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윤슬은 식탁에 펼쳐 둔 공책을 덮고 그 위에 우주의 크레파스 통을 올렸다. 밤새 켜 둔 거실 불을 끄자 창으로 들어온 아침빛이 식탁 모서리에 걸렸다.
방 안에서 이불 끄는 소리가 났다.
“엄마, 오늘 빨간 날?”
우주가 잠옷 바짓단을 밟으며 나왔다. 윤슬은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바짓단부터 접었다.
“응. 일요일.”
“그럼 어린이집 안 가?”
“안 가. 엄마 가게에 가야지.”
우주는 식탁 위 공책을 끌어당겼다. 어제 그린 파란 사람을 한번 보고는 다시 덮었다.
“이거 가져가.”
“가방에 넣어.”
“엄마가 넣어 줘. 나는 옷 입어.”
윤슬은 아이가 내민 공책을 받았다. 잠이 덜 깬 우주는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식탁 아래를 들여다보았다.
“내 파란색 없어.”
크레파스 하나가 의자 다리 옆에 떨어져 있었다. 윤슬은 그것을 주워 통에 넣었다. 우주는 뚜껑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 안에는 어린이집에서 가져온 종이도 있었다. 윗부분에 글씨가 적혀 있고 아래는 비어 있는 종이였다.
『우리 가족』
윤슬은 구겨진 귀퉁이를 손바닥으로 폈다. 공책과 나란히 넣고 지퍼를 닫자, 우주가 점퍼를 거꾸로 쥔 채 나왔다.
“엄마, 팔이 없어.”
“뒤집혔잖아.”
윤슬은 점퍼를 바로 돌려 주었다. 우주가 팔을 넣는 동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첫 손님이 오기 전에 수건을 개고 샴푸대도 닦아야 했다.
현관에서 파란 운동화 끈을 묶어 준 뒤 두 사람은 계단을 내려갔다. 1층 문 안쪽에서 탁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 가?”
“네. 우주도 같이요.”
“오늘은 그림 그린다더니 챙겼어?”
우주가 가방을 배 앞으로 돌렸다.
“여기 있어.”
“그래, 그래. 할머니 예쁘게 그려.”
“머리 동글동글하게?”
“그렇게. 어제 엄마가 동글동글하게 해 줬잖아.”
우주는 할머니 머리 대신 닫힌 문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윤슬은 아이 손을 잡고 빌라 밖으로 나왔다.
모퉁이를 돌면 미용실과 맞은편 유리문이 함께 보였다. 윤슬은 그쪽으로 가려던 우주의 손을 가볍게 당겼다.
“오늘은 이쪽.”
“왜?”
“가자.”
골목 반대쪽 담장을 따라가면 미용실 옆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윤슬은 먼저 그 길로 들어섰다. 우주는 몇 걸음 따라오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는 왜 저 집 안 가?”
“엄마는 미용실 가야지.”
“어제는 저기로 갔잖아.”
윤슬은 아이 점퍼 지퍼가 턱에 닿지 않게 조금 내려 주었다.
“앞 보고 걸어.”
우주는 가방을 등에 올리고 발을 크게 벌렸다. 보도 틈을 밟지 않으려고 걷다가 윤슬의 손이 당겨지자 다시 보통 걸음으로 돌아왔다.
미용실 옆에 도착해서야 윤슬은 열쇠를 꺼냈다. 문을 열고 우주를 먼저 들여보냈다. 정면 유리 너머로 맞은편 가게가 보였다. 아직 문은 닫혀 있었지만 안쪽 불이 켜져 있었다.
윤슬은 아이 가방을 구석 책상에 내려놓고 미용실 불부터 켰다.
▷
우주는 가족 그림 종이를 책상 한가운데 놓았다. 크레파스 통을 열고 살구색을 집었다가 윤슬을 불렀다.
“엄마, 귀도 그려?”
윤슬은 마른 수건을 선반에 쌓고 있었다.
“그려도 되고.”
“엄마 귀는 하나?”
“둘이지.”
우주가 윤슬의 묶은 머리를 빤히 보았다.
“이쪽은 안 보여.”
윤슬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우주는 그제야 종이 양쪽에 작은 반원을 붙였다.
“있네.”
문이 열리고 첫 손님이 들어왔다. 윤슬은 수건 맨 위를 고르게 누른 뒤 몸을 돌렸다.
