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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찻집 이층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9 17:00:00

『오늘 일정: 드레스숍 방문, 경란 여사님과 예복 고르기』

나는 거울에서 경란의 얼굴을 찾았다. 경란은 내 어깨에 걸친 천을 보고 있었다. 방금 한 말과 달리 입가에는 조금도 힘이 들어가 있지 않았다.

“어떻게 웃으셨는데요?”

경란이 눈을 들었다. 거울 안에서 눈이 마주쳤다.

“옷부터 갈아입어.”

직원이 커튼을 닫았다. 나는 등 뒤의 단추가 풀리는 동안 두 손을 배 앞에 모았다. 서은숙이라는 이름은 입 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누굴 두고 한 말인지는 물을 필요가 없었다.

직원이 드레스 자락을 걷어 주었다. 나는 발을 빼고 의자에 앉아 구두를 신었다. 왼손 검지에 실이 걸렸다. 드레스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내 소매에 묻어 온 흰 실이었다.

실을 떼어 휴지에 쌌다. 커튼 밖에서 경란이 말했다.

“근처에서 차 마시고 가.”

“네.”

가방에 휴지를 넣고 일어났다.

◈

찻집 계단은 좁았다. 경란이 먼저 올라갔고 나는 난간 쪽으로 몸을 붙여 뒤따랐다. 벽에는 찻잔을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 경란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이층에는 창가 자리만 비어 있었다. 아래층 계산대가 계단 틈으로 내려다보였고, 올라오는 사람의 발소리를 미리 들을 수 있었다.

경란은 벽을 등지고 앉았다. 나는 맞은편 의자에서 코트를 벗었다. 가방을 내려놓자 경란의 시선이 내 목 아래에 잠깐 머물렀다. 오늘도 반지는 실에 꿰어 옷 안에 넣어 두었다.

나는 목깃을 만지지 않고 찻집 메뉴를 펼쳤다.

“입어 보는 게 오래 걸렸네요.”

“원래 그래.”

“수선 볼 때는 혼자 와도 될까요?”

“그건 내가 정해.”

경란은 메뉴를 보지 않았다. 나는 마실 것을 고르고 종업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래층에서 찻잔 부딪는 소리가 났다.

잠시 뒤 사장이 직접 물을 가져왔다. 경란 앞에 잔을 놓다가 허리를 조금 숙였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늘 드시던 걸로 준비할까요?”

“네.”

“일행분은요?”

나는 대추차를 골랐다. 사장이 주문을 적으며 웃었다.

“따님이세요?”

“아니에요.”

경란의 대답이 빨랐다. 사장은 더 묻지 않고 물병을 내려놓았다.

“과자도 조금 드릴게요. 오늘 막 구웠거든요.”

사장이 계단을 내려간 뒤에도 경란은 물을 마시지 않았다. 나는 가방을 의자 안쪽으로 밀었다.

“이곳에 자주 오셨어요?”

“예전에.”

경란이 장갑을 벗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빼낸 뒤 장갑 두 짝을 포갰다.

“그 사람이랑도 왔었어.”

나는 메뉴를 덮었다.

경란은 창밖을 보았다. 건너편 건물 창에 드레스숍 간판이 비쳤다. 여기서는 글자가 거꾸로 보였다.

“이헌 씨 어머니요?”

말하고 나서 잔을 잡았다. 경란이 고개를 돌렸다.

“삼촌 말이니?”

“네. 실장님 어머니요.”

손가락이 잔 손잡이 안으로 다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검지를 빼고 엄지와 중지로 잔을 들었다.

경란은 내 얼굴을 조금 더 보다가 장갑 위에 손을 올렸다.

“집안 여자들끼리 차 마시는 게 뭐 특별한 일이니.”

“그런 뜻으로 여쭌 건 아니에요.”

“알아.”

대답은 짧았지만, 경란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사장이 쟁반을 들고 올라왔다. 내 앞에는 대추차를, 경란 앞에는 뚜껑이 있는 잔을 놓았다. 접시에는 둥근 과자가 놓여 있었다.

“많이 달지 않아요. 편하게 드세요.”

경란은 고개만 끄덕였다. 사장이 내려가자 나는 접시를 경란 쪽으로 조금 밀었다.

“안 드세요?”

“단 건 안 먹어.”

나는 과자를 하나 집었다. 가장자리를 베어 물자 부스러기가 접시 위로 떨어졌다. 점심에 먹은 것이 없어서 한입 더 먹었다.

경란이 내 손을 보았다.

“배고프니?”

