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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내면의 파국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7 11:06:47

대비전의 문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무게를 가지고 닫혔다.

문 하나가 닫힐 때 이수는 그것이 단순한 문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세상의 경계가 ‘철컥’ 하고 잠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 작은 소리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울렸다.

'나는… 무사한 것일까.'

걸음을 떼려 했으나 발끝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조금만 움직여도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간신히 붙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궁녀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빈마마… 밖으로 모시겠사옵니다.”

이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회랑을 나와 대비전의 뜰에 발을 디디는 순간

바람 한 줄기가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며 심장이 한 번 크게 패였다.

마치, 대비전에서 버텨낸 모든 담담함이 문밖에서 허물어지는 듯했다.

그녀는 회랑 기둥 가까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섰다.

궁녀들이 뒤에서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따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말을 걸지 않았다.

달빛도, 햇빛도 아닌 그저 적막이 깔린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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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42. 가늠되지 않는 불길한 그림자

    궁궐 깊숙한 세자의 동궁에는 아침보다 더 깊고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아 있었다.현은 책상 위 펼쳐진 문서를 들여다보고 있었으나글자는 하나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먹물처럼 점점 퍼지는 마음의 불안이 글자를 흐릿하게 만들어버렸다.책상을 두드리던 손끝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그는 스스로도 느꼈다.'무엇 때문인가… 왜 이리 마음이 시끄러운가.'그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내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고개를 깊이 숙였다.“저하… 전하의 대비마마께서…방금… 빈마마를 불러 드셨사옵니다.”현의 손끝이 마치 차가운 물에 빠진 듯 굳었다.“…대비마마께서 빈을?”“예, 저하. 급히 들라 하셨다 하옵니다.”그 말은 도끼로 쪼개는 소리보다 더 무겁게 현의 귀에 내려앉았다.대비는 한번 움직일 때마다 궁 전체가 들썩이는 인물이다.그런 대비가 가벼운 이유로 누군가를 부르지 않는다.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빈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안에 실린 감정은 날카로운 철편 같았다.내시는 머뭇거리다 대답했다.“…빈마마의 처소 근처에서 어젯밤… 일이 있었던 모양이옵니다.”“일?”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내시의 말을 겨누듯 시선을 보냈다.내시는 더 말해도 되는지 망설이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저하께서… 어젯밤 빈마마 처소 주변을 거닐었다는 말씀이…궁인들 사이에 돌기 시작했다 하옵니다.”현의 손이 책상을 강하게 눌렀다.탁~소리가 동궁 안을 울렸다.'소문이… 벌써 퍼졌단 말인가.'그는 작게 숨을 들이켰다.자신이 어젯밤 빈의 처소 근처를 거닐었던 것은 단지 마음을 정리하려는 걸음이었으나,궁은 사소한 숨결 하나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는다.“그것이… 대비마마의 귀에 들어갔다는 것이냐.”“예, 저하. 전각에서 여러 궁인들이 그 움직임을 조금…예사롭지 않게 여겼다 하옵니다.”현의 표정이 굳어졌다.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워졌으나너무 차가워지는 바람에 오히려 금이 가는 듯한 느낌을 풍겼다.궁이 빈을 향해 이렇게 빠르게 반응한

  • 천년의 기억   41. 내면의 파국

    대비전의 문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무게를 가지고 닫혔다.문 하나가 닫힐 때 이수는 그것이 단순한 문이 아니라자신을 향한 세상의 경계가 ‘철컥’ 하고 잠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그 작은 소리 하나가 가슴 깊은 곳에서 오래도록 울렸다.'나는… 무사한 것일까.'걸음을 떼려 했으나 발끝이 바닥에 달라붙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마치 조금만 움직여도 쏟아질 것 같은 감정들을 간신히 붙들고 서 있는 사람처럼. 궁녀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빈마마… 밖으로 모시겠사옵니다.”이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 회랑을 나와 대비전의 뜰에 발을 디디는 순간바람 한 줄기가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며 심장이 한 번 크게 패였다.마치, 대비전에서 버텨낸 모든 담담함이 문밖에서 허물어지는 듯했다.그녀는 회랑 기둥 가까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섰다.궁녀들이 뒤에서 조심스레 거리를 두고 따르고 있었지만 아무도 감히 말을 걸지 않았다.달빛도, 햇빛도 아닌 그저 적막이 깔린 낮의 뜰.이수는 그 적막 속에 온몸이 잠겨버린 듯했다.'대비마마의 질문들…''나를 향한 눈빛…''그 침묵의 무게…'마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속에서만 조용히 일어났다.그리고 그 무너짐의 틈 사이로 또다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도진.달빛 아래 서 있던 그의 옆모습.말없이 자신을 보던 눈.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던 또 다른 시선.그 모든 조각들이 하나의 금으로 이어지며 가슴을 조였다.'왜… 왜 그때를 떠올리면 이렇게 아픈가.'그 순간 그녀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정녕… 내 마음은 어제의 흔들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그러나 대답은 마음의 밑바닥에서 이미 일어나 있었다.이수는 기둥에 손을 짚었다.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평소 같으면 단정한 동작으로 숨을 골랐겠지만 오늘은 숨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가슴이 조였다.목이 메였다.눈은 뜨거워졌다.하지만 울 수 없었다.궁은 눈물조차 허락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 천년의 기억   40. 문밖에서 무너지는 숨

