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황제 부부의 기념 연회가 성황리에 끝났다.』
엘리네는 포개 둔 손을 풀지 않았다.
아드리안의 시선이 칼릭스에게 머물렀다.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엄지는 반지의 보석을 밀고 있었다.
“황후 폐하께 춤을 청했습니다.”
칼릭스가 말했다.
“나도 봤네. 제법 잘 추더군.”
“오래 익힌 춤이에요.”
엘리네가 말을 받았다. 아드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노르덴에서도 연회는 열렸으니까요.”
“그랬겠지.”
황제는 엘리네의 얼굴보다 어깨 너머를 먼저 보았다. 잔을 든 시종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잔을 바꾸어 들고 동생에게 턱짓했다.
“내일은 귀환 보고를 해야겠군.”
“준비하겠습니다.”
“오늘 밤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어. 사람들 인사나 받게.”
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가까이 왔다. 엘리네는 그들이 멈춰 설 자리를 남기고 옆으로 물러났다.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지도를 어디서 보았느냐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마리엔이 엘리네의 곁으로 왔다. 시녀의 시선이 오른쪽 장갑 끝에 닿았다. 엘리네는 이번에는 손을 내주었다.
마리엔이 몸을 가리고 서서 단추를 끼웠다. 벌어져 있던 장갑 끝이 여며졌다. 칼릭스는 이미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엘리네는 손목을 내려다보다 시녀에게 말했다.
“돌아가자.”
“겉옷을 가져오겠습니다.”
황제에게 물러가겠다고 알렸을 때 아드리안은 에스텔이 든 부채를 보고 있었다.
“벌써 가려고?”
“조금 쉬고 싶어요.”
“그러시오.”
엘리네는 고개를 숙였다. 몸을 돌린 뒤에는 악단 쪽도, 군인들이 모인 쪽도 보지 않았다.
복도에 나오자 연회장 안의 말소리가 줄었다. 시종이 문을 닫았다. 마리엔은 엘리네의 어깨에 겉옷을 덮고 반걸음 뒤를 따랐다.
본궁에서 동쪽 날개로 이어지는 복도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창문마다 검은 밤이 보였다. 엘리네의 구두 소리에 시녀의 걸음이 겹쳤다.
황후궁 문지기가 문을 열었다.
“폐하께서 오실 때를 위해 문을 열어 둘까요?”
엘리네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닫아 두세요. 오시면 그때 열어 드리면 돼요.”
“알겠습니다, 황후 폐하.”
마리엔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따라왔다.
방 안에는 따뜻한 물과 실내화가 준비되어 있었다. 엘리네는 겉옷을 벗고 의자에 앉았다. 문이 닫힌 뒤에야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마리엔이 치맛단을 걷고 무릎을 굽혔다.
“오른발부터 주세요.”
구두의 끈을 풀던 손이 잠깐 멎었다. 발등에 눌린 자국이 남아 있었다.
“많이 아프셨어요?”
“앉으면 괜찮아.”
마리엔은 구두를 벗겼다. 발뒤꿈치에 걸리지 않도록 손가락을 넣어 받쳤다. 엘리네는 실내화에 발을 넣고 반대쪽 발을 내밀었다.
시녀가 다른 구두도 벗겨 바닥에 나란히 놓았다.
“공주님, 발을 물에…….”
말끝이 끊겼다.
마리엔은 문 쪽을 보고 목소리를 고쳤다.
“황후 폐하. 물에 잠깐 담그시는 게 좋겠어요.”
방 안에는 두 사람만 있었다. 문밖에서도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엘리네가 치맛단을 무릎 위로 거두었다.
“공주님이라 불러도 돼.”
마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주근깨가 있는 뺨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꾸 나와서요.”
“그때만 조심해. 여기서는 괜찮아.”
“그래도 제가 버릇을 못 고치면…….”
“네가 고치는 동안 내가 기다리지, 뭐.”
마리엔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물렸다. 시녀는 물그릇을 끌어와 손으로 온도를 확인했다.
