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나는 답장을 쓰다가 지웠다.
옆에 있겠다는 말에 괜찮다고 답하는 것도 이상했고, 알겠다고 답하면 자리를 내주는 것 같았다.
결국 오늘 알려 줘서 고맙다는 말만 보냈다.
서랍을 닫고 가방을 들었다. 문을 나서기 전, 은채가 펼쳐 놓은 비교표를 한 번 더 봤다.
내일 확인할 항목이 남아 있었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보다 내가 알아야 할 일이 많았다.
▲
5월 25일 월요일, 규민 팀장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책상에는 금요일에 정리한 공정표가 놓여 있었다. 평소라면 벌써 창고에 내려갔다가 올라올 시간이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휴대폰를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 규민 팀장이었다.
다시 걸자 신호가 길게 가지 않았다.
“대리님.”
평소보다 목소리가 낮았다.
“팀장님, 전화하셨어요?”
“네. 제가 오늘 회사에 못 갈 것 같아서요.”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도 작게 섞였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어요. 조산 기미가 있다고 해서.”
나는 의자를 당기려던 손을 멈췄다.
“지금은 어떠세요?”
“일단 지켜보고 있어요. 제가 옆에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회사 일은 말씀 주세요.”
“대표님께는 연락드렸어요. 제 책상 위 공정표부터 봐 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팀장 책상으로 갔다. 서류가 날짜순으로 놓여 있었다.
맨 위에는 인쇄소에 확인할 내용이 적혀 있었다.
“보고 있어요.”
“오늘 종이 입고 시간 확인하고, 글벗 쪽 자료는 아직 보내지 마세요. 제가 조건표를 덜 붙였어요.”
“공장 먼저 확인하고, 글벗 자료는 기다릴게요.”
“네. 미안합니다.”
“팀장님, 회사에 못 오시는 건 제가 적을 항목이 아니에요.”
전화 너머가 잠깐 조용해졌다.
“지금 말씀하신 일만 적었어요.”
규민 팀장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전화를 끊고 공정표를 내 책상으로 가져왔다.
은채가 계단에서 올라오다 빈자리를 봤다.
“팀장님 외근이세요?”
“병원에 계세요. 오늘은 제가 연락받을게요.”
은채는 손에 든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나는 안경을 썼다.
종이 입고. 인쇄소 확인. 글벗 자료 보류.
우선 오늘 일을 나눴다.
▲
채 대표가 사무실에 들어온 건 공장과 통화를 마친 뒤였다.
작업복 단추가 하나 어긋나 있었다. 채 대표는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규민 팀장 자리 앞에 섰다.
“지유 씨, 연락 받았어요?”
“네. 입고 확인은 했어요. 인쇄소에는 지금 전화하려고요.”
“규민 씨가 휴직을 앞당겨야겠대요.”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았다.
“오늘부터요?”
“응. 원래보다 석 달 빨리. 아내 옆에 있어야겠다고.”
채 대표가 빈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어떡해. 지유 씨밖에 없어.”
나는 손목시계를 보는 척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됐다. 시계를 볼 일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 시간을 볼 게 아니지. 내 경력을 봐야지.’
“대표님, 제가 맡을 범위부터 정해 주세요.”
채 대표가 고개를 들었다.
“해 줄 수 있어요?”
“오늘 연락은 받을 수 있어요. 그런데 팀장님 일을 전부 맡으려면 인수인계가 필요해요. 진행 중인 계약하고, 제가 결정해도 되는 것부터요.”
“그렇죠. 그걸 줘야죠.”
채 대표가 자기 자리에서 결재판을 가져왔다.
은채도 의자를 당겨 앉았다.
나는 공정표를 가운데 놓았다.
“디자인 수정은 은채 씨가 정리해 주시고요. 저는 출시 일정하고 거래처 연락을 이어받을게요. 금액이나 계약 조건이 바뀌는 건 대표님께 올리겠습니다.”
