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유호와 해인이 부부가 된 건 권영자가 직접 이어준 인연 덕분이었다.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는 줄 알았는데, 이제 와 이런 꼴이 되고 말았다.권영자가 곁에 있던 진주에게 말했다.“지금 전화해서 희정이 집으로 오라고 해.”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권영자가 더 이상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뜻임을 알아차린 진주는 서둘러 알렸다.희정은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다. 손에는 권영자에게 줄 보양 선물까지 들려 있었다.“할머니, 이건 제가 얼마 전에 백두산 쪽으로 촬영 갔다가 현지 농가에서 구한 인삼이에요.” “깊은 산에서 오래 자란 거라 몸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할머니 드리려고 따로 챙겨 왔어요.”권영자쯤 되는 사람이 좋은 물건을 못 봤을 리 없었다. 희정이 가져온 인삼도 허투루 고른 물건은 아닐 터였다.하지만 권영자는 받지 않았다.“그런 귀한 보양식은 살 만큼 산 늙은이한테는 과하지. 도로 가져가서 더 필요한 사람한테 줘.”희정은 유호와 해인의 결혼을 권영자가 직접 이어줬다는 이야기도 알고 있었다.권영자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도 벌써부터 알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권영자와 거리를 좁혀 보려 한 것이었다.그런데 정성껏 가져온 선물부터 거절당하자, 희정의 표정이 굳어졌다.권영자는 형식적인 인사도 길게 나누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희정아, 설 지나면 스물다섯이지?”희정이 고개를 끄덕였다.권영자가 말을 이었다.“아직 만나는 사람 없지? 마침 내가 괜찮은 사람 하나 알고 있으니, 이따 한번 만나 봐.”희정은 멍해졌다. 권영자가 자신을 부른 이유가 설마 맞선을 보게 하려는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희정이 급히 말했다.“할머니, 저는... 아직 그렇게 급하지 않습니다.”“왜 안 급해?”권영자는 희정이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얼른 문승이 불러와.”명령을 받은 진주는 곧장 움직였다. 희정의 표정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문승? 한씨 가문의 그 의붓아들 말인가?’‘빈둥거리기 좋아하고, 종일 제대로 하는 일 하나 없이 편
설날을 이틀 앞둔 날은 해인이 임신 6개월차 정기 검진을 받는 날이었다.이른 아침부터 권영자가 물었다.“물도 마시면 안 되는 거야?”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산모 수첩에는 그렇게 되어 있어요.”권영자는 간단히 먹을 만한 간식을 찾아 해인의 가방에 챙겨 넣었다.“그럼 얼른 검사 받고 나와서 뭐라도 먹어. 배가 이렇게 불렀는데 그렇게 오래 굶어서야 되겠니?”이번 검사는 임신성 당뇨 검사였다. 전날 밤부터 금식은 물론 물도 마시면 안 됐다.해인이 외출 준비를 다 마쳤는데도 유호가 꾸물거리며 나타나지 않자, 권영자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이게 무슨 일이야? 전에는 회사가 바쁘다더니, 이제 KH그룹도 연휴 들어갔잖아. 설마 아직도 야근하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최근 한 달 가까이 유호는 야근을 핑계로 본가에 돌아오지 않았다.해인은 의외로 담담했다. 누구에게도 불만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기자들이 유호와 희정이 식당에서 만나는 모습을 여러 차례 찍었고, 두 사람 사이에 파경설이 돈다는 말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해인은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하루하루를 보냈다.처음에는 해인도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그러나 날이 지나고 새로 만난 팀원들과 일에 몰두하면서, 해인은 여자도 자기 일을 가져야 한다고 느끼게 됐다.결국 스스로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뿐이었다.같은 여자로서 권영자는 해인이 유호에게 마음이 식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차라리 크게 싸우기라도 하면 마음이 남아 있다는 증거일 텐데, 해인은 너무 조용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해인을 볼 때마다 권영자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권영자는 두 사람의 관계 때문에 속을 끓였다. 얼마 전에는 유호 쪽 사정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려고 일부러 KH그룹까지 찾아갔다.막상 가 보니, 유호는 정말로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할 만큼 일에 매달린 상태였다.유호의 수행비서는 유호가 아예 회사에서 지내고 있고, 한동안 밖으로 나간 적도 없다고 말했다.연말이라 처리할 일
해인은 예전부터 가족들이 애지중지하는 가운데 자랐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기만 하면 됐다.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소중한 딸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길 바랐을 것이다.진이철을 비롯한 팀원들은 그래서 해인의 뜻을 존중했다. 해인이 YD그룹을 인수할 만한 매수자를 찾을 수 있도록 힘을 아끼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하지만 누구도 자기 자신만큼 믿음직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지금 강씨 가문에는 해인 혼자만 남아 있었다.해인이 직접 회사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 이상, 그건 충분히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이라는 뜻이었다.진이철이 말했다.“아가씨는 회장님께서 공들여 키우신 따님입니다. 