“네.”

대답하고 남은 과자를 내려놓았다.

“드레스 입을 때는 물도 못 마셨거든요.”

“말하지 그랬어.”

“허리핀을 꽂고 계셔서요. 다 끝난 다음에 먹으려고 했어요.”

경란이 접시를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그럼 먹어.”

나는 과자를 마저 먹고 차를 마셨다. 경란은 잔 뚜껑을 열었다가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 사람도 먹는 걸 그렇게 참지는 않았어.”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묻지 않고 기다렸다.

“본가에 처음 왔을 때, 식사가 끝나기도 전에 더 달라고 하더라. 어른들이 수저도 안 놓았는데.”

경란은 잔 안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마음에 안 드셨어요?”

“낯설었지.”

경란이 소매 끝을 당겼다. 진주 귀걸이가 턱 아래에서 잠깐 보였다.

“나는 물 한 잔 달라는 것도 어려웠으니까.”

아래층에서 문 여닫는 소리가 났다. 경란이 계단 쪽을 보았다. 올라오는 발소리는 없었다.

나는 과자 접시에 떨어진 부스러기를 손끝으로 모았다. 바로 다음 질문을 하면 경란이 장갑을 집어 들고 일어설 수도 있었다.

“아까는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경란의 손이 멈췄다.

“드레스숍에서요.”

“네가 웃길래.”

“저를 보고 그분 생각이 나셨어요?”

“그냥 나온 말이야.”

경란은 찻잔을 들었다. 입술이 닿기 전에 다시 내려놓았다.

“그럼 그냥 들을게요.”

나는 냅킨을 접어 접시 옆에 놓았다. 경란은 장갑을 가지런히 고쳤다. 손가락 끝이 같은 자리를 두 번 눌렀다.

“사고 나기 전날에도 웃었어.”

찻잔에서 손을 뗐다.

경란은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가방 안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누르지 못했다. 진동이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저녁 먹을 때였어. 회장님이 이헌이 시험 이야기를 물으셨고.”

말끝이 끊겼다. 경란이 잔 받침을 돌려 손잡이가 몸 쪽으로 오게 했다.

“그날 본가에 계셨어요?”

“내가 거기서 살았으니까.”

“실장님도요?”

“아이들이 어디 있었는지는 기억 안 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란이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까지 붙잡고 다시 묻지는 않았다.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 둘 다 입을 다물었다. 종업원이 옆 테이블의 빈 잔을 치웠다. 쟁반 위에서 숟가락이 달그락거렸다. 경란은 종업원이 내려갈 때까지 기다렸다.

“서재에서 소리가 났어.”

나는 자세를 바로 했다.

“누가요?”

“주원이 아버지하고 그 사람.”

석진과 서은숙.

나는 두 이름을 입 안에서만 짚었다. 경란이 내 앞의 과자를 보았다.

“안 먹니?”

“조금 있다 먹을게요.”

“먹으면서 들어.”

과자를 하나 더 집었다. 손에 쥔 채로 있자 경란이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주원이 아버지 목소리만 들렸어. 문이 닫혀 있었으니까 무슨 말인지는 잘 안 들렸고.”

“여사님은 어디 계셨는데요?”

“복도.”

“서재 앞이요?”

경란은 대답 대신 찻잔을 옮겼다. 받침에서 찻물이 조금 넘쳤다.

나는 냅킨을 건넸다. 경란이 받지 않아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경란은 넘친 물을 내려다보다가 냅킨을 집었다.

“목소리가 커서 갔어.”

나는 물어볼 말을 고르며 과자 가장자리를 조금 베어 물었다. 입 안이 말라 차도 한 모금 마셨다.

“많이 다투셨나요?”

“그래.”

경란이 처음으로 내 눈을 똑바로 보았다.

“큰소리 몇 번 난 걸 내가 다퉜다고 하겠니.”

나는 과자를 내려놓았다.

서은숙의 기일에 보았던 이헌의 손이 떠올랐다. 꽃을 내려놓은 뒤에도 한동안 묘비 앞에서 떼지 못했던 손이었다. 나는 찻잔을 두 손으로 잡았다.

“평소에도 그러셨어요?”

“내가 아는 한, 그렇게까지 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어.”

“어떤 말 때문에 다투셨는지는 못 들으셨고요?”

경란은 젖은 냅킨을 반으로 접었다.

“목소리가 낮아지면 안 들렸어. 문을 열어 보지도 않았고.”

“들으신 말만 말씀해 주세요.”

“왜?”