“뜨거우면 바로 말씀하세요, 공주님.”
엘리네는 발을 물에 담갔다. 발가락을 조금 펴자 눌렸던 곳이 따끔거렸다.
마리엔은 구두 안쪽을 살폈다. 끈이 닿던 부분을 손끝으로 누르고는 따로 치워 두었다.
“내일 손보라고 할게요.”
“버리지는 말고. 밑창은 아직 괜찮아.”
“알아요. 노르덴에서도 꼭 그렇게 말씀하셨잖아요.”
“그때는 새 구두를 기다리느니 고치는 게 빨랐어.”
“고치자마자 또 산에 신고 가셨고요.”
엘리네가 시녀를 보았다. 마리엔은 물수건을 짜며 웃었다.
마리엔이 문밖에서 따뜻한 차를 받아 와 탁자에 잔을 놓았다. 문은 다시 닫혔다.
엘리네는 잔에서 오르는 김을 보았다. 연회장에서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으니 손가락까지 따뜻해졌다.
“황후궁 문 앞에서 늘 저렇게 묻네.”
마리엔이 물수건을 접다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오실지요?”
“응.”
“기념일이라서 그랬을 거예요.”
엘리네는 차를 조금 마셨다. 입술에 닿은 잔을 내려놓은 뒤 물었다.
“지난번에는 언제였지?”
마리엔이 눈을 내렸다.
“여름 자선 행사 명단에 인장을 받으러 오셨을 때요.”
“그게 마지막이었구나.”
황제는 문가에서 명단을 넘겼다. 앉으시겠느냐고 묻기도 전에 인장을 찍고 나갔다. 그날 준비한 차도 지금과 같은 잔에 담겨 있었다.
“3년 동안 4번이네.”
마리엔은 수건의 모서리를 맞추었다.
“차 더 드릴까요?”
“이것부터 마실게.”
마리엔은 엘리네의 발을 닦고 드레스의 등을 풀어 주었다. 연회복을 벗자 어깨에 닿던 장식이 사라졌다.
엘리네는 실내복을 입고 화장대에 앉았다. 시녀가 머리핀을 빼서 접시에 놓았다. 은빛이 섞인 갈색 머리가 등으로 내려왔다.
마지막 핀이 빠질 때 엘리네가 물었다.
“오늘 대공 전하를 전에 본 적 있니?”
“아니요. 저도 처음 뵀어요.”
“누가 이야기하는 건?”
“돌아오신다는 말은 주방에서도 했어요. 북부에서 오시는 거라고요.”
거기까지는 엘리네도 들었다.
마리엔은 빗으로 머리끝부터 풀었다. 당기지 않도록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잡고 있었다.
“춤을 추실 줄은 몰랐어요.”
엘리네는 화장대 위에 올려 둔 장갑을 보았다.
“나도.”
오른쪽 장갑의 단추는 제대로 끼워져 있었다. 엘리네가 손을 뻗어 단추 위를 눌렀다. 춤을 추던 손의 높이는 그보다 조금 낮았다.
마리엔의 빗질이 느려졌다.
“제가 미리 고쳐 드렸어야 했는데.”
“네가 그러려고 했잖아. 내가 나중에 하자고 했고.”
엘리네는 장갑을 내려놓았다.
“내일 다시 달아 줘. 실이 느슨한가 봐.”
“지금 해 둘게요.”
마리엔은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준 뒤 바느질 도구를 챙기러 갔다.
엘리네는 창가 탁자에 놓인 수틀을 당겼다. 펼친 천에 꽃잎이 절반쯤 수놓여 있었다. 옆에는 색을 나눈 실이 감겨 있었다.
바늘을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
황궁에 온 뒤로 완성한 꽃은 셀 수 없었다. 손수건과 방석, 기념일에 바칠 천에도 꽃을 놓았다. 빈자리에 줄기를 더하면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엘리네는 수틀을 덮어 옆으로 밀었다.