“네, 앉으세요.”
머리카락을 빗으로 가르고 덮개를 여미자 가위질 소리가 났다. 우주는 가끔 고개를 들어 윤슬을 확인하고 다시 그림으로 돌아갔다. 윤슬이 거울을 보며 손님에게 길이를 묻자 우주도 자기 종이 위 사람의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엄마, 나는 머리 안 잘라.”
“오늘은 안 잘라.”
“그림도?”
“네가 그리는 거잖아.”
우주는 검은색을 내려놓고 파란색을 골랐다. 종이를 들었다 놓는 소리가 났다.
손님이 나간 뒤 윤슬은 잘린 머리카락을 쓸었다. 우주는 빗자루가 책상 가까이 오자 두 발을 번쩍 들었다.
“나 공중이야.”
“조금만 그대로 있어.”
윤슬은 의자 밑까지 쓸어 쓰레받기에 담았다. 아이가 발을 내린 뒤에는 물컵을 가져다주었다.
“그림 얼마나 했어?”
우주가 팔로 종이를 가렸다.
“아직.”
“알았어. 다 하면 보여 줘.”
윤슬은 몸을 일으키다 맞은편 유리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열린 부엌 안에서 이든이 빵을 나무 도마에 놓았다. 칼이 내려가고, 잘린 조각이 작은 접시로 옮겨졌다. 문을 타고 온 버터 냄새가 미용실 입구에 잠깐 머물렀다.
우주도 고개를 들었다.
“접시 아저씨 열었어?”
“응.”
“빵도 열었어?”
윤슬은 대답 대신 아이 컵을 책상 안쪽으로 밀었다. 종이에 물이 닿지 않을 자리였다.
“목마르면 마셔.”
우주가 컵을 들자 윤슬은 미용실 문을 조금 당겼다. 문 아래에 걸린 발판 때문에 끝까지 닫히지 않았다. 발끝으로 발판을 안쪽에 넣고 문을 닫았다.
점심때가 지나면서 빈 의자가 생겼다. 윤슬은 우주가 먹고 남긴 것을 정리한 뒤 예약 장부를 펼쳤다. 다음 손님까지 조금 시간이 있었다.
아이 책상에서는 파란 크레파스가 종이 위를 오갔다. 윤슬은 바닥에 떨어진 검은색을 주워 통에 넣어 주었다.
“엄마 머리 다 그렸어?”
“응. 묶었어.”
“네 머리는?”
“나는 많이.”
우주는 종이를 더 가까이 당겼다. 윤슬은 들여다보려던 허리를 펴고 샴푸대 쪽으로 갔다. 수도꼭지 주위의 물기를 닦고 수건을 바꾸는 동안 입구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났다.
“머리 좀 깎아 주세요.”
윤슬은 젖은 수건을 접은 채 돌아섰다.
이든이 문 안에 서 있었다. 어제와 같은 짧은 머리였고, 오늘은 앞치마 없이 어두운 겉옷을 입고 있었다. 문을 놓기 전 바닥에 발판이 끼지 않았는지 한번 내려다보았다.
윤슬은 수건을 선반에 놓았다.
“네, 앉으세요.”
이든은 가까운 의자로 걸어왔다. 우주가 책상에서 몸을 반쯤 돌렸다.
“접시 아저씨.”
“안녕.”
“머리 길어?”
“조금.”
우주는 이든의 머리와 자기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안 긴데.”
“정리하려고.”
이든이 의자에 앉았다. 윤슬은 목에 두를 얇은 종이를 꺼냈다. 끝을 맞대어 붙이는 동안 이든은 거울 대신 무릎 위에 놓인 손을 보고 있었다.
덮개를 펼치자 우주가 의자에서 내려왔다.
“엄마, 나 볼래.”
“선 밖으로 나오지 마.”
윤슬이 바닥의 타일 이음새를 가리켰다. 우주는 운동화 앞코를 그 선에 맞췄다.
“여기?”
“응. 머리카락 날아가.”
우주는 두 손으로 자기 머리부터 덮었다. 이든의 입가가 조금 움직였다. 윤슬은 덮개 뒤의 잠금 부분을 여미고 빗을 들었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이든이 거울 아래를 보며 말했다.
“짧게. 편한 대로.”
윤슬은 빗으로 옆머리를 들어 올렸다. 가위를 펼치는 순간 손잡이가 손가락 끝에서 한 번 미끄러졌다. 날을 닫은 채 손바닥으로 받아 잡았다.