채 대표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짚었다.
“좋아요. 지유 씨는 브랜드팀장 대행으로. 규민 씨 돌아올 때까지.”
입사한 지 3주였다.
대리 명함이 아직 빳빳한데 직함에 단어가 더 붙었다.
‘대행. 대신 한다. 뭘. 이걸 전부.’
나는 빈 종이를 당겼다.
“팀장님께 연락해서 자료 위치부터 받을게요. 오늘 꼭 확인해야 하는 것하고 기다려도 되는 것도 나눠서요.”
“대표가 확인할 건 바로 가져와요.”
“네.”
채 대표가 어긋난 단추를 내려다봤다. 그제야 하나를 풀어 다시 잠갔다.
은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도 오늘 수정본은 대리님께 드리면 돼요?”
“네. 대신 제가 모르는 건 다시 물을 수 있어요.”
“그건 팀장님도 물어보셨어요.”
은채가 자기 책상에서 파일을 가져왔다.
“지난 수정 내용도 붙일게요. 제가 설명할게요.”
나는 파일을 받았다.
첫 장 모서리에 손가락이 눌렸다. 놓치지 않으려고 조금 세게 잡고 있었다.
창가 쪽에서 의자가 움직였다.
시환이 일어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결재판을 돌릴 뻔했다가 멈췄다.
시환은 내 서류가 아니라 채 대표를 봤다.
“인사 결정은 채 대표님께서 하신 겁니까.”
“네. 지유 씨가 대행을 맡아 주기로 했어요.”
“알겠습니다.”
시환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팀장 대행.”
새 호칭이 너무 빨리 왔다.
나는 서류를 고쳐 잡았다.
“네, 의장님.”
“오늘 시간이 없으실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퇴근 뒤에는 붙잡지 않겠습니다.”
“그건 원래 안 붙잡으셔야 하는데요.”
“확인차 말씀드렸습니다.”
시환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은채가 파일 뒤로 입을 가렸다.
나는 공정표에 오늘 확인할 표시를 했다.
‘확인. 저 사람까지 인수할 필요는 없다.’
▲
오후가 되자 규민 팀장에게서 파일이 왔다.
제목은 업무 인수인계서였다.
열어 보니 거래처 이름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날짜, 답변을 기다리는 내용, 서류가 저장된 위치가 붙어 있었다.
나는 인쇄한 종이를 책상 위에 펼쳤다.
규민 팀장에게는 통화 가능한 때 알려 달라고만 남겼다. 질문은 옆에 모았다.
은채가 수정본을 들고 왔다.
“여기 표지 색은 확정이고요. 안쪽 날짜 칸은 아직 확인 중이에요.”
“인쇄소에는 어느 파일까지 갔어요?”
“이전 거요. 오늘 수정한 건 아직 안 보냈어요.”
“그럼 파일 이름에 수정 날짜를 붙여 주세요. 보내는 건 제가 일정 확인하고 같이 할게요.”
은채가 고개를 끄덕이다 내 책상에 쌓인 종이를 봤다.
“대리님, 자리 좁죠?”
“조금요.”
은채는 자기 책상에 있던 빈 서류 받침을 가져왔다.
“이거 쓰세요. 저는 화면으로 보는 게 많아서.”
“괜찮아요?”
“네. 대신 제가 찾으러 오면 돌려주세요.”
“분실 안 할게요.”
받침에 미확인 서류를 넣자 책상 한쪽이 비었다.
나는 그 자리에 다이어리를 펼쳤다.
곧 답변을 받아야 하는 항목이 따로 보였다.
전화가 울렸을 때는 안찬영이 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찬영에게 잠깐 기다려 달라고 손짓한 뒤 받았다.
인쇄소였다.
입고 시간이 바뀌면 작업 시작도 달라질 수 있다는 확인이었다. 나는 공장에서 받은 시간을 다시 읽어 줬다.
통화를 마치자 찬영이 서류 가방을 두 손으로 들었다.
