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아침은 생각보다 선명했다.이수는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의 통화를 떠올렸다.말은 많지 않았고, 끝도 명확하지 않았는데 기억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어쩌면 기억에 남은 건 말보다 숨의 간격이었는지도 몰랐다.샤워를 마치고 나와 머리를 말리며 거울을 보았다.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그런데 눈빛 어딘가가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긴장을 풀어도 괜찮아진 사람의 얼굴처럼.휴대전화 위로 짧은 알림이 떴다.-오늘은 비가 올 것 같아요.이수는 그 문장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답장을 보냈다.-어제도 그랬죠.-비 오기 직전의 공기, 이상해요.잠시 뒤,-맞아요.-괜히 말을 아끼게 되는 공기.그 답장을 읽으며 이수는 작은 숨을 내쉬었다.서로 같은 감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안심으로 이어졌다.오전 일정은 바빴다.이수는 회의실을 오가며 필기를 하고, 질문에 답하고, 결정을 미뤘다.일은 늘 그렇듯 현실적인 속도로 흘러갔다.그런데 회의 중간중간 마음이 다른 곳으로 기울었다.도진의 목소리,어제의 빗소리,오늘 아침의 짧은 문장들.집중해야 할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자신이 조금 낯설었다.회의가 끝난 뒤 이수는 커피를 들고 사무실 복도를 걸었다.창밖으로는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지금 연락해도 될까.’그 생각이 스치자마자 이수는 고개를 저었다.괜히 마음이 앞서가는 것 같았다.지금은 조금 더 지켜봐도 되는 시간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도진은 차 안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빛은 그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그는 어젯밤 이후 자신의 반응이 달라졌다는 걸 부정하지 않았다.이전 같았으면 전화 한 통에 이렇게 오래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회사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했지만, 마음 한쪽이 계속해서 다른 방향을 향했다.일이 손에 안 잡히는 건 아니었지만,일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자꾸만 상기하게 됐다.점심시간이 다가올 즈음, 도진은 결국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점심은-혼자 드세요?이
비가 내리기 직전의 공기는 늘 묘했다.습기가 가득 차오르는데도 아직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이수는 창가에 서서 그 애매한 공기를 오래 바라보고 있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날이었다.일정은 계획대로 흘러갔고, 사람들과의 대화도 무난했다.그런데 하루의 끝자락에 이르자 마음 한켠이 자꾸만 정리되지 않은 문장처럼 남았다.휴대전화가 울렸다.이번에는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였다.“이수 씨.”도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 낮아진 톤이 괜히 더 또렷하게 들렸다.“무슨 일 있으세요?”“아니요.”그는 짧게 대답했다가 잠시 멈췄다.“그냥…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그 말은 가볍게 던져졌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이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숨을 한 번 고르고서야 말했다.“그러면… 지금 괜찮아요.”“네.”도진의 숨소리가 전화 너머로 들렸다.“그 말이면 충분합니다.”잠시 침묵이 흘렀다.이상하게도 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오히려 말이 끼어들면 깨질 것 같은 균형이었다.“오늘은,”이수가 먼저 말했다.“조금 조용했어요.”“좋은 쪽으로요?”“아뇨.”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다.“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쪽이요.”도진은 그 말을 이해했다.그래서 묻지 않았다. 대신 말했다.“그런 날이 제일 오래 남죠.”이수는 그 문장을 마음속에서 한 번 더 되뇌었다.오래 남는 날. 요즘의 날들이 꼭 그랬다.통화를 마친 뒤에도 이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전화는 끝났지만 기분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마치 대화의 여백이 아직 남아 있는 것처럼.그녀는 소파에 앉아 무릎 위에 손을 올렸다.심장이 뛰는 소리가 유난히 또렷하게 들렸다.설렘이라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고, 불안이라 하기엔 너무 안정적이었다.‘이게 뭐지.’이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그리고 굳이 답을 찾지 않기로 했다.지금은 이 상태 그대로 두는 편이 더 옳아 보였다.도진은 전화를 끊고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휴대전화를 내려놓지
오후의 빛은 창가에 오래 머물렀다.이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떼었다.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마치 무언가가 막 지나간 것처럼 마음이 한 박자 늦게 따라왔다.점심 이후로 도진의 말들이 생각보다 자주 떠올랐다.“이수 씨가 먼저 가면, 하루가 덜 남은 느낌이 들어서요.”그 문장은 의미를 갖지 않으려는 듯 가볍게 던져졌지만,그 가벼움이 오히려 이수의 마음에 오래 남았다.회의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회의 잘 끝나셨어요?짧은 안부였다.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이수는 잠시 답장을 미루었다. 망설임이라기보다 지금의 감정을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네. 방금 끝났어요.- 생각보다 길었네요.잠시 후 답장.-그럼 지금은-잠깐 숨 돌릴 시간인가요?이수는 ‘네’라고 쓰려다 문장을 바꿨다.-네.-커피 한 잔 마시려고요.-근처시면,-제가 합석해도 될까요?그 제안은 어제보다 한 걸음 가까웠다.그리고 이수는 그 사실을 모른 척하지 않았다.-좋아요.-회사 근처예요.카페는 조용했다.오후의 한산함이 공간 전체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었다.이수는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창밖을 바라봤다.사람들의 걸음은 빨랐고, 그 속도와 달리 자신의 마음은 천천히 가라앉아 있었다.도진은 예정보다 조금 빨리 도착했다.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마침 근처에 있어서요.”그는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주문을 마친 뒤에도 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고, 서로를 재촉하지도 않았다.“요즘,”이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시간 감각이 좀 이상해요.”도진은 고개를 들었다.“어떤 식으로요?”“빠르기도 하고, 느리기도 하고요.”이수는 웃었다.“같은 하루인데도요.”“그럴 때 있죠.”도진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의미가 겹칠 때요.”이수는 그 말을 곱씹었다.의미가 겹친다는 표현이 생각보다 정확했다.커피가 나왔다.
