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4일, 북방 지도 전시회를 연다.』
엘리네가 창에서 물러나자 지붕 위 사람도 난간에서 떨어졌다. 검은 옷자락이 굴뚝 뒤로 가려졌다.
마리엔이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누가 있었어요?”
“저택 지붕에 사람이 있어.”
마리엔이 창으로 다가오려 하자 엘리네는 탁자 위 천을 확인했다. 지도는 보이지 않았다. 천 아래로 나온 종이 끝만 손으로 밀어 넣었다.
“커튼을 달아야겠어. 창 아래쪽만 가릴 수 있게.”
“시종장께 말씀드릴까요?”
“응. 위쪽은 남겨 달라고 해. 빛은 들어와야 하니까.”
엘리네는 창 옆에 서서 저택을 다시 보았다. 지붕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였는지 물으러 갈 수는 없었다. 이쪽에서 창을 닦던 것을 보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엘리네는 천 가장자리에 책을 올리고 문을 잠갔다.
◊
지도 전시회에 가기 전, 마리엔은 엘리네의 소매에 묻은 실밥을 떼었다.
“이건 빼실까요?”
은 컴퍼스가 든 주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대로 둬.”
“오늘은 지도를 그리러 가시는 게 아니잖아요.”
“볼 때도 필요해.”
마리엔은 주머니의 단추를 채웠다. 엘리네는 손가락을 굽혀 보았다. 장갑 안쪽이 펜 굳은살에 걸렸다.
본궁 회랑에는 사냥용 창 대신 지도 받침이 늘어서 있었다. 벽에 걸린 공지에는 겨울 사냥 대회를 지도 전시회로 바꾼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
들어선 귀족들은 외투를 시종에게 건네고 난로 곁에 모였다. 사냥 장갑을 낀 채 온 남자가 벗어 든 장갑으로 손바닥을 치고 있었다.
엘리네가 들어서자 사람들이 길을 비켰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엘리네는 인사를 받으며 회랑 안쪽을 보았다. 지도마다 낮은 줄을 둘러놓았고, 가까이 볼 수 있는 탁자에는 모서리를 누르는 쇠추가 있었다.
가장 큰 지도 앞에 황제가 서 있었다. 반지 낀 손으로 북쪽을 가리키자 곁에 있던 귀족들이 고개를 들었다.
“길을 내면 봄부터 물자가 오갈 것이오. 사냥터 몇 곳을 도는 것보다 볼 것이 많지 않소.”
엘리네가 다가가자 아드리안이 손을 내렸다.
“황후. 추운 날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 좋지 않소?”
“지도를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그렇겠지. 북쪽은 익숙할 테니.”
황제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로웬 백작을 불렀다. 로웬 백작이 긴 막대를 받아 지도 위의 성곽을 짚었다.
“이번 전시에는 북방 개척에 필요한 길과 요새를 모았습니다.”
엘리네는 지도 아래 제목을 읽었다.
『아르벤 북방 교통도』
노르덴의 국경도 그 안에 들어 있었다. 회색 고개 너머로 이어지는 길에는 다른 길과 같은 색의 잉크가 칠해져 있었다. 국경선만 가는 점으로 끊어 놓았다.
엘리네는 장갑 끝을 당겨 손가락에 맞췄다.
“이 지도는 어디까지 그린 건가요?”
“북부 요새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로웬 백작이 답했다.
“교역로가 이어지는 곳은 국경 너머도 넣었지요. 폐하께서 넓게 살피라 하셨습니다.”
“지도를 그린 사람에게 설명을 들을 수 있겠어요?”
로웬 백작은 벽 쪽에 선 청년을 불렀다. 청년이 들고 있던 종이를 급히 말았다. 손등에 마르지 않은 잉크가 묻어 있었다.
“설명을 맡은 지도 기사입니다.”
청년이 허리를 숙였다.
엘리네는 탁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드리안은 따라오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귀족이 북방 광산 이야기를 꺼내자 황제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탁자에는 벽에 걸린 것과 같은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청년이 줄을 풀어 주었다.
“가까이서 보셔도 됩니다, 황후 폐하. 다만 잉크가 번질 수 있어…….”
청년은 말을 멈추고 엘리네의 손을 보았다.
엘리네가 장갑을 벗어 마리엔에게 건넸다.
“손은 깨끗해요. 종이에는 되도록 대지 않겠어요.”
“송구합니다.”
“지켜야 할 일이잖아요.”
탁자 옆에는 짧은 자와 종이를 덮는 얇은 판이 놓여 있었다. 엘리네는 자를 가리켰다.
“써도 될까요?”
청년이 자를 들어 두 손으로 건넸다.
지도 아래에는 축척이 적혀 있었다. 1대 100,000. 엘리네는 먼저 방위를 확인하고 강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회색 고개 아래에서 강이 굽었다. 탈로 마을의 표시는 작았다. 마을 바깥으로 난 길이 산허리를 따라 올라가다가 종이 한가운데를 지나 국경에 닿았다.
