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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고백의 잔향

Auteur: 데이지
last update Date de publication: 2026-07-05 20:44:20

대비전에서 나왔을 때의 공기는 아침보다 훨씬 더 묵직해져 있었다.

그 묵직함은 단순한 습기나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궁이라는 공간이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모으기 시작할 때 특유의, 설명할 수 없는 압력이 생긴다.

이수는 그 압력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회랑 끝에서 들려온 기척은 숨을 참듯 조용했지만,

그 안에 감춰진 감정만큼은 은근히 번져 있었다.

돌아보기도 전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세자였다.

그는 오늘 유난히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햇살보다 그늘을 선택하는 듯한 모습이었고,

그 그늘 속에서 서 있는 그의 눈빛은 아침보다 더 깊고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

이수는 천천히 다가가며 예를 갖추었다.

“저하를 뵙사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본인은 알고 있었다.

그 평온함은 겨우 마음을 붙잡고 있는 얇은 실과 같다는 것을.

세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살폈다.

오늘 하루 동안 그 얼굴에 어떤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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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년의 기억   64. 흔들리는 궁과 세 사람의 균열

    급보가 전각을 가르며 지나간 뒤,동궁전의 문이 닫히자 하나의 숨결이 꺼진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이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세자의 마지막 말이 마치 실처럼 가슴에 걸려조금만 잡아당겨도 울음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혼란 속에 섞인 것만 같았다.'저하의 마음을… 언젠가 듣게 하시겠다고….'그것은 고백이 아니었다.그렇다고 충성의 말도 아니었다.그 사이 어딘가, 빈이 감당해서는 안 되는 감정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그러고 나서야 전각 안에 서 있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굳어 있었는지 깨달았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회랑 바깥에 서 있던 궁인이 놀란 듯 들고 있던 등을 떨어뜨릴 뻔했다.“아… 빈마마! 저하께서 급히 나가시고…빈마마께선 이제 어찌하실지…”이수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걱정하지 마라. 동궁전을 정돈하고 너희 볼 일을 보거라.”궁인은 안도의 숨을 돌리며 물러났다.그러나 그 눈길 속에 말하지 못한 불안이 서려 있는 것을 이수는 알아보았다.'소첩 하나로 인해 궁이 이리 흔들릴 수 있는 것이었나….'그 생각이 오늘 내내 이수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회랑을 따라 걷는 동안, 세자와 도진 사이의 긴장,대비의 경고, 궁인들의 시선, 조정의 급보까지모든 것이 하나로 얽혀 이수의 발밑을 천천히 무너뜨리는 기분이었다.그 시각, 동궁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진은 궁의 경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늘 전방을 향해 있었지만오늘만큼은 마음속 어디선가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올라왔다.'빈마마…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실까.'그는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약간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궁인 몇 명이 도진의 앞에서 지나가며 작게 수군거렸다."경의 얼굴이 왜 저리 굳어 있지.""아까는 빈마마와도 함께 있던 것 같던데…""혹여… 무슨 소문이라도"도진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발을 내디뎠다.그의 움직임은 흔들리지 않았

