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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는 대공의 것이 아니다
황후는 대공의 것이 아니다
Author: Jino

1화. 첫 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20:08:58

『황궁 공보: 황제 부부의 결혼 3주년 축하 연회가 열렸다.』

아드리안은 엘리네의 앞을 지나 에스텔에게 손을 내밀었다.

붉은 드레스 자락이 대리석 바닥에 끌렸다. 에스텔이 부채를 접어 시종에게 맡기고 황제의 손을 잡았다. 악사들이 활을 들었다. 첫 음이 울리자 황제는 에스텔의 허리에 손을 얹었다.

엘리네는 웃는 얼굴로 잔을 들었다.

잔 안의 포도주는 입술에 닿지 않았다. 마주 선 귀부인이 엘리네의 손을 보고서야 자기 잔을 내렸다.

“오늘 연회가 참 아름답습니다, 황후 폐하.”

“준비하는 사람들이 애를 썼어요.”

“꽃도 노르덴에서 가져왔다지요.”

탁자마다 흰 꽃이 놓여 있었다. 노르덴에서는 여름에 피는 꽃이었다. 겨울에 구하려면 온실을 빌리고 마차 안에도 불을 피워야 했다.

엘리네는 꽃병에 꽂힌 줄기의 끝을 보았다. 잎이 대부분 잘려 있었다.

“먼 길을 왔으니 물을 자주 갈아 주라고 해야겠어요.”

귀부인이 고개를 숙였다. 더 할 말을 찾지 못한 입술이 잠깐 벌어졌다가 닫혔다. 엘리네는 먼저 시선을 돌려 주었다.

아드리안이 에스텔에게 무슨 말을 했다. 에스텔은 고개를 조금 젖혀 웃었다. 황제의 금발과 에스텔의 귀걸이가 등불 아래서 선명하게 보였다.

엘리네가 선 곳까지 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등 뒤에서 마리엔이 작게 불렀다.

“공주님.”

엘리네는 잔을 쥔 손을 조금 내렸다.

마리엔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노르덴에서 함께 온 시녀는 아직 사람이 많은 자리에서 호칭을 틀릴 때가 있었다.

“목이 마르시면 물을 가져올까요?”

“괜찮아. 이 잔만 맡아 줘.”

마리엔이 잔을 받다가 엘리네의 오른쪽 손목을 보았다. 장갑 끝의 단추가 하나 풀려 있었다. 시녀가 손을 뻗으려 하자 엘리네는 팔을 가볍게 내렸다.

“나중에.”

황제의 첫 춤이 끝나기도 전에 시녀에게 장갑을 고치게 할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미 엘리네를 충분히 보고 있었다.

춤을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척하는 사람이 나뉘어 있었다. 기둥 옆의 젊은 부인은 부채를 편 채 엘리네 쪽을 살폈고, 그 옆 남자는 악단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네는 목을 곧게 세웠다. 노르덴의 사절이 서는 자리는 비어 있었다. 결혼 기념 연회일 뿐이니 먼 북쪽에서 왕족이 올 이유는 없었다.

그래도 누가 편지를 쓴다면 오늘 밤의 일을 적을 터였다. 황제는 정부와 첫 춤을 추었고, 노르덴에서 온 황후는 옆에서 웃고 있었다고.

에스텔의 치맛자락이 돌아갔다. 붉은 천 아래로 구두 끝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엘리네는 악사들이 같은 구절을 되풀이하는 것을 들었다. 곧 첫 춤이 끝났다. 아드리안은 에스텔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박수를 받았다.

엘리네도 손뼉을 쳤다.

오른쪽 장갑이 손등 쪽으로 조금 밀렸다. 풀린 단추 아래로 맨살이 보였다. 엘리네는 손을 포개어 가렸다.

그때 연회장 문 옆에서 의전관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칼릭스 아르벤 대공 전하께서 드십니다.”

문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먼저 돌아보았다.

엘리네도 고개를 들었다. 황제에게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북부군을 이끄는 대공이며, 엘리네가 제국에 온 뒤로 줄곧 전선에 있었다.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문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검은 예복을 입고 있었다. 어깨에 눈도 먼지도 없었지만, 장화에는 자주 닦아 생긴 주름이 남아 있었다. 다른 남자들의 허리에 달린 장식용 검과 달리 칼집에는 보석이 없었다.

남자가 걸음을 멈추자 의전관이 몸을 깊이 숙였다.

“북부에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수고했습니다.”

짧은 대답이었다.

