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1일, 황후궁의 비품을 정리한다.』
시종장이 헝겊을 내밀었다. 엘리네가 엄지로 닦은 손잡이와 달리 홈에는 검은 때가 남아 있었다.
“문이 뻑뻑할 겁니다. 사람이 드나든 지 오래됐습니다.”
“다른 열쇠는 정말 없나요?”
“보관함을 다 뒤져도 이것뿐입니다.”
엘리네는 헝겊으로 홈을 훔쳤다. 손잡이 가운데 둥근 구멍이 있었다.
“안에 있는 물건은 그대로 두세요. 내일 올라가 보고 정하겠어요.”
시종장이 고개를 숙였다.
◊
이튿날 아침, 마리엔은 바구니를 안고 계단 아래에서 기다렸다. 걸레와 솔, 작은 비누가 담겨 있었다.
계단을 오르자 치맛단에 먼지가 묻었다. 아래층에서는 시녀들이 접시를 나르는 소리가 났다. 위로 올라갈수록 소리는 작아졌고, 꼭대기에 닿자 마리엔의 숨소리만 들렸다.
문 옆 벽에는 못 자국이 남아 있었다. 엘리네는 열쇠를 넣고 천천히 돌렸다. 안쪽에서 쇠가 긁혔다.
“제가 밀까요?”
“같이 밀자. 바구니는 내려놓고.”
둘이 어깨로 문을 밀었다. 문 아래에 쌓여 있던 먼지가 바닥에 길게 밀렸다.
마리엔이 코를 가리며 재채기했다. 엘리네도 고개를 돌린 채 잠시 기다렸다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 아래 둥근 창이 있었다. 창살 사이로 들어온 햇빛에 먼지가 보였다. 가운데에는 천을 덮은 탁자가 놓였고, 벽에는 빈 선반이 붙어 있었다. 구석의 망원경은 창이 아닌 벽을 향해 기울어 있었다.
엘리네는 탁자 주위를 걸었다. 바닥에 흩어진 종잇조각은 글씨가 지워져 있었다. 벽 쪽 의자에는 다리가 없었다.
“여기서 뭘 보셨을까요?”
“별을 봤겠지.”
“이렇게 추운데 밤에도요?”
엘리네가 창 아래 걸쇠를 살폈다.
“창을 열고 보지는 않았을 거야.”
탁자 덮개를 조금 들추자 나무 모서리가 나왔다. 엘리네는 손바닥으로 눌러 보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맞은편까지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넓었다.
접힌 지도를 펼쳐도 가장자리가 바닥으로 늘어지지 않을 너비였다.
“마리엔, 여길 쓰자.”
“무슨 방으로요?”
“지도실.”
마리엔이 바구니를 내려다봤다가 방 안을 다시 살폈다.
“그럼 걸레가 더 필요해요.”
엘리네는 소매 단추를 풀었다.
“물부터 가져오자.”
마리엔이 물통을 가져오는 동안 엘리네는 문을 활짝 열어 벽에 붙였다. 부서진 의자를 옮기고, 바닥의 종잇조각을 한곳에 모았다. 덮개를 걷을 때는 문 쪽으로 끌고 가 접었다. 천이 접힐 때마다 손등에 먼지가 앉았다.
복도를 지나던 시녀가 문 앞에서 멈췄다.
“황후 폐하, 사람을 더 부를까요?”
엘리네는 시녀가 든 쟁반을 보았다. 다림질한 냅킨이 쌓여 있었다.
“그 일 끝내고 마른 걸레만 가져다줘요.”
“예. 시종장께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큰 가구는 아직 옮기지 않아요.”
말을 마친 엘리네는 문고리를 잡았다. 누군가 열쇠를 찾으면 이 방도 열 수 있었다. 문이 높이 있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니었다.
엘리네는 열쇠를 소매 안 주머니에 넣고 탁자로 돌아갔다.
물이 닿은 걸레가 금세 검어졌다. 마리엔은 물통 앞에 쪼그려 앉아 걸레를 비틀었다.
“공주님은 저쪽 선반만 닦으세요. 탁자 밑은 제가 할게요.”
“왜?”
“치마가 끼어요. 아까부터 밟고 계세요.”
