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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좌석 배치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2 12:02:18

나는 결재란을 다시 봤다.

브랜드팀장 대행.

내 이름을 쓰면 되는 자리인데 펜을 쥔 손이 잠깐 머뭇거렸다.

“확인한 일정만 공유하겠습니다. 바뀌는 건 따로 알려 드리고요.”

“네.”

“보고용이라고 해서 매일 새로 만들지는 않을 거예요. 팀에서 쓰는 표를 같이 보시는 겁니다.”

“그걸 요청했습니다.”

나는 결재란에 이름을 썼다. 서류를 시환에게 돌려주자 시환이 받아 들었다.

돌아가는 방향이 낯설었다.

‘확인. 내가 돌려주는 쪽. 적응하자.’

시환은 서류를 자기 책상에 놓고 가방을 들었다. 나는 팀장 자리의 서랍을 닫기 전에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확인했다.

규민 팀장의 물건은 그대로 뒀다. 내 물건을 넣을 곳부터 비워야 했다.

▲

5월 28일 목요일, 나는 빈 상자를 발로 밀어 통로 밖으로 옮겼다.

상자 안에는 책상에서 내려놓은 서류 받침과 다이어리가 들어 있었다. 안경은 이미 쓰고 있었다. 책상을 옮기는 날에도 일정 확인은 멈추지 않았다.

은채가 돌돌 만 종이를 들고 올라왔다.

“대리님, 이거 봐 주세요.”

펼친 종이 위에 책상들이 그려져 있었다. 가운데 통로가 좁고, 복사기 앞에는 의자 하나가 튀어나와 있었다.

나는 그 의자를 가리켰다.

“이거 누구 자리예요?”

“제 자리요.”

“복사하려면 은채 씨가 일어나야 하네요.”

“맞아요. 그래서 제가 회사에서 제일 자주 일어나요.”

은채가 의자를 안쪽으로 옮겨 그렸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규민 팀장 책상 앞에 서류를 내려놓으면 사람이 지나갈 자리가 없었다.

나는 창고로 내려가는 문부터 회의실 계단까지 손가락으로 따라갔다.

“이쪽은 비워야겠어요. 출고 서류 받으러 오시는 분들도 여기로 지나가니까요.”

“서류장은 벽으로 붙일까요?”

“문이 끝까지 열리는지만 봐 주세요.”

은채가 일어나 서류장 문을 열었다. 문 끝이 내 상자에 걸렸다.

둘이 동시에 상자를 봤다.

내가 발로 다시 밀었다.

“제 것부터 치울게요.”

“저도 여기 옷 걸어 둔 거 뺄게요.”

의자 등받이에 걸린 은채의 옷이 팔걸이까지 내려와 있었다. 은채는 옷을 접어 가방 위에 올렸다.

채 대표가 계단을 올라오다가 펼쳐진 종이를 봤다.

“자리 바꿔요?”

“서류가 늘어서요. 복사기 앞도 좀 비우려고요.”

“좋아요. 나도 작업물 펼칠 데가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채 대표 책상을 봤다. 견본 위에 견본이 놓여 있었다. 책상 모서리에는 토마토 화분까지 있었다.

“화분은 창가에 옮겨도 될까요?”

채 대표가 화분을 두 손으로 감쌌다.

“얘 자리도 그려 줘요.”

은채가 종이 위에 작은 네모를 더했다.

사람 책상보다 먼저 화분 자리가 확정됐다.

‘아니. 입사 순서로 따지면 화분이 선배지.’

나는 채 대표 자리 옆으로 견본 놓을 자리를 표시했다. 규민 팀장 자리와 내 기존 자리 사이에는 함께 쓰는 서류 받침을 두기로 했다.

가족사진은 옮기지 않았다.

채 대표가 그 부분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규민 씨 오면 자기 자리 바로 알겠네요.”

“네. 저는 쓰는 물건만 가져올게요.”

“지유 씨 물건 놓을 데도 있어야죠.”

채 대표가 내 상자를 보고 작은 서류 받침 하나를 자기 책상에서 꺼냈다.

먼지를 손바닥으로 털어 주려고 하기에 내가 얼른 받았다.

“제가 닦을게요.”

“이건 튼튼해요. 무거운 서류 넣어도 돼요.”

나는 받침을 새 자리 옆에 놓았다. 비어 있던 칸에 인수인계서 묶음이 딱 들어갔다.

은채가 종이 맨 위에 제목을 적었다.

『좌석 배치도』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시환이 들어왔다. 나는 벽시계를 봤다.

8시 40분이었다.

