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30

40 فصول

21화. 솔뫼리 청문회

솔뫼리 가족회의 안건 제1호. 이 계약, 추석 때부터였냐?(발의: 큰이모. 장소: 마루. 증거물: 냅킨 한 장, 노란 포스트잇 두 장.)세배는 중단됐다.큰이모네 손주 셋은 세뱃돈을 쥔 채 작은방으로 쫓겨났다. 문틈으로 눈 여섯 개가 반짝였다. 복실이는 칭찬을 기다리다 지쳐 마루 끝에 엎드렸다.마루 한가운데에 밥상이 펴졌다. 떡국 대신 냅킨이 올라갔다.서윤은 그 냅킨을 내려다봤다. 넉 달 넘게 지갑 카드칸에서 접혔다 펴지며 천처럼 부드러워진 종이. 편의점 로고가 반쯤 지워진 모서리. 거기 적힌 조항 네 개와 부칙 하나를, 지금 온 가족이 보고 있었다. 회의실에서 기획서가 전원 반려당할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옆에서 이현이 작게 말했다."기획서 발표라고 생각하세요.""청중이 너무 많잖아요.""본부장님보단 적어요.""본부장님은 고추장 안 던져요.""이모님들도 안 던지세요.""우리 큰이모는 던져요. 추석 때 삼촌한테.""앉아라."큰이모가 말했다. 서윤과 이현은 밥상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둘 다 그렇게 앉았다.맞은편에 이모 셋이 앉았다. 가운데 큰이모, 왼쪽 둘째 이모, 오른쪽 막내 이모. 둘째 이모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수첩을 펼쳤다. 막내 이모는 팔짱을 꼈다. 할머니는 한 발 뒤에서 방석을 깔고 앉았고, 엄마는 부엌 문턱에 행주를 든 채 섰다. 아빠는 마루 기둥에 기대어 막걸리 병을 땄다."아빠, 아침부터요?""청문회엔 막걸리지." 아빠가 말했다. 드물게 신이 난 목소리였다.큰이모가 돋보기를 고쳐 썼다."지금부터 가족회의를 시작한다. 서기는 둘째.""예." 둘째 이모가 볼펜 끝을 눌렀다."검사는 막내.""예." 막내 이모가 턱을 들었다."변호인은……." 큰이모가 할머니를 돌아봤다. "사돈 어른이 하시겠습니까.""나는 방청객 할란다." 할머니가 말했다. "재밌는 거는 앞에서 봐야지."서윤은 이현을 곁눈질했다. 이현은 등을 곧게 폈다. 본부장 보고 들어갈 때 자세였다."자, 피고 정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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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솔뫼리 부속 합의서

솔뫼리 부속 합의서 제1조. 가짜로 시작한 죄는 명절로 갚는다.(작성: 큰이모. 용지: 1월 달력 뒷면. 인주가 없어서 고추장.)"청매골서부터요?"서윤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작은방 문이 다시 빼꼼 열렸다.할머니는 서두르지 않았다. 식혜 잔을 밥상에 내려놓고, 치마 무릎을 한 번 쓸고, 그다음에 말했다."사진 때문이다.""사진이요?""니가 처음 보낸 사진." 할머니가 이현을 가리켰다. "둘이 증명사진 찍듯 서 있는 사진. 사귀는 놈들이 그렇게 서 있나. 계약하는 놈들이 그렇게 서 있지."이현이 눈을 감았다. 서윤은 그 사진을 기억했다. 뒷골목 카페의 노란 조명 아래, 증명사진처럼 굳은 두 사람이 사업 파트너처럼 나란히 선 첫 장. 이현이 제일 자연스럽다며 할머니한테 보낸, 망한 사진."그래서 청매골 오라 했지. 눈으로 볼라고." 할머니가 말을 이었다. "와서 보니까 확실하더라. 가짜다. 손을 잡긴 잡는데, 대문 앞에서 잡았다가 마루 올라오면서 놓을 궁리를 하더라고. 둘 다."서윤은 할 말이 없었다. 정확했다."근데." 할머니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정자 가는 길 모퉁이에서 이상하더라. 가짜는 모퉁이 돌면 손 놓는다. 아무도 안 보니까. 근데 안 놓대. 둘 다 안 놓고 걸어가더라."큰이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 이모는 수첩에 '모퉁이'라고 적고 밑줄을 그었다."그래서 알았지. 아, 가짜로 시작했는데 진짜 되는 중이구나. 그럼 됐다. 가만 두면 된다." 할머니가 식혜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앨범 보니까 이놈은 처음부터 진짜였고.""……할머니, 그럼 여태 알면서 모른 척하셨어요?""손주며느리 곱다고 문자 보낸 거는 진짜다." 할머니가 서윤을 봤다. "가짜한테 그런 문자 안 보낸다. 나는 받침은 틀려도 사람은 안 틀린다."엄마가 부엌 문턱에서 코를 훌쩍였다. 아빠는 막걸리 잔을 할머니 쪽으로 밀었다. "사돈 어른, 한 잔 더 하시지요.""점심 먹고. 판결 보고."점심은 떡국이었다. 아무도 판결 얘기를 꺼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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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귀경길 제1조