금속이 부딪치는 작은 소리가 났다.
“엄마?”
“괜찮아. 거기 있어.”
윤슬은 가위 손잡이를 수건으로 닦았다. 손가락을 다시 넣고 빗을 머리 가까이 댔다. 이든은 움직이지 않았다.
첫 가위질에 짧은 머리카락이 덮개 위로 떨어졌다. 우주는 발끝을 들었다가 윤슬을 보고 다시 내렸다.
윤슬은 이든의 귀 위로 빗을 옮겼다. 귓바퀴에 닿지 않게 빗 끝을 돌리는 일은 오래 해 온 일이었다. 손가락 사이에 머리카락을 잡고 길이를 맞췄다.
거울 속 이든의 눈은 윤슬의 손 아래에 머물렀다.
“언제부터 여기 살았어?”
윤슬은 가위를 한 번 더 움직였다.
“5년.”
이든이 덮개 아래에서 손을 옮겼다. 천이 조금 들렸다가 가라앉았다.
“나는 몰랐어. 하 선생님 자리라서 온 거야.”
“그래.”
빗살에 걸린 머리카락을 털고 뒤통수로 자리를 옮겼다. 윤슬이 고개를 조금 숙이게 하자 이든은 그대로 따랐다.
우주가 물었다.
“아저씨도 여기 살아?”
“응.”
“접시랑?”
“가게 뒤에 방이 있어.”
“침대도?”
“있어.”
우주는 잠깐 생각하다 자기 책상으로 돌아갔다. 의자를 당기고 앉더니 살구색을 다시 집었다. 윤슬은 거울 속 아이가 제자리에 있는 것까지 보고 가위를 움직였다.
뒤통수의 길이를 맞추고 양옆을 확인할 즈음 문이 열렸다.
“백윤슬, 이거 받아.”
나영이 비타민 한 통을 들고 들어왔다. 안경을 코 위로 밀어 올리며 계산대에 통을 놓다가, 거울 속 의자에 앉은 이든을 보았다.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손님 있었네.”
“금방 끝나.”
“천천히 해.”
나영은 빈 의자에 가방을 놓았다. 우주가 고개를 내밀었다.
“나영 이모, 이거 뭐야?”
“엄마 먹는 거.”
“나는?”
“너는 엄마한테 물어보고.”
우주는 비타민 통을 보려다 종이를 팔꿈치로 눌렀다. 접힌 부분을 손바닥으로 펴느라 더 묻지 않았다.
윤슬은 마지막으로 앞머리를 빗었다. 눈썹 위에서 길이를 맞추고 손을 멈췄다.
짧아진 옆머리와 이마 위에 남은 모양이 거울에 들어왔다. 이든이 부탁한 것은 짧게 정리해 달라는 말이 다였다. 그런데 윤슬은 어느 쪽을 덜어 내고 어디를 남길지 묻지도 않고 잘라 놓았다.
손에 든 빗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거울을 보았다.
7년 전과 같은 머리 모양이었다.
윤슬은 가위를 닫아 허리 가위집에 넣었다.
“뒤쪽 봐.”
작은 거울을 들어 보이자 이든이 눈을 올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닿기 전에 윤슬은 거울을 조금 옆으로 옮겼다.
“괜찮아.”
“더 짧게 할 데는?”
“없어.”
윤슬은 작은 거울을 내려놓고 목덜미의 머리카락을 털었다. 부드러운 솔이 지나가자 이든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덮개를 걷고 목에 둘렀던 종이를 떼었다.
우주가 자리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 귀 나왔어.”
이든이 자기 귀를 만졌다.
“그러네.”
“빨개.”
윤슬은 덮개를 접으며 거울에서 눈을 뗐다. 나영이 비타민 통의 뚜껑을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겨 줄게.”
윤슬이 샴푸대 쪽을 가리켰다. 이든은 겉옷을 벗지 않은 채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윤슬은 목 받침에 수건을 대고 물 온도를 먼저 확인했다.
“뜨거우면 말해.”
“괜찮아.”
짧아진 머리에 물을 적시고 거품을 냈다. 수도를 잠근 뒤에는 손끝이 머리카락 사이를 움직이는 소리만 났다. 윤슬은 거품이 귀에 닿지 않게 손바닥으로 막고 헹궜다.
