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로맨스 / 이별전문가! 신나리 / Chapter 11 -الفصل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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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فصول

11. 두 사람이 마주 앉은 자리

점심 무렵, 햇살이 낮게 기울어 카페 안쪽 바닥에 긴 그림자를 눌러 놓았다. 바깥 거리는 이미 봄의 냄새가 묻어나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옷차림에는 여전히 겨울의 무게가 남아 있었다. 오늘은 수경과 재희가 직접 마주 앉는 날이었다. 전날 밤, 그녀는 짧은 메시지로 시간을 미뤘다. 내일 낮에 카페에서 보자. 그 한 문장이 만들어낸 공간이 오늘의 무대를 열었다.나는 새벽부터 카페의 구조를 다시 점검했다. 햇빛이 들어오는 각도, 출입문과 창가 자리의 시선 교차, 음악의 볼륨까지. 불필요한 긴장을 덜어내려면 배경이 먼저 단정해야 했다. 제하는 창가 오른쪽 끝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펼쳐 두었다. 겉으로는 업무에 집중하는 손님이었지만, 사실 그의 시선은 출입문과 재희의 동선을 예리하게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먼저 도착한 사람은 수경이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한결 차분한 얼굴로 들어와 자리를 골랐다. 검은색 니트에 짙은 회색 코트를 걸친 모습은 단순했지만, 어쩐지 단단해 보였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밖을 한참 바라보다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내가 카운터 너머에서 가볍게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짧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문이 열리며 찬 바람이 스쳤다. 어깨를 곧게 편 남자가 들어왔다. 재희였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그녀의 자리로 향했다. 앉는 순간, 의자가 짧게 삐걱거렸고, 그의 눈빛은 곧장 그녀를 찔렀다.“어제 왜 전화를 안 받았어.”첫마디는 질문이 아니라 추궁이었다. 수경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늦은 시간에 통화하는 건 서로에게 좋지 않다고 생각했어.”“좋지 않다니? 난 걱정했는데.”“걱정과 구속은 달라. 어젯밤엔 그 차이를 확인하고 싶었어.”그의 표정이 굳어졌다.나는 바리스타처럼 컵을 닦는 시늉을 하며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작은 차이에서 갈라지는 선이, 오늘을 갈무리할 열쇠였다.“너 요즘 달라졌다.”재희가 낮게 말하자, 수경은 잔을 들어 올리며 짧게 웃었다.“그래. 달라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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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당신의 이별을 대신해 드립니다

하루가 길게 늘어져 저녁이 가까워올 무렵, 카페 안쪽은 은근한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낮 동안 수경의 이별이 매듭지어졌지만,그녀가 떠난 자리엔 설명할 수 없는 공기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분명 의뢰인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나도 누군가의 이별을 돕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간 사람은, 의뢰인이 아니라 동료에 가까운 존재로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그 여운 속에서 컵을 정리하고 있었다.제하는 창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종 그가 그랬듯, 무심한 척하지만 사실은 내 표정을 읽는 중이었다. “오늘 네가 조금 흔들렸어.”그 말에 나는 손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내가?”“응. 그녀가 네 말을 고스란히 따라 했을 때. 마치 네가 거울을 보는 것처럼 보였어. 너 닮은 사람을 만나면, 감정이 흐려지는 거 알아?”나는 차갑게 식은 머그를 치우며 웃었다. “흐려진 게 아니라, 단순히 겹쳐 보였던 거야. 그녀도 나처럼 자기 숨을 찾고 싶었던 거니까.”제하는 대꾸하지 않고, 그냥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나를 꿰뚫고 있었다.카페 문이 열리며 손님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반사적으로 환한 미소를 지었지만, 그가 주문을 끝내고 떠난 뒤에도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문이 닫히자 다시 고요가 돌아왔고, 제하는 노트북을 펼쳐 일정을 확인했다.“내일은 쉬어야 해. 의뢰 없는 날도 필요하잖아.”“쉬면 뭐해. 계속 생각나는데.”“그래도 쉬어. 네 머리, 숨 좀 줘야지.”그가 그런 말을 할 때면, 늘 대학 시절이 떠올랐다. 술에 취한 내 어깨를 잡고 집 앞까지 데려다주던 모습, 연애 문제로 흔들릴 때마다 묵묵히 옆에 앉아 있던 그림자 같은 존재. 그는 늘 나보다 먼저 나의 무너짐을 감지했고, 내가 깨닫기 전에 먼저 받쳐주는 사람이었다.나는 괜히 카페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초침이 가볍게 움직일 때마다 오늘 하루의 무게가 줄어드는 듯 보였다. 그런데 그때, 주머니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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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림자처럼 다가온 이름

