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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은 컴퍼스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20:09:12

『황궁 공보: 황후가 겨울 자선 바자와 차 모임을 주관한다.』

엘리네는 맞은편 창의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커튼을 여미고 책상으로 돌아왔다. 지도는 보관함에 넣었지만 접는 자는 밖에 남겨 두었다. 내일 아침에도 손이 닿는 자리에 두고 싶었다.

등불을 끄기 전, 서랍에서 은 컴퍼스를 꺼냈다. 뾰족한 끝이 천을 뚫지 않도록 가죽집에 넣어 침대 곁에 놓았다.

아침에 마리엔이 가져온 것은 얇은 종이와 하루 일정이었다.

“풀은 아직 쓸 수 있어요. 붓도 씻어 두었고요.”

“고마워. 지도는 돌아와서 손보면 되겠다.”

엘리네가 종이를 창 쪽으로 들어 보았다. 뒤에 댄 손가락이 비쳤다. 찢어진 모서리를 받치기에 알맞았다.

마리엔은 옷장 앞에서 드레스를 골랐다.

“오늘은 바자에 내놓을 물건을 먼저 보신대요. 그다음이 차 모임이고요.”

“인사받는 건?”

“물건을 보시기 전에요.”

“그럼 서 있는 시간이 길겠네. 어제 신은 건 빼 줘.”

마리엔이 구두를 바꾸어 놓았다. 엘리네는 거울 앞에서 소매를 여미고 가죽집을 집었다. 허리 안쪽 주머니에 넣자 컴퍼스 끝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것도 가져가세요?”

“주머니가 있는 옷이잖아.”

“쓰실 일이 있을까요?”

엘리네는 주머니 입구를 눌렀다.

“두고 가면 찾게 되더라.”

마리엔은 더 묻지 않고 드레스의 뒤를 정리했다.

책상에는 지도를 손보려고 꺼낸 압지가 있었다. 엘리네는 깨끗한 것을 골라 접는 자와 함께 수첩에 끼웠다. 수틀을 가져가겠느냐는 물음에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물건을 살펴야 하니까. 두 손을 비워 둘게.”

문밖에서 시녀가 출발할 때가 되었다고 알렸다.

엘리네는 수첩을 마리엔에게 맡기고 복도로 나갔다.

◊

본궁의 접견실 앞에는 바자에 물건을 낸 귀부인들이 서 있었다. 시종이 이름을 읽으면 앞으로 나와 인사를 올렸다.

엘리네는 같은 자리에서 답례했다.

“올해도 맡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께서 살펴 주시니 저희가 감사하지요.”

인사를 마친 부인이 물러났다. 뒤에서 기다리던 사람이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탁자 한쪽에는 비어 있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엘리네가 앉을 자리 옆이었다. 시녀가 그 앞에 찻잔을 놓으려다 다른 시녀의 눈짓을 받고 거두었다.

황태후가 없는 황궁에서도 의전표는 바뀌지 않았다. 빈자리에는 꽃을 놓았고, 그 몫의 인사는 엘리네가 받았다.

마지막 부인이 물러나자 의전 담당 시종이 다가왔다.

“바자 물품을 살펴보실 시간입니다.”

“상자부터 볼 수 있을까요?”

시종이 잠시 명단을 내려다보았다.

“진열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상자에 남은 것도 빠뜨리지 않고 보려고요.”

엘리네가 먼저 안쪽으로 걸었다. 시종은 명단을 넘기며 따라왔다.

진열대에는 레이스와 수놓은 장갑, 작은 장식품이 놓여 있었다. 바닥의 상자에는 모직 천이 들어 있었다. 품목표를 들어 보니 천의 길이만 적혀 있었다.

“이것도 오늘 파는 건가요?”

“팔리지 않으면 구휼소에 보낼 예정입니다.”

엘리네가 천 끝을 만졌다. 접힌 곳이 두꺼워 손가락 사이에서 잘 펴지지 않았다.

“구휼소에서 필요한 물건을 적어 보낸 게 있나요?”

시종이 뒤의 서기에게 손을 내밀었다. 서기가 서류를 찾아 건넸다.

『덮개, 덧신, 아이들 겨울옷.』

엘리네는 천을 도로 접었다.

“이건 덧신에 쓰면 좋겠어요. 팔 물건과 나눠 주세요.”

“값을 정해 둔 물품입니다만…….”

“제가 그 값으로 사겠어요. 잘라 보내면 받는 곳에서도 쓰기 편할 거예요.”

서기가 펜을 들었다. 엘리네는 바닥에 있던 상자를 가리켰다.

“구휼소로 가는 물건은 여기에 모으고요. 마차에 실을 때 섞이지 않게 표시해 주세요.”

누군가 뒤에서 엘리네의 자비를 칭찬했다. 엘리네는 다음 품목표를 들었다. 상자 하나가 비어야 바닥에 놓인 다른 천까지 꺼낼 수 있었다.

마리엔이 다가와 수첩을 펼쳤다.