우주가 책상에서 나영에게 그림을 보여 주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탁 할머니.”
“머리 잘 그렸네.”
“동글동글해.”
“엄마도 있네.”
윤슬은 물을 잠갔다. 수건으로 이든의 머리를 감싸고 몸을 일으키게 했다. 다시 의자로 돌아와 머리를 말리는 동안에는 드라이어 소리 때문에 우주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
이든은 계산대 앞에 섰다. 윤슬이 커트 가격을 말하자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나영은 우주 책상 옆에 서 있었다. 아이가 크레파스를 찾을 때마다 통 안을 함께 들여다보았지만, 계산대 쪽으로는 오지 않았다.
결제가 끝나자 윤슬은 카드와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여기.”
이든이 카드를 챙겼다. 영수증은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었다.
“고마워.”
윤슬은 계산대 아래 서랍을 닫았다.
우주가 물었다.
“아저씨, 이제 밥 팔아?”
“응. 돌아가야지.”
“머리카락 들어가면 안 돼.”
“씻었으니까 괜찮아.”
아이는 이든의 머리를 확인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이든은 문 쪽으로 가다가 몸을 돌렸다.
“내일도 열어. 매일.”
윤슬은 닫은 서랍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내일 월요일이잖아.”
“정리할 게 있어. 가게에 있을 거야.”
이든은 그 말만 덧붙였다. 우주가 짧게 손을 흔들자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윤슬은 문이 닫힌 뒤에야 서랍에서 손을 뗐다. 나영이 의자에 놓아 둔 가방을 들었다.
“커트 잘됐네.”
“응.”
“너도 좀 앉아.”
“바닥 쓸어야 해.”
나영은 계산대 옆에 세워 둔 빗자루를 집었다. 윤슬이 손을 내밀었지만 이미 의자 뒤로 걸어간 다음이었다.
“이쪽만 할게.”
“내가 하면 돼.”
“알아. 잠깐 앉으라고.”
윤슬은 손님 의자 가장자리에 앉았다. 나영이 짧은 머리카락을 한쪽으로 모았다. 우주가 두 발을 들자 이번에는 나영이 책상 밑을 쓸었다.
“이모, 나 공중이야.”
“착륙은 조금 있다가.”
우주는 발을 든 채 웃었다. 윤슬은 무릎 위에 손을 놓고 빗자루 소리를 들었다. 가위 손잡이가 닿았던 손가락 안쪽을 엄지로 한번 문질렀다.
나영이 쓰레받기를 비우고 돌아왔다.
“통은 여기 둘게.”
“고마워.”
“빈속에 먹지 말고.”
나영은 더 묻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 우주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윤슬은 의자에서 일어나 새 덮개를 꺼냈다. 다음 손님이 올 때까지 아직 조금 시간이 남아 있었다.
▷
저녁이 되어 예약 장부의 마지막 칸에도 줄이 그어졌다.
윤슬은 가위를 닦아 가위집에 넣고 거울 앞의 빗을 정리했다. 우주는 구석 책상에서 종이를 가방에 넣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엄마, 이거 안 들어가.”
가방 입구보다 종이가 넓었다. 윤슬은 다가가 종이를 받아 들었다.
“접지 말고 엄마가 가져갈게.”
그림에는 사람이 셋 있었다. 머리를 묶은 엄마, 파란 옷을 입은 우주, 동그란 머리의 탁 할머니였다. 셋의 발 아래에는 길게 땅을 그어 놓았다.
오른쪽에도 땅은 이어졌지만 사람은 없었다.
윤슬은 종이를 책상 위에 다시 놓았다. 빈 곳에는 크레파스 자국도 없었다.
“여긴 누구 자리야?”
우주는 가방 지퍼를 당겼다. 천이 끼어 잘 닫히지 않자 다시 조금 열었다.
“몰라. 비워 둔 거야.”
윤슬은 끼인 천을 빼 주었다. 우주가 이번에는 끝까지 지퍼를 닫았다.
“다 했어.”
“응. 점퍼 입자.”
윤슬은 그림을 예약 장부 사이에 넣지 않고 손에 들었다. 반대 손으로 우주의 점퍼를 여며 주고 미용실 불을 껐다.
밖으로 나오자 맞은편 식당 유리문에 불빛이 비쳤다. 나무 카운터 안쪽에서 이든이 접시를 옮기고 있었다. 윤슬은 문을 잠근 뒤 아이와 함께 미용실 옆길로 돌았다.