    수련장에는 아직 아침 햇빛의 잔열이 남아 있었다.도진은 대나무 검을 쥐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몸은 평소처럼 움직였지만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걸음 하나, 휘두름 하나마다 어딘가 균형이 흐트러진 느낌.'왜 이리 마음이 흔들리는가…'그는 스스로에게서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만어젯밤 이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는 진동은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검 끝이 공기를 가르는 순간 수련장 끝에서 급히 달려오는 발걸음이 들렸다.도진은 검을 멈추고 돌아보았다.장 무사였다.그의 얼굴은 안색이 변해 있었고 숨까지 거칠었다.나쁜 소식임을 말하기도 전에 느낄 수 있는 얼굴이었다.“도진…”그 한마디만으로도 도진의 심장이 먼저 움츠러들었다.“…무슨 일인가.”장 무사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고 가까이 다가왔다.목소리는 낮았으나 안에 담긴 무게는 너무 컸다.“빈마마께서… 대비전으로 들라 하셨다오.”그 말은 천둥처럼 크지는 않았지만뼛속에서 울리는 벼락과 같았다.도진의 손끝이 아주 조용히 떨렸다.“…대비전으로.”“그래. 게다가 중전전에서도 동시에 부름이 내려왔다 하오.”도진의 숨이 흐트러졌다.“곧바로 두 전각에서 모두? 빈마마에게?”장 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러하오.”그 말의 의미는 너무 선명했다.대비와 중전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한 사람을 불러들이는 일은 궁에서 거의 없었다.그것은 이미 사건이었다.도진은 검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그러나 들여온 숨이 폐끝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또다시 어딘가에서 가로막혔다.심장이 아주 얇게 찢어지는 듯한 통증.도진은 그 통증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이수…그녀의 이름이 마음속에서 불쑥 떠오르자 가슴이 더 아려왔다.'왜? 왜 그녀가 두 전각에서 불려가는 것이 이토록 견디기 어렵나.'도진은 스스로를 탓하듯 이를 천천히 악물었다.“…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왜 대비전에서 빈마마를 부르시는가.”장 무사는 고개를 숙였다.“빈마마께 무슨 문

  • 천년의 기억   39. 시선의 가시화

    대비전의 문이 천천히 열릴 때,그 안에서 흘러나온 공기는 마치 다른 계절처럼 차갑고 정적이었다.이수는 문턱 앞에서 한 번 숨을 고르고 천천히 발을 들였다.대비전 안은 향 냄새도, 사람 냄새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오직 정제된 침묵만이 공간의 주인이었다.대비는 하얀 비단 방석 위에 가만히 앉아 손에 들고 있던 묵주를 굴리고 있었다.머리맡에 걸린 매화 자수가 그녀의 권위를 드러내듯 고요하게 빛났다.이수는 예를 갖춰 무릎을 꿇고 상반신을 깊게 숙였다.“빈, 이수… 대비마마께 인사 올리옵니다.”그 말이 끝나자 대비전의 공기는 더 깊게 가라앉았다.대비가 바로 답하지 않은 시간이 이수의 마음을 천천히 압박했다.잠시 후, 대비가 입을 열었다.“고개를 들라.”이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대비의 표정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그저 모든 것을 관찰하는 사람의 아주 깊은 눈이었다.“빈.”그 한마디가 가벼운 호칭이 아니라 심문을 여는 첫 문장처럼 들렸다.“너를 부른 이유를 아느냐.”이수는 심장이 한 번 세게 뛰는 것을 느꼈다.“…마마의 명을 받고 서둘러 들었을 뿐이옵니다. 사유는… 알지 못하옵니다.”대비는 천천히 묵주를 굴렸다.“그러하겠지. 궁은 네가 아는 것보다 훨씬 깊은 곳이니.”그녀는 잠시 이수를 바라보다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어젯밤, 너의 처소 앞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보아라.”이수는 눈을 크게 뜨기도 전에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벌써 그 이야기까지 도달했구나.'그러나 표정 하나 흔들어서는 안 되는 자리였다.이수는 침착하게 말했다.“어젯밤… 달이 밝아 잠시 회랑을 거닐었사옵니다. 그뿐이옵니다.”대비는 눈썹을 아주 미세하게 올렸다.“그뿐이라 하였다.”이수는 고개를 숙였다.“예, 마마.”대비는 가만히 말했다.“그러면… 그 자리에 세자 저하가 계셨다는 것도 모르느냐.”이수의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그녀는 잠시 말을 잃었다.세자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수는 알고 있었다.몸으로, 기척으로, 공기로