“적어 드릴까요?”

“보낼 곳만. 물건 수는 서기가 적고 있으니까.”

마리엔이 품목표의 주소를 옮겨 적었다. 엘리네는 탁자 가장자리에 걸린 레이스를 안쪽으로 밀어 놓고 다음 진열대로 갔다.

◊

차 모임에 들어갈 때는 잔이 모두 놓여 있었다.

엘리네가 앉자 귀부인들도 자리를 잡았다. 시녀들이 차를 따르는 동안에는 찻주전자 내려놓는 소리만 났다.

“어젯밤 연회가 아주 훌륭했습니다.”

맞은편 부인이 먼저 말했다.

“돌아가는 마차에서도 음악 이야기를 했지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에요.”

엘리네는 잔의 손잡이를 잡았다. 창가에서 햇볕이 들어와도 차가 놓인 탁자는 서늘했다.

다른 부인이 설탕 집게를 내려놓았다.

“대공 전하께서 오실 줄은 몰랐어요. 귀환 소식은 들었지만 연회에 바로 나오실 줄이야.”

“북부에서는 연회복을 입을 일도 없으셨겠지요.”

“예복도 검은색이었잖아요.”

짧은 웃음이 오갔다. 엘리네는 잔을 받침에 놓았다.

“오랫동안 북부에 계셨다고 들었어요.”

귀부인들의 시선이 모였다. 엘리네는 찻잔 옆에 놓인 과자 접시를 조금 옮겼다.

“귀환을 축하하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어제는 인사할 분들이 많으셔서요.”

“3년 만이지요. 회색 고개에서 돌아오신 뒤에도 계속 북부에 남으셨으니까요.”

회색 고개.

엘리네의 손이 접시에서 떨어졌다.

노르덴에서 그 고개를 올려다본 적이 있었다. 눈이 내리면 낮은 산길부터 가려졌다. 먼 곳에서 보이는 능선만으로는 어느 길이 막혔는지 알 수 없었다.

“겨울 행군이었다면서요.”

옆자리 부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돌아온 분들이 한동안 말을 못 탔다고 들었어요. 발을 많이 다쳐서요.”

“이런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요.”

나이가 든 부인이 말을 잘랐다. 차를 따르던 시녀의 손도 잠시 멈췄다.

엘리네는 잔에 시선을 두었다.

어젯밤 칼릭스가 황제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예복 깃 위로 흰 흉터가 보였다. 왼쪽 목이었다. 춤이 끝난 뒤에야 본 자국이었다.

“황후 폐하께서는 고개를 아시겠군요.”

엘리네가 고개를 들었다.

“노르덴 쪽 길은 조금 알아요.”

“겨울에도 지날 수 있는 길인가요?”

“고개 아래와 위는 날씨가 달라요. 아래에서 눈이 그쳐도 위에는 쌓이고요.”

말이 빨라지려 했다. 엘리네는 잔에서 손을 떼었다.

“출발하기 전에 확인해야 해요.”

“그렇군요.”

부인은 더 묻지 않았다. 엘리네의 대답을 기다리던 얼굴들이 찻잔으로 돌아갔다.

누군가 바자에 나온 장갑 이야기를 꺼냈다. 손목에 단 진주가 너무 커서 일상에 끼기는 어렵겠다는 말이었다.

엘리네는 장갑의 색을 물었다. 대화는 곧 레이스와 자수로 옮겨 갔다.

그때 오른쪽에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젊은 부인이 몸을 일으키다 소매로 찻잔을 건드렸다. 차가 탁자를 지나 무릎 쪽으로 흘렀다. 부인이 의자를 뒤로 밀었다.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시녀가 쟁반을 내려놓으려 했지만 뒤에 선 사람과 자리가 겹쳤다. 엘리네는 마리엔이 들고 있던 수첩에서 압지를 뺐다.

접힌 종이를 펴 젖은 탁자 위에 놓았다.

“잔은 제가 잡고 있을게요. 옷부터 보세요.”

부인이 치맛단을 들었다. 엘리네는 접시 아래로 번지는 차에 압지를 한 장 더 댔다. 종이 가장자리까지 갈색 물이 스몄다.

시녀가 수건을 가져왔다. 엘리네는 잔을 건네고 손을 물렸다.

“데지는 않으셨어요?”

“네. 식은 차라서 괜찮습니다.”

부인이 젖은 소매를 누르며 대답했다. 맞은편에서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부인의 시선이 압지에 머물렀다.

“그건 무엇인가요?”

“압지예요.”

“편지에 쓰는 건가요?”

“네. 저는 지도를 그릴 때도 써요. 잉크가 마르기 전에 손에 묻지 않게요.”

말하고 나서야 엘리네는 수첩을 덮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안쪽에는 접는 자가 끼워져 있었다.

부인의 눈이 자로 옮겨 갔다.

엘리네는 젖지 않은 종이를 골라 수첩에 넣었다. 젖은 압지는 시녀가 가져온 빈 쟁반 위에 놓았다.

