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우주가 연필을 내려놓자 윤슬은 공책 아래에 깔린 가족 그림을 빼냈다. 종이 귀퉁이에 파란색이 조금 묻어 있었다. 엄지로 문질렀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엄마, 귀 빨간 거 봤어?”
“봤어.”
“두 개 다 빨개.”
우주는 공책을 들어 보여 주고는 하품했다. 윤슬은 연필을 크레파스 통 옆에 놓았다.
“이제 자자.”
“그림은?”
“여기 둘게.”
가족 그림은 공책 밑에 넣지 않았다. 식탁 끝에 따로 놓고 우주의 손을 잡았다. 아이는 방에 들어가면서도 고개를 돌려 종이를 보았다.
윤슬은 우주를 눕힌 뒤 식탁으로 돌아왔다. 공책을 덮고 크레파스 뚜껑을 닫았다. 가족 그림을 어디에 둘지 잠깐 망설이다가 냉장고 옆에 붙였다.
오른쪽 빈자리까지 종이가 반듯하게 펴졌다.
▷
3월 17일 화요일 아침, 윤슬은 세탁을 마친 앞치마를 바구니에서 꺼냈다.
우주가 전날 그림을 그리며 묻힌 초록색 자국이 주머니 밑에 남아 있었다. 물을 묻혀 문질렀을 때는 옅어지는 듯했는데, 빨고 나니 오히려 더 또렷해 보였다.
“엄마, 없어졌어?”
우주가 베란다 문턱에 발을 걸치고 물었다.
“조금 남았네.”
“내가 그린 거니까 놔둬.”
“앞치마에 그리는 거 아니야.”
“종이가 작았어.”
윤슬은 남색 천을 펼쳤다. 목에 거는 끈은 우주에게 맞게 짧게 묶여 있었고, 허리 끈은 몇 번을 둘러도 남았다. 주머니 한쪽에는 오래전에 실밥을 덧댄 자리가 있었다.
우주는 젖은 앞치마 밑으로 손을 내밀었다.
“오늘 못 입어?”
“저녁이면 마를 거야.”
“그럼 오늘 그림은 저녁에 그려.”
“어린이집에서도 그리잖아.”
“이거 입으면 안 묻어.”
윤슬은 앞치마를 빨랫줄에 걸고 양쪽 어깨에 집게를 꽂았다. 천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바구니 안으로 들어갔다. 우주는 손바닥에 떨어진 한 방울을 바지에 닦았다.
“그림은 안 묻고 물은 묻네.”
“손 닦고 가방 가져와.”
우주가 방으로 달려갔다. 윤슬은 앞치마 주머니를 한 번 펴 주었다. 젖은 천이 손가락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바구니를 정리하고 나오니 우주가 파란 운동화를 신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한쪽 뒤축이 접혀 있었다. 윤슬은 아이를 앉히고 신발부터 바로 신겼다.
계단을 내려가는데 1층 문이 열렸다. 탁 할머니가 뜨개실 뭉치를 손에 든 채 나왔다.
“우주 어린이집 가는구나.”
“응. 오늘 화요일.”
“그래, 그래. 잘 알고 있네.”
우주가 할머니 손에 들린 실을 가리켰다.
“그거 다 풀면 어디까지 가?”
“할머니도 안 풀어 봤지.”
“골목 끝?”
“그만큼은 안 갈걸.”
우주가 계단 난간에 붙어 밖을 내다보았다. 할머니는 윤슬에게 조금 가까이 와서 목소리를 낮췄다.
“그 셰프 총각, 어디서 봤는데.”
윤슬은 우주의 가방끈을 올려 주던 손을 멈췄다.
“맞은편 식당이요?”
“응. 어제 유리문 닦고 있더라고. 머리 깎아서 그런가, 얼굴이 눈에 익어.”
“가게가 가까우니까 자주 보셨겠죠.”
“그런 건가.”
할머니는 뜨개실을 다른 손으로 옮겼다.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더니 우주가 기다리는 것을 보고 웃었다.
“어서 가. 늦겠다.”
윤슬은 인사를 하고 아이와 밖으로 나왔다. 우주는 몇 걸음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탁 할머니도 접시 아저씨 알아?”