우주는 따라오며 윤슬 손에 들린 종이를 보았다.
“엄마, 구겨져.”
윤슬은 종이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집에 돌아온 우주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식탁에서 그림일기 공책을 펼쳤다. 윤슬은 가족 그림을 식탁 한쪽에 놓고 아이의 짧은 연필을 깎았다.
우주는 이번에도 파란색으로 사람을 그렸다. 머리를 짧게 그리고 양쪽 귀에는 빨간색을 칠했다.
윤슬이 깎은 연필을 놓아 주자 아이는 칸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윤슬은 옆에 놓인 가족 그림의 빈 곳을 보다가 종이를 조금 안쪽으로 밀었다.
우주의 팔꿈치가 닿지 않는 자리였다.
『엄마가 아저씨 머리를 깎았다. 아저씨 귀가 빨갰다. 추워서 그랬나.』
(2화 끝)
우주는 사진이 없는 장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여기는 나중에 넣어?”“응. 또 찍으면.”“나 안 잘 때 찍어.”윤슬은 아이 손 밑에서 투명한 주머니를 펴 주었다. 우주는 빈 칸을 하나씩 짚다가 앨범을 덮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면서도 의자는 식탁 끝에 그대로 두었다.윤슬은 의자를 안으로 밀려다 멈췄다. 두 사람이 앉아 쓰던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우주 가방을 놓거나 빨래를 잠깐 걸쳐 두던 자리였다.의자에 걸린 수건만 걷어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4월 25일 토요일 아침, 우주는 미용실 거울 앞에서 모자를 고쳐 썼다.파란 챙을 눈썹까지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윤슬이 가방에 물병을 넣는 동안에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았다.“엄마, 나 안 보여?”“다 보여.”“눈은?”“챙 때문에 조금.”우주는 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거울 속에서 눈이 다 보이자 입을 벌리고 웃었다.윤슬은 예약 장부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예약 두 칸 사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마지막 손님의 파마가 끝나는 시간을 손목시계로 세어 본 뒤 장부를 덮었다.“엄마는 조금 늦게 가. 아저씨랑 먼저 가 있어.”“얼마나?”“점심 먹기 전에는 갈 거야.”“그럼 빵 남길게.”“네 것은 다 먹어.”“엄마는?”“엄마 것도 있어.”말을 마치자 유리문 밖으로 이든이 보였다. 앞치마 대신 얇
우주는 유리문을 놓고도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이든이 다시 칼을 든 것을 보고서야 윤슬 옆으로 붙었다.“엄마, 아저씨는 맨날 저기서 자?”“가게 뒤에 방이 있어.”“빵 옆에서?”“빵은 부엌에 있고.”우주는 가방 끈을 끌어 올렸다. 윤슬은 아이 어깨에서 뒤집힌 끈을 펴 주고 빌라 쪽으로 걸었다. 우주는 모과나무를 지날 때까지 식당 창을 두 번 더 봤다.▷4월 18일 토요일, 윤슬은 마지막 손님의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었다.거울 아래에는 우주가 그린 종이가 놓여 있었다. 파란 지붕 밑에 네모난 창이 세 개였다. 실제 집에는 없는 큰 창도 하나 그려져 있었다.“이건 어디야?”손님이 나간 뒤 윤슬이 물었다.“우리 집.”“창이 이렇게 많아?”“내 방에 하나 더.”“왜?”“아저씨네 보게.”윤슬은 빗에 낀 머리카락을 빼다가 손을 멈췄다. 빌라에서는 맞은편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는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창을 하나 더 그렸다.“집에서는 잘 자면 돼.”“나 잘 자.”“아침에는 누가 깨워도 눈 안 뜨잖아.”“눈도 자는 거야.”윤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주는 대답을 잘했다고 여겼는지 종이 아래에 자기 이름을 크게 썼다.미용실 바닥을 쓸고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담았을 때, 맞은편에서 철구가 손을 흔들었다. 우주가 문 앞으로 달려갔다가 윤슬을 돌아봤다.