엘리네는 검은 머리 아래 드러난 얼굴을 보았다. 황제와 닮은 곳을 찾기는 어려웠다. 아드리안은 웃을 때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았고, 칼릭스는 앞에 난 길을 보며 걸었다.

사람들이 알아서 비켰다.

방금 전까지 황제에게 향하던 얼굴들이 조금씩 방향을 바꾸었다. 누군가 낮게 귀환을 축하했고, 다른 사람은 북부의 날씨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는 황제 앞에 멈춰 섰다.

“폐하.”

“드디어 왔군. 3년 만인가.”

아드리안은 에스텔에게 잔을 건네며 동생을 보았다.

“씻고 쉬어도 됐을 텐데. 오늘은 사람이 많아.”

“연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 결혼 기념일이지. 기억은 하고 있었나?”

“축하드립니다.”

아드리안이 웃었다. 손가락에 낀 반지 넷 가운데 하나를 엄지로 밀어 돌렸다.

“그럼 즐기다 가게. 북부에는 이런 자리가 드물 테니.”

엘리네는 시선을 내렸다. 황제의 말이 끝났으니 칼릭스는 군부 사람들이 모인 쪽으로 갈 터였다. 그쪽에서 벌써 자리를 벌려 두고 있었다.

하지만 구두 소리는 엘리네 앞에서 멎었다.

가까이서 보니 키가 컸다. 엘리네가 얼굴을 보려면 턱을 조금 들어야 했다. 검은 예복의 깃은 단정히 잠겨 있었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폐하.”

“돌아오신 것을 환영해요, 대공 전하.”

처음 나누는 인사였다. 엘리네는 준비된 말에 짧은 말을 더했다.

“먼 길에 피곤하시겠어요.”

“괜찮습니다.”

칼릭스가 오른손을 내밀었다.

“춤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옆에서 부채 접히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내민 손을 보았다. 흰 장갑을 낀 손이었다.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새 곡을 준비하던 악사들 사이에서 활 하나가 내려갔다. 귀부인이 마저 잇지 못한 말이 가까이서 끊겼다. 연회장 전체가 조용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엘리네 주위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시동생이 형수에게 춤을 청하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황제 부부의 결혼 기념일이었다. 황제는 다른 여자와 첫 춤을 추었고, 엘리네는 아직 누구와도 춤추지 않았다. 칼릭스가 내민 손을 모두 보고 있었다.

엘리네는 황제 쪽을 보지 않았다.

허락을 구한다면 아드리안은 웃으며 귀찮게 하지 말라고 할 터였다. 아니면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저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엘리네가 청한 춤이 되어 버렸다.

칼릭스는 손을 더 가까이 내밀지 않았다.

거절해도 거둘 수 있는 거리에 두고 기다렸다. 그 손끝에서 눈을 뗀 엘리네가 칼릭스의 얼굴을 보았다. 웃음도 재촉도 없었다.

엘리네는 포개 두었던 손을 풀었다.

“좋아요.”

오른손을 올리자 장갑 너머로 단단한 손바닥이 닿았다.

칼릭스는 그제야 몸을 돌렸다. 엘리네가 먼저 발을 옮길 자리를 남겨 두고 나란히 걸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악단 앞에 이르자 지휘자가 활을 들었다.

엘리네는 왼손을 칼릭스의 어깨에 얹었다. 예복 안쪽이 단단했다. 칼릭스의 오른손은 허리에 놓였고, 맞잡은 손은 엘리네의 어깨보다 낮은 곳에서 멈췄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춤의 간격이었다.

첫 음이 울렸다.

엘리네는 오른발을 뒤로 뺐다. 드레스 밑단이 구두에 걸리지 않도록 발끝을 돌렸다. 칼릭스가 같은 박자에 따라왔다.

첫 회전이 끝나고 나서야 엘리네는 칼릭스가 춤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았다.

걸음이 크지 않았다. 힘으로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엘리네가 움직이면 그만큼 자리를 내주었고, 돌아설 때는 다른 쌍이 있는 쪽을 먼저 확인했다.

사람들이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낮은 목소리가 연회장 둘레에서 들렸다. 엘리네는 어느 말도 알아듣지 않으려 했다. 대신 악사들의 손과 바닥의 이음매를 차례로 보았다.

벨모르에 오기 전에는 이런 바닥에서 춤추지 않았다.

노르덴 왕궁의 마룻장은 모서리가 들뜬 곳이 있었다. 유겐은 그곳을 피하려다 늘 같은 방향으로만 돌았고, 춤 선생은 유겐에게 다른 쪽도 연습하라며 손뼉을 쳤다.