제1조. 정서윤과 차이현은 서로에게 계속 빠진다.(연애 기획서 v1.0. 적용 범위에 고속도로가 포함되는지는 명시되지 않았다.)설 연휴 셋째 날 아침, 솔뫼리 대문 앞은 추석보다 붐볐다.엄마는 남색 흰꽃 보자기를 두 개 쌌다. 하나는 서윤 몫, 하나는 이현 몫. 이현 몫이 더 무거웠다."이건 김치. 이건 전. 이건 식혜. 병 뚜껑 꽉 닫았다.""엄마, 서윤 거보다 이현 씨 게 더 커.""너는 사 먹잖아. 이현이는 해 먹어."틀린 말이 아니라서 서윤은 반박하지 않았다.큰이모는 고추장 한 통을 따로 챙겨 줬다. 지장 찍고 남은 그 종지의 친척이었다. 둘째 이모는 서윤에게 목도리를 둘러 주다가 이현의 목을 힐끗 보더니, 목도리를 하나 더 가져왔다. 막내 이모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대신 이현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폰."이현이 휴대폰을 건넸다. 막내 이모는 뭔가를 한참 두드리더니 돌려줬다."내 번호 저장했다. 서윤이가 딴소리하면 연락해.""……저장명은 뭐로 하셨어요?""막내 이모. 그리고 괄호 치고 '주선 실패'."이현이 웃음을 참았다. 서윤은 참지 못했다.아빠는 트렁크에 막걸리 두 병을 조용히 실었다. 그리고 운전석 창문을 두드렸다. 이현이 창문을 내리자, 아빠가 몸을 숙였다."다음 추석에.""네.""화투. 계산하지 말고.""네. 이길 때는 이기겠습니다.""그래야지." 아빠가 창틀을 두 번 두드렸다. 그게 아빠식 포옹이었다.차가 출발하자 복실이가 대문 밖까지 따라 나왔다. 백 미터쯤 달려오다가 멈춰 서서 한참 꼬리를 흔들었다. 사이드미러 속에서 점이 될 때까지."복실이가 이현 씨를 더 좋아해요.""배 보여 준 사람한테만 그래요. 저도 배 보여 준 적 없는데.""그건 다행이에요."뒷좌석에서 할머니가 끌끌 웃었다. "둘이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청매골까지는 한 시간 반이었다. 할머니는 출발 십 분 만에 잠이 들었다. 분홍 보자기를 끌어안은 채, 고개를 창 쪽으로 기대고. 조용해지자 차 안에 히터 소리만 남았다.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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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사내 연애 신고서

