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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책임의 선언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19 06:58:50

위협은 예고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건우 앞으로 소송 예고 통지서가 도착했다.

허위 사실 유포 및 기업 이미지 훼손에 대한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는 내용이었다.

아직 언론에 공개된 것도 없었는데, 움직임을 감지한 쪽이 먼저 선을 긋고 나온 셈이었다.

건우는 통지서를 내려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건 겁을 주기 위한 문서가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게 묶는 족쇄였다.

하나는 그 서류를 읽는 동안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마지막 장을 넘기는 순간, 종이를 잡은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선제 봉쇄네.”

그녀가 낮게 말했다.

“언론 접촉까지 파악했다는 거야.”

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시하고 있었다는 거지.”

하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제 개인을 치는 단계야.”

그녀는 차분하게 분석했지만, 그 안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사건의 진실을 막을 수 없다면, 사람을 겁줘 멈추게 만드는 방식.

그것은 법을 가장한 폭력이었다.

“그만하자.”

건우가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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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수의 밤   177. 커피 냄새와 이상한 잔흔

    그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잠깐이라도 자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너무 많은 생각을 잠시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눈을 감는다고 머릿속까지 멈추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것들이 더 많았다. 서하가 “예전에도 그랬잖아”라고 말할 때의 목소리, 하나가 아침에 메모를 쥔 채 자기가 이상하다고 말했던 얼굴, 그리고 둘 다 같은 입술과 같은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기를 바라보던 순간들까지.건우는 그 생각 속에서 아주 늦게 잠이 들었다.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해가 꽤 올라와 있었다.처음에는 자기가 어디서 잠들었는지조차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소파 등받이에 목이 어색하게 꺾여 있었고, 몸 여기저기가 뻐근했다. 그는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거실은 완전히 아침 얼굴을 하고 있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빛은 밤의 그림자를 거의 밀어냈고, 어젯밤 켜둔 스탠드 조명은 여전히 불이 들어온 채였다.그리고 식탁 쪽에 하나가 서 있었다.하나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컵에 따르고 있었다. 머리는 느슨하게 묶여 있었고,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빛은 어젯밤보다 훨씬 흐렸다. 밤이 다 빠져나간 얼굴. 건우는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안도보다 더 큰 피로를 느꼈다.하나는 컵을 들고 뒤돌았다가, 소파에서 막 일어나는 건우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여기서 잤어?”그 말투는 완전히 하나였다.건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잠깐 졸았나 봐.”하나는 컵을 내려놓고 그를 잠시 바라봤다. 그 시선에는 걱정도 있었고, 어딘가를 더듬는 듯한 낯선 공백도 있었다.“왜 그렇게 자.”“너는.”건우는 무심한 척 되물었다.“괜찮아?”하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녀는 시선을 아주 잠깐 식탁 쪽으로 돌렸다가 다시 건우를 봤다.“잘 모르겠어.”목소리가 낮았다.건우는 가슴 안이 묘하게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어젯밤 서하가 들어간 뒤, 오늘 아침의 하나가 어떤 얼굴로 나올지 그는 이미 여러