“선배님, 바쁘십니까.”
“지금은 괜찮아요. 의장님 서류죠?”
“네. 그리고 이건 제가 확인받고 싶은 건데.”
찬영이 얇은 종이를 꺼내다 내 책상 위 인수인계서를 봤다.
종이를 다시 넣었다.
“제 것은 급하지 않습니다.”
“급한지 제가 먼저 보고요.”
“대표님께 보고할 일정의 확인 순서입니다.”
“그럼 끝나고 볼게요. 의장님께 드릴 것부터 전달하세요.”
찬영은 창가로 갔다가 돌아왔다.
나는 인수인계서에서 빠진 연락처를 표시하고 있었다.
“선배님도 새 업무를 맡으신 겁니까.”
“팀장 대행이요. 팀장님이 육아휴직에 들어가셔서.”
찬영의 자세가 조금 더 반듯해졌다.
“축하드려도 되는 상황입니까.”
“팀장님 댁에 급한 일이 생긴 거라서요.”
“그럼 축하는 보류하겠습니다. 업무에는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온빛 일부터 잘 챙겨요.”
“알겠습니다.”
찬영은 가방을 고쳐 들다가 한마디를 보탰다.
“그리고 지난 금요일 저녁 일정은 결국 아무것도 안 잡으셨습니다. 비워 두기만 하셨습니다.”
“제가 물은 건 아니었는데요.”
“선배님이 궁금해하실 줄 알고 보고드렸습니다.”
‘비우라고 해 놓고 비워 뒀다. 뭐야 그게.’
말은 그렇게 했는데 찬영은 바로 가지 않았다.
“선배님이 비서실에 계실 때도 이런 자료를 만드셨던 게 생각나서요.”
“일이 바뀌었으니까 확인할 것도 달라요.”
나는 종이 한 장을 옆으로 옮겼다.
찬영이 빈 팀장 자리를 봤다.
“사모님도 옛날에 회장님 비서셨다던데, 선배님도 아셨어요?”
손이 멈췄다.
“사모님이요?”
“네. 대표님 어머님 말입니다.”
나는 창가 쪽을 봤다.
시환은 전화기를 귀에 댄 채 서류를 넘기고 있었다.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았다.
“처음 듣는데요.”
찬영도 창가를 봤다. 그러고는 가방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제가 전달할 업무 내용은 아니었습니다.”
“찬영 씨가 직접 들은 얘기예요?”
“네. 구내식당에서 사모님께 서류를 전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잘못 들은 얘기는 아니었다.
나는 펴 놓은 종이 끝을 맞췄다.
시환의 어머니가 회장 비서였다.
대표 비서로 5년을 일하면서도 몰랐다. 가족 식사 시간을 잡고, 어머니께 보낼 물건을 챙긴 적도 있는데.
찬영이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나는 먼저 말했다.
“확인받을 종이는 메일로 보내 주세요. 제가 시간 나면 볼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찬영이 내려간 뒤에도 빈 팀장 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직함이 바뀌면 책상부터 달라지는 건가.
나는 인수인계서를 다시 당겼다.
지금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먼저 확인해야 할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
저녁에 규민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대리님, 이제 잠깐 통화할 수 있어요.”
“사모님은 어떠세요?”
“안정을 취하고 있어요. 저도 계속 여기 있으려고요.”
“네. 인수인계서는 받았어요. 질문만 모아 뒀고요.”
나는 안경을 고쳐 썼다.
규민 팀장은 보내 준 자료 순서대로 설명했다. 답변을 기다리는 곳은 어디인지, 구두로 확인했지만 아직 메일을 받지 못한 건 무엇인지.
나는 말이 끝날 때마다 적은 내용을 읽어 줬다.
“이건 확정이 아니라 요청 상태죠?”
“맞아요. 꼭 답변 받고 진행해 주세요.”
“그럼 별도로 표시할게요.”