엘리네가 발을 들었다. 치맛단에 구두 자국이 나 있었다.
“그러네.”
“웃지 마세요. 이거 제가 빨아야 해요.”
엘리네는 치맛단을 걷어 허리에 끼웠다. 마리엔이 급히 문 쪽을 보았다.
“누가 오면 어쩌시려고요.”
“그러면 내려야지.”
마리엔은 입술을 다물고 걸레를 건넸다. 엘리네는 선반부터 닦았다. 좁은 틈에 솔을 넣으니 먼지가 뭉쳐 떨어졌다.
선반 끝에는 낡은 나무 받침이 남아 있었다. 종이를 기대 놓을 수 있도록 아래에 턱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받침을 창가로 옮겼다.
“버릴 건가요?”
“아니. 지도를 세워 놓으면 멀리서도 볼 수 있겠어.”
마리엔은 구석으로 가서 망원경에 덮인 천을 벗겼다. 천 끝이 다리에 걸리자 몸을 숙였다.
곧 짧은 비명이 났다.
엘리네가 돌아보았다. 마리엔은 천을 쥔 채 뒤로 물러나 있었다.
“왜 그래?”
“저기요. 눈 대는 데요.”
렌즈 앞에 거미줄이 붙어 있었다. 마리엔의 손끝에도 가는 줄이 걸렸다. 줄을 떼려고 손을 털던 마리엔이 다시 소리를 냈다. 손목 위로 거미가 기어가고 있었다.
“가만히 있어.”
엘리네는 바닥의 종잇조각을 집어 마리엔의 손목에 댔다. 거미가 종이로 옮겨 갔다.
“물지는 않았니?”
마리엔이 고개를 저었다. 엘리네는 문밖 모서리에 종이를 내려놓았다. 거미가 벽 틈으로 들어가자 빈 종이를 들고 돌아왔다.
마리엔은 손목을 문질렀다.
“산에서는 괜찮았는데요.”
“산에서는 네가 먼저 보고 피했잖아.”
“제가 먼저 저걸 만진 건 아니에요.”
엘리네는 망원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리엔이 걸레로 렌즈를 닦으려 하자 그 손을 가볍게 막았다.
“그건 모래가 묻었어. 유리에 흠집이 나.”
엘리네는 손수건을 꺼내 모서리로 거미줄을 걷었다. 천을 접어 깨끗한 면으로 바꾼 뒤 렌즈 가장자리를 닦았다.
마리엔이 망원경 다리를 붙들었다.
“아직 보일까요?”
“지금은 먼지가 안쪽에도 있어서 모르겠어. 손볼 사람을 찾아야겠다.”
“그럼 이것도 안 버리시고요?”
“응. 고칠 수 있으면 써야지.”
탁자를 닦고 나니 나무에 밴 잉크 자국이 드러났다. 둥근 자국도 있었다. 엘리네는 젖은 손끝으로 그 위를 문질렀다가 마른 천으로 물기를 없앴다.
아래에서 가져온 걸레가 문 앞에 놓였다. 엘리네는 시녀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물통을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시녀의 발소리가 계단 아래로 멀어졌다.
“문은 닫을까요?”
마리엔이 물었다.
엘리네는 열려 있는 문과 빈 탁자를 보았다.
“청소가 끝날 때까지는 둬.”
이곳을 비밀로 만들 수는 없었다. 다만 누가 들어오는지는 알아야 했다.
엘리네는 벽에 붙은 선반을 다시 살폈다. 가장 아래 칸에는 문이 달려 있었지만 자물쇠가 없었다.
“여긴 종이와 자를 두면 되겠어.”
“지도는요?”
“내가 가져왔다가 가져갈 거야.”
마리엔의 걸레질이 잠깐 멎었다.
“네.”
엘리네는 더 말하지 않고 선반 안쪽을 닦았다.
점심 쟁반이 올라왔을 때는 창 아래까지 청소가 끝났다. 마리엔은 손을 씻고 빵을 반으로 갈랐다. 엘리네가 조각을 집자 곧바로 접시를 받쳐 주었다.
“탁자에 부스러기 떨어져요.”
“아직 지도를 놓지도 않았는데.”
“다 닦았잖아요.”