“차도 잘 스미네요.”

잔을 엎은 부인이 말했다. 소매를 누르던 손이 조금 내려갔다.

“손수건을 주셨다면 제가 망가뜨렸을 거예요.”

“종이는 마르면 버리면 돼요.”

“다음에는 저도 챙겨야겠어요.”

맞은편 부인이 웃으며 냅킨을 펼쳤다.

“오늘 바자에는 없는 물건이군요.”

“남은 종이가 있으면 나눠 드릴게요.”

엘리네가 답하자 잠깐 끊겼던 대화가 이어졌다. 시녀는 젖은 찻잔 받침까지 바꾸고 물러났다.

새 차가 놓였지만 엘리네는 곧바로 들지 않았다.

압지를 꺼낼 때 주머니에 든 컴퍼스가 허리에 닿았다. 손을 내려 주머니 위를 누르자 천 아래로 가죽집의 모서리가 만져졌다.

옆자리 부인이 물었다.

“손에 차가 묻으셨나요?”

“아니요. 괜찮아요.”

엘리네는 손을 탁자 위로 돌려놓았다.

모임이 끝날 때까지 지도 이야기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

황후궁으로 돌아오자 마리엔이 수첩부터 펼쳤다.

“다행이에요. 종이가 젖지는 않았어요.”

“압지는 다 썼니?”

“깨끗한 건 조금 남았어요. 그런데 공주님, 다음에는 제가 수건을 빨리 가져올게요.”

“가까이 있는 걸 쓴 거야.”

마리엔은 말없이 수첩에서 자를 꺼냈다. 접힌 마디에 차가 묻었는지 살피고 마른 천으로 닦았다.

엘리네는 의자에 앉아 장갑을 벗었다.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에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 엄지로 문질러도 단단한 부분은 그대로였다.

오늘 인사를 나눈 사람 중에는 지도를 본 사람이 없었다.

압지와 자를 본 사람은 있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을까요?”

마리엔이 물었다.

엘리네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말?”

“돌아오는 길에 시녀가 물어서요. 공주님이 노르덴에서 산길을 다니셨다고 했어요.”

“사실인데 괜찮아.”

“지금도 그리시냐고 해서, 그건 못 들은 척했어요.”

엘리네는 장갑을 포개 놓았다.

“다시 물으면 모른다고 해. 너도 내가 오늘 무엇을 그릴지는 모르잖아.”

마리엔이 책상 쪽을 보았다. 어젯밤 내놓은 접는 자가 놓일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럼 이건 여기 둘게요.”

시녀가 자를 내려놓았다.

복도에서 엘리네를 찾는 소리가 났다. 오후 의례에 쓸 답서를 확인받으러 온 서기였다. 마리엔이 서류를 받아 왔다.

엘리네는 첫 장부터 읽었다. 바자 물품을 낸 집안에 보낼 감사 인사였다. 끝에 적힌 황제 부부의 이름 아래로 서명할 자리가 있었다.

“오늘 안에 보내야 한대요.”

“읽고 줄게.”

엘리네는 문구를 고치지 않았다. 같은 감사 인사가 집안마다 되풀이되었다. 이름과 물품이 맞는지 확인한 뒤 서명했다.

마지막 장을 건네자 마리엔이 물었다.

“이제 지도 손보실 거예요?”

“응. 풀과 붓을 가져다줄래?”

문이 닫힌 뒤 엘리네는 보관함을 열었다.

강이 그려진 지도를 꺼내려다 손을 멈췄다. 오늘 귀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겨울 행군에서 돌아온 뒤 말을 타지 못한 사람들.

엘리네는 강 대신 회색 고개 아래 산길이 든 지도를 폈다.

자신이 걸어 본 곳에는 날짜와 날씨를 적어 두었다. 비가 내린 날, 물이 불어난 곳, 돌아서 내려온 길. 제 손으로 적은 글씨를 따라 손가락을 옮겼다.

고개 위쪽은 이 지도에 없었다.

엘리네는 빈 종이를 옆에 놓고 노르덴에서 가져온 지도 목록을 뒤졌다. 북쪽 능선이 든 장을 찾아 붙였지만, 국경 너머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황궁 도서관에는 북부 자료도 있을 터였다.

엘리네는 수첩을 당겨 도서관에서 찾을 것을 적었다.

『회색 고개. 겨울 통행 기록.』

펜을 놓은 뒤 허리 주머니에서 가죽집을 꺼냈다. 노르덴을 떠나던 날 아버지가 직접 넣어 준 컴퍼스였다. 은 표면에는 오래 써서 생긴 흠집이 남아 있었다.

엘리네는 컴퍼스를 지도 위에 대었다. 거리를 재려면 먼저 다리를 벌려야 했다.

엄지로 경첩을 받치고 천천히 열었다.

안쪽에 새긴 글씨가 드러났다.

『길은 내가 정한다.』

(3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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