누구와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습니다.”“저희는 모두 아가씨를 믿고 있습니다. 전에는 아가씨께서 회사 경영에 뜻이 없어 보이셔서, 저희도 억지로 권하지 못했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예전과 달랐다.다른 몇몇 오래된 팀원들도 말을 보탰다.“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끝까지 돕겠습니다. 예전에 회장님과 동현 도련님을 보필했던 것처럼요.”해인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그렇게 오래됐는데도, 아버지 곁을 지켰던 직원들이 아직도 이렇게 충심을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해인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임신 중이라 술을 마실 수가 없어서, 찻잔을 들어 술잔을 대신했다.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진이철이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앞으로 저희 힘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해인보다 어른의 입장에서, 진이철과 개발팀 팀원들은 해인이 억울한 일을 당하길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강씨 가문에는 해인을 지켜 줄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진이철과 팀원들이 당연히 해인의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야 했다.해인은 잠시 멈칫했다. 진이철과 팀원들이 유호와 희정에 관한 가십 기사를 본 모양이었다.해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지금은 괜찮습니다.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진이철이 다시 물었다.“일하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저희에게 물으셔도 됩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거지?’유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올라간 유호는 이불을 걷다가, 자기 것이 아닌 인형 위에 털썩 앉고 말았다.네모바지 스폰지밥 인형이 입을 크게 벌린 채 유호를 향해 해맑게 웃고 있었다.그제야 유호는 떠올렸다. 이 방에서 해인도 잤을지 모른다고. 이건 해인의 물건일 가능성이 컸다.유호는 미간을 좁히고 네모바지 스폰지밥 인형을 한쪽에 내려놓은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잠결에 빠져들려던 때, 핸드폰이 울렸다.주헌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샤브샤브집에서 나온 뒤로 주헌은 유호와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대표님...]주헌의 목소리에는 불안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말을 꺼내려다 삼키는 듯했다.유호는 주헌이 원래 말을 흐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이 생겼는데, 꺼내기 난감한 모양이었다.“말해.”[저녁에 대표님께서 차희정 씨랑 같이 나가셨잖아요. 사모님께서... 제가 보기엔 꽤 화가 나신 것 같았습니다.]유호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그래서?”[사모님 좀 달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필요 없어.”[대표님, 요즘 사모님을 대하시는 태도가 예전이랑 많이 달라지셨습니다.]“응? 내가 예전엔 강해인한테 어떻게 했는데?”주헌은 속으로 생각했다.‘대표님이 사모님한테 어떻게 했는지, 대표님이 모르십니까?’‘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어쨌든 지금 같지는 않으셨습니다.]유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그래?”...며칠 동안 해인은 계속 YD그룹으로 출근해 현장을 살폈다.남자에게 기대서 회사 경영을 맡길 수는 없었다. 결국 많은 일은 해인이 직접 확인하고 챙겨야 했다.회사의 중요한 부분을 해인 자신의 손안에 확고하게 쥐고 있어야 마음이 놓였다. YD그룹은 어디까지나 강씨 가문의 사업이고, 해인은 강씨 가문의 유일한 상속인이었다.앞서 유호는 전문 경영팀을 따로 보내 회사 운영을 도왔다. 불과 반년 사이에 실적은 꾸준히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거기에 KH그룹
샤브샤브를 다 먹은 뒤, 영지는 해인과 함께 배도 꺼뜨릴 겸 쇼핑몰 근처 공원을 조금 걸었다.본가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 9시 반이었다.권영자와 한원랑은 평소에도 일찍 잠드는 편이었다. 저택 안의 불도 절반 넘게 꺼져 있었다.하지만 자정이 되어도 유호는 돌아오지 않았다.영지의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일이 점점 손쓸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만 같았다. 영지는 유호가 밤새 들어오지 않는 걸 자기 할머니에게 알려야 할지 망설였다. 그래야 권영자가 알게 될 테니까.‘그런데 내가 말하면, 나중에 큰 사모님이 한 대표님을 혼내실 텐데...’‘그러면 한 대표님이 작은 사모님이 일러바쳤다고 오해하지 않을까?’‘안 그래도 위태로운 한 대표님과 작은 사모님 사이가 더 흔들리면 어떡하지?’영지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말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그날 밤, 유호는 본가로 돌아오지 않았다.해인도 유호를 기다리며 불을 켜 두지 않았다.전화해서 돌아오라고 하지도 않았다....유호는 샤브샤브집 밖으로 희정을 따라 나간 뒤, 눈가가 붉어진 희정을 보았다.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왜 울어?”희정은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젖은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내가 협력도 그만두고, 네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따라 나왔어?”