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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웰컴 투 소원리: Chapter 21 - Chapter 30

56 Chapters

21. 틈새가 보이겠지

최 씨는 구멍가게 앞, 낡을 대로 낡아 색이 다 바래버린 자판기 옆 평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위에 길게 늘어진 처마 너머로 내려오는 빗줄기를 구경하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한 손에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가 들려있었고, 그의 앞에는 조금 전 기탁이 방문하며 놓고 간 보온 가방이 있었다. 빈속에 술 마시지 말라는 다정한 잔소리를 늘 꿋꿋이 해대는 양반이었다. 교회에는 전혀 관심 없는 최 씨를 여태 포기하지 않은 끈질긴 인물이기도 했고. 원래 이렇게 반강제로 농사를 쉬어야 하는 날이면 고 이장의 무리가 방문하고는 했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아무도 소식이 없었다.오늘이 나를 빼고 노는 날이던가. 최 씨는 좋은 장소를 제공해 주고, 때때로 공짜로 마른안주나 술을 내어주기도 해서 그들이 자신을 이용 가치로만 보는 걸 알고 있었다. 때때로 그를 아래로 보고, 때때로 그를 뒤에서나 앞에서 대놓고 비웃기도 하면서 최 씨를 종종 모임에 끼워주고는 했다. 남 주려니 아깝고, 진짜 친구로 받아들이자니 그들의 눈에는 최 씨가 한참 모자라 보이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부인이 그를 두고 도망간 버린 후부터 원래도 팽배했던 그들의 업신여김이 더 심해졌다. ‘자고로 성공한 사내라면 옆에 훌륭하게 내조해 주는 부인이 꼭 있어야지.’그런 말을 끝마친 고 이장이나 심 씨의 시선 끝에 걸리는 건 최 씨였다. “후-.”최 씨가 들이마셨던 공기가 연기가 되어 흩어져 나왔다. 아내는 첫째 딸의 아이보는 걸 도와줘야한다며 서울로 떠나버렸다. 딸아이가 육아로 많이 힘들어한다면서 도와야겠다는 이유였다. 그게 벌써 5년 전이었다. 그 사이 둘째 딸도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듣자 하니 아내는 두 집을 오가며 손주들을 봐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갑자기 떠난 후, 그의 아내는 단 한 번도 소원리에 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하게 되는 연락도 용건만 간단히. 최 씨가 그녀의 의중을 떠보기라도 하면, 그녀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그렇다고 아내와 마을 사람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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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좋은 꿈 꾸고

“아으, 으으-.”곤히 잠들어있던 에스더는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눈을 살며시 떴다. 아직 어두운 새벽 시간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어느 공포영화에나 나올법한,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에 에스더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둑이 든 건 아니겠지? 누군가가 인협의 목이라도 조르는 듯한 끔찍한 소리였다. 에스더는 긴장한 채로 옆에 보이는 스탠드를 집어 들었다. 이 정도면 도둑을 아프게 만들 수 있겠지. 그녀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보이는 거실에는 다른 사람의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으으, 아니야. 그만-.” “인협아-.”에스더는 스탠드를 내려놓고서 인협에게 달려갔다. 그의 표정은 매우 고통스러워 보였다. 주룩-. 도통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인협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인협아, 일어나봐. 야-.”에스더가 인협의 어깨를 붙들고 거칠게 흔들어대자, 신음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그때, 인협이 숨을 거칠게 쉬며 눈을 떴다. “괜찮아?”아직도 꿈 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인협은 눈이 살짝 풀린 채로 에스더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가득한 절망과 무력감이 고스란히 에스더에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아, 에스더도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악몽 꿨어?”에스더의 나지막한 물음에 인협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손으로 그의 등을 받쳐서 에스더는 인협의 상체를 일으켜주었다.그러자 인협이 순순히 그녀의 움직임을 따랐다. 그의 등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온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 “무슨 악몽이길래-. 물이라도 한잔 갖다줘?”에스더의 음성은 인협을 달래듯이 절로 부드러워져 있었다. “응, 고마워.”인협의 답에 에스더는 물 한 잔을 준비해 그에게 갖다주었다. 묵묵히 그녀만 기다리던 인협은 그것을 받아서 들자마자 몽땅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에스더는 달빛 아래 보이는 그 모습을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괜찮아?”잔을 내리며 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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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바윗덩어리

