는 데 필요 이상으로 시간이 걸렸다.

“제가 잘못한 걸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셔서 기다렸어요.”

“오래요?”

“정확히는 기억 안 나요. 차를 한 잔 마셨어요.”

할아버지는 손님이 오래 기다릴 때만 찬장에서 잔을 꺼냈다. 평소에는 책을 내려놓을 자리부터 치웠다.

“저한테 말도 걸었어요?”

“물 마시라고 컵을 줬어요.”

그 컵은 떠올릴 수 없었다. 대신 손등으로 눈을 닦았다가 할아버지에게 손부터 씻으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이헌이 무릎 옆에 놓인 봉투를 내 쪽으로 밀었다. 흩어진 쪽지를 넣어 두려다 비워 둔 봉투였다.

나는 쪽지를 안에 넣었다.

“그 책을 계속 가지고 있었어요?”

“고쳐 온 뒤로는 내가 뒀어요.”

“제가 한 바느질이 남아 있을 텐데.”

“남아 있어요.”

내가 작업실에서 확인한 구멍이었다. 조금 삐뚤어진 첫 구멍과 그 옆에 다시 낸 구멍.

나는 일지를 덮지 못하고 손만 거뒀다.

◈

창가에서 종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낮은 창 한쪽에 붙은 한지가 떨리고 있었다. 나무틀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아래쪽이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나는 일지 위에 천을 덮었다.

“잠깐만요.”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창가로 갔다. 한지 끝이 찢어진 게 아니라 창틀에서 떨어져 있었다. 유리 한쪽을 가린 종이라 그대로 두면 가장자리부터 더 상할 상태였다.

이헌이 손전등을 들었다.

“여기 비출까요?”

“네. 틀 아래요.”

나는 손등을 가까이 댔다. 바람이 들어오는 곳은 창짝 사이였다. 한지를 붙이기 전에 틈부터 막아야 했다.

계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 테이프 있어요?”

“밑에 상자 싸는 거 있어. 그거면 돼?”

“조금만 쓸게요.”

할머니가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필통에서 빈 종이를 꺼내 접었다. 틈에 들어갈 만큼 두께를 맞추고 접지칼 손잡이로 눌렀다.

이헌이 손전등을 내 옆에 내려놓았다.

“가져올게요.”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났다. 나는 한지에 묻은 먼지를 붓으로 쓸었다. 바깥쪽에 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여기에 테이프를 바로 붙이면 나중에 뗄 때 종이부터 뜯긴다.

이헌이 돌아와 테이프를 건넸다.

“이거밖에 없대요.”

“틀에만 붙일 거예요.”

접은 종이를 창짝 틈에 끼우고, 양 끝을 테이프로 나무에 고정했다. 한지가 들리지 않자 떨어진 모서리도 제자리에 내려왔다.

이헌이 그 부분에 손을 대려다 멈췄다.

“눌러 주면 돼요?”

“종이 말고 여기요.”

나는 나무틀을 짚었다. 이헌이 내가 가리킨 곳을 눌렀다. 손가락 사이에 테이프를 놓고 잘랐다. 손을 거두는 순서를 맞추느라 잠깐 서로를 봤다.

옆으로 비키면 될 자리였다. 그런데 나는 필통 뚜껑을 닫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헌이 먼저 손을 내렸다.

“됐어요?”

“네.”

아래에서 할머니가 불렀다.

“막았어?”

“네. 종이에는 안 붙였어요.”

“잘했네. 그거 네 할아버지가 발라 놓은 거야.”

나는 창을 다시 봤다. 누렇게 된 한지 위에 붓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장자리만 여러 번 덧칠한 흔적도 보였다.

“다음에 풀 가지고 와서 붙여 드릴게요.”

“천천히 해. 이제 바람만 안 들어오면 돼.”

할머니가 계단 아래에서 돌아섰다. 나는 쓰고 남은 테이프를 가방 옆에 내려놓았다.

이헌은 창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었다. 그 앞을 지나 서랍으로 돌아가려면 어깨를 돌려야 했다.

나는 그대로 서서 물었다.

“왜 말 안 했어요?”

이헌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그 책을 제가 고쳤다는 거요. 작업실에 가져왔을 때 말할 수 있었잖아요.”

“네. 말할 수 있었어요.”

“제가 몰라보는지 보고 있었어요?”

“그건 아니에요.”

짧게 대답한 뒤 이헌이 옆으로 비켰다. 지나갈 자리가 생겼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알게 되면, 그때 내가 본 것까지 물을 것 같았어요.”

나는 필통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울던 거요?”

“네.”

창을 막고 나니 아래층 소리가 더 잘 들렸다. 할머니가 컵을 내려놓았다. 문 닫히는 소리도 났다.

“그건 제가 물으면 돼요.”

“맞아요.”

“이헌 씨가 먼저 정할 일은 아니고요.”

“미안해요.”

나는 필통을 가방에 넣었다. 지퍼를 끝까지 닫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그 책을 처음 보는 줄 알았어요.”

“알아요.”

“잘못 꿰맨 구멍도 봤는데요. 누가 급하게 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이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말했으면 제가 덜 부끄러웠을까요?”