▲

은채가 종이를 들어 보였다.

“의장님, 오늘 자리 조금 바꾸려고요.”

시환은 창가 책상에 가방을 놓다가 멈췄다.

“제가 옮길 곳이 있습니까.”

“아직 정하는 중이에요. 의장님 자리는 어떻게 할까요?”

채 대표가 비어 있는 벽 쪽을 가리켰다.

“저기 칸막이 세우면 따로 자리 만들 수는 있어요. 전화도 많이 하시고.”

시환은 벽과 창가를 번갈아 봤다.

“의장실은 필요 없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세요?”

“지금 책상이면 됩니다.”

시환의 책상에는 서류 묶음과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옆으로 넓힐 물건도 없었다.

나는 배치도에서 창가 책상을 가리켰다.

“그러면 여기는 그대로 두고, 서류장을 이쪽으로 옮기겠습니다. 책상 옆으로 사람이 좀 지나다닐 거예요.”

“괜찮습니다.”

“통화하실 때는 회의실이 비었는지 확인하고 쓰시면 되고요.”

“알겠습니다.”

시환은 소매를 걷고 책상 옆 상자를 들었다.

“이건 어디로 갑니까.”

“잠깐만요. 그건 아래층으로 내려갈 거라 무거워요.”

시환이 상자를 내려놓았다.

나는 바닥에 놓인 얇은 견본 상자를 가리켰다.

“그걸 벽 쪽에 놓아 주시면 돼요.”

시환은 상자를 바꿔 들었다.

정말 별말 없이 바꿨다.

은채가 내 옆으로 와서 목소리를 낮췄다.

“저분은 왜 매일 와요?”

나는 배치도의 선을 한 번 더 그었다.

“대주주는 원래 그래요.”

“원래 매일 와요?”

선이 조금 길어졌다.

온빛에 투자한 사람들이 매일 대표실에 앉아 있던 건 아니었다.

‘아니. 말을 잘못 골랐다. 너무 크게 골랐다.’

나는 종이 끝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회사마다 다르죠. 여기서는 자주 보시려나 봐요.”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 해서요.”

“물어봐도 돼요. 저 말고 의장님께요.”

은채가 시환 쪽을 봤다. 시환은 채 대표에게 상자 놓을 방향을 확인하고 있었다.

은채는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 자리부터 바꿀게요.”

“네. 그게 급해요.”

나는 복사기 앞 의자를 당겼다.

등 뒤에서 시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 자리는 정해졌습니까.”

“네. 창가 책상 하나요.”

“좋습니다.”

시환이 돌아가는 걸 확인하고 배치도에 책상 선을 마저 그었다. 은채가 옆에서 작게 웃었다.

“대리님 선이 삐뚤어요.”

“알아요. 다시 그릴게요.”

▲

자리가 정리되자 전화가 울렸다.

글벗문구 구매부장이었다.

나는 새로 옮긴 서류 받침에서 조건표를 꺼냈다. 종이를 찾느라 전화를 기다리게 하지 않아도 됐다.

“종이달 브랜드팀 원지유입니다.”

“추만철입니다. 자료 봤어요.”

나는 은채에게 손바닥을 보여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은채가 들고 있던 견본을 내 책상 끝에 내려놓았다.

“검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건은 괜찮은데 입고가 늦어요. 그 일정이면 우리 매장 행사에 넣기 어렵습니다.”

나는 공정표를 옆에 펼쳤다.

“먼저 필요한 제품부터 받으시면 어떨까요. 전체를 한꺼번에 보내는 대신 나눠서요.”

“따로 받으면 우리도 일이 늘죠.”

“행사에 들어갈 제품을 먼저 확정해 주시면 그 물량부터 생산 순서를 맞출 수 있습니다.”

전화 너머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납기를 당길 수 있다는 얘기예요?”

“품목과 수량이 먼저 정해지면요. 아직 확인 없이 날짜를 약속드릴 수는 없습니다.”

추만철은 잠깐 말이 없었다.

나는 채 대표를 봤다. 채 대표가 다가와 내 옆에 섰다.

“그러면 그쪽에서 가능한 일정 다시 줘요.”

“네. 대신 선주문 조건도 같이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떤 조건이요?”

“현재 조건은 판매가 안 된 물량을 전부 돌려받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행사 물량은 주문을 확정해 주셔야 먼저 생산에 넣을 수 있어요.”

“처음 거래하면서 부담이 크네요.”

“저희도 먼저 종이를 확보해야 해서요. 주문이 확정되면 그만큼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나는 조건표의 빈칸에 짧게 적었다.