엘리네는 접시를 받아 창가로 갔다. 유리에 낀 먼지 때문에 바깥이 뚜렷하지 않았다. 창 아래에는 접은 사다리가 놓여 있었다.
“오후에는 저것부터 닦자.”
마리엔이 빵을 씹다 말고 창을 올려다봤다.
“안쪽만요. 바깥까지 닦으려면 사람을 불러야 해요.”
“알아.”
“공주님은 가끔 모르시는 척하시니까요.”
엘리네는 대답 대신 남은 빵을 마리엔의 접시에 놓았다. 마리엔이 그 조각을 집어 먹었다.
식사를 치운 뒤 엘리네는 아래층 방에서 지도 꾸러미를 가져왔다. 마리엔이 먼저 탁자를 만져 물기가 없는지 확인했다.
천을 풀자 접힌 종이가 나왔다.
엘리네는 가장 위의 지도를 들었다. 접힌 선을 따라 손가락을 넣고 종이를 폈다. 그 아래에서도 지도를 꺼냈다. 마리엔은 모서리가 말리는 쪽에 책을 올려놓았다.
종이 6장이 탁자를 채웠다.
엘리네는 왼쪽 위부터 자리를 맞췄다. 산줄기가 이어지고, 계곡 아래의 길이 다음 종이로 넘어갔다. 가운데 비어 있는 자리는 그대로 두었다.
마리엔은 책을 들고 기다렸다.
“여긴 붙여 놓으면 안 되나요?”
“빈 곳이 있어야 나머지 길이 맞아.”
엘리네는 마주 보는 종이 끝을 접는 자로 눌렀다. 마리엔이 책을 내려놓자 접힌 부분이 평평해졌다.
“이렇게 넓게 펴 놓은 건 처음 봐요.”
“노르덴에서는 바닥에 폈지. 아버지가 밟지 말라고 의자를 둘러놓으셨어.”
“저는 그때 문밖에 있었어요. 잉크를 쏟았거든요.”
“네가 아니라 내가 쏟았어.”
마리엔이 눈을 들었다.
“제가 치웠는데요.”
“그래서 네가 쏟은 줄 아는 거야.”
엘리네는 검은 잉크병을 탁자 구석에 놓았다. 병 아래에는 접은 천을 받쳤다.
마리엔이 빈 곳을 피해 종이 끝을 살폈다.
“이건 여름에 가셨던 데죠?”
“맞아. 비가 와서 내려올 때 오래 걸렸어.”
엘리네는 지도에 그린 작은 점을 짚었다. 점 옆에는 샘의 위치가 적혀 있었다. 손톱으로 가리지 않게 손가락을 옮겼다.
“여기서 쉬었어. 기억나니?”
마리엔은 허리를 굽혔다.
“물이 너무 차서 손도 못 씻었어요.”
“여름에도 그래.”
엘리네는 종이 아래쪽의 축척을 확인했다. 1대 50,000. 접는 자를 펴 길 위에 댔다. 탁자에 자를 온전히 놓을 수 있었다. 침실의 작은 책상에서는 종이를 접어 가며 재야 했다.
마리엔이 옆 지도를 돌려 보려 하자 엘리네가 가장자리를 잡았다.
“이쪽이 북쪽이야. 그대로 두면 길이 이어져.”
“저는 산이 다 비슷해서 모르겠어요.”
“이 선을 따라와 봐.”
엘리네가 계곡을 짚었다. 지도 이야기를 시작하자 손이 바빠졌다. 접는 자를 옮기고 종이 귀퉁이를 맞추며 갈림길을 보여 주었다.
“물이 흐르는 쪽을 보면 돼. 여기서 갈라졌다가 아래에서 다시 만나지. 이 길은 물을 건너지 않고 내려갈 수 있어.”
“그럼 이쪽이 편하겠네요.”
“짐이 있으면. 맨몸이면 위쪽이 짧아.”
마리엔은 고개를 끄덕이다 창 쪽을 돌아봤다.
“아, 저걸 닦아야 하는데.”
엘리네는 지도에서 손을 뗐다.
“먼지 떨어지지 않게 먼저 덮자.”
둘은 지도 위에 깨끗한 천을 얹었다. 엘리네는 천 아래 빈 자리가 눌리지 않도록 손으로 펴 주었다.