“정렬 씨!” “황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많이 늦었죠?”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유림과 정결만 남아 있던 학교에 정렬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깨끗하게 청소된 학교 상태를 고려해 신발을 벗고서 맨발로 들어온 그였다. “아, 괜찮아요. 비가 진짜 많이 내리죠?” “네, 오늘 일이 좀 바빴어요. 늦어서 죄송해요.” “괜찮아요. 지금 오셨으니 됐죠. 그동안 저도 학교 뒷정리하고 있었어요.” “죄송해요.”포터를 운동장에 비스듬하게 세우고 급하게 뛰어오느라 손에 든 우산을 펼치지도 못했던 정렬의 머리카락은 거센 빗줄기에 꽤 젖어있었다. “괜찮아요. 해봤자 집은 걸어서 1분 남짓이라 퇴근이 급할 것도 없는데요.”에스더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는 밖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학교 불을 다 끄는 에스더를 지켜보다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정결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인협이 형은요?” “네?”정결의 물음에 우산을 펼치려던 에스더가 멈칫하고선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인협이 형, 학교에서 지내고 있다고 양 목사님께 지난번에 들었거든요.” “아-.”지난번에 목사님이 반찬 전해줄 때 인협이가 집에서 마주쳤다더니. 에스더는 인협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학교에서 지냈다고 둘러댔다는 사실을 재빨리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녁에 들어오면 제가 문을 열어드리거든요. 어차피 금방 걸어올 수 있는 거리니까요.” “어? 그럼, 낮에는 물새는 집에서 지내는 거예요?”정렬의 순진무구한 눈을 마주한 에스더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하하하, 낮에는 어디에 가 있을까요?” “그나저나, 인협이 형이 잠시 아이들을 가르칠 거라는 소문도 돌던데요.”소문이 참 빨리도 퍼지는 동네야. 에스더는 속으로 새삼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 네. 지난번에 이야기 나누는데 악기도 좀 다룰 줄 아신다고 하셔서 잠시 예체능 쪽을 맡길까 하고요. 당장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요.” “그렇군요.”정렬의 표정에서 이유 모를 아쉬움이 보였다. “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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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아이의 용서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난, 어느 조용한 일식당 안. 180센티미터 남짓한 키에 적당한 체구. 안경을 쓴 남자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상대를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가장 구석진 자리로 향했다. “반갑습니다, 조봉길 코치님.” “우겸 씨, 안녕하세요.”마스크를 쓴 우겸의 인사에 봉길이 화답하고는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어쩌다 제게 연락을….” “지난 5년 동안 몸담았던 케이비에서 반 쫓겨나듯이 코치직을 그만두셨다고 들었어요.”우겸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봉길이 잠시 흠칫했다. 그런 봉길을 기다려주며 우겸은 잔에 물을 따라서 봉길 앞에 놓아주었다. “아…. 네, 그렇게 됐습니다.” “혹시 갑작스러운 인협 씨 퇴출과 관련된 일 때문이었을까요?” “…….” “승부조작건 말이에요.” “…….”봉길보다 열 살은 족히 어리지만, 현재로서는 리그 오브 카오스로 전 세계 1위이자 유일무이한 존재인 우겸이었다. 그의 포커페이스에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한 봉길은 막막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침묵했다. 신뢰 혹은 불신.모두가 쉬쉬하고 넘어갔지만, 몇몇은 진실을 알고 있는 승부조작건을 우겸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가 관건이었다.특히나 내부에서 모든 진실을 보고 들었던 봉길의 입장으로선. 게다가 우겸은 케이비의 오랜 천적인 원티드의 수장이었다. “저와 우겸 씨와 오며 가며 인사도 나눴기에 일면식은 어느 정도 있고, 제가 우겸 씨의 엄청난 팬이기도 하지만 답하기 조심스러운 질문이네요.”그가 택한 전략은 보류였다. 우겸의 반응을 보기 위한 보류. 봉길의 긴장한 시선에 미소 띤 우겸의 얼굴이 담겼다. “아, 제가 중요한 사안인데 너무 다짜고짜 여쭤봤죠?” “사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봉길의 조심스러운 대답에 우겸이 쿡쿡 웃으며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일단은 봉길 코치님을 제가 옮겨갈 새 팀으로 영입하고 싶어요.” “네? 저를요?” “네, 그리고 인협 씨도 같은 팀 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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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난 기다릴 수 있어