엘리네는 자를 내려놓았다.
“이 선은 무엇을 나타내나요?”
“높이가 같은 지점을 이은 선입니다. 길을 보실 때 경사를 함께 살피시도록 넣었습니다.”
“등고선이군요.”
“예.”
“이 구간은 왜 선 사이가 이렇게 넓죠?”
청년이 몸을 숙였다. 엘리네가 가리킨 곳은 고개로 오르는 길의 중간이었다. 아래에서는 촘촘하던 선이 그곳에서 벌어졌다가 정상 아래에서 다시 모였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완만한 길이라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계곡을 건너나요?”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려가는 선은 어디에 있나요?”
청년이 입을 열었다가 지도 쪽을 보았다. 길은 이어져 있는데, 길 아래로 내려가야 할 등고선이 없었다. 물길을 나타낸 선만 빈 곳을 통과하고 있었다.
엘리네는 손을 옮겨 계곡 반대편을 짚었다.
“이쪽 둑에서 저쪽 둑으로 곧장 건널 수는 없어요. 물은 아래로 흐르고, 길은 물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니까요.”
“다리가 있는 구간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리는 더 아래에 있어요. 이 길에서는 보이지도 않아요.”
청년의 손가락이 말아 든 종이를 눌렀다.
가까이 있던 귀족이 고개를 돌렸다. 옆 사람도 말을 멈췄다. 청년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제가 확인한 자료에는…….”
“원본도 여기 있나요?”
“아닙니다. 군무청 보관본을 보고 옮겼습니다.”
“직접 다녀온 기록은요?”
“함께 받은 것은 없습니다.”
엘리네는 자를 종이 바깥으로 뺐다. 청년이 움찔하자 자를 쥐여 주는 대신 빈 받침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 선을 그릴 때 빠뜨렸는지부터 살펴볼까요. 다른 부분과 이어지는 자리를 보여 주세요.”
청년은 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접힌 곳을 펴자 등고선과 길의 일부가 나왔다. 옮겨 그리기 전에 만든 밑그림이었다.
청년은 전시 지도 옆에 종이를 놓았다. 모서리가 말려 올라오자 마리엔이 빈 쇠추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청년이 낮게 말하고 종이 끝을 눌렀다.
밑그림에도 같은 빈 곳이 있었다. 그 옆에는 원본을 확인했다는 날짜와 보관 담당자의 짧은 서명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허리를 숙여 선이 만나는 곳을 보았다. 붓이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자리도 같았다.
“옮겨 그리면서 빠진 건 아니군요.”
“예. 원본과 대조했습니다.”
“글씨도 줄에 닿지 않게 옮겼고요. 물길과 도로도 잘 구분했어요.”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엘리네는 주위에서도 들을 수 있게 말했다.
“잘 그리셨어요. 이건 원본이 틀린 거예요.”
“황후 폐하, 원본은 군무청에서…….”
“보관한 곳과 그린 사람은 다를 수 있죠. 이 종이를 옮긴 분에게 원본의 잘못까지 물을 수는 없어요.”
옆에서 듣던 귀족이 잔을 내려놓았다.
“노르덴의 길이라 황후 폐하께서 잘 아시는 모양이군요.”
“걸어 본 길이에요.”
엘리네는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 고치지는 마세요. 원본과 어느 부분이 다른지 먼저 적어 두세요. 누구에게 확인했는지도요.”
“예, 황후 폐하.”
청년이 기록지를 찾다가 품에서 짧은 연필을 떨어뜨렸다. 탁자 다리 아래로 굴러간 연필을 마리엔이 주워 건넸다.
청년은 귀까지 붉어진 채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기록지에 적힌 제목을 확인했다. 청년은 잠시 멈췄다가 『원본 재확인 사항』이라고 고쳐 썼다.
“그렇게 적으면 돼요.”
청년의 연필이 다시 움직였다.
“어느 길입니까?”
등 뒤에서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엘리네는 손을 종이에서 거두고 돌아섰다. 칼릭스가 탁자 끝에 서 있었다. 왼쪽 목의 흰 흉터가 옷깃 위로 드러나 있었다.
“대공 전하.”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회랑 반대편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아드리안은 로웬 백작이 가리키는 다른 지도를 보고 있었다. 엘리네는 황제의 등을 확인한 뒤 옆으로 조금 비켰다.
칼릭스는 빈자리로 바로 다가오지 않았다.
“함께 봐도 되겠습니까?”
“여기 계곡을 보고 있었어요.”
엘리네가 지도를 가리키자 칼릭스가 탁자 옆에 섰다. 마리엔은 장갑을 든 채 뒤에 남았다. 다른 시녀가 차를 들고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엘리네는 쟁반이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전하께서도 이 길을 아시나요?”