마리엔은 사다리를 펼치기 전에 다리를 눌러 보았다. 흔들림이 없자 창 아래에 놓았다.
“제가 올라갈게요.”
“위쪽은 손이 닿겠니?”
“안 닿으면 그때 내려올게요.”
엘리네가 사다리를 잡았다. 마리엔은 창 아래부터 물걸레로 닦았다. 회색 물이 걸레 끝으로 흘렀다. 물통에 천을 빨아 다시 건네는 동안 아래층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발소리가 잘 들리네요.”
마리엔이 말했다.
엘리네는 열린 문을 보았다.
“계단이 가팔라서 천천히 걸으니까.”
“오시는 건 알겠어요.”
누가 왔는지는 얼굴을 보기 전까지 알 수 없었다. 엘리네는 사다리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창 한쪽이 닦이자 지붕들이 드러났다. 황후궁 아래 뜰에는 사람이 없었다. 마리엔은 마른 걸레로 유리를 훔친 뒤 사다리에서 내려왔다.
“보세요. 이제 잘 보여요.”
엘리네는 창 앞으로 갔다.
본궁에서 보던 풍경과 달랐다. 서쪽 담이 내려다보였고, 담 밖으로 길이 나 있었다. 길 건너 저택의 지붕이 보였다.
칼릭스의 저택이었다.
엘리네는 창 아래에 손을 짚었다. 저택에 갔을 때 마차가 멈췄던 문은 나뭇가지에 가려져 있었다. 대신 위층 창과 지붕이 모두 보였다.
그렇다면 저쪽에서도 이 창이 보였다.
“공주님, 탁자를 창 가까이 옮길까요?”
마리엔이 물었다.
“아니. 지금 자리가 좋아.”
엘리네는 천을 덮은 탁자를 돌아보았다. 창에서 떨어져 있고, 문에서도 지도 글씨까지 읽을 수 없는 자리였다.
마리엔은 바구니에 걸레를 담았다. 엘리네는 창을 닦고 남은 물자국을 손수건으로 지웠다.
저택 지붕의 난간 옆에 검은 것이 보였다.
굴뚝은 아니었다. 엘리네가 손을 멈추자 그 위로 팔이 움직였다. 사람이 서 있었다.
멀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엘리네는 유리에 가까이 갔다가 걸음을 멈췄다. 허리 옆에 길쭉한 물건이 걸려 있었다. 지도통인지 다른 물건인지 가릴 수 없었다.
“마리엔.”
바구니를 들던 마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엘리네는 창에서 손을 내렸다. 지붕 위의 사람이 몸을 돌렸다. 이제 얼굴을 둔 방향이 분명했다.
서쪽 담 밖 대공 저택 지붕에 선 사람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11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8일, 지도 감정 자료를 대조한다.』엘리네는 장갑 끝을 당기던 손을 멈췄다.칼릭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로에서 비켜섰다. 문밖에서 마리엔이 외투를 들고 있었다. 엘리네는 칼릭스의 소매에 남은 주름을 더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자료가 준비되면 황후궁으로 보내 주세요.”“직접 가져가겠습니다.”엘리네는 문턱 앞에서 돌아보았다.“그럼 제가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하겠어요.”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마리엔이 펼쳐 준 외투에 팔을 넣었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겨울 첫째 달 28일 밤, 엘리네는 지도실 탁자에서 바느질 바구니를 치웠다.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옮겼다. 탁자 옆에 나란히 놓으려는 것을 엘리네가 막았다.“맞은편에 놓아 줘.”마리엔은 의자를 탁자 건너로 가져갔다. 등받이가 벽에 닿지 않는지 살핀 뒤 앉는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문지기는 자료 대조라고 적었어요.”“뭐라고 물었어?”“왜 응접실을 안 쓰시냐고요. 지도를 아래로 옮기면 접힌다고 했어요.”탁자에는 펼친 종이와 접는 자가 놓여 있었다. 응접실 탁자로는 종이 끝을 받치기 어려웠다. 문지기가 올라와 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엘리네는 등불을 옆으로 밀었다.“네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마리엔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눌러 보았다.“저는 문 앞에 있으면 돼요?”“누가 오면 문을 두드려 줘. 막으려고 하지는 말고.”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