통화 중에 채 대표가 내 책상 옆으로 왔다. 나는 손짓으로 옆에 놓인 서류를 가리켰다.
채 대표는 금액이 달라진 항목을 읽고 짧게 메모했다.
나는 그 내용까지 인수인계서에 붙였다.
창밖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내 다이어리도 새 페이지로 넘어갔다.
“대리님, 마지막 장까지 왔어요?”
규민 팀장이 물었다.
나는 뒤쪽 종이를 넘겼다.
업무 항목이 끝난 다음, 신제품 이름 후보표가 끼어 있었다.
후보는 다섯 개였다.
그중 한 줄에서 눈이 멈췄다.
『도담』
“이름 후보표도 같이 왔어요.”
“아, 그거.”
규민 팀장이 작게 웃었다. 오늘 처음 듣는 웃음이었다.
“아기 이름 후보인데 몰래 넣었어요. 되면 좋고.”
나는 후보표 위쪽을 확인했다.
신제품 이름은 아직 결정 전이었다.
“회사 후보표에 넣으신 거예요?”
“네. 뜻도 적어 놨어요. 우리 제품에도 어울리는 것 같아서요. 회의에서 별로라고 하면 빼면 되고.”
“아기 이름은 정하셨어요?”
“아직요. 아내하고 더 얘기하려고 했는데, 오늘은 이름 얘기를 못 했네요.”
전화 너머에서 작은 움직임이 들렸다.
규민 팀장이 잠깐 수화기를 가린 듯 목소리가 멀어졌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기다렸다.
다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대리님, 늦었죠. 나머지는 내일 해도 될까요?”
“네. 오늘 진행할 건 다 받았어요. 후보표도 그대로 보관할게요.”
“고맙습니다.”
“팀장님.”
“네.”
“자료 위치를 잘 적어 주셔서 찾기 쉬웠어요.”
규민 팀장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럼 다행이네요.”
전화를 끊고 후보표를 다시 봤다.
이름 옆에 짧은 뜻이 적혀 있었다. 아직 누구의 이름도, 어떤 제품의 이름도 아니었다.
나는 서랍에서 빨간 인덱스 탭을 꺼냈다.
도담이 적힌 줄에 하나를 붙였다. 이름 회의 때 빠뜨리지 않고 펼칠 수 있게.
은채가 가방을 메고 다가왔다.
“아직 많이 남았어요?”
“오늘 할 건 끝났어요. 정리만 하면 돼요.”
은채가 후보표를 보고 웃었다.
“팀장님 저거 넣으셨구나.”
“알고 있었어요?”
“이름 생각하다가 자꾸 혼자 웃으셔서 물어봤어요.”
은채는 빨간 표시가 붙은 줄을 한 번 보고 가방 끈을 당겼다.
“내일 수정 파일 먼저 드릴게요. 오늘 더 보지 마세요.”
“네. 먼저 가세요.”
사무실 문이 닫혔다.
나는 받은 자료를 한 묶음으로 모았다. 확정된 일, 답변을 기다리는 일, 대표에게 올릴 일을 나눠 넣었다.
팀장 책상에 두어야 모두가 찾을 수 있었다.
▲
규민 팀장의 의자를 당겼다.
책상 한쪽에는 가족사진이 놓여 있었다. 나는 사진을 그대로 두고 그 옆에 인수인계서를 놓았다.
내 자리에서 가져온 다이어리도 펼쳤다.
막 앉으려는데 시환이 창가에서 일어났다.
아직 남아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늦을 때까지일 줄은 몰랐다.
“안 가셨어요?”
“마무리 중이었습니다.”
시환은 내 책상 앞에서 멈췄다. 빈 결재판에 서류 한 장을 올렸다.
나는 무심코 받아 들었다.
익숙한 동작이었다. 내용을 읽고, 결재할 곳을 확인해서, 다시 시환 쪽으로 돌리려 했다.
손이 중간에서 멈췄다.