“그건 모르겠어요.”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헌이 덧붙였다.

“말 안 해서 지금 더 불편해진 건 알아요.”

계단 아래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할머니가 전화를 받으며 창고 바깥으로 나갔다. 통화 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서랍 앞으로 돌아와 천을 걷었다. 할아버지가 적은 내 이름을 손끝으로 가리지 않도록 옆을 짚었다.

“거짓말한 건 아니네요.”

“거짓말은 안 해요.”

“안 했다는 말로 끝내지는 말아요.”

“네.”

이헌은 변명하지 않았다. 나는 일지를 내려다봤다. 무엇을 더 듣고 싶은지는 나도 몰랐다.

잠시 뒤 이헌이 내 맞은편에 앉았다. 서랍 하나가 우리 사이에 놓였다.

“그 책을 다시 맡길 때는 말했어야 했어요.”

나는 덮어 뒀던 천을 반으로 접었다.

“다음부터는 제가 알아도 되는지 혼자 고르지 마요.”

“그렇게 할게요.”

그제야 나는 일지 아래에 손을 넣었다.

◈

표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받침을 댄 뒤 공책을 꺼냈다. 뒤에 끼어 있던 종이가 함께 들려 나왔다.

이헌이 손을 내밀었지만 종이를 잡지는 않았다.

“어디 받칠까요?”

“밑에 천 잡아 주세요.”

천의 양 끝을 나눠 잡고 공책을 서랍 밖으로 옮겼다. 바닥에 놓인 상자 뚜껑을 뒤집어 받침으로 썼다. 글씨가 있는 면이 위로 가도록 얹은 뒤에야 나는 허리를 폈다.

“사진부터 남길게요.”

휴대폰을 꺼내 날짜와 이름이 함께 나오도록 찍었다. 화면 속 글씨를 확대했다. 내가 쓴 체크는 할아버지 글씨보다 훨씬 진했다.

이헌이 화면을 보려고 숙이지 않았다. 내가 휴대폰을 돌려 내밀자 그제야 시선을 내렸다.

“이거 제가 한 거예요.”

“작업 끝났다는 표시예요?”

“아뇨. 제가 끝냈다고 생각했을 때요. 할아버지는 다시 보라고 하셨을 수도 있고요.”

나는 화면을 끄고 일지를 다시 봤다. 마지막 줄의 반납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책 찾으러 오셨을 때 다 못 끝냈잖아요. 그날 가져가셨어요?”

“네.”

“제가 직접 드렸어요?”

“종이에 싸서 줬어요. 끈을 묶다가 다시 풀었고요.”

“너무 꽉 묶었나 봐요.”

“자국 나면 안 된다고 했어요.”

나는 빈 끈을 찾는 손을 멈췄다. 가방 안에 포장용 면끈을 챙겨 왔지만, 공책을 묶을 때는 덧댈 종이가 더 필요했다.

이헌이 그 손을 보고 물었다.

“뭘 드릴까요?”

“지금은 없어요. 작업실에서 포장해야겠어요.”

나는 가방에서 종이 받침을 꺼냈다. 봉투와 일지를 따로 놓고, 서랍 안의 공책도 순서대로 사진을 찍었다. 이헌은 내가 옮겨 달라는 것만 옆으로 뺐다.

빈 서랍 바닥까지 확인했지만 열쇠는 없었다.

“상자 열쇠는 다시 찾아야겠어요.”

“다른 서랍도 볼까요?”

“오늘은 여기까지요. 이걸 먼저 정리하고요.”

계단 아래로 내려가 할머니에게 일지를 보여 드렸다. 할머니는 안경을 쓰고 표지만 살폈다.

“이것도 가져가. 거기 두면 또 못 찾아.”

“찾은 자리 사진 찍었어요. 다른 물건도 정리해서 알려 드릴게요.”

“네가 가져가는 건데 뭘 알려 줘.”

할머니가 손을 내저었다. 나는 테이프를 돌려드리고 앞치마를 덧댈 천을 받았다. 내려갈 때 꿰매 드리겠다고 하고 다시 계단에 발을 올렸다.

중간쯤에서 멈췄다.

다락에 남은 이헌의 셔츠 소매가 보였다. 손전등은 꺼져 있었다. 창으로 들어온 낮빛만으로도 일지를 볼 수 있을 만큼 밝았다.

이헌은 내가 덮어 둔 천을 건드리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약혼식 날부터 알고 있었다. 내 이름을 듣고, 할아버지 공방을 확인하고, 그러고도 한동안 그 책을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내게 맡겼다.

나는 난간을 놓고 끝까지 올라갔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이헌이 고개를 들었다.

바에서 내가 책등을 보고 말을 걸었다. 그건 기억이 났다. 그 뒤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헌이 내게 건넨 말도, 내가 먼저 가까이 갔던 것도.

다만 그 밤을 어디서부터 다시 떠올려야 할지는 몰랐다.

나는 문턱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래서 그날 바에서 말 걸었어요?”

“아니요. 바에선 몰랐어요. 다음 날 알았어요.”

(4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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