  • 천년의 기억   38. 두 전각에서 내려온 부름

    오전 해가 머물던 마루 끝으로 갑작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처소의 문이 조용히 열리며 궁녀 두 명이 들어왔다.둘 다 낯익은 얼굴이었지만, 오늘의 표정은 낯설었다.고개를 깊이 숙인 채, 그들은 동시에 말했다.“빈마마… 대비마마께서…즉시 들라 하옵니다.”이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잔 위 매화 잎 그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대비마마께서… 나를?”궁녀들은 고개만 숙인 채 대답했다.“예, 마마. 지체 없이 들라 하옵니다.”이수는 천천히 일어났다.그러나 발끝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대비전에서 부름을 받는 일이 전혀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즉시’라는 말. 그리고 두 궁녀의 굳은 표정.그 모든 것이 단순한 예의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었다.궁녀가 외투를 걸어드리려 다가오는 순간,또 다른 발걸음이 급하게 처소를 향해 다가왔다.문이 조심스레 열렸다.이번에는 중전전에서 온 궁녀였다.그녀는 숨을 가다듬을 틈도 없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빈마마… 중전마마께서도… 즉시 들라 하옵니다.”처소 안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이수를 모시던 궁녀 둘이 돌아보았고, 중전전 궁녀도 순간 멈칫했다.두 전각에서 동시에 내려온 부름. 이수는 급히 숨을 들이쉬었다.“…대비전과… 중전전에서?”궁녀들은 누구도 먼저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한동안 무거운 침묵만 흘렀다.마침내 중전전 궁녀가 조심스레 말했다.“부름이 겹쳤사옵니다, 마마… 어느 전각을 먼저 들라 해야 하는지… 저희도 감히 판단키 어렵사옵니다.”‘감히’라는 말이 이 상황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궁녀 한 명이 조심스럽게 눈을 들었다.“…빈마마, 아무래도… 대비마마의 부름을 먼저 받드시는 것이 옳을 듯하옵니다.”그러자 중전전 궁녀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허나… 중전마마께서도 지체 없이 들라 명하셨사옵니다. 두 전각의 처분을 동시에 어길 수는 없어…저 또한… 어찌해야 할지…”그들은 두려움에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이 순간, 궁녀들은 단순

  • 천년의 기억   37. 지체 없는 개입

    한낮의 해는 밝았지만 궁의 위쪽 전각들은 햇빛보다 더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대비전 앞뜰의 매화는 조용히 피어 있었으나,그 고요는 어딘가 불길한 예고처럼 느껴졌다.평소라면 상궁들과 궁녀들은 정해진 동선에 따라 움직이며 전각을 살뜰히 챙겼을 터였다.그러나 오늘은 달랐다.수군거림이 없었다.걸음은 더 조심스러웠고, 목소리는 더 작은 속삭임으로 바뀌었고,아무도 이유를 말하지 않았지만 누구나 이유를 알고 있는 듯한 공기였다.그러다 마침내 그 공기의 중심이 대비전으로 흘러들었다.대비의 측근 상궁이 문 앞에서 발끝을 끌며 조심스레 들어왔다.그녀는 대비가 손에 들고 있는 불경을 방해하지 않으려 허리를 깊게 굽힌 채 한참을 기다렸다.그러나 대비는 이미 그녀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다.“…무슨 일인가.”상궁은 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더 숙였다.“마마, 전각에… 소문이 하나 퍼지고 있습니다.”대비의 손이 불경을 덮는 동작은 조급하지 않았으나 침착함 속에 묵직한 무게를 띠고 있었다.“…말하라.”상궁은 시선을 들지 못한 채 말했다.“세자 저하의… 최근 행보에 대해 궁인들이 우려를 품는 기류가 있어옵니다.”대비의 눈이 아주 천천히 가늘어졌다.“우려라.”“예, 마마. 부부 사이의 정은 당연한 것이나 요사이 저하께서 빈마마를 대하시는 모습이 평소 전하셨던 예법과 다르다 하여… 전각들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사옵니다.”대비는 손끝으로 상을 한 번 두드렸다.그 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전각의 공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할 만큼 명확했다.“다르다 함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상궁은 숨을 한 번 더 고르고 말을 이었다.“어젯밤… 저하께서 정해진 시각도 아니었음에도 홀로 빈마마의 처소 근처를 한참 머무르셨다 하옵니다.”대비전 안의 공기가 슬며시 움직였다.궁녀들이 바늘을 들던 손을 멈추었고, 누군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상궁은 말을 이어야 했으나 그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더욱 떨렸다.“빈마마께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은 아니오나…

  • 천년의 기억   6. 시선의 감옥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 천년의 기억   5. 열리지 않는 상자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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