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황궁 공보: 양국의 우의를 담은 황실 서한을 봉한다.』
“손에 뭘 쥐고 있소?”
엘리네는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 경첩에 눌린 자리가 아팠다.
“컴퍼스예요.”
“서명하는 데 그런 것도 쓰나?”
“늘 지니고 다녀요. 아버지께 받은 거라서요.”
아드리안은 손을 내밀지 않았다. 서한을 당겨 서명부터 살폈다.
“꿀 이야기도 적으시오. 그대 말 때문에 사람을 다시 부를 수는 없으니.”
엘리네는 펜을 들었다. 꿀을 잘 받았고, 아버지의 건강을 바란다고 썼다. 종이 아래에 빈 곳이 조금 남았다.
펜촉을 받침에 내려놓자 황제가 서한을 가져갔다.
“이제 가 봐도 좋소.”
“예, 폐하.”
엘리네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창 아래 탁자로 눈을 돌리지 않고 문까지 걸었다.
문밖에서 마리엔이 겉옷을 펼쳤다.
“오래 걸리셨네요. 손이 차세요?”
“주머니에 넣고 있었어.”
마리엔이 소매를 잡아 주었다. 손을 넣는 동안 서재 안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났다.
“노르덴행 문서는 함께 봉하라고 해.”
황제의 말에 시종이 대답했다. 마리엔이 엘리네의 옷깃을 여몄다. 엘리네는 시종이 문을 닫을 때까지 서 있었다.
◊
황후궁의 저녁 식탁에는 수프와 익힌 채소가 놓였다.
엘리네는 숟가락으로 수프를 떴다가 내려놓았다. 식탁 건너편 의자는 비어 있었다. 시녀가 빵 접시를 가까이 밀어 주었다.
“다른 것으로 가져올까요?”
“아니에요. 이것이면 돼요.”
엘리네는 빵을 조금 떼어 먹고 물을 마셨다. 시녀가 접시를 거두어도 좋을지 눈으로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마리엔이 머리핀을 빼 주었다. 거울 아래에는 낮에 쓰던 수틀이 놓여 있었다. 자른 실 끝이 천 밖으로 나와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실 거죠?”
“응. 서류함을 가져다줘.”
“어느 것을요?”
“노르덴에서 올 때 가져온 것. 인장 달린 서류가 든 함.”
마리엔이 옷장 아래에서 함을 꺼냈다. 엘리네는 열쇠를 찾아 뚜껑을 열었다.
혼인 때 오간 문서와 물품 목록이 차례로 들어 있었다. 노르덴에서 실어 온 가구, 겨울옷, 은식기. 엘리네는 목록을 들어 옆에 놓고 밑에 깔린 종이를 꺼냈다.
동맹 조약 사본이었다.
마리엔이 탁자의 수틀을 치웠다. 엘리네는 조약을 펼치고 접힌 자리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더 필요한 건 없으세요?”
“편지지하고 봉투를 꺼내 줘.”
마리엔이 서랍을 열었다. 황후의 문장이 찍힌 봉투가 먼저 나왔다. 엘리네는 그 아래에 있는 작은 봉투를 가리켰다.
“그것도.”
두 종류의 봉투가 탁자에 놓였다. 어느 쪽도 노르덴까지 혼자 갈 수는 없었다.
엘리네는 펜을 고르다가 손을 멈췄다.
“내가 아버지께 쓴 편지, 오늘 서한과 같이 보낼 수 있을까?”
“시종장께 여쭤볼게요.”
“봉하기 전에 가져가야 하겠지?”
마리엔이 편지지의 모서리를 맞추었다.
“지난번에도 펼쳐서 달라고 하셨어요. 사사로운 안부라도 외국으로 가는 편지는 확인해야 한다고요.”
“알아. 이번에도 같은지 물은 거야.”
“확인하고 올까요?”
엘리네는 빈 편지지를 보았다. 시종장을 불러도 바뀔 일은 없었다.
“아니. 늦었으니 내일 하자.”
◊
마리엔은 잠시 뒤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잔 위에서 김이 났다. 우유 냄새 뒤로 익숙한 꿀 냄새가 났다.