창밖으로 내리는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길게 흘러내렸다. 오후 내내 내린 비는 거리를 흐릿하게 만들었고, 카페 안쪽의 불빛조차 탁한 안개 속에서 조금은 어둡게 느껴졌다. 컵을 닦으며 바깥을 바라보던 나는, 오늘 하루가 평소보다 더디게 흐른다는 걸 느꼈다. -날씨 탓일까, 아니면 마음속의 무거움 때문일까.문이 열리자 습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틈으로 낯익은 얼굴이 들어섰다. 수경이었다. 그녀는 어제보다 훨씬 가벼운 옷차림이었지만, 표정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고개를 들며 나를 바라보더니 곧장 자리를 잡았다.“여기 오면 숨이 조금은 쉬어져요.” 그녀가 말을 꺼냈다.“오늘은 어떤 하루였나요?” 내가 묻자,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대답했다.“조용했어요. 하지만 조용한 게 오히려 더 불안했어요. 그 사람한테서 연락이 없었거든요. 원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와 메시지를 쏟아내던 사람이었는데….”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계가 끝날 때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예요. 통제하려는 손길이 갑자기 느슨해지면, 사람은 오히려 공허를 느끼죠. 그 공허가 당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거예요.”수경은 손가락으로 잔 표면을 천천히 문질렀다. “혹시… 그가 다시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이미 끝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또 붙잡으면….”“그럴 때는 새로운 질서를 보여주는 게 필요해요.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야 해요.”그녀는 눈빛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 제가 지켜야 할 선.”그 순간 카페 문이 다시 열렸다. 빗소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키가 크고, 우산을 접으며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내 심장이 순간 철렁 내려앉았다. 재희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수경을 발견했고, 잠시 멈칫한 뒤 다가왔다.“여기 있었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엔 여전히 불안이 숨어 있었다.수경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커피 마시고 있었어.”그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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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름 없는 안부

비가 그치자 거리는 서서히 제 빛을 되찾았다. 새벽까지 젖어 있던 도로가 햇살에 반짝이며 말라가고,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사람들의 발걸음도 다시 분주해졌다. 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눅눅하게 젖어 있었다. 전날 밤, 휴대폰에 남겨진 짧은 문장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리야, 비 오니까 네가 더 생각나.'아침 카페 문을 열자 습기 섞인 바람이 먼저 맞아들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시키고, 익숙한 동작으로 커피머신을 예열했다. 손끝이 부드럽게 움직였지만 마음은 고요하지 않았다.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떨림이 피부 밑에서 가늘게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오늘 표정이 별로네.”낮게 깔린 목소리가 카운터 건너편에서 들려왔다. 제하였다. 그는 이미 들어와 의자에 앉아 있었고, 내린 아메리카노를 손으로 감싸 쥐고 있었다.“괜찮아.” 짧게 대답했지만, 그는 눈썹을 찌푸렸다.“괜찮아 보이지 않아서 하는 말이야. 어젯밤에도 메시지 왔지?”나는 대답하지 않고 컵을 정리했다. 그러나 침묵은 곧 대답이 되었다. 제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네가 계속 피하는 사이, 그 번호는 점점 더 집요해질 거야. 지금이라도 확인하자. 누군지.”“무서워서 그래. 만약… 진짜라면? 정말 온유라면?”그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럼?”“그럼…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전부 흔들릴 것 같아.”말이 끝나자 카페 안은 적막에 잠겼다. 기계가 내뿜는 증기 소리만 희미하게 울렸다. 제하는 컵을 내려놓고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나리야, 넌 늘 남의 이별만 지켜주면서 정작 네 이별은 멈춘 채 살아왔어. 이제는 마주할 때도 됐어. 네가 도망치면, 결국 더 아프게 찾아올 거야.”나는 시선을 피했다. 그의 말은 옳았다. 하지만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여전히 내겐 부족했다.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맑은 바람이 들어왔다. 수경이었다. 그녀는 어제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었다. 눈가엔 여전히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걷는 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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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우산을 접는 순간