지금 발밑은 고른 대리석이었다. 발을 헛디딜 곳이 없는데도 엘리네는 구두 안에서 발가락을 굽혔다 폈다.

악단의 둘째 구절이 시작됐다.

이 곡은 3분이었다.

엘리네는 마지막 박자까지 알고 있었다. 결혼식 전에 익혔고, 그 뒤로도 연회가 열릴 때마다 들었다. 황제가 엘리네를 찾지 않는 날에는 잔을 든 채 끝까지 듣기만 했다.

오늘은 눈앞에 검은 예복의 깃이 있었다.

엘리네가 시선을 올리자 칼릭스와 눈이 마주쳤다. 칼릭스는 곧 엘리네가 움직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고 싶었다.

황제의 동생이니 엘리네의 체면을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돌아온 첫날이라 궁정의 사정을 몰랐을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춤추는 동안 물을 말은 아니었다.

회전하며 맞잡은 손이 바깥쪽으로 향했다.

풀린 장갑 끝이 다시 벌어졌다.

엘리네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장갑을 당겨 올리려면 손을 놓아야 했다. 막 춤을 시작한 두 사람을 보고 있는 얼굴들이 정면에 있었다.

칼릭스의 시선이 잠깐 내려갔다.

다음 걸음에서 손을 고쳐 잡았다. 엘리네의 오른손을 다른 손으로 받아 몸 가까이 이끌고, 회전이 끝나자 다시 왼손으로 받았다.

박자는 어긋나지 않았다.

바뀐 손바닥의 위치가 엘리네의 손목을 가렸다. 장갑 끝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칼릭스는 단추를 만지지 않았다. 고쳐 주려 하지도, 엘리네를 내려다보며 괜찮은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맞잡은 손의 높이를 조금 낮췄다.

엘리네는 어깨에서 힘을 뺐다.

칼릭스의 손가락이 오른손의 굳은살에 닿았다. 가운뎃손가락 옆에 남은 자국이었다. 장갑을 껴도 펜을 오래 쥐던 자리는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엘리네는 무심코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칼릭스의 손은 그대로였다.

탁자 옆에서 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고 있었다. 시녀는 엘리네의 손목을 보고, 이어 칼릭스를 보았다. 그러고는 쟁반을 배 앞에 붙여 들었다.

엘리네는 시녀에게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춤의 방향이 바뀌며 황제가 보였다.

아드리안은 에스텔 옆에 서 있었다. 잔을 든 손을 내린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에스텔의 부채는 펼쳐지지 않은 상태였다.

엘리네의 발끝이 치맛단 안에서 멎을 뻔했다.

허리에 놓인 손이 밀거나 당기지 않았다. 칼릭스는 엘리네가 다음 발을 옮길 때까지 보폭을 줄였다. 엘리네는 박자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이번에는 황제를 지나 악단을 보았다.

바이올린을 켜는 악사의 소매 끝이 닳아 있었다. 활이 위로 올라갔다. 마지막 구절이었다.

맞잡은 손을 놓을 때가 다가오자, 엘리네는 자신이 단추를 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칼릭스는 춤을 추는 동안 한 번도 웃지 않았다. 그런데도 웃는 얼굴을 계속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엘리네가 밟는 자리와 남은 간격만 보면 됐다.

마지막 회전에서 드레스가 칼릭스의 장화에 스쳤다.

음악이 끝났다.

칼릭스는 먼저 허리에서 손을 뗐다. 엘리네가 어깨에 얹었던 손을 내리자 맞잡은 손도 놓았다.

박수가 울렸다.

엘리네는 오른손을 왼손 아래로 넣었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가까이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노르덴 산길 지도를 그리신 분이라 들었습니다.”

엘리네의 손이 멎었다.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는 모두 알았다. 동맹을 위해 시집온 둘째 공주라는 것도, 수를 잘 놓는다는 것도 연회에서 자주 들었다.

지도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없었다.

엘리네는 칼릭스를 다시 보았다. 누구에게 들었느냐고 묻기 전에 옆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사람들 사이가 벌어지고 아드리안이 걸어왔다.

칼릭스가 몸을 돌려 황제를 향했다.

예복의 깃 위로 왼쪽 목이 드러났다. 흰 흉터가 귀 아래에서 깃 안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엘리네는 처음 보는 자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드리안이 동생과 엘리네를 번갈아 보았다.

박수는 이미 그쳐 있었다. 황제는 손가락의 반지를 돌리며 웃었다.

“동생이 황후를 좋아하나 보군.”

(1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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