“조금 드세요. 저녁을 거의 안 드셨잖아요.”
“꿀을 넣었어?”
“노르덴에서 온 것으로요.”
마리엔이 잔을 내려놓다가 받침을 바로 잡았다. 숟가락에 남은 꿀이 손등에 묻었다.
“앗.”
엘리네가 손수건을 건넸다.
“뜨거운 게 묻었어?”
“아니요. 꿀이에요. 제가 뚜껑을 제대로 못 닫아서…….”
“닦고 앉아.”
마리엔은 손을 닦고도 서 있었다. 엘리네가 옆 의자를 빼 주자 그제야 쟁반을 무릎에 놓고 앉았다.
“많이 넣지는 않았어요. 바닥에 가라앉았을 수 있으니 저어서 드세요.”
엘리네는 숟가락을 들었다. 잔 안쪽을 건드리지 않게 천천히 저었다.
“너도 마셨니?”
“저는 괜찮아요.”
“작은 잔에 덜어 가. 남겨 두면 식겠어.”
마리엔은 쟁반에 받쳐 온 빈 잔을 보았다. 우유가 넘칠까 봐 가져온 잔이었다.
엘리네가 우유를 나누어 따랐다. 마리엔은 두 손으로 잔을 받았다.
“왕궁 부엌에서는 꿀을 더 넣어 줬는데요.”
“네가 계속 졸랐으니까.”
“공주님 것도 제가 받아 왔잖아요.”
마리엔이 잔을 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황후 폐하 것도요.”
“여기서는 그냥 불러도 돼.”
마리엔이 우유를 조금 마셨다. 윗입술에 묻은 것을 손수건으로 닦다가 탁자 위의 조약을 보았다.
“노르덴에서 무슨 소식이 왔어요?”
“아니. 예전에 가져온 거야.”
“국왕 전하께서 편지를 받으시면 좋아하시겠어요. 꿀이 입에 맞는지 걱정하셨을 거예요.”
엘리네는 잔을 들어 입술에 댔다. 따뜻한 우유가 혀에 닿았다. 꿀은 더 넣지 않아도 충분했다.
“아까 잘 받았다고 썼어.”
“그럼 됐네요.”
마리엔은 빈 잔을 쟁반에 놓았다. 엘리네의 잔은 아직 절반이 남아 있었다.
“다 드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가서 쉬어. 잔은 여기에 둘게.”
“옷 갈아입으시는 건 도와드려야죠.”
엘리네는 조약에서 손을 떼었다. 마리엔이 잠옷을 가져오는 동안 잔을 비웠다.
옷을 갈아입고 나자 겉옷 주머니에서 컴퍼스가 나왔다. 마리엔이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엘리네는 문이 닫힌 뒤에야 컴퍼스를 편지지 옆으로 옮겼다.
◊
겨울 첫째 달 7일 밤이었다.
엘리네는 잠자리에 들지 않고 탁자 앞으로 돌아왔다. 의자에 걸친 숄을 어깨에 두르고 펜에 잉크를 묻혔다.
『아버지께.』
그 아래로는 쓰지 못했다.
날짜와 장소를 적으면 됐다. 봄 첫째 달 10일, 회색 고개. 군사 3만. 알아야 할 것은 길게 쓸 필요도 없었다.
엘리네는 봉투를 당겼다.
겉에 황후의 인장을 찍어도 소용없었다. 시종장은 편지를 받아 외교 문서 담당자에게 넘겼다. 확인이 끝나야 제국의 행낭에 들어갔다. 노르덴에서 온 답장도 같은 손을 거쳐 황후궁에 도착했다.
엘리네는 작은 봉투를 뒤집었다. 문장이 없는 봉투도 다르지 않았다.
시녀에게 맡기면 황후궁 문에서부터 누구에게 보내는지 물을 게 뻔했다. 마리엔을 시켜 편지를 숨기게 할 수는 없었다.
엘리네는 펜을 다시 들었다.