낮의 햇살이 유난히 차가웠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그친 뒤라 하늘은 맑았지만, 바람 속엔 아직 축축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카페 앞 인도를 스쳐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모두가 무언가를 향해 부지런히 가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그와 반대로 점점 느려졌다. 전날 밤 창밖에서 본 검은 우산, 그리고 휴대폰에 도착한 긴 문장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커피머신을 닦던 손이 잠시 멈췄다. 어제 그 그림자가 정말 온유였을까. 눈은 확신하지 못했지만, 심장은 벌써 답을 내린 듯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답을 믿어버리면 지금까지 버텨온 시간이 전부 흔들릴 것 같았다.“오늘도 멍하네.”낯익은 목소리가 현실로 나를 끌어냈다. 제하였다. 그는 아침부터 카페에 와 있었다. 노트북을 열어놓고 있었지만, 화면보다 내 얼굴을 더 오래 바라보는 게 분명했다.“어제 본 게 누군지, 아직도 생각 중이지?”나는 대답 대신 컵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는 집요하게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나리야, 네가 겁내는 거 알아. 근데 언제까지 피할 거야? 진짜라면… 더 늦기 전에 마주해야 하지 않을까?”“만약 아니라면?” 내가 낮게 되물었다.“그럼 더 빨리 끝낼 수 있겠지. 네가 붙잡은 환영일 뿐이라는 걸 확인하면.”논리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마음은 쉽게 납득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 두려웠다. 환영이든 현실이든, 그 이름을 다시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내 삶이 달라질 것 같았다.그때 카페 문이 열리며 낯익은 여자가 들어왔다. 수경이었다. 밝은 색 스웨터를 입은 그녀의 얼굴은 며칠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희미하게 번진 웃음이 있었다.“혹시 오늘은 제가 서빙 좀 해도 돼요?”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점점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 동업자처럼 구네.”제하가 농담처럼 거들었다. “차라리 세 사람 이름으로 간판을 바꿀까?”수경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냥 여기가 좋아서 그래요. 여긴 숨이 트이거든요.”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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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지워지지 않는 문장들

밤새 창문을 때리던 바람이 새벽이 되자 한결 잦아들었다. 도로 위에 흩뿌려진 물방울들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고, 그 위를 첫차가 천천히 지나갔다. 그러나 내 눈꺼풀은 단 한순간도 무겁게 감기지 않았다. 온유와 마주친 장면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누군가는 오래 기다리던 이별의 끝에서 안도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날 가로등 아래에서 다시 부른 이름은 안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잊고 지내던 고통이 한꺼번에 되살아난 듯, 가슴이 터질 듯 아팠다.아침이 되어 카페 문을 열었을 때, 제하는 이미 안에 있었다. 그는 커튼을 걷으며 유리창을 닦고 있었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천천히 다가왔다.“한숨도 못 잤지?”나는 억지로 웃었다.“티가 그렇게 나?”“눈 밑이 다 말해주고 있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리야, 지금이라도 정리해야 해. 다시 흔들리면 너 무너져.”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음 한편에서 그의 말이 옳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온유의 눈빛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남긴 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 문장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문이 열리며 맑은 공기가 흘러들었다. 수경이었다. 그녀는 아직 잠이 덜 깬 듯 눈가를 비비며 들어왔다. 그러나 내 표정을 보자 곧장 긴장했다.“어제… 무슨 일 있었던 거죠?”제하가 나 대신 대답했다. “그 사람을 만났어.”수경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 온유 씨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맞아. 그 사람이었어.”수경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조용히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다시 나타난다고 해서, 지난 시간까지 무너지는 건 아니에요. 언니가 지켜온 하루하루가 사라지는 게 아니에요.”그녀의 말은 따뜻했지만, 쉽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지난 하루하루는 내가 온유를 잊기 위해, 그리고 견디기 위해 만들어낸 세계였다. 그런데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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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남겨진 시간, 머물고 싶은 자리