“가게가 생겼으니까.”
“나는 빵도 알아.”
윤슬은 아이 점퍼 주머니에 손수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우주는 그 손을 기다렸다가 자기 손을 내밀었다.
▷
낮에는 예약 장부가 비어 있었다.
윤슬은 오전 손님이 쓰고 간 덮개를 정리한 뒤 미용실 문에 잠깐 자리를 비운다는 안내를 걸었다. 문을 잠그면서 맞은편은 보지 않았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골목 어귀로 걸었다.
모과 약국에는 손님이 한 명 있었다. 나영이 봉투에 든 약을 꺼내 복용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윤슬은 입구 옆 의자에 앉았다.
“밥 먹고 드세요. 이건 따로 빼서 드시고요.”
손님이 봉투를 챙겨 나가자 나영이 안경을 올렸다.
“웬일이야. 비타민 벌써 다 먹었어?”
“아직 안 뜯었어.”
“그럴 줄 알았어.”
나영은 계산대 위를 정리하고 윤슬 쪽으로 왔다. 윤슬은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앞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약국 유리문을 보았다.
“잠깐 얘기해도 돼?”
나영은 입구에서 떨어진 의자를 당겨 앉았다.
“해.”
윤슬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둥근 고리를 엄지로 한 번 밀었다.
“일요일에 머리 깎으러 온 사람.”
“맞은편 사장?”
“응.”
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슬은 열쇠를 손바닥 안에 넣었다.
“그 사람이야. 우주 아빠.”
나영의 손이 의자 등받이에서 내려왔다.
잠깐 동안 약국 안에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만 났다. 나영은 윤슬을 보다가 유리문 너머 골목으로 눈을 돌렸다.
“진이든?”
“응.”
“이름만 들었으니까 몰랐지. 그날 네가 가위 떨어뜨릴 뻔해서 이상하다 싶긴 했어.”
윤슬은 열쇠 고리에 걸린 손가락을 뺐다.
“나도 몰랐어. 거기 가게 낼 줄.”
“우주는?”
“몰라. 그냥 접시 아저씨야.”
“그 사람은 우주를 봤고?”
윤슬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영은 바로 다음 말을 하지 않았다. 계산대 쪽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받아 왔다. 윤슬 앞에 놓고 다시 앉았다.
“먼저 마셔.”
윤슬은 컵을 들었다. 물을 조금 마신 뒤에도 내려놓지 못했다.
“네가 오기 전에 우주가 먼저 들어갔어?”
“토요일에. 손님 머리 말아 주는 동안 길을 건넜어.”
“놀랐겠다.”
“애 찾으러 갔다가 봤어.”
나영은 손가락으로 의자 모서리를 쓸었다.
“그 사람한테는 아직 말 안 했지?”
“응.”
“언제 말할 건데.”
윤슬은 컵을 무릎 위에 놓았다. 나영은 대답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약국 문이 열릴 때마다 울리는 작은 종도 그동안은 잠잠했다.
“돌아온 줄도 몰랐어.”
“연락은?”
“안 했잖아. 서로.”
컵 옆면에 붙은 윤슬의 손가락이 조금 미끄러졌다.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7년 전 12월 2일, 떠나던 날의 모과나무 골목에도 두 사람밖에 없었다.
이든은 가방 손잡이를 쥔 채 “3년이야”라고 말했다.
윤슬은 “붙잡지 않을게. 너도 연락하지 마” 하고 답했다.
“너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말 안 할게.”
“3년 뒤 겨울에 둘 다 혼자면 여기서 보자.”
이든은 윤슬이 짚은 모과나무 옆자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여기서.”
윤슬도 고개를 끄덕였고, 가방을 든 이든이 골목을 나갈 때 따라가지 않았다.
“약속이었어.”
윤슬이 컵을 내려놓았다.
“연락 안 하기로 한 건.”
나영은 한숨 대신 입술을 눌렀다. 잠시 뒤 윤슬의 빈 컵을 가져가며 말했다.
“그 약속에 우주는 없었잖아.”
“알아.”
“오늘 말해.”
윤슬은 의자 옆에 놓인 가방을 들었다. 어깨에 걸기 전에 끈이 꼬인 곳을 폈다.