“이놈의 여편네가! 요새 내가 조용히만 있었더니!!”포터에서 내리자마자 집에서부터 들려온 거친 음성에 정렬이 집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굉음을 내며 열리자마자 거실 바닥에 주저앉듯이 쓰러진 엄마인 애라와 그 앞에 머리 위로 손을 들고 선 원길이 보였다. 참 익숙하면서 끔찍하고 동시에 지긋지긋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늘 유순한 시골 청년의 모습을 한 정렬의 두 눈에 일순간 분노의 불이 일었다. 어렸을 적부터 봐왔던 아버지의 화내는 모습을 혐오해, 도통 화를 내는 적이 없는 정렬이었다. 그러나, 인간다움을 포기한 아버지 원길 앞에서만큼은 달랐다. 정렬이 거친 몸짓으로 신발을 벗고서 뛰어 들어가 애라 앞을 막아섰다. 분노로 인해 거친 숨결을 내뱉는 원길의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결국 저보다 몸집이 커버린 아들 앞에서는 분노를 삭이고 말 비겁한 그였다. ”네 엄마가 집안의 가장인 아버지를 무시했다!”그놈의 무시. 정렬이 어렸을 적부터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어왔던 단어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아버지를 무시했는데요?”애라는 기력도, 말수도 없는 여자였다. 애초에 무시할 힘조차도 없는 사람이었다.늘 빼빼 마른 몸으로 삶을 살아내기 위해 사부작거리며 이 집에 유령처럼 존재해왔을 뿐. 일평생 순종적으로 살아오며 제대로 목소리 내는 법이 없는 그녀였다. 그래서 바보처럼 그녀는 이곳에서 폭력적인 남편 곁에 꾸역꾸역 머물러있는지도 몰랐다. “어떻게 집안에 점심거리 하나가 준비가 안 되어있어!” “아버지가 자주 밖에서 드시잖아요. 그래서 준비를 못 하셨나 보죠.”상 위에는 간단히 차려진 떡국과 김치 그릇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보나 마나 애라는 간단하게 점심만 때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집안에 당장 먹을 게 하나도 없는 게 말이 돼?!” “아버지-.” “고 이장네, 본용이 형님네 봐! 마누라들이 몇 분이면 뜨거운 요리 턱턱 내오지.” “그러면 최 씨 아저씨도 보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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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절대로 아니야

방과 후. 아침에 본용으로부터 옆집 관사 도어락 비밀번호를 전달받은 에스더가 그것을 인협에게 건네자마자 둘만의 작은 이사가 시작됐다. 7월 초. 오랜만에 잠시 비가 쉬어가는 날이었다. 그래봤자 옆집에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한 후에 캐리어 하나를 달랑 바로 옆집으로 옮기는 거였지만 말이다. “진짜로 짐이 이게 다야?” “응.”에스더와 인협은 에스더의 집과 똑같이 생겼지만, 방향만 다른 집안을 둘러보았다. 사람 사는 온기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관사 안은 휑했다. “이사 기념으로 자장면은 대접 못하지만, 짜파게리나 같이 끓여 먹을래?”짐이 든 캐리어를 한구석 벽에 기대어놓은 인협의 제안에 에스더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지! 오늘 밥 차리기 귀찮았는데, 잘 됐다.” “잘됐네. 소파에 앉아 있어.” “좋아.”에스더는 아직 물건 없이 텅 빈 집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인협은 능숙하게 움직여, 관사에 있던 냄비를 하나 꺼내서 그것을 씻었다. 생각보다 어깨가 넓네. 에스더의 눈이 인협의 뒷모습을 바쁘게 좇았다. 팔을 뻗을 때 은근히 보이는 근육. 생각보다 남자다운 몸의 선. 그녀는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차라리 내 취향은 정렬 씨라고. 키도 크고 남자답고, 성격도 순하고. 마른 안경잡이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에스더는 자기 최면을 걸며 잠시 스쳐 지나간 생각을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이상하게도 부엌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인협의 뒷모습에 절로 흐뭇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뭐야.” “뭐가?”에스더의 나지막한 혼잣말에 짜파게리를 끓이던 인협이 의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냐, 아무것도 아니야.” “싱겁긴.”피식 웃고서 돌아보는 인협의 모습의 잔상이 남아 에스더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한 번 더 응시했다. 나, 드디어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아니야, 그동안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었던 거지. 단지 그거뿐이야.내가 저 인간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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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두근두근