늦은 밤, 카페의 불빛이 꺼지자 남겨진 공기가 한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오늘 하루는 다른 날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온유가 다시 나타났고, 그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내 지난 시간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다. 문을 닫고 의자에 주저앉자, 손끝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컵을 닦던 힘이 풀려 작은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질 뻔했을 때, 제하가 재빨리 잡았다.“이제 그만해.”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오늘은 정리할 힘이 없어 보여. 그냥 앉아 있어.”나는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었다. 눈물이 나오려다 멈추기를 반복했다. 마치 심장이 울컥울컥 북처럼 뛰는 소리가 온 카페를 울리는 것 같았다.수경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내 앞에 따뜻한 물을 놓았다. “나리 언니… 괜찮아요?” 그녀의 눈빛에는 걱정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그녀도 방금 전 장면을 똑똑히 지켜봤으니, 쉽게 마음을 가라앉히기 어려웠을 것이다.나는 겨우 입술을 열었다. “괜찮지 않아. 그런데 괜찮다고 해야 할 것 같아. 그래야… 버틸 수 있을 것 같거든.”말끝이 떨리자 제하의 눈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의자에서 일어나, 카페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 버렸다. 차가운 바람이 잠깐 안으로 들어왔다가 문이 닫히며 사라졌다.그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나를 걱정하면서도 결국 이 자리에선 버티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하는 늘 내 옆에 있었지만, 정작 나는 그 존재를 다 품어주지 못했다.“언니…” 수경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온유 씨랑 다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나는 순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내 안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머리로는 절대 안 된다고 외치는데, 가슴은 여전히 그 이름을 붙잡고 있었다. 결국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만나고 싶다는 말보다… 그냥, 놓을 수 없다는 게 맞을 것 같아.”수경은 그 대답을 듣자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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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균열의 시작

병원 복도를 따라 걸어가는 발소리가 낯설게 메아리쳤다. 하얗게 칠해진 벽과 희미하게 반짝이는 형광등 불빛이 눈을 아프게 했다. 팔꿈치에 걸친 가방이 무겁게 느껴졌지만, 실은 마음이 더 무거웠다. 온유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내 일상은 다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그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숨이 차오르는 듯 가빠졌고, 웃으려 애쓰지만 눈빛 속 피로는 감추지 못했다. 벤치에 앉아 있던 그는 두 손을 무릎 위에 포개며 내게 말했다.“치료는 버티고 있어. 근데 의사가 말했어. 이제는 기적이 필요하다고.”그 순간, 숨이 막히는 듯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대답이 떠올랐지만, 입술은 얼어붙은 듯 열리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 눈은 내가 사랑했던 그때와 같았다. 아니, 더 간절해진 듯했다.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제하가 내 옆에서 묵묵히 걸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팔짱을 낀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그 떨림이 나보다 더 크게 그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제하야.”“응.”“미안해.”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왜 네가 미안해해야 해?”“너한테… 계속 상처 주는 것 같아서.”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상처받는 건 괜찮아. 근데 네가 무너지는 걸 더는 못 보겠어. 그게 더 아프거든.”그 말에 심장이 저릿하게 쿵 내려앉았다. 제하는 늘 내 곁에서 가장 큰 버팀목이었고, 그래서 더 잔인하게 다루게 되는 존재였다. 나는 그의 진심을 모른 척하며 살아왔고, 이제 와서 온유가 돌아오자 그의 마음을 더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카페로 돌아오니 수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커피머신 앞에 서 있다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다가왔다.“언니… 어디 다녀오셨어요?”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온유랑 병원에.”순간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곧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랬군요. 상태는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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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무너뜨리고 싶은 충동