윤슬은 대답 대신 빵이 든 통을 우주 쪽으로 밀었다. 우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불고, 윤슬 앞에도 빵 한 조각을 놓았다.“엄마도 먹어.”“먹고 있어.”“더.”윤슬은 아이가 놓아 준 빵을 집었다. 예약 장부 옆 영수증이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뒤집혔다. 윤슬은 빈 통으로 한쪽 끝을 눌러 두었다.▷토요일 예약 장부에는 빈 줄이 거의 없었다.윤슬은 손님 머리에 파마 약을 바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샴푸대에는 씻어야 할 수건이 쌓여 있었고, 다음 손님은 창가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4월 11일. 장부 위에 적힌 날짜 옆으로 하원 시간이 작게 쓰여 있었다.탁 할머니는 아침에 허리가 뻐근하다며 오늘은 계단을 덜 오르겠다고 했다. 윤슬은 우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시간을 비워 두었지만, 앞 손님의 염색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많이 남았어요?”거울 속 손님이 물었다.“조금만 더요. 안쪽부터 확인할게요.”윤슬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풀어 보았다. 시간을 줄이려고 서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아 고정하고 손을 씻었다.맞은편 유리문 너머로 철구가 빈 접시를 들고 움직였다. 이든은 카운터 끝에 놓인 주문서를 보고 있었다.윤슬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직 번호를 묻지 않았다.기다리는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골목으로 나오자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윤슬은 건너지 않고 손으로 오라고 했다.이든은 철구에게 짧게 말을 건넨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무슨 일 있어?”윤슬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오늘 하원만.”이든이 미용실 안을 한 번 보았다. 창가 손님이 잡지를 넘겼고, 파마 기계의 짧은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할게.”“4시 반. 모과 어린이집.”“알아. 길은 우주가 알려 줬어.”“선생님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네가 간다고.”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슬은 가위집에서 빠져나온 빗을 안으로 밀었다. 부탁은 끝났는데 손이 다른 일을 찾았다.“바쁘면 말해. 내가 손님한테 양해 구하고 가면 돼
윤슬은 받은 빗을 선반 위에 놓았다. 빗살이 아래로 가게 놓았다가 다시 뒤집었다.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든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평소 손님을 앉히던 자리였다. 윤슬은 의자 높이를 낮추는 발판을 밟으려다 발을 거뒀다.“불편하면 뒤로 조금 밀어.”“괜찮아.”이든의 무릎과 윤슬의 무릎 사이에 바닥 타일의 줄이 놓여 있었다. 윤슬은 그 줄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뭐부터 듣고 싶어?”이든이 입을 열기까지 조금 걸렸다.“언제 알았어.”“네가 떠나고, 다음 달.”윤슬은 귀 뒤로 넘긴 앞머리를 다시 눌렀다.“1월 둘째 주였어. 8주라고 하더라.”이든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다. 바지에 생긴 주름을 펴다가 손을 멈췄다.“혼자 갔어?”“응.”“그때도 혼자 살았잖아.”“살고 있었지.”윤슬은 의자 끝에 놓인 수건을 집었다. 손님 목에 둘렀다가 세탁하려고 빼 두었다. 접힌 자리가 어긋나 있어 모서리를 맞췄다.“전화할까 했어. 병원 나와서.”이든이 윤슬을 보았다.“안 했어.”“왜.”“말하면 돌아올 거잖아.”윤슬은 수건을 무릎에 내려놓았다.“연수고 뭐고, 다 두고 올 사람이었으니까.”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안 왔을 거라고는 못 하겠어.”“알아.”“그래도 알았어야 했어.”윤슬은 수건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응. 그건 알아.”더 보탤 말은 없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고 소식을 전하면, 이든은 돌아올 테니까. 그걸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윤슬이었다.“우리 붙잡지 않기로 했잖아. 연락도 하지 않기로.”“했지.”“3년 뒤 겨울에 둘 다 혼자면 다시 보기로 했고.”이든의 시선이 선반 위 빗에 잠깐 머물렀다.“그때 말하려고 했어. 네가 돌아오면.”윤슬은 무릎 위 수건을 한 번 더 접었다. 더 작게 접을 필요는 없었는데 손이 멈추지 않았다.“그때는 우주도 같이 데리고 나갈 수 있겠다 싶었어.”“골목에 왔어?”“세 번.”짧게 답하자