“좀 봐야겠어.”
“뭘.”
“어떤 사람인지.”
나영이 컵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네가 알던 사람이잖아.”
“7년 지났어.”
윤슬은 가방끈을 어깨에 올렸다. 나영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윤슬이 일어서자 의자를 밀어 놓고 문까지 함께 걸었다.
“그래도 혼자 정리하고 혼자 끝내지는 마.”
윤슬이 문손잡이를 잡았다.
“너한테 왔잖아.”
나영은 윤슬의 얼굴을 잠깐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했어.”
약국 밖으로 나오자 골목에서 바람이 불었다. 윤슬은 가방에서 열쇠를 꺼냈다. 손바닥에 고리 자국이 둥글게 남아 있었다.
미용실로 돌아오는 길에는 맞은편 문이 열려 있었다. 윤슬은 자기 가게 문에 붙인 안내부터 떼었다. 종이를 반으로 접고 문을 열었다.
전화가 울렸다.
윤슬은 가방을 계산대 아래 넣고 수화기를 들었다.
“네, 윤슬 미용실입니다.”
통화가 끝난 뒤 예약 장부의 빈칸에 시간을 적었다. 빗을 꺼내고 수건을 새로 놓았다. 방금 적은 숫자 아래로 번진 잉크를 손으로 건드리지 않게 장부를 덮었다.
▷
하원 시간이 되자 윤슬은 미용실 문을 잠그고 어린이집으로 갔다.
우주는 가방을 앞으로 멘 채 나왔다. 지퍼 끝에 걸린 끈을 잡아당기다가 윤슬을 보고 손을 놓았다.
“엄마, 이거 안 닫혀.”
윤슬은 가방 안으로 튀어나온 공책 모서리를 눌러 넣었다.
“이제 해 봐.”
우주가 지퍼를 당겼다. 끝까지 닫히자 가방을 등에 돌려 멨다.
“내가 했어.”
“응. 가자.”
아이는 보도 가장자리의 마른 잎을 밟으며 걸었다. 윤슬이 손을 내밀자 잎 하나를 더 밟은 뒤에야 손을 잡았다.
모과나무 골목에 들어서자 우주의 걸음이 빨라졌다. 맞은편 식당 유리문 안에서 이든이 나무 도마를 닦고 있었다.
“접시 아저씨 있다.”
윤슬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엄마 가게로 가.”
“인사만.”
우주는 이미 유리문을 향해 다른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도마를 내려놓고 문 가까이 왔다.
“어린이집 다녀왔어?”
“응. 오늘 화요일.”
“맞아.”
“아저씨도 알아?”
“나도 알지.”
우주가 웃었다. 윤슬은 자기 가게 열쇠를 꺼내려다 주머니 안에서 손을 멈췄다.
이든이 조금 떨어져 서 있는 윤슬을 보았다.
“빵 자르고 있었어. 한 조각 먹어도 돼?”
우주는 윤슬의 손을 흔들었다.
“엄마, 한 개.”
윤슬은 손목시계를 봤다. 다음 예약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하나만. 먹고 나오자.”
식당 안에는 버터 냄새가 남아 있었다. 이든은 카운터 가까운 의자를 빼 주었다. 윤슬은 앉지 않고 우주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
이든이 빵을 도마에 올렸다. 칼이 빵껍질을 지나가며 바삭한 소리가 났다. 작은 조각을 접시에 놓고 아이 앞으로 밀었다.
우주는 두 손으로 접시를 가까이 당겼다.
“여기서 만든 거야?”
“응.”
“배웠어?”
“배웠지.”
“누구한테?”
“처음엔 선생님한테. 나중에는 바다 건너 가서.”
우주가 빵을 입에 넣었다가 다시 조금 뺐다.
“얼마나?”
이든은 칼을 내려놓고 도마의 부스러기를 모았다.
“3년 배우러 갔어.”
“많아?”
“짧지는 않아.”
윤슬은 가방끈을 손에 감았다가 풀었다. 우주는 빵 조각을 내려다보며 또 물었다.
“그럼 3년 있었어?”
이든의 손이 도마 끝에서 멈췄다. 윤슬 쪽을 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니. 돌아오는 데는 7년 걸렸어.”