  • 형수의 밤   176. 기억하지 못하는 대화

    밤이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서하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그 움직임은 조용했고, 거의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건우는 그 미세한 기척 하나를 놓치지 않았다. 둘 사이에 오간 말은 길지 않았고, 끝내 분명한 답으로 닫힌 것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몇 마디가 남긴 흔적은 길게 이어진 밤보다 더 진했다. 스탠드 조명 아래서 나눴던 시선, 손등 위로 아주 잠깐 겹쳐졌던 체온, 그리고 끝내 문장으로 다 열리지 않은 어떤 오래된 익숙함까지. 건우는 그 모든 것이 아직도 거실 안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꼈다.서하는 소파에서 일어나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옷 자락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고,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건우는 그녀가 문 앞에 멈춰 서는 순간, 그 짧은 정지 안에 담긴 망설임까지 알아차렸다. 돌아볼지, 그대로 들어갈지, 혹은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더 남길지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건우는 소파 끝에 앉은 채 낮게 물었다.“그냥 들어가게.”서하는 문고리를 잡은 손을 멈춘 채, 반쯤 돌아보았다. 어둠이 더 짙은 복도 쪽에 서 있는 탓에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건우는 그쪽을 향한 시선만으로도 그녀가 웃는지 아닌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서하는 늘 그랬다. 표정을 완전히 읽을 수 없게 만들면서도, 이상하게 상대가 자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또렷하게 남기는 사람.“안 자?”그녀가 물었다.건우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이 상황에 어떻게 자.”서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아주 낮게 말했다.“예전에도 그랬잖아.”그 짧은 한마디가 건우의 가슴 안쪽을 가볍게 긁고 지나갔다.예전에도. 그 말은 둘 사이에 이미 지나간 수많은 밤을 너무 아무렇지 않게 불러냈다. 혼자 감당하겠다고 버티는 건우와, 그걸 비웃는 척하면서도 끝내 옆에 남아 있던 서하. 사건 자료를 같이 보다가 해가 뜬 적도 있었고, 아무 대화도 없이 같은 공간에서 새벽을 버틴 적도 있었다. 싸우듯 말을 주고받다가도 어느 순간 둘 다 피

  • 형수의 밤   175. 나한테만 너무 많이 숨기지 마

    그 말은 위로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건우는 그 안에 섞인 결을 바로 알아챘다. 이건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아침에 하나가 어떤 상태였는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말투였다. 건우는 그 사실에 괜히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너 기억해?”그가 물었다.서하는 잠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조용히 말했다.“조각조각.”“그 메모도?”서하는 대답 대신 아주 짧게 숨을 내쉬었다.건우는 그 작은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메모를 쓴 게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문장이 왜 남겨졌는지, 적어도 그 방향 정도는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왜 그런 걸 남겨.”건우가 낮게 묻자, 서하는 이번에도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한참 동안 건우를 바라봤다.그 시선이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다.처음 보는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단지 익숙한 수준도 아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같은 패턴을 여러 번 봐온 사람처럼, 건우의 표정과 목소리, 지금 이 순간의 호흡까지 전부 이미 알고 있다는 듯한 시선.건우는 그 눈을 마주보다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서하는 자기를 '처음 상대하는 사람'처럼 보지 않는다.그건 단순히 최근 몇 번 밤을 함께 보낸 정도의 익숙함이 아니었다. 더 오래된 종류의 익숙함, 혹은 누군가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거리감이 그 안에 있었다.건우는 낮게 물었다.“너… 왜 가끔 나를 되게 오래 본 사람처럼 말하냐.”서하는 아주 미세하게 눈을 깜빡였다.그 짧은 반응 안에, 처음으로 아주 옅은 망설임이 섞였다.건우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아까도 그랬잖아. 오늘 하루 힘들었겠다, 같은 말.”그는 잠깐 숨을 골랐다가 덧붙였다.“마치 네가 다 보고 있었던 사람처럼.”서하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스탠드 조명의 흐린 빛이 그녀의 얼굴 옆선을 따라 흘렀고, 그 아래 드러난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완전히 무감한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건우는 그 차분함 아래에서 아주 오래된 피로를 느꼈다