『의장 보고용 주간 일정 — 요청자 우시환』
요청자는 시환인데 결재란은 다른 사람 몫이었다.
나는 아래쪽을 한 번 더 읽었다.
브랜드팀장 대행.
“이건 뭔가요?”
“주간 일정 공유 요청입니다.”
“인수인계서에 있는 전체 일정이요?”
“공유 가능한 내용만 주시면 됩니다.”
나는 서류를 내려놓았다.
“아직 확인 중인 것도 있어요.”
“빼셔도 됩니다.”
“거래처 조건은 대표님 확인이 필요하고요.”
“그럼 확인 후에 주십시오.”
재촉하는 말은 없었다.
나는 일정표에 붙일 자료를 골라 놓다가 시환을 봤다.
5년 동안 내가 가져간 결재판은 늘 저 사람 책상으로 갔다.
오늘은 시환이 내 앞에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 이 방향이 맞나. 결재판이 반대로 왔는데.’
나는 서류 아래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제 제가 결재하는 거예요?”
시환이 짧게 답했다.
“결재자는 팀장 대행입니다.”
(9화 끝)
나는 알림을 누르고 첨부된 파일이 있는지 확인했다.없었다.‘아니. 품의서라며. 올렸다며.’화면을 조금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결재자 이름도, 기한도 그대로였다. 정작 결재할 서류만 없었다.나는 답장을 쓰려다 손을 멈췄다.확인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어디인지 물으면 대답할 사람이었다.그런데 지금 물으면 잠은 더 못 잘 게 뻔했다.휴대폰를 내려놓고 이불을 당겼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혼자 이러는 거 좀 억울한데.’나는 옆에 놓인 다이어리를 펼쳤다. 어제 일정의 마지막 줄은 집 앞이었다. 다음 장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손끝으로 빈칸을 눌렀다.토요일 일정은 내가 정하면 됐다.«▲»11월 21일 토요일 아침, 나는 혼자 종이달로 걸어갔다.검정 재킷 위에 외투를 걸쳤다. 가방에는 평소 쓰던 다이어리를 넣었다. 일할 때 쓰는 안경은 두고 왔다.서류 한 장 읽으러 가는 데 안경까지 챙기면 너무 준비한 사람으로 보였다.‘재킷은 입었잖아. 이미 준비했네.’솔숲길은 평일보다 조용했다. 종이달 앞에 도착하자 2층 창가에 불이 켜져 있었다.나는 손목시계를 봤다.8시 40분이었다.계단을 올라가면서 가방 끈을 짧게 잡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 창가 책상에 앉아 있던 시환이 일어났다.셔츠 소매가 걷혀 있었다. 평소처럼.그런데 책상 위에는 노트북도, 온빛 서류도 없었다.“일찍 왔네요.”“서류 확인하러 왔어요.”“네.”시환은 내 자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내 책상 위에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평일에는 출시 일정과 거래처 주문서가 꽂혀 있던 자리에 오늘은 종이 한 장만 놓여 있었다.나는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았다.외투를 벗어 등받이에 걸고, 결재판 앞에 섰다. 손바닥을 재킷에 한 번 문지른 다음 종이를 들었다.『품의서』『건명: 혼인.』나는 첫 줄 아래에서 멈췄다.‘아니.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 바로.’시환은 창가 책상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읽었는지 묻지도, 다음 줄을 설명하지도 않았다.나는 종이를 조금 더