  • 천년의 기억   63. 달빛에 물드는 전각

    동궁전으로 향하는 회랑은 유난히 길어 보였다.발걸음이 빠른 것도 아닌데 마치 땅이 조금씩 뒤로 미끄러져 거리만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이수는 끝내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궁인을 따라 걸었다.'저하께서… 왜 이 시각에 소첩을 찾으셨을까.'대비전에서의 일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전해졌을 것이다.궁의 귓속말은 바람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그리고 그 바람은 결국 세자의 마음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있었다.회랑 끝에서 동궁전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안에는 세자가 있었다.그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늘 곧고 점잖았던 그의 기운이 지금은 조용하고 깊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궁인은 이수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바람이 끊기자 방 안의 공기는 더욱 단단히 굳은 듯했다.세자는 잠시 이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 서서 밖으로 기울어가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침묵이 말보다 더 무거웠다.이수는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저하를 뵙사옵니다.”그녀의 목소리가 넓은 전각 안에서 천천히 흩어졌다.잠시 뒤, 세자가 돌아섰다.그의 눈빛은 무엇인가를 오래 참고 있던 사람의 눈빛이었다.“빈.”그 한 마디에는 부름 이상의 감정이 있었다.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오늘 하루가 남긴 흔적이 깊게 깔려 있었다.이수는 눈을 들지 못한 채 고개를 낮췄다.“…저하께서 소첩을 찾으셨다 하여 급히 달려왔사옵니다.”세자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그 발걸음은 고의적으로 조심스러워 보였다.다만 조심스러움 속에 말하지 못한 긴장도 함께 있었다.“대비전에서는 무슨 말씀을 들었습니까.”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않았다.하지만 그 물음이 얼마나 오래 고민 끝에 나온 것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이수는 조용히 대답했다.“…궁의 바람이 심상치 않다 하셨사옵니다.”세자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궁의 바람.”그는 낮게 되뇌었다.“그 바람이… 무엇을 향하고 있다 들었습니까.”이수는 답을 망설였다.그러나 침묵은 결국

  • 천년의 기억   62. 숨길수록 커지는 그리움의 그림자

    전각 사이로 햇빛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시각,이수는 아직도 대비전에서 들었던 말이가슴 안을 천천히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궁중의 바람은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의 발걸음을 향해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누군가의 마음을 먼저 건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소문이 된다.그리고 오늘, 그 바람은 너무 빠르게 불기 시작했다.회랑을 지나던 그녀의 걸음이 조금 느려질 때,어디선가 조용히 들려오는 기척이 있었다.그 기척은 날카롭거나 무례하지 않았고,오히려 누군가가 말하지 못한 걱정을 안고 다가오는 듯한 온도를 가졌다.“빈.”이름이 아닌 호칭, 그 안에 담긴 존중과 조심스러움이 한 번에 귀에 닿았다.이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그곳에는 도진이 서 있었다.햇빛이 그의 어깨를 스쳤지만 그늘이 눈가에 걸려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묻고 싶은 말, 근심,그리고 말하지 않은 충성까지 모두 섞여 있었다.이수는 조용히 예를 갖추었다.“경이… 어찌 이곳에.”도진은 고개를 숙였다.“빈마마께서 대비전으로 향하실 때 얼굴빛이 좋지 않으시기에…혹여 무슨 일일까 염려되었사옵니다.”그의 말은 규범을 지키고 있었지만,말 사이에 스며 있는 감정은 규범으로는 감출 수 없었다.이수는 시선을 잠시 떨구었다.“…경의 염려는 고맙사오나 궁의 눈이 점점 다가오는 듯하니오늘만큼은 가까이 서지 않으심이 경에게도 이롭사옵니다.”도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끝내 말로 드러내지 않았다.“빈, 대비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사옵니까.”그 물음은 조심스러운 동시에 필사적인 느낌이 있었다.꼭 알아야 한다기보다, 알지 못하면 빈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이수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대비마마께서는 궁이 소첩을 주시하고 있다 하셨사옵니다.”도진의 표정이 굳었다.“저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사옵니까.”이수는 한숨을 아주 가늘게 내쉬었다.“저하께서는… 그대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염