행사 품목 우선. 수량 확정. 반품 범위 확인.

채 대표가 적힌 내용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서 하실 때도 이런 조건까지 보셨어요?”

추만철이 물었다.

나는 펜 끝을 종이에서 뗐다.

“지금은 제가 출시 일정과 거래처를 맡고 있습니다. 말씀드린 조건은 종이달에서 준비할 수 있는 범위고요.”

“우 대표하고 얘기하면 더 빠르지 않습니까?”

“종이달 계약은 채 대표님께서 결정하십니다. 의장님 결재를 받는 건 아닙니다.”

창가 쪽에서 서류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추만철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행사 물량은 확정 주문으로 검토할게요. 나머지는 따로 얘기하고.”

“확정 주문 물량은 판매 후 반품 없는 조건으로 검토하시는 거죠?”

“제품 이상은 받아 줘야죠.”

“네. 제품 하자는 별도 기준대로 처리하고요.”

“그렇게 써서 보내요. 내가 확인할 테니까.”

나는 적은 내용을 다시 읽어 줬다. 추만철은 행사에 필요한 품목표를 보내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펜을 내려놓았다.

은채가 가까이 왔다.

“된 거예요?”

“아직 계약은 아니에요. 납기하고 조건을 같이 바꿔서 검토하기로 했어요.”

채 대표가 조건표를 들어 봤다.

“우리가 다 만들어 놓고 기다리는 건 안 해도 되는 거죠?”

“행사 물량은 먼저 확정받는 쪽으로 얘기했어요. 나머지는 더 협의해야 하고요.”

채 대표가 손뼉을 쳤다.

나는 전화기를 한번 봤다.

아직 상대가 들을 것처럼 괜히 신경이 쓰였다.

“좋아요. 그럼 인쇄소 확인해요.”

“네. 가능한 일정 받아서 대표님께 먼저 올릴게요.”

채 대표는 이번에는 소리 없이 손을 맞댔다. 은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아니. 조용히 해 달라고 한 건 아닌데.’

나는 웃음을 참으며 인쇄소 연락처를 눌렀다.

▲

모덕규 사장은 내가 적어 둔 공정 순서를 듣고 질문부터 했다.

“먼저 찍을 게 정해졌어요?”

“글벗에서 품목표를 보내 주기로 했어요. 받으면 바로 전달드릴게요.”

“표지 확정이 안 된 건 먼저 넣으면 안 돼요.”

“그건 뒤로 빼겠습니다. 확정된 제품 중에서 가능한지 확인하려고요.”

나는 은채를 봤다. 은채가 견본을 나누어 놓고 수정이 끝난 쪽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모 사장이 종이 입고와 인쇄 준비에 필요한 내용을 말해 줬다. 나는 공정표에 표시한 뒤 한 번 더 읽었다.

“그럼 품목표 받으면 최종 확인하고, 그전에는 가능 일정으로만 안내할게요.”

“그래요. 먼저 된다고 해 놓으면 서로 곤란하니까.”

전화를 끊고 글벗문구에 보낼 메일을 썼다.

채 대표는 내 옆에서 조건표를 확인했다. 독단으로 바꾼 줄은 없는지, 준비할 수 없는 약속은 없는지 하나씩 짚었다.

“이 부분은 이렇게 보내도 돼요.”

“그럼 대표님 확인받았다고 적고 보내겠습니다.”

메일을 보낸 뒤에야 안경을 벗었다.

새 자리에서는 창고로 내려가는 문이 잘 보였다. 은채가 복사기에 다녀와도 내 의자를 밀지 않았다.

나는 발밑의 빈 상자를 접었다.

은채가 종이컵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자리 괜찮아요?”

“네. 전화하면서 자료 찾기 편해요.”

“그럼 이대로 붙일게요.”

은채는 좌석 배치도를 서류장 옆에 붙였다.

창가 책상에도 네모가 하나 있었다.

시환은 그 자리에서 자기 서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통화하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전화가 끝났는지 묻지도 않았다.

나는 메일의 보낸 시간을 확인하고 다이어리에 적었다.

글벗 품목표 수신 후 공정 재확인.

오늘 한 일 옆에 다음 할 일을 붙였다.

▲

“어떡해.”

채 대표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서류가 아니었다. 채 대표가 창가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꽃 폈어요.”

은채가 먼저 달려갔다. 나도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잎 사이에 작은 노란 꽃이 있었다. 채 대표는 손가락을 가까이 댔다가 건드리지 않고 거뒀다.

“아침에는 못 봤는데.”