나는 출고표를 놓고 시환을 봤다.“3년 만에 내는 연차를 제 생일에 쓰시는 거예요?”“네.”“그날 급한 일이 생기면요?”“담당자가 있습니다.”“전화는요?”“급한 건 받습니다. 나머지는 다음 날입니다.”나는 시환의 책상 위에 놓인 휴대폰를 봤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저한테도 적용돼요?”“무슨 뜻입니까?”“종이달에서 연락 오면 제가 받아도 되는지요.”“내가 정할 일이 아닙니다.”시환이 내 출고표를 가리켰다.“팀장이 정하면 됩니다.”‘확인. 연차를 내도 팀장이네.’나는 출고표를 파일에 넣었다.“급한 건 받을게요. 나머지는 다음 날로요.”“좋습니다.”시환은 창가 책상으로 돌아가 다이어리를 폈다. 내가 가까이 가자 펼친 쪽을 손으로 가렸다.“업무 서류예요?”“아닙니다.”“그럼 안 볼게요.”나는 가방을 들었다. 시환의 손이 종이 위에서 조금 움직였다. 손바닥 아래로 작은 글씨가 빽빽했다.일정표 같은데.나는 묻지 않고 먼저 계단으로 향했다.«▲»11월 20일 금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눈을 떴다.침대에서 손부터 뻗었다. 휴대폰를 들고 시간을 확인한 다음, 평소처럼 출고 담당자에게 보낼 말을 생각했다.‘아니. 연차. 오늘 연차.’나는 화면을 내려놓았다.잠을 더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현관 벨이 울렸다.배송이었다.문 앞 상자에는 내 이름과 남란희의 이름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상자를 식탁에 놓고 포장을 열었다. 진하게 볶은 옥수수가 든 봉지와 작은 거름망, 뚜껑이 있는 잔이 들어 있었다.봉지 옆에 접힌 종이가 있었다.『지유 씨, 생일 축하해요. 오늘은 끓이지 말고 얻어 마셔요.』나는 잔을 꺼내 손잡이를 잡아 봤다. 손가락이 편하게 들어갔다.구내식당에서 차를 끓이던 날, 뜨거운 잔을 내려놓느라 손잡이를 자꾸 바꿔 잡았었다. 그때 내 손을 보고 있던 작은 눈이 떠올랐다.휴대폰가 울렸다.엄마였다.영상통화를 받자 화면 아래에서 엄마의 턱이 먼저 나왔다.“엄마. 조금만 위로.”“이만큼?”“너무 위로.
나는 방문 일정표와 시환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버릇 설명을 회장님께 맡기신다고요?”“네.”“의장님이 말하면 제가 왜 안 믿는데요?”시환이 종이 모서리에서 손을 완전히 뗐다.“믿고 나면 내가 일을 못 할 것 같아서요.”‘아니. 설명이 하나 더 필요해졌는데.’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걸었다.“그럼 다음 주까지는 일하실 수 있겠네요.”“그럴 예정입니다.”시환은 내 책상에 남은 파일을 가리켰다.“이건 꽂아 둡니까?”“제가 할게요. 순서가 있어요.”“알겠습니다.”손을 내밀던 시환이 바로 물러났다. 나는 파일을 서류장에 넣고 문을 닫았다.일정표는 책상 위에 그대로 뒀다.다음 주 수요일.회사 방문 일정 아래에 질문 하나가 더 생겼다. 따로 적지는 않았다.«▲»11월 11일 수요일, 은채가 내 재킷 깃을 보고 손을 들었다.“팀장님. 잠깐만요.”“뭐 묻었어요?”“실이요.”은채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가 깃 끝에 붙은 짧은 실을 떼었다. 