경란의 시선이 내 손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다.

“네가 그걸 알아서 뭘 하려고.”

나는 잔을 놓았다. 이헌의 이름을 꺼내려다가 멈췄다. 경란은 여전히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분 이야기인데, 잘못 듣고 싶지 않아요.”

“잘못 들으면?”

“다른 사람한테도 잘못 전하게 되니까요.”

경란은 내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접시에 남긴 과자를 다시 집었다. 부서진 조각이 손바닥에 묻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

“네.”

“문밖에서 들은 게 전부야.”

경란이 접은 냅킨을 받침 아래에 끼웠다.

“그 사람이 나한테 이러지 말라고 했어. 주원이 아버지한테.”

나는 입 안에 남은 과자를 삼켰다.

“서은숙 씨가요?”

경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요?”

“주원이 아버지가 목소리를 낮췄어. 그러고는 다시 언성이 높아졌고. 누가 먼저 무슨 말을 했는지까지는 몰라.”

나는 더 재촉하지 않았다.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도 등이 서늘했다. 코트를 걸치려다가 그대로 두었다.

“왜 이제 말씀하세요?”

경란의 손이 장갑으로 갔다.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사고 전날 다투셨다고 하셨잖아요.”

“부부끼리도 다투고 형제끼리도 다퉈. 그 집에서 큰소리 나는 게 그것뿐이었겠니.”

“그날 다음에 사고가 났고요.”

경란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탁자 아래에서 손바닥의 부스러기를 냅킨에 털었다.

“둘을 같은 일이라고 말씀드리는 건 아니에요.”

경란이 나를 보았다.

“전날 일을 여쭤보는 거예요.”

“다음 날 사고가 난 건 맞아.”

잔 받침에 고였던 물이 냅킨에 스몄다. 경란은 젖은 곳을 피해 잔을 내려놓았다.

“연락을 받고서야 알았어.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경란은 말을 끝내지 않았다.

나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폈다. 서재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었다는 목소리. 그다음 날의 사고. 경란이 말한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날 들으신 걸 누가 또 아세요?”

경란이 고개를 저었다.

“누가 들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여사님이 들으셨다는 건요?”

“너 지금 나한테 뭘 묻는 거니.”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높았다. 나는 계단 쪽을 보았다.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다른 분께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요.”

경란이 나를 오래 보았다.

“없어.”

나는 대답을 듣고도 고개만 끄덕였다. 경란은 손가락으로 찻잔 손잡이를 만졌다.

“죽은 사람 두고 그런 이야기를 꺼내서 뭐 하니. 장례 치르고, 아이 학교 보내고, 집안일 하다 보니 시간이 갔어.”

경란이 잔을 들었다. 이번에는 차를 마셨다.

“그렇다고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너는 말을 쉽게 한다.”

“쉽게 들은 건 아니에요.”

경란은 잔을 내려놓고 나를 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가방 안에서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짧은 진동이었다. 경란이 먼저 가방 쪽을 보았다.

“확인해.”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에 실장님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식사는 했어요?』

나는 화면을 몸 쪽으로 기울였다. 답장을 쓰는 칸에 손가락을 댔다가 떼었다. 오늘 들은 말을 여기서 몇 줄로 적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아직 밖이에요.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보내고 화면을 껐다. 경란이 내 손에서 휴대폰을 보았다.

“주원이니?”

“아니요.”

“그럼?”

나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었다.

“실장님이요.”

경란은 찻잔에서 손을 뗐다. 장갑을 집었지만 끼지는 않았다.

나는 탁자 끝에 놓인 영수증을 가져오려 손을 뻗었다. 경란이 먼저 눌렀다.

“내가 내.”

“차는 제가 살게요.”

“됐어.”

경란의 손등 아래로 영수증 모서리가 조금 구겨졌다. 나는 손을 거두었다.

경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코트를 입고 가방을 들었다. 접시에는 과자가 하나 남아 있었다. 경란은 끝내 손대지 않았다.

계단 앞에서 경란이 멈췄다. 아래층 사장이 다른 손님을 응대하고 있었다. 나는 한 계단 내려가려던 발을 도로 올렸다.

경란이 내 소매를 잡았다. 잡힌 곳은 손목에서 조금 위였다. 나는 돌아섰다.

“네가 아까 한 말.”

나는 휴대폰을 넣은 가방 끈을 고쳐 쥐었다.

“다른 사람한테 전한다는 말이요?”

경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매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 손을 떼지 않고 기다렸다.

“이건 내가 한 말 아니야.”

(5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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