  • 천년의 기억   61. 고백의 잔향

    대비전에서 나왔을 때의 공기는 아침보다 훨씬 더 묵직해져 있었다.그 묵직함은 단순한 습기나 온도의 문제가 아니었다.궁이라는 공간이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모으기 시작할 때 특유의, 설명할 수 없는 압력이 생긴다.이수는 그 압력 속을 걸어가고 있었다.회랑 끝에서 들려온 기척은 숨을 참듯 조용했지만,그 안에 감춰진 감정만큼은 은근히 번져 있었다.돌아보기도 전에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세자였다.그는 오늘 유난히 빛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햇살보다 그늘을 선택하는 듯한 모습이었고,그 그늘 속에서 서 있는 그의 눈빛은 아침보다 더 깊고 더 날카로워져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다가가며 예를 갖추었다.“저하를 뵙사옵니다.”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러나 본인은 알고 있었다.그 평온함은 겨우 마음을 붙잡고 있는 얇은 실과 같다는 것을.세자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살폈다.오늘 하루 동안 그 얼굴에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 읽어내려는 듯한 시선.“대비전에서의 일은… 별일 없었습니까?.”그가 먼저 물었다.그 질문은 ‘괜찮았느냐’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대비가 무엇을 말했고, 그 말이 빈을 어떻게 흔들었는지를 묻는 말이었다.이수는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대비마마의 은덕으로 소첩은 무사히 물러나왔사옵니다.”세자는 아주 미세하게 눈을 좁혔다.“무사히라.”그는 그 단어를 천천히 되뇌었다.“허나 빈의 얼굴은… 그리 무사해 보이지 않는구려.”이수는 그 말에 더 이상 눈을 들 수 없었다.그녀는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오늘 하루 동안 마음에 새겨졌음을 알고 있었다.대비의 말, 내명부의 시선, 궁인들의 속삭임, 그리고 도진의 답하지 못한 침묵까지.그것들이 모두 그녀의 얼굴에 자연스레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세자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대비마마께선… 무어라 하셨습니까.”그의 물음은 조용했으나 가볍지 않았다.이수는 한 번도 세자에게 거짓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그러나 오

  • 천년의 기억   60. 숨은 바람이 흔드는 자리

    대비전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길고, 언제나 조용했다.그러나 오늘은 그 고요함조차 속뜻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이수는 회랑의 기둥 사이를 따라 걸으면서도 단 한 번도 마음이 안정되는 순간이 없었다.발걸음은 일정했으나 가슴 속은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대비마마께서… 왜 다시 부르신 것이오.'분명 아침에 뵈었다.그때의 대화도 간단하지 않았다.그러나 그 뒤로 불과 조금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궁 안에서는 이미 무언가 움직인 것이다.그녀의 옷자락을 스치는 바람도 평소와는 달라져 있었다.궁은 언제나 조용히 움직이고, 움직일 때마다 가장 약한 곳을 먼저 건드렸다.그리고 오늘 약한 곳은 분명 빈이었다.대비전 앞마당을 지나 문이 열리는 순간, 이수는 스스로 마음을 단단히 가다듬었다.전각 안은 더 어둡고, 더 고요했다.방금 누군가가 속삭인 말들이 아직 공기 속에서 가라앉지 않은 것처럼미묘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대비는 방금 전과 같은 자리,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그 눈빛에는 약간의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그 온도는 궁이 파악한 정보가 늘어나고 그 뜻이 보다 선명해질 때 나타나는 변화였다.이수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가 정중히 예를 올렸다.“대비마마, 소첩이 말씀을 듣고 다시 뵈러 왔사옵니다.”대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그래. 빈이 와야 할 것이었다.”그 한 마디에 이수의 목 안쪽이 미세하게 조여왔다.대비는 손끝을 들어 곁에 있던 상궁에게 눈짓했다.상궁은 한 폭의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펼쳤다.그 안에는 궁인들의 보고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된 조각들이 정돈된 글로 옮겨져 있었다.이수는 그 문서가 무엇을 뜻하는지 읽기 전에도 이미 알 수 있었다.대비가 말했다.“금일 새벽, 네가 회랑을 지나던 길에 세자저하와 마주쳤다 하지.”이수의 숨이 뚝 멎는 듯했다.'벌써… 벌써 이 일이 대비전까지…'궁의 움직임이 얼마나 빠른지 오늘만큼 뼈저리게 깨달은 적은 없었다.“그리고 그 직후, 도진 경이 빈 곁에 있었음을 본 이들이