검정 재킷 위에 흰 실 하나가 있었다.“됐어요.”“고마워요.”“오늘은 옷을 너무 자주 확인하세요.”나는 손목시계에서 손을 내렸다.‘아니. 시간 확인이었다. 절반은.’“출고 시간 보고 있었어요.”“출고표는 저쪽인데요.”은채가 규민의 책상을 가리켰다. 규민은 배송지 확인을 마친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창고 먼저 내려가 있을게요. 회장님 오셔도 작업은 그대로 하겠습니다.”“네. 통로만 확인해 주세요.”“상자 치우려고요?”“아뇨. 지나갈 자리요. 나갈 물건을 숨길 필요는 없죠.”규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내려갔다.채 대표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잉크를 닦았다. 닦다가 멈추더니 손바닥을 나한테 보였다.“이건 안 지워지네.”“그대로 계셔도 돼요.”“의장님도 그랬어요. 그런데 내가 악수하다가 묻힐까 봐.”채 대표는 손수건으로 손가락 끝을 한 번 더 눌렀다.창가에서 시환이 일어났다. 셔츠 소매는 오늘도 걷혀 있었다. 책상에는 읽던 서류가 뒤집혀 놓였고, 옆에는 빈 찻잔
나는 바뀐 이름을 한 번 더 눌러 봤다. 사진도, 연락처도 그대로였다.토마토 담당만 새로 붙었다.‘아니. 담당 작물은 다 땄는데. 다음 업무는 언제 생기나.’화면을 끄려는데 냉장고에 넣어 둔 잼이 생각났다. 나는 작은 병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어제 조금 기울게 붙은 이름표는 내가 고쳐 놓은 자리에서 잘 붙어 있었다.한 숟가락을 덜어 맛을 봤다.달았다.시환이 붙인 이름표까지 보고 있는 건 맛을 확인하는 데 필요한 절차는 아니었다.‘확인. 업무 아니다.’나는 병을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11월 4일 수요일, 내 책상에는 잼 병 대신 재인쇄 발주서가 놓여 있었다.『도담 다이어리 2차 인쇄. 발주 수량: 1만 부.』규민이 서류 옆에 인쇄소 견적을 내려놓았다.“표지는 초도하고 같은 사양입니다. 모 사장님이 종이 확보해 두셨대요.”“인쇄 들어가기 전에 최종 견본만 다시 볼게요. 은채한테 넘겨 주세요.”“도담 이름이 붙으니까 제가 더 자주 보게 되네요.”규민은 서류의 제품명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나는 검토란에 표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집에서도 보시잖아요.”“집에 있는 도담은 새벽에도 봅니다.”자리에서 들리던 은채의 웃음이 짧게 끊겼다.“그럼 회사에 있는 도담이 더 얌전하네요.”“여기 있는 도담은 울지는 않으니까요.”나는 발주 수량을 다시 확인했다.초도 1만 2천 부를 보낼 때는 창고를 내려갈 때마다 남은 상자부터 셌다. 이번에는 들어올 상자를 어디에 둘지 먼저 정해야 했다.“창고에 입고 자리도 잡아 주세요. 직거래 출고분하고 글벗 납품분은 섞이지 않게요.”“네. 재주문서 기준으로 나누겠습니다.”규민이 서류를 챙겨 내려갔다. 나는 발주서에 붙일 근거 자료를 순서대로 놓았다. 재주문 집계, 입금 확인, 판매 정산.결재판에 끼우기 전에는 빠진 서류가 없는지 한 번 더 넘겼다.창가에서 시환이 물었다.“인쇄 들어갑니까?”“채 대표님 결재받고요.”“잘됐습니다.”“아직 견본 검수가 남았어요.”“그것도 잘하실 겁니다.”