음악 시간이 끝난 후 교무실. 에스더가 수업하는 시간이라 교무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너, 대학은 나온 거니?” “네?” “인협이 너, 대학은 나왔냐고.” 옆 책상에서 들려온 제환의 깐깐한 목소리에 인협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대꾸했다. 서른 살 무렵의 제환이나, 마흔 살 무렵의 제환이나. 옹졸하고 짜증 나게 구는 건 여전했다. 아니, 어쩌면 십 년이 지나는 동안 더 똘똘 뭉쳐 단단해지기까지 한 옹졸함은 더 답이 없어 보이게 만드는 듯했다. “대학 안 나왔는데요.”거짓말이라고는 모르는 인협이었다. 그의 돌직구에 제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근데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칠 생각을 해?”시골에만 살아서 순수해서 그렇다고 해야 할까.약아빠지게 굴 줄 전혀 모르는 듯해보여 불쌍해 보이는 지경의 제환의 공격에 인협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황 선생님이랑 교장 선생님의 요청이 있어서 맡게 된 건데요.”인협이 에스더를 언급하자마자 제환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찰나의 변화를 잡아낸 인협이 한쪽 입꼬리만 올려서 웃었다. “황 선생님이야 맡은 과목 수가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다지만…. 교장 선생님은 황 선생님이 설득해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한 거야, 알아?” “그럼, 황 선생님의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게 그전에 형님이 잘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뭐?” “형님이 맡은 과목 수가 해봤자 네 개였고, 영어 선생님으로 임시로 와있는 황 선생님이 맡고 있던 과목 수가 여섯 개는 족히 됐다면서요? 그것도 필수 과목 위주로.”인협의 대꾸에 제환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다크서클이 유독 짙어 보이는 탓에 오늘따라 제환은 더 심술궂은 뱀파이어 같았다. “게다가 형님은 뭐가 억울한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해봤자 아무도 안 살아서 오랫동안 비어 있던 관사 주시고, 형님의 월급에 훨씬 못 미치는 50만 원 다달이 받으면서 이 자리를 메꿀 건데요.” “…….” “겨우 몇 시간씩이긴 하지만, 주중 매일 출근인데 이 정도 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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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더 헤아려줄걸

인협과 인섭이 아직도 소원리에서 지내던 어느 날, 서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영애가 엄마인 인자의 집에 들린 날이었다. 쿵쿵쿵. “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해가 일찍 지는 어느 겨울 저녁. 조심스럽게 새로 단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굽은 엄마 인자와 남편 태욱과 함께 식사를 하던 영애가 걸어 나가 문을 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추위에 얼굴이 벌겋게 된 김 씨 부부가 보였다. “어? 아줌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날이 추운데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부부의 방문의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영애는 두 사람을 거실로 들였다.지팡이를 짚는 두 사람이 오르기 꽤 험한 편인 오르막길을 어찌 올라왔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몇 년 전, 사위인 태욱의 도움으로 아예 신식으로 탈바꿈된 인자의 집안은 깔끔했다. 많이 추웠는지, 순순히 거실 소파에 앉은 김 씨 부부에게 인자가 말을 걸었다. 인자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짧은 머리로 굵은 파마머리를 한 노인이었다. 평생을 부지런하게 산 터라 몸에 살집은 전혀 없었다. “무슨 일이야?” “언니, 그게….”인자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김씨 부인이 입을 열었다. 딱 봐도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부용이네가 사정이 어려워서 그동안 우리가 많이 도와줬던 거.”김씨 부인의 말에 김씨가 흐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우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아. 그래서 염치없지만 큰 부탁 하나 하려고.” “살날이 나보다 너희 부부가 더 남았으면 남았지, 내가 더 남았겠어?” “그래서. 그래서 영애네 부부가 잠시 들렀다는 소리에 이렇게 부리나케 찾아왔어.”김씨 부인의 뜻밖의 소리에 인자와 영애가 동시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염치없지만 부탁 하나만 할게, 영애야.” “한번 들어보고요, 아주머니.”자고로 영애는 어렸을 적부터 소원리에 소문난 똑순이였다. 그녀만큼 셈이 빠른 사람이 없었고, 바른 말을 잘하는 사람이 없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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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잘 자, 나인협