『봄에도 고개에는 눈이 남겠지요.』
노르덴에서 온 편지에 몇 번이나 적혀 있던 말이었다. 아버지는 산 아래 마을의 안부를 전할 때마다 어느 길이 열렸는지도 알려 주었다.
이 문장을 읽고 군사가 온다는 뜻까지 알아볼 수 있을까.
엘리네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을 전하려면 위험이라고 써야 했다.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모르면 군사를 모을 수도, 마을 사람을 옮길 수도 없었다.
종이를 옆으로 밀었다.
엘리네가 편지를 숨겨 보냈다는 사실만 남고 노르덴에는 닿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면 서재의 지도를 다시 볼 기회부터 없어질 터였다.
엘리네는 펜촉을 닦았다. 잉크가 묻은 천을 접은 뒤 새 편지지에 평범한 안부를 적었다.
우유에 꿀을 타 마셨다고 썼다. 마리엔도 잘 지낸다고 덧붙였다.
다 쓴 편지는 봉투에 넣지 않았다.
엘리네는 첫 편지와 나란히 놓고 오랫동안 내려다보았다. 한쪽에는 보내지 못할 문장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보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말만 있었다.
◊
조약은 여러 장이었다.
엘리네는 양국 국경에 관한 항목을 찾아 손가락으로 짚었다. 경계에 세운 표석, 상인이 지나는 길, 군대가 통과할 때 필요한 사전 통보가 적혀 있었다.
회색 고개도 이름이 올라 있었다.
엘리네는 다음 장을 넘겼다.
『양국은 상대의 국경을 군사로 침범하지 않는다.』
아래에는 노르덴과 아르벤이 서로 보장할 일이 이어졌다. 노르덴은 산길을 지나는 제국 상인의 통행을 도왔다. 아르벤은 노르덴의 국경을 지켜 주기로 했다.
엘리네는 종이를 가까이 당겼다.
국경을 지켜 줄 군대가 그 국경을 넘어온다면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조약 끝에는 황제의 서명과 아버지의 서명이 있었다. 엘리네는 아버지가 길게 내려 쓴 마지막 획을 손끝으로 짚었다.
잉크는 오래전에 말라 있었다.
엘리네는 빈 종이에 항목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침범 금지. 군대 통과 전 통보. 동맹국의 영토 보호.
적고 보니 서재에서 본 화살표가 어느 항목에도 맞지 않았다.
아직 병사들이 국경을 넘은 것은 아니었다. 계획을 세운 것만으로 조약을 어겼다고 할 수 있는지, 엘리네는 문장을 다시 읽었다.
계획에 관한 말은 없었다.
황제에게 직접 묻는다면 훈련이라고 답할 수도 있었다. 북쪽을 지키기 위한 준비라고 해도 반박할 종이가 엘리네에게는 없었다.
천 아래에 있던 지도를 가져온 것도, 베껴 온 것도 아니었다.
엘리네는 회색 고개라고 썼다. 아래에 탈로를 적고 그 사이에 선을 그었다.
고개에서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곧지 않았다. 돌아가야 하는 바위와 물이 고이는 자리를 표시하자 종이가 모자랐다. 엘리네는 손을 멈추고 펜을 놓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길을 자세히 그리는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지도를 보았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황제의 서재에 들어간 까닭과 혼자 남은 시간부터 물을 터였다. 엘리네가 아니라 황제에게 확인하러 갈 수도 있었다.
문밖에서 발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조약 위에 빈 종이를 덮었다. 문 앞에서 소리가 멎었다가 멀어졌다. 복도를 돌던 시녀의 걸음이었다.
엘리네는 덮었던 종이를 다시 치웠다.
황후궁 안에서도 말할 사람을 고르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으로 움직이는 병사들을 멈추라고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조차 뜻대로 봉하지 못했다.
엘리네는 조약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서명을 한 사람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옆 본궁에 있었다. 물으러 가는 길은 가까웠다. 대답을 들은 뒤 노르덴에 알릴 길은 여전히 없었다.
서류함 뚜껑을 닫으려다가 손을 거두었다.
안부 편지를 꺼내고, 조약 사본을 그 자리에 다시 펼쳐 두었다.