책상 아래의 깊은 서랍을 열었다. 편지함 뒤에 납작한 보관함이 있었다. 양손으로 꺼내자 나무 바닥이 서랍 테두리에 걸렸다.
조금 기울여 빼냈다.
함 뚜껑에는 먼지가 묻어 있었다. 엘리네는 천으로 닦고 걸쇠를 열었다. 접힌 지도들이 얇은 종이 사이에 들어 있었다.
1장을 꺼내고, 그 아래 것을 꺼냈다.
마지막 지도를 펼친 뒤에야 보관함이 비었다. 모두 7장이었다.
마리엔이 바느질 도구를 들고 돌아왔다. 시녀는 탁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걸 꺼내셨어요?”
“잠깐 보려고.”
“수틀을 치울까요?”
“응. 차도 저쪽에 놓아 줘.”
마리엔은 찻잔을 다른 탁자로 옮겼다. 수틀과 실을 치운 자리에 엘리네가 지도를 폈다. 접힌 부분이 들뜨자 빈 실 상자를 올려 눌렀다.
종이 귀퉁이에는 노르덴에서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산길 조사도』
엘리네는 그 아래 적힌 축척을 짚었다.
『1:50,000』
“이건 강 건너 길이네요.”
마리엔이 조금 떨어져서 말했다.
“맞아. 여기서부터 올라가면 돼.”
엘리네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옮겨 갔다. 강을 따라가다 갈라지는 곳에서 멈췄다.
“여기는 비가 오면 물이 불어. 길은 이쪽에 있지만 돌아가야 해.”
“그때도 돌아오느라 늦으셨잖아요.”
“물을 건너는 것보다는 나았어.”
말을 마친 엘리네가 손을 떼었다. 손끝에 마른 종이의 감촉이 남았다.
이 지도를 황궁에서 펼친 적은 드물었다. 보관함째 서랍에 넣어 두었고, 귀부인들과 차를 마시는 자리에는 가져간 적도 없었다.
그런데 칼릭스는 수가 아니라 지도를 말했다.
엘리네는 다른 장을 끌어당겼다. 길을 처음 그은 선 옆에 고쳐 그린 선이 있었다. 지웠던 자리가 조금 보였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눌렀다.
“대공 전하께서 이걸 아시더라.”
장갑에 바늘을 넣던 마리엔의 손이 멈췄다.
“지도를요?”
“내가 노르덴 산길 지도를 그렸다고 들으셨대.”
“누구한테 들으셨대요?”
“못 물었어.”
마리엔은 장갑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전 말씀드린 적 없어요. 대공 전하를 뵌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요.”
“네가 이야기했을 거라는 뜻은 아니야.”
엘리네는 지도 끝을 펴며 고개를 저었다.
“누가 기억하고 있었을까 해서.”
마리엔은 잠깐 생각하더니 바늘을 다시 들었다.
“노르덴에 계실 때도 베껴 달라는 분들이 있었잖아요.”
“그랬지.”
길을 찾으러 온 사람들은 대개 지도의 한 부분만 필요로 했다. 엘리네는 종이를 대고 선을 옮겼다. 원본을 내주기 어려울 때는 날짜와 길 상태를 덧붙였다.
그 종이들이 어디까지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엘리네는 접힌 모서리를 살폈다. 한쪽은 종이가 닳아서 더 누르면 찢어질 만큼 얇았다. 보관함 안에서 꺼낸 얇은 종이를 그 밑에 받쳤다.
“풀을 가져올까요?”
“오늘은 그대로 둘게. 먼저 말려 둔 종이가 필요해.”
말이 빨라져 있었다. 엘리네는 손끝을 멈추고 마리엔을 보았다.
시녀는 단추를 붙잡은 채 웃고 있었다.
“왜?”
“그냥요. 필요한 걸 말씀해 주시면 내일 찾아 놓을게요.”
“붓은 가는 걸로. 풀은 새로 끓이지 않아도 돼. 있는 게 굳었는지 먼저 보고.”
“종이도요?”
“응. 이 종이보다 얇은 게 있으면 좋겠어.”