아침의 공기는 어제보다 한결 가벼웠다.이수는 창문을 열어 두고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특별한 일이 예정된 날도 아니었고, 마음에 걸릴 만한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그런데도 하루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상하리만큼 안정된 기분이 들었다.그 안정감이 어디서 오는지, 이수는 이미 알고 있었다.다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을 뿐이었다.휴대전화가 울렸다.메시지 알림이었다.-오늘도 일정 많으시죠?짧은 문장이었다.안부를 묻는 말 치고는 담백했고, 담백해서 더 오래 시선이 머물렀다.- 네. 오전에 미팅 하나 있어요.-도진 씨는요?답장을 보내고 나서 이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언제부터 이렇게 서로의 하루를 자연스럽게 묻는 사이가 되었을까. 답장은 곧 도착했다.-저는 오후에만 좀 바쁠 것 같아요.-점심 괜찮으시면 같이 하실래요?이수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웃었다.이제는 이 정도 제안이 설레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았다.그저 ‘그렇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 뿐이었다.-좋아요.-장소는 도진 씨가 정하세요.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이수는 미팅을 마치고 약속 장소로 향했다.길은 평소보다 붐볐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제각각이었다.그 사이를 지나며 이수는 문득 도진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그때는 지금처럼 편안하지 않았다.낯설고, 조심스럽고,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살피던 시간.그런데 어느새 그 경계는 너무 자연스럽게 옅어져 있었다.식당 앞에서 도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창가 자리에 앉아 메뉴를 보고 있던 그는 이수를 보자 고개를 들었다.“오셨어요.”그 말 한마디에 이수는 괜히 발걸음을 늦췄다.환영도, 반가움도 과하지 않게 담긴 목소리였다.“기다리셨어요?”“아니요. 저도 방금 왔어요.”둘은 자리에 앉았다.메뉴를 고르는 동안에도 굳이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그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 두 사람 모두에게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음식이 나오고, 포크와 젓가락이 움직였다.처음 몇 분은 그저 먹는 데 집중했다
아침 공기는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채였다.이수는 커튼을 조금만 열어 두고 커피를 내렸다.창밖의 소음이 실처럼 얇게 스며들었고, 그 소음 위로 김이 오르는 머그잔이 오늘 하루의 속도를 미리 정해 주는 듯했다.휴대전화가 조용히 울렸다. 도진의 이름이었다.전화를 받기 전, 이수는 잠시 숨을 골랐다.이제는 이 짧은 간격조차 자기 마음을 다독이는 시간이 되어버렸다.“네.”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다.“아침 일찍 연락해서 죄송해요.”도진의 말투는 여전했지만, 말과 말 사이에 놓인 공기가 어제보다 한 톤 부드러워졌다.“괜찮아요. 마침 일어나 있었어요.”“그럼… 다행이네요.”그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이수도 묻지 않았다.두 사람 모두 이 통화의 목적이 ‘용건’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오늘은 비 온다던데요.”이수가 먼저 말을 꺼냈다.“우산 챙기세요.”“네. 이수 씨도요.”짧은 대화였지만, 끊고 나서도 통화의 여운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이수는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따뜻함이 손끝에 오래 남았다.도진은 사무실로 향하는 차 안에서 와이퍼가 유리에 남기는 선을 바라보고 있었다.비는 얌전했지만, 그 얌전함이 오히려 더 오래 남았다.그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한 번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이수와의 대화는 늘 그랬다.별것 아닌 말들이 그의 하루를 조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았다.사무실에 도착하자 회의와 전화가 이어졌다.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정이었지만,도진은 문득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무슨 좋은 일 있어요?”직원이 농담처럼 묻자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요.”그 대답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 자신에게도 낯설었다.점심 무렵,이수는 편집자와의 미팅을 마치고 잠시 혼자 남았다.노트북 화면에 문장이 떠 있었지만 바로 다음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그녀는 창가로 다가가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을 손끝으로 따라 그렸다.흘러내리는 물방울처럼 자신의 감정도 천천히 자리를 옮기고
점심을 마치고 헤어질 때, 이수는 괜히 걸음을 늦췄다.바쁜 오후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보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온도가 갑자기 사라질 것 같아서였다.“오늘은 여기까지죠.”도진이 말했다.말투는 평소와 같았지만 끝에 남긴 숨이 조금 길었다.“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일정 있으시죠.”“있긴 한데,”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덧붙였다.“급한 건 아니에요.”그 말은 더 같이 있고 싶다는 말도,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