우주가 골목 끝에서 한 번 더 손을 당겼다.“엄마, 여기 밝은 데.”빌라 입구의 등이 켜져 있었다. 아이는 불빛 아래로 먼저 발을 넣고 새로 짧아진 머리를 만졌다. 윤슬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현관에서 신발을 벗은 우주가 양손을 폈다.“아저씨는 뭘 기다려?”윤슬은 아이 점퍼의 지퍼를 내려 주었다.“언제?”“아까. 가게 앞에서.”점퍼 안쪽에 머리카락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윤슬은 손톱으로 집어 떼고 옷을 걸었다.“가게 문 닫고 있었겠지.”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발판을 당겼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난 뒤에도 윤슬은 현관에 서 있었다.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선우가 보내 준 사진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똑같아진 두 아이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윤슬은 화면을 끄고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4월 8일 수요일 아침, 우주는 빌라 계단을 내려오며 가방 끈을 고쳐 멨다.“엄마, 이쪽.”아이가 모과나무 쪽으로 발을 돌렸다. 윤슬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골목 바깥쪽을 가리켰다.“오늘은 저쪽으로 가자.”“또?”우주가 멈춰 섰다.그 길로 가면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접시 하나 앞을 지나게 됐다. 유리문 안에서 빵을 자르는 손이나 카운터를 닦는 이든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윤슬은 요 며칠 골목 어귀를 돌아서 다녔다.“여기도 길 있잖아.”“아저씨 집 앞에도 있어.”“알아.”“엄마는 왜 저 집 앞만 돌아가?”윤슬은 아이 가방에서 한쪽으로 기운 물통을 바로 넣었다. 뚜껑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엄마가 생각할 게 있어서.”우주가 윤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걸으면서?”“응.”“그럼 천천히 가.”아이는 먼저 달려가지 않았다. 윤슬 옆에 붙어 작은 걸음으로 걸었다. 파란 운동화 앞코가 바닥의 금을 넘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고리가 흔들렸다.윤슬은 아이 손을 조금 느슨하게 잡았다.“우주는 빨리 가도 돼.”“손 잡았잖아.”우주가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 윤슬은
윤슬은 공책을 덮어 가방 옆에 놓았다. 예약 장부에는 다음 토요일 오후가 한 칸 비어 있었다. 우주 머리를 깎으려고 남겨 둔 자리였다.방 안에서 이불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윤슬은 장부를 닫고 아이 곁으로 갔다. 베개 아래에 눌린 머리카락을 빼 주자 우주가 잠결에 고개를 돌렸다. 귀를 덮은 머리끝이 손등을 간질였다.▷4월 4일 토요일, 우주는 미용실 의자 앞에서 두 발을 붙이고 섰다.“다음에.”윤슬은 아이 목에 두를 작은 수건을 펴 들었다.“오늘 하기로 했잖아.”“내일.”“내일도 머리는 깎아야지.”우주는 귀를 양손으로 덮었다. 머리카락까지 눌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윤슬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귀 안 자르는 거 알지?”“아는데.”“그럼 앉자.”“싫은 건 알아도 싫어.”윤슬은 펴 놓은 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예약한 손님이 늦는다는 연락을 해 와서 잠깐 틈이 났다. 그사이에 끝낼 생각이었지만 우주는 의자 가까이에도 가지 않았다.“머리가 눈 찌르잖아.”“눈 감으면 돼.”우주가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한쪽만 살짝 뜨고 윤슬의 손을 살폈다.가위는 아직 허리 가위집에 있었다.“엄마, 조금만 잘라.”“응. 조금만.”“조금보다 더 조금.”“먼저 앉아 봐.”윤슬은 아이를 안아 의자 위에 놓았다. 높이를 맞추려고 받침을 올리고 덮개를 펼치자 우주의 턱이 벌써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지난번에도 이 자리에서 울었다. 목에 머리카락이 붙는다고 울고, 털어 주려고 덮개를 풀면 아직 안 끝났느냐고 울었다. 윤슬은 오늘 쓸 수건을 두 장 준비해 두었다.“목에 안 들어가게 할게.”우주는 수건을 두른 목을 만졌다.“여기 다 막아.”“막았어.”“뒤도.”윤슬은 목덜미 쪽을 한 번 더 접었다. 우주가 고개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덮개를 여미고 빗을 꺼냈다.빗살이 앞머리를 지나기도 전에 아이의 어깨가 올라갔다.“아직 안 잘랐어.”“지금 자르잖아.”“빗는 거야.”우주의 입이 벌어졌다. 윤슬은 가위를 꺼내려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