마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네는 책상 서랍에서 접는 자를 꺼내 길 사이의 거리를 쟀다. 기억하던 숫자가 나왔다.
자를 놓고 옆의 지도를 붙였다. 강의 굽이가 이어졌다. 다른 종이에 나누어 그렸어도 어긋나지 않았다. 엘리네는 경계선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칼릭스가 이 길을 보았을까. 보았다면 누가 베껴 간 사본이었을까. 연회장에서는 그것을 물을 틈이 없었다.
엘리네는 탁자 건너편의 빈 의자를 보았다. 무심코 지도를 그쪽으로 돌렸다가 멈췄다. 마리엔이 바느질을 끝내고 실을 끊고 있었다.
“다 됐어요.”
시녀가 장갑을 가져왔다. 새로 단 단추를 당겨 보여 주었다.
“이제 안 풀릴 거예요.”
“고마워.”
엘리네는 장갑을 받아 접었다. 오른쪽 장갑을 아래에 놓으려다 위로 바꾸었다.
“접어 드릴까요?”
“내가 할게. 너는 가서 쉬어.”
“불은 남겨 둘까요?”
“이쪽 등불만.”
마리엔이 난로를 확인하고 물그릇을 들었다. 문을 열기 전 시녀가 돌아보았다.
“잘 쉬세요, 공주님.”
“너도.”
문이 닫혔다.
엘리네는 펼친 지도를 바로 접지 않았다. 자를 치우고 종이의 굽은 곳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손목이 탁자 가장자리에 닿았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이었다.
엘리네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손을 거두었다. 지도를 차례로 포개고 그 사이에 얇은 종이를 넣었다. 7장을 다 모은 뒤에도 보관함의 걸쇠는 잠그지 않았다.
창문 쪽에서 찬 기운이 느껴졌다.
엘리네는 일어나 커튼을 잡았다. 정원 너머 본궁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사람 하나가 회랑을 지나고, 문가에서 멈췄다. 이곳에서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커튼을 당기려던 손이 멎었다.
서쪽 담 밖으로 낮은 지붕이 보였다. 황궁에 올 때 안내받았던 대공 저택이었다. 엘리네가 이 창 앞에 설 때마다 창문들이 어두워져 있던 건물이었다.
오늘은 현관 앞에 마차가 서 있었다.
누군가 내렸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문 옆의 등불 아래로 사람이 지나갔다가 사라졌다.
엘리네는 커튼을 놓았다.
잠시 뒤, 서쪽 담 밖 대공 저택 창에 불이 켜졌다.
(2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7일, 북방 보급안을 검토한다.』탁자 다리를 누르던 엘리네가 손을 뗐다. 마리엔이 지도 묶음을 올려놓으려 하자 엘리네는 창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그쪽에 두자. 창을 열어도 종이가 날리지 않게.”천을 벗기고 지도 모서리에 자를 얹었다. 바닥을 닦은 물이 마를 때까지 둘은 탁자를 움직이지 않았다.그 뒤로도 탁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실을 나설 때마다 다리가 놓인 곳을 확인했다.◊군무청 서기가 보급 계획서를 펼쳤다. 칼릭스는 가죽 지도통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장갑을 벗었다.창 아래에 놓인 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서기는 난로 쪽에 말려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계획서 끝에 붙였다.“창고별 수량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량은 따로 표시했습니다.”칼릭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첫 장을 읽었다.『봄 첫째 달 10일 출정. 병력 3만. 회색 고개 경유.』그 아래에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수량이 적혀 있었다. 칼릭스는 출정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행군 일수는 어디 있습니까?”“노정표에 있습니다.”서기가 묶음에서 종이를 찾아냈다. 칼릭스는 그것부터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벨모르에서 북부 요새까지 이어지는 선 옆에 숙영지가 적혀 있었다. 요새 위쪽부터는 표시가 드물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노르덴 쪽 마을에서 보급을 받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현지 보급을 약속한 문서도 있습니까?”서기는 종이 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첨부된 것은 없습니다.”“요청한 기록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