◊
방이 추워졌을 때 엘리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난로의 불이 줄어 있었다. 사람을 부르려다가 줄을 놓았다. 물병에서 잔에 물을 따르고 창가로 갔다.
유리 안쪽에 김이 서렸다. 손수건으로 닦자 맞은편 복도의 등이 보였다.
엘리네는 돌아와 지도에 적힌 숫자를 따로 썼다.
『봄 첫째 달 10일. 군사 3만.』
종이를 접지 않고 조약 아래에 넣었다. 남이 가져갈 수 있는 서랍 대신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두었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탁자에는 노르덴 꿀이 묻은 숟가락이 남아 있었다. 마리엔이 쟁반을 들고 가며 빠뜨렸다.
엘리네는 숟가락을 빈 잔에 넣었다. 잔이 울리지 않게 손으로 받쳤다.
조용해지자 도서관에서 들었던 칼릭스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400명이 아니라 412명이라고 했다.
엘리네는 조약 아래로 나온 종이 끝을 보았다. 병력은 3만이라고 적혀 있었다. 제국이 고개를 넘으면 노르덴의 군사도 산으로 올라올 터였다. 좁은 길에서 양쪽이 마주칠 자리 아래에 탈로가 있었다.
창밖의 등이 하나씩 꺼졌다.
엘리네는 의자를 창 쪽으로 옮겼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려 숄을 여몄지만,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날 때마다 눈을 떴다.
이 궁에서 북쪽 산길을 아는 사람이 더 있었다.
황후와 단둘이 있는 걸 보이면 안 된다고 했다.
엘리네는 의자 팔걸이에서 손을 내렸다. 서재에서 본 것을 말한다면 칼릭스는 어떤 답을 할까. 황제의 동생에게 황제의 군사 지도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탁자로 돌아가 안부 편지 끝에 이름을 썼다. 인장은 찍지 않았다.
창밖이 밝아 오고서야 밤이 지난 것을 알았다.
엘리네는 창문 걸쇠에 손을 얹었다. 밖에서는 근위병이 교대하고 있었다. 닫힌 창 너머로 짧은 구령이 들렸다.
서쪽 담 밖에 대공 저택의 지붕이 보였다.
엘리네는 유리에 남은 김을 마저 닦았다.
대공 저택 창에도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7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8일, 지도 감정 자료를 대조한다.』엘리네는 장갑 끝을 당기던 손을 멈췄다.칼릭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통로에서 비켜섰다. 문밖에서 마리엔이 외투를 들고 있었다. 엘리네는 칼릭스의 소매에 남은 주름을 더 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자료가 준비되면 황후궁으로 보내 주세요.”“직접 가져가겠습니다.”엘리네는 문턱 앞에서 돌아보았다.“그럼 제가 볼 수 있는 시간으로 정하겠어요.”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엘리네는 마리엔이 펼쳐 준 외투에 팔을 넣었다. 장갑 안에서 손가락을 폈다가 다시 모았다.◊겨울 첫째 달 28일 밤, 엘리네는 지도실 탁자에서 바느질 바구니를 치웠다.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옮겼다. 탁자 옆에 나란히 놓으려는 것을 엘리네가 막았다.“맞은편에 놓아 줘.”마리엔은 의자를 탁자 건너로 가져갔다. 등받이가 벽에 닿지 않는지 살핀 뒤 앉는 자리를 손으로 쓸었다.“문지기는 자료 대조라고 적었어요.”“뭐라고 물었어?”“왜 응접실을 안 쓰시냐고요. 지도를 아래로 옮기면 접힌다고 했어요.”탁자에는 펼친 종이와 접는 자가 놓여 있었다. 응접실 탁자로는 종이 끝을 받치기 어려웠다. 문지기가 올라와 보더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엘리네는 등불을 옆으로 밀었다.“네가 불편하면 안 해도 돼.”마리엔은 찻주전자의 뚜껑을 눌러 보았다.“저는 문 앞에 있으면 돼요?”“누가 오면 문을 두드려 줘. 막으려고 하지는 말고.”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