“왜?”
이든은 부스러기를 작은 통에 털었다. 뚜껑을 닫은 뒤에야 말을 이었다.
“더 배우고 싶어서 남았어.”
“빵도 더?”
“빵도. 다른 것도.”
우주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은 빵을 먹었다. 윤슬은 아이의 입가에 붙은 부스러기를 손수건으로 떼었다.
“먹었으면 가자.”
우주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이든은 아이가 디딜 곳에 의자 다리가 걸리지 않게 뒤로 당겼다.
“잘 먹었어.”
“그래. 천천히 나가.”
윤슬은 가방을 우주 등에 메어 주었다. 이든이 문을 잡아 주는 동안에는 문턱만 보았다.
밖으로 나온 우주는 골목 한가운데서 맞은편을 돌아보았다.
“아저씨가 3년 배우러 갔다가 7년 걸렸대.”
윤슬은 손수건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3년은 몇 밤이야?”
아이의 얼굴이 올라왔다. 윤슬은 대답 대신 우주의 손을 잡았다. 미용실까지 가는 짧은 길에서 우주는 제 손가락을 폈다.
“셋은 적은데.”
윤슬은 미용실 문을 열었다. 우주가 안으로 들어가자 뒤에서 문을 닫았다. 열쇠를 꽂았던 손가락에 아직 둥근 고리 자국이 남아 있었다.
▷
저녁에 걷어 들인 앞치마는 다 말라 있었다.
윤슬은 베란다에서 집게를 빼고 남색 천을 두 번 접었다. 우주가 식탁에 크레파스를 늘어놓다가 달려왔다.
“마른 거야?”
“응.”
“줘. 오늘 입을 거야.”
윤슬은 접은 앞치마를 다시 펼쳤다. 우주가 목을 들이밀자 끈을 걸고 뒤에서 허리 끈을 묶어 주었다. 긴 끝은 매듭 안으로 한 번 더 넣었다.
“너무 조이지 않아?”
우주가 배를 내밀었다.
“이만큼 있어.”
“앉으면?”
아이는 식탁 의자에 올라가 앉았다. 양손을 배 위에 넣어 보더니 빼냈다.
“있어.”
윤슬은 앞치마 밑단을 무릎 위로 올려 주었다. 우주는 파란색을 골라 공책을 펼쳤다.
윤슬이 마른 수건을 접는 동안 아이는 사람 두 명을 그렸다. 종이를 가까이 당겼다가, 두 사람 사이를 손가락으로 재 보았다.
“엄마, 손은 여기까지?”
“네 팔 봐.”
우주는 자기 팔을 펴고 손끝을 들여다보았다. 잠시 뒤 종이 위에 짧은 선을 더 그었다.
“됐다.”
글씨를 다 쓴 다음에는 연필을 주머니에 넣으려 했다. 윤슬이 손을 내밀었다.
“연필은 통에.”
“여기에도 들어가는데.”
“넣고 자면 찔려.”
우주는 연필을 빼서 통에 넣었다. 윤슬이 앞치마 끈을 풀어 주자 아이는 몸을 한 번 돌려 빠져나왔다. 목에 걸린 끈이 턱에 걸려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엄마, 잡혔어.”
윤슬은 웃음이 나오려는 입술을 다물고 끈을 들어 주었다.
“나왔어. 씻으러 가.”
우주가 욕실로 들어간 뒤 윤슬은 앞치마를 접어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주머니의 초록색 자국이 바깥으로 보였다. 천을 뒤집어 걸려다 그대로 두었다.
아이를 씻기고 이불을 덮어 줄 때까지 우주는 빵 이야기를 두 번 더 했다. 부스러기가 바삭했다가, 안쪽은 안 바삭했다는 말이었다.
윤슬은 아이의 머리카락에 남은 물기를 수건으로 눌러 닦았다.
“이제 눈 감아.”
우주가 눈을 감았다가 바로 떴다.
“엄마.”
“응.”
“아저씨도 왼손으로 밥 먹는대. 나처럼. 그래서 좋대.”
윤슬은 수건을 팔에 걸고 일어섰다. 불을 끄려던 손이 스위치 앞에서 멈췄다.