“상자 옮기느라 바쁘셨잖아요.”

은채가 화분 뒤쪽까지 살폈다.

“대표님 거 먼저 폈네요.”

시환 책상 옆의 작은 화분에는 잎만 있었다. 채 대표 화분에서 받아 키운 곁가지는 곧게 서 있었지만 꽃은 보이지 않았다.

은채가 두 화분을 번갈아 봤다.

“의장님 거는 늦네요.”

시환이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늦어도 핍니다.”

나는 시환을 봤다.

시환은 화분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말을 화분한테 하는 거 맞지?’

채 대표가 작은 화분을 조금 돌려 줬다.

“햇빛 이쪽으로 받으면 돼요. 물은 흙 보고 주시고요.”

“네.”

“많이 준다고 빨리 크는 건 아니에요.”

“알겠습니다.”

시환이 화분 밑에 손을 대자 채 대표가 받침까지 같이 옮기라고 했다. 시환은 시키는 대로 받침을 받쳤다.

은채가 내 팔꿈치를 가볍게 건드렸다.

“의장님도 처음 키우시나 봐요.”

“그런 것 같아요.”

온빛 대표실에는 관리된 화분이 들어왔다. 시환이 직접 흙을 들여다보는 모습은 본 적 없었다.

시환이 손끝에 묻은 흙을 확인하다 나를 봤다.

나는 괜히 채 대표의 꽃을 다시 봤다.

은채는 창가에 놓인 상자를 치웠다.

“이건 여기 두면 햇빛 가리겠네요.”

오전에 그린 배치도에는 없는 수정이었다. 채 대표가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오후에 글벗문구 품목표가 왔다.

나는 은채와 수정이 끝난 견본을 대조했다. 인쇄소에 확인할 제품을 묶어 전달하고, 채 대표에게 받은 회신을 붙여 보고했다.

채 대표가 서류를 읽다 물었다.

“이 묶음이 먼저 나가는 거죠?”

“최종 일정 확인되면요. 글벗에서도 조건표에 답을 줘야 해요.”

“그럼 아직 기다릴 게 남았네요.”

“네. 기다리는 항목은 여기 표시해 뒀어요.”

채 대표는 내가 가리킨 줄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렇게 해 놓으니까 뭘 기다리는지 알겠어요.”

나는 확인받은 서류를 묶으려고 스테이플러를 눌렀다.

빈 소리만 났다.

다시 눌렀다가 손을 멈췄다. 아침에도 심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봤었다. 자리부터 옮기느라 채우는 걸 잊었다.

“제가 심 가져올게요.”

은채가 일어났다.

“괜찮아요. 탕비실 갈 때 제가 가져올게요.”

“그럼 이 서류는 눌러 둘게요.”

은채가 견본을 서류 위에 올려놓았다. 종이 모서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급한 회신부터 보냈다.

퇴근 준비를 할 때쯤 사무실 바닥은 다시 비어 있었다. 접은 상자는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좌석 배치도는 벽에 붙어 있었다.

채 대표는 꽃을 한번 더 보고 내려갔다. 은채도 가방을 들고 나가며 복사기 앞이 넓어졌다고 했다.

나는 낮에 묶지 못한 서류를 당겼다.

문구용품을 가져오려고 일어서다가 서랍이 덜 닫힌 걸 봤다. 안에 놓인 다이어리 모서리가 걸린 줄 알고 열었다.

스테이플러 심 한 통이 들어 있었다.

뜯지 않은 새 통이었다.

나는 손가락으로 통을 끌어당겼다. 서랍 안에 적힌 글도, 따로 붙은 종이도 없었다.

5년 동안 온빛 대표실에서 이걸 확인하는 건 내 일이었다. 시환이 빈 스테이플러를 누르기 전에 서랍에 새 통을 넣어 뒀다.

나는 포장을 열고 심을 채웠다.

서류를 묶는 소리가 나자 창가에서 의자가 움직였다. 시환이 가방을 들고 내 책상 옆으로 지나왔다.

나는 빈 포장과 시환을 번갈아 봤다.

“의장님이 넣으셨어요?”

시환이 멈췄다.

“네.”

“이건 제가 챙겨도 되는데요.”

말을 하고 나니 손에 쥔 스테이플러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시환은 내 손을 잠깐 봤다가 짧게 말했다.

“이번엔 내가 챙깁니다.”

(10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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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 퇴사 사유: 대표님   37화. 재인쇄 발주서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 퇴사 사유: 대표님   36화. 송년 행사 기획안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 퇴사 사유: 대표님   35화. 완판 보고서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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