사내 연애 신고서 제4항. 교제 시작일을 기재하시오.(인사팀 양식. 칸 크기는 날짜 하나가 들어갈 만큼이다. 딱 하나.)연휴가 끝난 첫 출근일, 12층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서윤이 자리에 앉자 사방에서 키보드 소리가 동시에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시작됐다. 아무도 서윤을 보지 않았다. 모두가 서윤을 보고 있었다."선배." 민지가 의자를 굴려 왔다. "고 과장님 열 시에 오신대요.""알아.""긴장되세요?""신고서잖아. 기획서도 아니고.""선배, 기획서는 반려돼도 다시 쓰면 되지만요." 민지가 목소리를 낮췄다. "연애 신고서가 반려되면, 씨름 방이 일주일은 떠들어요."서윤은 모니터를 켰다. 메신저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차이현: 출근했습니다. 커피 책상에 뒀어요.]서윤은 책상을 봤다. 아이스 바닐라라떼가 있었다. 뚜껑 옆에 반듯한 글씨. '시럽 1/2, 얼음 조금'. 그리고 그 아래 작은 글씨가 한 줄 더 있었다.'신고서는 제가 먼저 냅니다.'서윤은 매직을 꺼냈다. 컵 옆면 빈 곳에 적었다. '안 돼요.' 그리고 컵 사진을 찍어 보냈다.[차이현: 커피에 답장하지 마세요. 증거 남아요.][정서윤: 증거 남기려고 한 거예요.]열 시 정각에 인사팀 고 과장이 12층에 나타났다. 워크숍에서 마이크를 잡고 사진첩을 만들던 그 과장이었다. 손에는 서류 봉투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씨름 방의 속보는 틀리지 않았다.고 과장은 서윤의 자리에 먼저 왔다."정 선임님. 축하드립니다.""……감사합니다.""이건 인사팀 권고 양식이에요. 강제는 아니고요. 같은 팀에서 교제하시는 분들 평가 공정성 확인용입니다. 연애를 막는 게 아니라, 나중에 서로 곤란하지 않게 하려는 거예요."봉투에서 종이 한 장이 나왔다. 제목은 '사내 교제 신고서(권고)'. 항목은 다섯 개였다. 성명, 소속, 상대방, 교제 시작일, 비고."두 분 각자 따로 쓰시고, 금요일까지 인사팀으로 주세요. 따로요. 상의하지 마시고요.""상의하면 안 돼요?""상의하면 날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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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교제 시작일

연애 기획서 v1.1 개정안. 부록 제1항. 기념일은 하나로 한다.(발의: 정서윤. 반대: 차이현. 심사: 인사팀 고 과장, 팀장, 그리고 왜인지 민지.)금요일 오후 네 시. 12층 작은 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제목은 '교제 시작일 선정의 건'. 부제는 '근거 중심으로'. 서윤이 이틀 밤을 새운 기획서였다. 달토끼 이벤트 때보다 슬라이드가 세 장 많았다.테이블 맞은편에는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고 과장. 고 과장 옆에 팀장. 팀장 옆에, 아무도 부르지 않은 민지."민지 씨는 왜 여기 있어요?" 이현이 물었다."서기요." 민지가 수첩을 흔들었다. "둘째 이모님 역할이요."서윤은 이현을 돌아봤다. "둘째 이모 얘기를 민지한테 했어요?""안 했어요.""그럼 어떻게 알아.""단톡방에서 봤어요." 민지가 태연하게 말했다. "선배 어머님이 저 추가하셨어요. 설에 보내 주신 식혜 사진 잘 받았다고 했더니요. 지금 17명이에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이 회사와 솔뫼리 사이에 경계선이 사라지고 있었다."자, 시작하자." 팀장이 손뼉을 쳤다. "나는 오늘 중재가 아니라 심사야. 방장 자격으로.""방장은 공식 직함이 아니잖아요.""오늘부턴 공식이야."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들었다. 발표할 때의 목소리가 나왔다."먼저 사실관계부터 정정하겠습니다. 공식 발표했던 '작년 여름휴가 이후'는 사실이 아닙니다."팀장이 물컵을 들다 멈췄다."두 사람은 작년 추석을 앞둔 주에, 회사 앞 편의점에서 가짜 연애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명절 선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요. 계약서는 냅킨입니다."민지가 수첩에 '냅킨!!!'이라고 쓰고 느낌표를 세 개 그렸다. 팀장이 물컵을 내려놓았다. 천천히."……가짜?""네. 계약 기간 중에는 가짜였고, 1월에 계약을 파기하면서 진짜가 됐습니다.""그럼 11월에 내 앞에서 사귄다고 한 것도…….""그때도 계약 중이었어요."팀장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을 봤다. 3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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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3월 2일