  • 형수의 밤   174. 오래 본 사람처럼

    그날 하루는 이상할 만큼 길었다.하나는 평소보다 더 적게 말했고, 건우는 그런 하나를 대하는 내내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의식할 수 없었다. 아침 식탁 위에서 메모를 펼쳐 보이던 그녀의 손끝, 자기 글씨를 보고도 아무 기억이 없다고 말하던 순간의 얼굴, 그리고 “나 이상해”라고 거의 속삭이듯 뱉어냈던 목소리까지. 그 짧은 장면들이 하루 종일 건우의 머릿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그는 여러 번 말을 걸었다.괜찮냐고 묻기도 했고, 병원에 가보자고 에둘러 말하기도 했고,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고 일부러 가볍게 넘겨보려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나는 종일 어딘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굴었다. 대답은 했지만 짧았고, 웃는 척은 했지만 시선은 자꾸만 다른 곳으로 흘렀다. 특히 혼자 있을 때면 무의식적으로 손목 안쪽을 만지작거리거나, 자기 손글씨를 휴대폰 메모장과 종이 위에 번갈아 적어보며 뭔가를 확인하려는 모습까지 보였다.건우는 그걸 보면서도 끝내 정확한 말을 해줄 수 없었다.정확히는 해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그 선택이 옳은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하나에게 '네 안에 또 다른 인격이 있는 것 같다.'는 식의 말을 꺼내는 건, 상처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 맨살 위에 바로 칼을 대는 일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그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서하를 하나에게 어디까지 설명해야 하는지, 혹은 설명할 자격이 있는지조차.저녁이 지나고 밤이 깊어질수록 집 안 공기는 다시 천천히 무거워졌다.하나는 평소보다 일찍 방에 들어갔다. 피곤하다는 말만 짧게 남기고 방문을 닫았고, 건우는 그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거실로 돌아왔다. 어젯밤과 똑같이 스탠드 조명 하나만 켜두었지만, 오늘의 어둠은 어제와는 조금 달랐다. 어제는 답답함과 예감이 뒤섞인 밤이었다면, 오늘은 이미 무언가를 목격한 뒤의 밤이었다.건우는 소파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손바닥을 내려다봤다.어젯밤

  • 형수의 밤   173.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나아

    그녀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기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는 걸 깨달았다.그 사실이 더 싫었다.하나는 숨을 한번 고르고, 거의 씹어 삼키듯 말했다.“나한테 지금 무슨 일 있는 거야?”건우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그 짧은 침묵이 너무 길게 느껴졌다.하나는 그 얼굴을 보며 아주 선명하게 알았다.건우는 뭔가를 알고 있다.정확히 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금 하나를 미치도록 불안하게 만들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너, 뭔가 알고 있지.”건우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그 순간 하나는 자기 안쪽에서 이상한 감정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두려움과, 분노와, 설명할 수 없는 배신감 같은 것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 감정이 너무 갑작스럽고 너무 날것이라서,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더 거리를 벌리고 싶어졌다.그런데 그 순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머릿속 어딘가에서, 아주 낯선 감정 하나가 스치듯 올라왔다.'그를 너무 가까이 두지 마.'그건 분명 자기 생각처럼 느껴지지 않았다.문장이라기보다 감각에 가까웠다. 아주 차갑고 단호한 경고 같은 것. 하나는 그 순간 얼굴이 창백해지는 걸 느꼈다. 자기 안에서 자기 것이 아닌 어떤 감정이 지나갔다는 사실이, 메모보다 더 선명하게 사람을 무너뜨릴 때가 있다.하나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나 이상해.”그 말은 건우에게 한 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고백처럼 들렸다.건우는 바로 그녀 쪽으로 다가오려 했다.그런데 하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오지 마.”짧은 한마디.그 말이 떨어진 뒤, 둘 사이 공기가 순식간에 멈췄다.하나 자신도 놀랐다. 건우를 향해 저렇게 날카롭게 거리를 둔 적이 있었던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방금 그 말은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마치 원래 자기 안 어딘가에 있었던 말처럼. 그 사실이 소름 끼쳤다.건우는 걸음을 멈췄