똑똑똑. “나인협!”노크 소리에 방에 들어갈 힘조차 없어서 거실 소파에 옆으로 누워있다가 깜빡 잠에 들었던 인협이 겨우 눈을 떴다.머리가 지끈거리고 열이 올랐는지, 온몸이 뜨거웠다. 인협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확인하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식은땀이 이마에 맺혀 있었다. “아으….”몸이 천근만근인 것도 모자라,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똑똑똑.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지금 나가….”인협의 힘없는 음성에 에스더의 힘찬 노크 소리가 잠시 멈췄다. “너, 아파? 목소리가 좀 안 좋은데?”인협이 느릿하게 움직여 구부정한 몸을 하고선 손으로 벽을 짚고는 문을 열었다. “너 아프구나.” “조금.”에스더의 동그래진 눈을 본 인협이 겨우 미소 띤 얼굴로 대꾸했다. 에스더는 잠시 할 말을 잃었는지, 입을 벌린 채로 잠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째, 네가 더 아픈 것 같은 표정이야?”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은 에스더의 표정에 인협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몸, 많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링거라도 맞을래?” “추워….”훅 불어온 여름 밤공기에 인협이 몸을 떨자, 에스더는 다짜고짜 발을 들이밀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쾅. 그렇게 현관문이 닫혔다.두 사람은 불도 켜지지 않은 어둑어둑한 집안에 함께 있게 되었다. “어디 봐. 이 더운 여름에 춥기까지 한 거면 꽤 심각한 거 같은데.”에스더는 손을 뻗어서 인협의 이마를 짚었다. 열이 잔뜩 오른 이마에 닿은 그녀의 손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인협은 그 기분 좋은 감각에 눈을 감고서 그녀의 손에 살짝 기댔다. “시원해. 기분 좋아.” “인협아. 병원 가자.” “괜찮아. 돈 아까워. 그냥 견디면서 약 먹으면 돼.”행여나 큰 병원에 갔다가 신상이라도 밝혀질까 두려워진 인협은 에스더의 제안을 거절했다. “약은 있고?”도리도리. 인협의 힘없는 고갯짓에 에스더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쯤 꼬박 견디면 나아.”인협이 숙소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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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왜 입술을 괜히

인협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아직 커튼도 달지 못한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눈앞에는 깊이 잠든 에스더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는 아직 묵직했지만, 심한 몸살 기운은 가신 뒤였다. “…….”머리카락 한 가닥이 그녀의 코 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인협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그 가닥을 에스더의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귀가 예쁘네. 에스더의 귀에 잠시 닿았던 시선이 천천히 그녀의 이마로 향했다. 동그랗고 예쁜 이마. 둥그런 아치 모양을 그리며 뻗어있는 눈썹. 얇게 진 속쌍꺼풀과 긴 편인 속눈썹. 오뚝한 코, 귀여운 콧방울. 그리고 입술. 윗입술보다 더 도톰하고 유난히 붉어 보이는 아랫입술에 시선이 닿자마자 인협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일종의 본능이었다. 시선은 더 아래로 향했다. 갸름한 턱, 가느다랗고 긴 목선. 그리고 늘어진 티셔츠 목 부분 옆으로 보이는 쇄골. 거기까지 시선이 닿은 인협은 얼굴로 밀려오는 뜨거운 기운에 당황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애꿎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어서였다. 에스더의 손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있었다. 마치 어제 가지 말라고 붙들었던 사람이 그녀인 것처럼. 평온한 순간이었다. 밝은 햇빛에 조용히 공기에 떠다니는 먼지마저도 따뜻이 다가올 만큼. 커튼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오래된 할머니 집 사랑방에서 어느 날 남동생 인섭과 함께 할머니 곁에 잠든 적이 있었다. 평소에는 건넌방에서 자고는 했었는데, 웬일인지 그날따라 함께 자고 싶어졌었다. 인협이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때였다. 그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한지 사이로 비춰들어 오는 은은한 햇빛에 보였던 할머니를 보며 느꼈던 안온함과 비슷했다. 마치 그가 원래 있어야만 했던 곳으로, 집을 찾아낸 느낌. 그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단단한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선 느낌이었다. 이상해. 할머니와 에스더 사이에나 이 관사와 할머니 집의 사랑방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음에도 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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