연애 기획서 v1.1 부록 제2항. 2021년 3월 2일은 을의 기념일로 한다. 갑은 그날 을이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준다.(조항 해석은 갑이 한다. 갑은 이 조항을 쓰고 열여드레 동안 후회했다. 조금.)청솔 연수원은 3월에도 추웠다.셔틀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서윤은 코트 깃을 여몄다. 산 공기가 서울보다 한 겹 얇았다. 11월 워크숍 때는 비가 왔고, 6년 전 오늘은 눈이 조금 날렸다. 오늘은 맑았다."기억나요?" 이현이 물었다. 버스 계단을 내려와 서윤 옆에 섰다."뭐가요.""6년 전 오늘도 이 버스 정류장이었어요. 서윤 씨는 캐리어 바퀴가 하나 빠져서 끌고 올라갔어요. 드르륵거리면서.""……그걸 왜 기억해요.""그 소리가 커서 다들 돌아봤어요. 저도요. 그게 첫 번째로 본 거예요."서윤은 걸음을 멈췄다. 6년 동안 그녀는 그 캐리어를 창피한 기억으로만 갖고 있었다. 바퀴 빠진 캐리어를 끌고 연수원 언덕을 올라가던 스물세 살. 사원증도 받기 전이었다."첫 번째로 본 게 그거예요? 발표가 아니라?""발표는 두 번째요. 첫 번째는 캐리어. 세 번째는 점심때 콩자반 남긴 거.""콩자반은 왜요.""저도 남겨서요. 같은 테이블에서 둘만."서윤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사람의 5년 11개월에는 그녀가 모르는 목록이 너무 많았다.강당은 그대로였다. 계단식 좌석, 무대 위의 연단, 맨 뒷줄 창가의 햇빛. 앞쪽 좌석에 신입 서른두 명이 앉아 있었다. 다들 긴장한 얼굴이었다. 6년 전의 자기들처럼.고 과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 선배 특강은 기획팀 정서윤 선임, 개발팀 차이현 선임께서 해 주시겠습니다. 두 분은 입사 동기시고요, 사내에서 회의를 제일…… 활발하게 하시는 분들입니다."신입 몇 명이 웃었다. 이미 소문을 들은 얼굴들이었다. 씨름 방은 신입 연수 전에 신입들에게까지 초대 링크를 돌렸다는 소문이 있었다. 방장은 부인했다.특강 제목은 '기획과 개발이 싸우는 법'이었다. 팀장이 지어 준 제목이었다. 서윤은 싫다고 했고, 이현은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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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청매골 점검표

청매골 점검표 제1항. 냉장고를 연다. 아들이 말리면 두 번 연다.(작성: 이현 어머니. 수첩 뒷장. 항목은 일곱 개. 점검 보조: 정서윤.)토요일 오전 열 시, 고속버스 터미널.서윤은 도착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는 따뜻한 보리차 두 병이 들려 있었다. 이현은 없었다. 어머니가 금지했다.[어머니: 이현이는 집에 있으라 해라. 너만 나와라. 작전 회의 해야지]작전 회의라는 말에 서윤은 전날 밤 잠을 설쳤다. 5년 동안 수백 번 회의를 했지만, 남자친구 어머니와의 작전 회의는 처음이었다.버스에서 내린 어머니는 분홍 보자기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서윤이 하나를 받아 들자 묵직했다."뭐가 이렇게 무거워요, 어머님.""반찬. 그리고 이거."어머니가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약국 이름이 찍힌 작은 수첩이었다. 뒷장을 펼치자 볼펜으로 쓴 목록이 나왔다.'점검표. 1. 냉장고. 2. 신발장. 3. 책장. 4. 옷장. 5. 달력. 6. 컵. 7. 그 애 얼굴.'"일곱 번은 뭐예요?""마지막에 볼 거. 제일 중요한 거."택시 안에서 어머니가 작전을 설명했다. 간단했다. 어머니가 점검하고, 서윤은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면 된다. 이현이 변명하면 서윤이 반박한다."반박은 잘하지?""……5년 동안 그것만 했어요.""그래서 불렀지." 어머니가 서윤의 손등을 토닥였다. "쟤는 나한테는 반박을 안 해. 대답만 해. '네, 어머니.' 그게 제일 얄미워."이현의 집 현관문이 열렸다. 이현이 앞치마를 두르고 서 있었다. 부엌에서 된장찌개 냄새가 났다."오셨어요."어머니는 대답 대신 아들의 얼굴을 한참 봤다. 위아래로. 그리고 서윤을 돌아보며 작게 말했다. "일곱 번은 나중에."점검이 시작됐다.1항, 냉장고. 이현이 앞을 막아섰다."어머니, 냉장고는 괜찮아요. 제가 정리…….""비켜라."어머니가 냉장고를 열었다. 반찬통이 크기 순서대로 줄 서 있었다. 통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다. '김치(솔뫼리)', '김치(청매골)', '멸치볶음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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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파란등대 협업 제안서