  • 형수의 밤   172. 내가 쓴 기억이 없는 문장

    그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자 목 안쪽이 서늘해졌다.그녀는 컵을 치우려다가 문득 자기 손목을 봤다. 아주 희미한 자국 하나가 안쪽 피부에 남아 있었다. 누가 세게 잡은 것처럼 선명한 건 아니었다. 그냥 손가락이 잠깐 닿았다 떨어졌을 때 생길 수 있는 정도의 옅은 붉은 자국. 남이 보면 별것 아니라고 넘길 정도의 흔적이었지만, 하나는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자기 기억 안에는 이 자국이 생길 만한 장면이 없었다.하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자리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문지른다고 해서 흔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대로 두기가 불편했다. 그녀는 그 불편함을 설명할 수 없었다. 단지 너무 사소해서 더 무서운 종류의 위화감이었다.그때, 식탁 아래쪽 바닥에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보였다.처음에는 영수증인 줄 알았다. 그런데 허리를 숙여 집어 들어 보니, 손바닥 안에 접혀 들어갈 만큼 작게 반으로 접힌 메모였다. 종이는 집 안에 늘 두는 평범한 메모지였고, 아무 장식도 없는 하얀 종이였다.하나는 잠깐 멈칫하다가 천천히 그 종이를 펼쳤다.짧은 문장이 하나 적혀 있었다.'그 애를 믿지 마.'하나는 그대로 굳었다.처음에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하기를 거부한 쪽에 가까웠다. 그 문장은 너무 단순했고, 그래서 오히려 더 끔찍했다. 그 애가 누구를 가리키는 건지, 왜 믿지 말아야 하는지, 누가 이런 문장을 써서 식탁 아래 떨어뜨렸는지. 질문은 많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모든 질문보다 먼저 그녀를 붙잡은 건 글씨체였다.자기 글씨였다.틀릴 리가 없었다.자음의 각도, 받침을 눌러 쓰는 버릇, 모음 끝이 미세하게 올라가는 습관까지 전부 자기 것이었다. 몇 년째 손으로 써온 문장을 자기 눈이 못 알아볼 리 없었다.그런데 하나는 이걸 쓴 기억이 없었다.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그녀는 종이를 쥔 손에 자기도 모르게 힘을 줬다가, 금세 다시 풀었다. 너무 세게 구기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이유는 알 수 없었

  • 형수의 밤   6. 6분의 공백

    카페는 회사 건물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점심시간이 지난 뒤라 한산했다.유리창 밖으로는 출입증을 목에 건 직원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유림은 이미 와 있었다.짙은 네이비 재킷, 단정한 머리.의자에 앉아 있는 자세가 흐트러짐 없이 곧았다.하나와 건우가 들어서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와주셔서 감사합니다.”목소리는 낮고 안정적이었다.하나는 마주 인사했다.“바쁜데 시간 내줘서 고마워요.”건우는 따로 말을 하지 않았다.유림과 눈이 마주쳤다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세 사람은 마

  • 형수의 밤   5. 공백의 길이

    건우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눈을 떴다.방은 익숙했다.벽지의 색, 침대 옆 협탁의 위치, 책상 위에 뒤집힌 법전까지.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그런데도 공기는 낯설었다.부엌에서 물이 끓는 소리, 컵이 부딪히는 소리,혼자일 때는 존재하지 않던 생활의 잔향이 집 안에 남아 있었다.그는 천천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하나가 부엌에 있었다.단정하게 묶인 머리, 다림질된 셔츠,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어제 새벽의 젖은 얼굴은 어디에도 없었다.“일어났네.”건우는 대답을 늦췄다가 짧게 말했다.“네.”하나는 커피를 내

  • 형수의 밤   4. 문장 사이의 공백

    회의실 창밖으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잔잔했지만, 오래 갈 비였다.유림은 앉지 않았다. 테이블 끝에 서서, 파일을 내려다보는 건우를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어제 저녁,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그녀의 말투는 단정했다.감정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건우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통화 기록의 숫자들이 시야에 남아 있었다.저녁 7시 12분.“오늘로 끝내자고 하셨다고요.”그가 되물었다.“네.”“무엇을.”유림은 잠시 침묵했다.답을 고르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상대를 재는 사람의 침묵이었다.“업무 관계를요.”

  • 형수의 밤   3. 마지막 통화

    아침은 비가 그친 뒤에야 찾아왔다.창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사라지자,집 안은 이상할 만큼 고요해졌다.어젯밤의 대화가 정말 있었던 일인지,건우는 한동안 확신하지 못했다.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났다.그는 잠시 멈춰 서서 그 소리를 들었다.익숙한 소리였다.누군가 이 집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었다.하나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머리는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어제 젖었던 코트는 의자에 걸려 있었다.“일어났어?”목소리가 차분했다.건우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젯밤의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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