“제 생일에 뭘 하시려고요?”시환은 내가 들고 있던 가방을 받아 들지 않고, 계단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려가자는 뜻이었다.“일정 짜고 있습니다.”“누가요?”“내가요.”나는 가방 끈을 어깨에 올렸다.“혹시 제가 검토해야 해요?”“그날은 일 안 합니다.”“일정 검토도요?”“안 합니다.”‘아니. 검토 없는 일정이라니. 저 사람 입에서.’시환이 계단 불을 켰다. 나는 먼저 내려가다가 뒤를 돌아봤다.“그럼 그날은 비서 안 해요.”“팀장입니다. 지금도.”발을 헛디딜 뻔했다. 난간을 잡고 아무 일도 없는 척 내려갔다.뒤에서 시환이 말했다.“천천히 가십시오.”“알아요.”‘안다. 계단인 것도. 지금 팀장인 것도.’그런데 저 사람은 내가 자꾸 잊는 쪽만 정확히 짚었다.«▲»10월 23일 금요일, 내 책상에는 생일 일정표 대신 송년 행사 기획안이 놓여 있었다.다음 인쇄를 기다리는 동안 직거래처의 재주문 의사를 확인하고, 온빛몰 문의를 정리하고, 행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연말은 아직 멀었는데 할 일은 먼저 와 있었다.나는 행사 날짜 후보를 적은 서류를 규민에게 건넸다.“창고 출고하고 겹치는 날부터 빼 주세요. 거래처 납품일도요.”“행사는 근무시간 안에 끝내는 쪽으로요?”“네. 참석 못 하는 사람한테 따로 업무를 얹지는 말고요.”규민이 서류 위에 손을 올렸다.“그럼 저는 참석하겠습니다.”“아직 날짜도 안 정했는데요.”“일단 의사 표시부터 하는 겁니다.”은채가 자기 자리에서 고개를 들었다.“저도요. 그리고 장기 자랑은 빼 주세요.”“아직 넣지도 않았어요.”“넣기 전에 말씀드리는 거예요.”나는 기획안의 빈칸을 내려다봤다.『진행 내용』그 아래에는 아직 아무것도 없었다. 종이가 벌써 직원들의 반대를 받았다.‘확인. 빈칸도 조심하자.’창가에서는 채 대표가 토마토를 따고 있었다. 작은 그릇에 마지막 남은 열매를 옮긴 뒤, 옆 화분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의장님, 이것도 따도 돼요?”시환의 곁가지 화분에는 토마
나는 휴대폰를 내려놓고 집계판의 빈칸에 온빛몰 출고 수량을 적었다.『2,200부』규민이 그 아래에 선을 그었다. 은채는 상품 사진이 제대로 올라갔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고, 채 대표는 창고 열쇠를 챙겼다.“월요일에 다 나갈까.”채 대표가 숫자를 보며 말했다.“나가는 만큼 확인하고 보내면 돼요. 아직 주문 안 들어온 수량을 먼저 지우지는 말고요.”나는 집계판 옆에 확인할 항목을 붙였다. 결제 완료, 주문 취소, 출고 대기.‘확인. 할 일은 있다. 걱정은 집에 가서.’가방을 들자 시환이 사무실 불을 하나씩 껐다. 집계판 위의 불은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껐다.«▲»10월 12일 월요일, 나는 평소보다 먼저 출근해서 창고 수량부터 확인했다.직거래 주문 상자에는 가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온빛몰로 나갈 물량이 따로 쌓여 있었다.포장 담당 직원이 명단을 가져왔다.“직접 찾으러 오시는 분들도 오늘부터죠?”“네. 약속 시간 적어 뒀어요. 주문서 확인하고 드리면 돼요.”나는 상자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가 뗐다. 손에 묻은 먼지를 털고 2층으로 올라갔다.은채는 자기 자리에 앉자마자 판매 화면을 열었다.“팀장님, 저 이거 계속 보고 있어도 돼요?”“상품 문의도 같이 봐 주세요.”“네. 그건 제가 만든 거니까 제가 답할게요.”나는 주문 관리 화면을 켰다. 채 대표는 옆에 의자를 가져와 앉았다.시환이 창가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을 때, 첫 주문 알림이 떴다.8시 40분이었다.채 대표가 내 팔을 잡았다.“들어왔어.”“네. 결제 확인됐어요.”“진짜로?”“지금 여기 보시면 돼요.”나는 화면을 조금 돌렸다. 채 대표는 안경을 썼다가 벗었다가 다시 썼다.은채가 자리에서 고개를 내밀었다.“대표님, 안경 문제 아니에요.”“알아. 나도 알아.”채 대표는 내 팔을 놓았다. 이번에는 자기 무릎 위에 손을 가지런히 올렸다.알림이 다시 떴다.나는 주문서를 내려받고 주소 누락이 있는지 확인했다. 그사이 은채가 문의에 답했고, 규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