우주는 이불 밖으로 손 하나를 내밀었다.
“이 손.”
윤슬은 아이의 손을 이불 안에 넣어 주었다. 작은 손이 이불 속에서 한 번 움직였다. 방을 나와 식탁 앞에 섰을 때도 윤슬은 팔에 걸린 수건을 내려놓지 못했다. 펼쳐진 공책에는 파란 사람 둘이 같은 쪽 손을 들고 있었다.
『아저씨도 왼손이다. 왼손 친구가 생겼다.』
(3화 끝)
우주는 사진이 없는 장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여기는 나중에 넣어?”“응. 또 찍으면.”“나 안 잘 때 찍어.”윤슬은 아이 손 밑에서 투명한 주머니를 펴 주었다. 우주는 빈 칸을 하나씩 짚다가 앨범을 덮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면서도 의자는 식탁 끝에 그대로 두었다.윤슬은 의자를 안으로 밀려다 멈췄다. 두 사람이 앉아 쓰던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우주 가방을 놓거나 빨래를 잠깐 걸쳐 두던 자리였다.의자에 걸린 수건만 걷어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4월 25일 토요일 아침, 우주는 미용실 거울 앞에서 모자를 고쳐 썼다.파란 챙을 눈썹까지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윤슬이 가방에 물병을 넣는 동안에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았다.“엄마, 나 안 보여?”“다 보여.”“눈은?”“챙 때문에 조금.”우주는 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거울 속에서 눈이 다 보이자 입을 벌리고 웃었다.윤슬은 예약 장부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예약 두 칸 사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마지막 손님의 파마가 끝나는 시간을 손목시계로 세어 본 뒤 장부를 덮었다.“엄마는 조금 늦게 가. 아저씨랑 먼저 가 있어.”“얼마나?”“점심 먹기 전에는 갈 거야.”“그럼 빵 남길게.”“네 것은 다 먹어.”“엄마는?”“엄마 것도 있어.”말을 마치자 유리문 밖으로 이든이 보였다. 앞치마 대신 얇
우주는 유리문을 놓고도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이든이 다시 칼을 든 것을 보고서야 윤슬 옆으로 붙었다.“엄마, 아저씨는 맨날 저기서 자?”“가게 뒤에 방이 있어.”“빵 옆에서?”“빵은 부엌에 있고.”우주는 가방 끈을 끌어 올렸다. 윤슬은 아이 어깨에서 뒤집힌 끈을 펴 주고 빌라 쪽으로 걸었다. 우주는 모과나무를 지날 때까지 식당 창을 두 번 더 봤다.▷4월 18일 토요일, 윤슬은 마지막 손님의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었다.거울 아래에는 우주가 그린 종이가 놓여 있었다. 파란 지붕 밑에 네모난 창이 세 개였다. 실제 집에는 없는 큰 창도 하나 그려져 있었다.“이건 어디야?”손님이 나간 뒤 윤슬이 물었다.“우리 집.”“창이 이렇게 많아?”“내 방에 하나 더.”“왜?”“아저씨네 보게.”윤슬은 빗에 낀 머리카락을 빼다가 손을 멈췄다. 빌라에서는 맞은편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는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창을 하나 더 그렸다.“집에서는 잘 자면 돼.”“나 잘 자.”“아침에는 누가 깨워도 눈 안 뜨잖아.”“눈도 자는 거야.”윤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주는 대답을 잘했다고 여겼는지 종이 아래에 자기 이름을 크게 썼다.미용실 바닥을 쓸고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담았을 때, 맞은편에서 철구가 손을 흔들었다. 우주가 문 앞으로 달려갔다가 윤슬을 돌아봤다.