  • 천년의 기억   59. 장막의 잔향

    도진의 목소리가 회랑 한쪽에 닿아왔을 때,이수는 아직도 세자의 마지막 말이 가슴 깊숙한 곳에서 울리고 있었다.그 울림은 금방 사라지지 않았고,마치 얇은 장막처럼 마음을 덮어 숨을 쉽게 내쉬지도, 들이쉬지도 못하게 했다.“…괜찮으시옵니까.”그 한 줄의 물음은 마치 누군가 문틈 사이로 손을 내밀어조심스레 그녀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 같았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도진은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너무 가까이도, 그렇다고 멀리도 아닌,자신이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끝없이 계산한 끝에 도달한 듯한 위치.햇빛이 아직 그의 얼굴을 완전히 비추지 않았고,미묘한 그림자가 눈가에 걸려 표정의 진의를 더 알 수 없게 만들었다.이수는 숨을 고르듯,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경이… 어찌 여기를 찾았소.”그 말투는 자신을 낮추지 않았고, 상대만을 높이지도 않았다.궁 규범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가장 절묘한 중심에 선 말이었다.도진은 고개를 조금 숙였다.“빈마마께서… 혼자 두기엔 오늘의 바람이 심상치 않아 보였사옵니다.”그 말은 ‘걱정된다’는 뜻이었고, 곁에 있고 싶다는 속마음이었으며, ‘하지만 감히 다가설 순 없다’는 절제이기도 했다.이수는 눈을 내리깔았다.“…경까지 그리 말하면 소첩이 더 흔들릴 일만 남지 않소.”자신을 낮추지 않는 어투 속에 오늘 하루 내내 간직해야 했던 무게가 살짝 새어 나왔다.그녀는 이어 말했다.“이 궁에서 빈의 자리란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곳이오.경이 그런 마음을 보이면… 그 또한 소문이 되어 경을 해치게 될 것이오.”도진의 시선이 순간 미묘하게 흔들렸다.그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세자의 눈빛이 자신을 향할 때의 얇은 금을.“…소문의 칼은 이미 저를 향하고 있사옵니다.”도진이 조용히 대답했다.“빈마마께서 ‘경’이라 부를 때마다, 저 또한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질 뿐이옵니다.”그 말은 경계선 위에 놓인 감정이었다.한 걸음만 더 나가면 마음이 드러날 것이고,한 걸음만 물러서면

  • 천년의 기억   10. 이름을 가둔 가슴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 천년의 기억   9. 금지된 이름의 파문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

  • 천년의 기억   8. 어둠이 새긴 흔적

    이수는 대답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침묵이 짧게 흘렀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많은 말들이 미묘하게 얽혀 있었다.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오늘 하루… 마마께서 많이 지치셨을 듯하여 저하께서도 염려가 깊으셨사옵니다.”그 말은 조심스럽고 공손했다.그러나 그 속에는 세자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을 감추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이수는 시선을 창호로 옮기며 말했다.“…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숨을 감추고 있는 곳이더이다.”도진은 그 말에 정답처럼 대답하지 않았다.오히려 아주 짧게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었

  • 천년의 기억   7. 밤이 삼킨 경계

    그 말은 단순한 배려처럼 들렸지만 그 안에는 자신이 먼저 그녀를 품으려는 의지가,그리고 동시에 도진을 묘하게 견제하는 마음이 스며 있었다.전각 밖으로 나오자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스쳐 지나갔다.세상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새소리, 바람 소리, 궁인들의 바쁜 발걸음.이수는 걸음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거기 호위무사.”도진은 고개를 돌렸다.“예, 마마.”“저하와 내가… 잘 어울리오?”이 질문은 그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도진의 발걸음이 순간 멈추었다.이수는 그 미묘한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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