희정은 그렇게 말하며 유호의 품으로 기대려고 했다. 손으로 유호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리기까지 했다.드라마 속 남자들은 대체로 이런 장면에 약했다. 여자의 눈물을 거절할 수 있는 남자는 많지 않았다.희정은 이미 머릿속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유호가 자신을 품에 끌어안고, 머리카락과 등을 쓰다듬으며 안쓰럽게 달래 주는 모습을.하지만 유호는 그 자리에 나무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아무 반응도 없었다.냉담한 태도는 NPC보다도 못할 정도였다.“다 울었어?”유호는 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반듯하게 서 있었다. 말투는 타이르듯 딱딱했다.“다 울었으면 이제 이성적으로 생각해. 사적인 감정을 일에 끌고 오
희정은 눈가가 붉어진 채,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유호에게 말했다.“네 말이 맞아, 유호야. 내가 이렇게 자주 너한테 투자 얘기를 하자고 한 게 왜였겠어? 너랑 조금이라도 더 만날 기회를 만들고 싶어서였어.”“그런데 네가 이걸 네 결혼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앞으로는 만나지 말자. 영화 투자 건도 여기서 끝내.”말을 마친 희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유호는 미간을 찌푸렸다.‘끝낸다고?’이미 거의 다 논의된 영화 투자였다. 내부 절차도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그런데 이렇게 없던 일로 끝내자니, 그럴 수는 없었다.유호는 이미 팀과 함께 이 투자 건을 분석해 봤다. 이번 투자는 그룹에 상당한 이익을 가져다줄 가능성이 컸다. 대본도 유호가 직접 읽어 봤고, 꽤 괜찮다고 판단했다. 제작진도 국내 최정상급이었고, 국제 영화제에서 여러 차례 수상한 이력까지 있었다.거의 손해 볼 가능성이 낮은 사업이었다. 이런 기회를 포기할 사업가는 없었다. 유호는 개인적인 이유로 희정과의 업무상 협력까지 망치고 싶지 않았다.그는 해인을 한 번 바라보고는 결국 희정을 따라갔다.해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쪽을 지켜보고 있었다.심지어 희정이 유호에게 입을 맞추려는 듯 다가가는 것도 보았, 유호가 피하는 것도 보았다. 그 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다만 희정이 먼저 뛰쳐나가고, 유호가 뒤따라 식당을 나서는 모습만은 분명히 보였다.“작은 사모님...”영지는 해인이 상처받을까 걱정했다.이런 일을 보고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해인은 임신 5개월째였다.‘한 대표님도 정말 너무하셔. 그래도 와서 인사 한마디는 하셔야 하는 거 아닌가?’‘작은 사모님이랑 부부면서, 밖에서는 완전 남처럼 구시네.’“먹자.”해인은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영지의 앞접시에 음식을 집어 주었다.아까 냄비에 빠진 차돌박이는 너무 익어 버렸다. 해인은 새 차돌박이 한 점을 다시 데쳐
오늘 저녁, 해인은 승아와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승아는 연예와 재계 쪽을 오래 파온 기자였다. 한씨 가문에 대해, 해인이 몰랐던 이야기들도 많이 알고 있었다.승아의 말에 따르면, 당시 유호가 한씨 가문을 떠나게 된 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다.유호의 아버지가 직접 보냈기 때문이다.유호가 모터사이클 대회에 참가한 뒤였다.아들이 자신의 뜻을 거슬렀다고 여긴 유호의 아버지는 분노한 끝에 유호를 군대로 보내 버렸다.그 군부대에는 유호 아버지의 지인이 있어서, 유호를 혹독하게 굴리도록 했다.거의 8년 가까이 유호는 집에 돌아
해인은 서류 위 한 줄을 손가락으로 짚고,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퇴사 사유: 조직에서의 역할이 문제가 아니라, 지속 가능하지 않은 구조 속에 머무는 상황에 대한 우려로 인해 퇴사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조진규의 표정이 굳어졌다.“회사 망하라는 저주야?”“굳이 그렇게 받아들이신다면, 제가 더 드릴 말은 없습니다.”“이렇게 감정적으로 사표 던지는데, 네 지도교수는 알고 계셔?”“전 이미 졸업했습니다. 지도교수님도 제 커리어까지 간섭하실 위치는 아니시죠.”조진규는 목소리를 낮췄다.“나가는 건 좋아. 하지만 강해인 씨가
파일을 오래전에 저장해 두고 잊어버렸다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앞뒤로 고작 3분 차이였다.이건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정확했다.누가 봐도 예주가 미리 계산해 두고 백업해 둔 정황이었다.이게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졌다.사람들 마음속에 의심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해인은 예주가 억지로 순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바라봤다.‘이 사람, 정말 무고한 척은 잘하네.’그때 해인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말했다.“방금 밀크티를 누가 쏟았는지 확인하는 거,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우리
유호는 해인의 붉어진 뺨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이야기 좀 했다고 벌써 부끄러워하네.’“네가 나를 찾아와서 YD그룹을 인수해 달라고 한 이유가 뭐겠어.”유호의 목소리는 낮았다.“내 능력을 본 거잖아. YD그룹을 더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유호가 소리 없이 웃었다.“그렇다면 결혼... 꽤 괜찮은 제안 아니야? 이렇게 하면 네가 안고 있는 문제도 다 정리되고.”해인은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을 받았다.‘이거... 내가 방금 술을 너무 마셔서 그런 거지?’‘이게 도대체 어떻게 전개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