늦은 밤, 카페의 불빛이 꺼지고 문이 닫히자 적막이 서서히 스며들었다. 나는 그 적막을 견디지 못하고 한참을 테이블 위에 손바닥을 올려두고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오늘 병원에서 본 온유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푸석해진 피부, 잠깐 웃다가도 금세 숨을 고르느라 힘들어하는 그의 모습은 ‘끝’이라는 단어를 더 선명하게 만들고 있었다.제하는 계산대에 기대어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복잡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걱정, 화, 안쓰러움이 뒤엉켜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한마디 던졌다.“이제 네 마음을 정해야 해. 두 발로 똑바로 서려면.”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정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누군가를 잃는 일이니까.뒤에서 수경이 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언니, 혹시 오늘도 병원 다녀오셨어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상태가 많이…?”말끝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눈빛이 유난히 날카롭게 느껴졌다. 내가 눈을 피하자, 그녀는 잔을 내려놓고 의자를 끌어앉았다.“언니, 제가 한마디 해도 돼요?”나는 피곤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응.”“이제 그분은 언니보다 자기 병이 더 무겁잖아요. 그 무게를 언니가 다 짊어지면… 언니는 무너져요. 그럼 오빠는요?”그녀의 시선이 순간 제하를 향했다. 마치 무심한 듯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 숨은 감정은 날카로웠다. 제하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나는 애써 웃었다. “수경아, 사람 마음은 그렇게 쉽게 선 긋는 게 아니야.”“맞아요. 그래서 더 위험해요. 누구도 이득 보지 못하는 길로 계속 걸어가는 거니까.”그녀의 말은 정곡을 찔렀다. 그러나 나는 더는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만 떨며 숨을 고를 뿐이었다.며칠 뒤, 병원에 다시 갔을 때 온유는 침대에 기대 앉아 있었다. 창밖의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여전히 웃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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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흔들리는 무대 위

낮에는 이별을 돕는 상담으로 하루를 시작했지만, 머릿속은 조금도 집중되지 않았다. 병원 침대 위의 온유, 그리고 점점 깊어지는 수경의 시선이 마음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의뢰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남편은 제가 아직도 예쁘다고 말해요. 근데 그 말이 더 아프더라고요. 저는 이미 그 사람 눈빛에서 식어가는 걸 알아요. 그래서… 먼저 끝내고 싶어요.”의뢰인은 차분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온유가 했던 말들이 겹쳐졌다. 사랑하지 않는다. 설레지 않는다. 그때는 칼날 같던 말이, 이제는 그의 병을 숨기기 위한 방패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상처는 여전히 아물지 않았다.의뢰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상담을 마친 뒤, 나는 자리에 앉아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제하는 내 표정을 읽더니 조용히 물었다.“아직도 그날 말을 떠올려?”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래. 아무리 이유를 알았다고 해도, 그 순간 무너졌던 나는 그대로 있거든.”그의 눈빛에 안쓰러움이 번졌다. 손을 뻗어 내 손등에 닿으려 했지만, 그 순간 수경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의 눈이 두 사람 사이에 멈추더니 묘하게 굳어졌다.며칠 뒤, 의뢰인의 남편을 관찰하던 중 일이 어긋났다. 나는 평소처럼 멀리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자리를 떠나 낯선 카페로 들어갔다. 급히 뒤따라가자, 이미 수경이 안쪽 자리에 앉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아내분이 힘들어하는 거, 혹시 모르셨나요?”남편은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 난… 잘한다고 생각했는데.”“때론 잘한다고 믿는 게 가장 큰 상처가 돼요.”나는 안쪽으로 들어가 그녀를 불렀다. “수경아.”그녀는 놀란 듯 돌아봤지만, 곧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언니, 그냥 조금만 얘기했어요. 분위기를 보려고.”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지만 속은 서늘해졌다. 이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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