윤슬은 대답 대신 빵이 든 통을 우주 쪽으로 밀었다. 우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불고, 윤슬 앞에도 빵 한 조각을 놓았다.“엄마도 먹어.”“먹고 있어.”“더.”윤슬은 아이가 놓아 준 빵을 집었다. 예약 장부 옆 영수증이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뒤집혔다. 윤슬은 빈 통으로 한쪽 끝을 눌러 두었다.▷토요일 예약 장부에는 빈 줄이 거의 없었다.윤슬은 손님 머리에 파마 약을 바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샴푸대에는 씻어야 할 수건이 쌓여 있었고, 다음 손님은 창가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4월 11일. 장부 위에 적힌 날짜 옆으로 하원 시간이 작게 쓰여 있었다.탁 할머니는 아침에 허리가 뻐근하다며 오늘은 계단을 덜 오르겠다고 했다. 윤슬은 우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시간을 비워 두었지만, 앞 손님의 염색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많이 남았어요?”거울 속 손님이 물었다.“조금만 더요. 안쪽부터 확인할게요.”윤슬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풀어 보았다. 시간을 줄이려고 서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아 고정하고 손을 씻었다.맞은편 유리문 너머로 철구가 빈 접시를 들고 움직였다. 이든은 카운터 끝에 놓인 주문서를 보고 있었다.윤슬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직 번호를 묻지 않았다.기다리는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골목으로 나오자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윤슬은 건너지 않고 손으로 오라고 했다.이든은 철구에게 짧게 말을 건넨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무슨 일 있어?”윤슬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오늘 하원만.”이든이 미용실 안을 한 번 보았다. 창가 손님이 잡지를 넘겼고, 파마 기계의 짧은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할게.”“4시 반. 모과 어린이집.”“알아. 길은 우주가 알려 줬어.”“선생님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네가 간다고.”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슬은 가위집에서 빠져나온 빗을 안으로 밀었다. 부탁은 끝났는데 손이 다른 일을 찾았다.“바쁘면 말해. 내가 손님한테 양해 구하고 가면 돼
윤슬은 받은 빗을 선반 위에 놓았다. 빗살이 아래로 가게 놓았다가 다시 뒤집었다.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든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평소 손님을 앉히던 자리였다. 윤슬은 의자 높이를 낮추는 발판을 밟으려다 발을 거뒀다.“불편하면 뒤로 조금 밀어.”“괜찮아.”이든의 무릎과 윤슬의 무릎 사이에 바닥 타일의 줄이 놓여 있었다. 윤슬은 그 줄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뭐부터 듣고 싶어?”이든이 입을 열기까지 조금 걸렸다.“언제 알았어.”“네가 떠나고, 다음 달.”윤슬은 귀 뒤로 넘긴 앞머리를 다시 눌렀다.“1월 둘째 주였어. 8주라고 하더라.”이든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다. 바지에 생긴 주름을 펴다가 손을 멈췄다.“혼자 갔어?”“응.”“그때도 혼자 살았잖아.”“살고 있었지.”윤슬은 의자 끝에 놓인 수건을 집었다. 손님 목에 둘렀다가 세탁하려고 빼 두었다. 접힌 자리가 어긋나 있어 모서리를 맞췄다.“전화할까 했어. 병원 나와서.”이든이 윤슬을 보았다.“안 했어.”“왜.”“말하면 돌아올 거잖아.”윤슬은 수건을 무릎에 내려놓았다.“연수고 뭐고, 다 두고 올 사람이었으니까.”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안 왔을 거라고는 못 하겠어.”“알아.”“그래도 알았어야 했어.”윤슬은 수건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응. 그건 알아.”더 보탤 말은 없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고 소식을 전하면, 이든은 돌아올 테니까. 그걸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윤슬이었다.“우리 붙잡지 않기로 했잖아. 연락도 하지 않기로.”“했지.”“3년 뒤 겨울에 둘 다 혼자면 다시 보기로 했고.”이든의 시선이 선반 위 빗에 잠깐 머물렀다.“그때 말하려고 했어. 네가 돌아오면.”윤슬은 무릎 위 수건을 한 번 더 접었다. 더 작게 접을 필요는 없었는데 손이 멈추지 않았다.“그때는 우주도 같이 데리고 나갈 수 있겠다 싶었어.”“골목에 왔어?”“세 번.”짧게 답하자