“압니다.”
칼릭스가 지도통 뚜껑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이 종이는 처음 봅니다.”
“원본을 그대로 옮겼다고 해요. 그런데 계곡으로 내려가는 선이 없어요.”
칼릭스는 청년이 펼친 밑그림까지 살폈다.
“행군로 표시는 어느 자료에서 가져왔습니까?”
“그것도 같은 원본입니다, 전하.”
“길과 높이를 따로 확인한 기록은 없고요?”
“예. 없었습니다.”
칼릭스는 청년을 물러나게 하지 않았다. 기록지 옆으로 자를 놓고, 적어 둔 문장이 지도를 가리지 않도록 종이만 옮겼다.
“확인할 항목에 넣으십시오.”
“알겠습니다.”
엘리네는 물길 아래쪽을 짚었다.
“봄에는 여기서 바로 건너지 못해요. 눈 녹은 물이 모이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쓰는 길은 이 아래로 돌아가요.”
“짐을 실은 말도 그 길을 씁니다.”
“맞아요. 위쪽 길은 폭이 좁아서…….”
엘리네가 갈림길을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칼릭스도 같은 곳으로 손을 뻗었다.
지도 위에서 손가락이 닿았다.
엘리네는 말을 멈췄다. 칼릭스의 손끝에 굳은살이 있었다. 종이 위를 미끄러지던 손이 더 움직이지 않았다.
탁자 너머에서 청년이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칼날에 깎인 나무가 종이 위로 떨어졌다.
엘리네가 먼저 손을 들었다.
“이 갈림길이에요.”
목소리가 낮아져 있었다. 엘리네는 자를 집어 손가락 대신 길을 짚었다. 칼릭스도 손을 거두고 탁자 가장자리에 놓았다.
“여기서 내려가야 하죠.”
“예.”
대답은 짧았다. 칼릭스는 종이를 보고 있었지만, 엘리네가 자를 옮길 자리는 비워 두었다.
마리엔이 장갑을 고쳐 들었다. 엘리네는 빈손을 치맛자락 옆으로 내렸다. 손끝을 굽혔다 펴는 동안 칼릭스가 청년에게 원본 보관 위치를 물었다.
엘리네는 자의 눈금을 다시 읽었다. 방금 짚었던 곳에서 아래쪽 다리까지 거리를 재고, 돌아 올라오는 길을 확인했다.
“여기에는 쉬는 곳도 없네요.”
“부대를 나눠 통과시켜야 합니다.”
“길 위에서 기다릴 수는 없겠어요. 뒤에서 오는 말이 서 있을 자리도 없고요.”
“그래서 계곡에 들어가기 전에 대기시킵니다.”
청년의 연필이 멈췄다. 설명을 적던 종이 아래로 새 종이를 받쳤다.
엘리네는 지도 위 갈림길을 다시 보았다. 황제의 서재에서 보았던 붉은 화살표가 지나던 자리였다. 그 종이에 적힌 봄의 날짜를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이 지도에는 돌아가는 거리도, 기다리는 자리도 빠져 있군요.”
칼릭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서 있던 쪽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자를 내려놓았다. 아드리안은 수행원의 말을 듣느라 걸음을 멈췄다.
탁자 위에는 두 사람이 짚었던 갈림길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칼릭스가 그곳을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이 등고선대로 행군하면 하루가 모자랍니다.”
(12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8일, 지도 감정 자료를 대조한다.』엘리네는 장갑 끝을 당기던 손을 멈췄다.칼릭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로에서 비켜섰다. 문밖에서 마리엔이 외투를 들고 있었다. 엘리네는 칼릭스의 소매에 남은 주름을 더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자료가 준비되면 황후궁으로 보내 주세요.”“직접 가져가겠습니다.”엘리네는 문턱 앞에서 돌아보았다.“그럼 제가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하겠어요.”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마리엔이 펼쳐 준 외투에 팔을 넣었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겨울 첫째 달 28일 밤, 엘리네는 지도실 탁자에서 바느질 바구니를 치웠다.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옮겼다. 탁자 옆에 나란히 놓으려는 것을 엘리네가 막았다.“맞은편에 놓아 줘.”마리엔은 의자를 탁자 건너로 가져갔다. 등받이가 벽에 닿지 않는지 살핀 뒤 앉는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문지기는 자료 대조라고 적었어요.”“뭐라고 물었어?”“왜 응접실을 안 쓰시냐고요. 지도를 아래로 옮기면 접힌다고 했어요.”탁자에는 펼친 종이와 접는 자가 놓여 있었다. 응접실 탁자로는 종이 끝을 받치기 어려웠다. 문지기가 올라와 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엘리네는 등불을 옆으로 밀었다.“네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마리엔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눌러 보았다.“저는 문 앞에 있으면 돼요?”“누가 오면 문을 두드려 줘. 막으려고 하지는 말고.”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