우주가 골목 끝에서 한 번 더 손을 당겼다.“엄마, 여기 밝은 데.”빌라 입구의 등이 켜져 있었다. 아이는 불빛 아래로 먼저 발을 넣고 새로 짧아진 머리를 만졌다. 윤슬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현관에서 신발을 벗은 우주가 양손을 폈다.“아저씨는 뭘 기다려?”윤슬은 아이 점퍼의 지퍼를 내려 주었다.“언제?”“아까. 가게 앞에서.”점퍼 안쪽에 머리카락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윤슬은 손톱으로 집어 떼고 옷을 걸었다.“가게 문 닫고 있었겠지.”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발판을 당겼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난 뒤에도 윤슬은 현관에 서 있었다.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선우가 보내 준 사진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똑같아진 두 아이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윤슬은 화면을 끄고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4월 8일 수요일 아침, 우주는 빌라 계단을 내려오며 가방 끈을 고쳐 멨다.“엄마, 이쪽.”아이가 모과나무 쪽으로 발을 돌렸다. 윤슬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골목 바깥쪽을 가리켰다.“오늘은 저쪽으로 가자.”“또?”우주가 멈춰 섰다.그 길로 가면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접시 하나 앞을 지나게 됐다. 유리문 안에서 빵을 자르는 손이나 카운터를 닦는 이든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윤슬은 요 며칠 골목 어귀를 돌아서 다녔다.“여기도 길 있잖아.”“아저씨 집 앞에도 있어.”“알아.”“엄마는 왜 저 집 앞만 돌아가?”윤슬은 아이 가방에서 한쪽으로 기운 물통을 바로 넣었다. 뚜껑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엄마가 생각할 게 있어서.”우주가 윤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걸으면서?”“응.”“그럼 천천히 가.”아이는 먼저 달려가지 않았다. 윤슬 옆에 붙어 작은 걸음으로 걸었다. 파란 운동화 앞코가 바닥의 금을 넘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고리가 흔들렸다.윤슬은 아이 손을 조금 느슨하게 잡았다.“우주는 빨리 가도 돼.”“손 잡았잖아.”우주가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 윤슬은
윤슬은 공책을 덮어 가방 옆에 놓았다. 예약 장부에는 다음 토요일 오후가 한 칸 비어 있었다. 우주 머리를 깎으려고 남겨 둔 자리였다.방 안에서 이불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윤슬은 장부를 닫고 아이 곁으로 갔다. 베개 아래에 눌린 머리카락을 빼 주자 우주가 잠결에 고개를 돌렸다. 귀를 덮은 머리끝이 손등을 간질였다.▷4월 4일 토요일, 우주는 미용실 의자 앞에서 두 발을 붙이고 섰다.“다음에.”윤슬은 아이 목에 두를 작은 수건을 펴 들었다.“오늘 하기로 했잖아.”“내일.”“내일도 머리는 깎아야지.”우주는 귀를 양손으로 덮었다. 머리카락까지 눌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윤슬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귀 안 자르는 거 알지?”“아는데.”“그럼 앉자.”“싫은 건 알아도 싫어.”윤슬은 펴 놓은 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예약한 손님이 늦는다는 연락을 해 와서 잠깐 틈이 났다. 그사이에 끝낼 생각이었지만 우주는 의자 가까이에도 가지 않았다.“머리가 눈 찌르잖아.”“눈 감으면 돼.”우주가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한쪽만 살짝 뜨고 윤슬의 손을 살폈다.가위는 아직 허리 가위집에 있었다.“엄마, 조금만 잘라.”“응. 조금만.”“조금보다 더 조금.”“먼저 앉아 봐.”윤슬은 아이를 안아 의자 위에 놓았다. 높이를 맞추려고 받침을 올리고 덮개를 펼치자 우주의 턱이 벌써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지난번에도 이 자리에서 울었다. 목에 머리카락이 붙는다고 울고, 털어 주려고 덮개를 풀면 아직 안 끝났느냐고 울었다. 윤슬은 오늘 쓸 수건을 두 장 준비해 두었다.“목에 안 들어가게 할게.”우주는 수건을 두른 목을 만졌다.“여기 다 막아.”“막았어.”“뒤도.”윤슬은 목덜미 쪽을 한 번 더 접었다. 우주가 고개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덮개를 여미고 빗을 꺼냈다.빗살이 앞머리를 지나기도 전에 아이의 어깨가 올라갔다.“아직 안 잘랐어.”“지금 자르잖아.”“빗는 거야.”우주의 입이 벌어졌다. 윤슬은 가위를 꺼내려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