협업 제안서 제4조. 기획 담당자는 파란등대 스튜디오 부산 본사에서 2주간 상주한다.(제안사: 파란등대 스튜디오. 지명 담당자: 정서윤. 개발 리드 지명: 없음. 그 칸만 비어 있었다.)월요일 오전 열 시, 12층 대회의실.파란등대 스튜디오 대표는 생각보다 작은 사람이었다. 짧은 머리에 남색 재킷. 악수할 때 손아귀 힘이 셌다. 이름은 오태주였다."반갑습니다. 정 기획자님이시죠. 까치 이벤트 잘 봤어예."말끝에 부산 억양이 묻어 있었다. 서윤은 악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오태주가 다음 사람에게 손을 내미는 걸 봤다. 이현이었다."차 리드님." 오태주가 웃었다. "거절 메일 잘 받았습니다. 짧더라고요.""……죄송합니다.""아니요. 짧아서 좋았어예. 긴 거절은 대부분 핑계거든요." 오태주가 이현의 손을 한 번 더 흔들었다. "'끝까지 맡아야 할 일'. 그게 뭔지 궁금했는데."오태주의 눈이 서윤 쪽으로 한 번 미끄러졌다가 돌아왔다. 아주 짧게. 서윤은 그 시선을 봤다. 이현도 봤다."오늘 와 보니 알겠네요."본부장이 헛기침을 했다. 회의가 시작됐다.제안은 명료했다. 여름 합동 이벤트. 이름은 '등대 편지'. 유저가 편지를 쓰면 바다 건너 등대 불빛이 그 편지를 비춰 상대에게 전해 주는 연출. 파란등대의 바다 배경 게임과 이 회사의 편지 시스템을 잇는 기획이었다."편지 시스템은 여기가 제일 잘하시더라고요. 달토끼부터 까치까지. 그래서 기획 담당은 정 기획자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오태주가 서류를 넘겼다. "다만 초기 2주는 부산 본사 상주가 필요해요. 저희 팀이랑 세계관을 맞춰야 해서요. 4월 마지막 주부터."회의실의 시선이 서윤에게 모였다. 그리고 곧바로 이현에게 옮겨 갔다. 이제 이 회사에서 서윤을 볼 때는 이현을 같이 보는 게 습관이었다.본부장이 서류를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정 선임, 어때?"서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2주. 부산. 좋은 기회였다. 기획자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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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부산 운영 매뉴얼

부산 2주 운영 매뉴얼 제1항. 매일 밤 9시 영상통화. 공수 30분. 초과 허용.(작성: 차이현. 검토: 필요 없음. 그래도 갑은 첫날 밤 빨간 볼펜을 들었다.)파란등대 스튜디오는 바다 앞에 있었다.사무실 창문을 열면 파도 소리가 들렸다. 12층 창문을 열면 들리는 건 에어컨 실외기 소리였다. 서윤은 첫날 오전 내내 창밖만 봤다. 오태주가 커피를 들고 와서 옆에 섰다."좋지예.""좋네요. 일이 안 될 것 같아요.""첫 주는 다들 그래요. 둘째 주부터 파도 소리가 안 들려예."오태주가 커피를 건넸다. 아이스 바닐라라떼. 시럽이 반만 들어 있었다. 얼음은 적었다. 컵 옆면에 매직으로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한 글씨였다. 반듯하지 않았다.'1/2'."……이거 어떻게 아셨어요?""누가 메일을 보냈어예. 지난주에." 오태주가 웃었다. "'업무 협조 요청의 건'. 본문이 세 줄인데, 두 줄이 커피 얘기였어요. 한 줄은 '부산 바람이 차니 회의실 창문은 오후에 닫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서윤은 컵을 내려다봤다. 매뉴얼 제3항이 떠올랐다. '제3항. 아침 커피는 현지 조달. 사전 협조 완료.'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 뜻이었다."제가 개발 리드를 뺏어 오려다 실패한 이유를 이제 알겠어예." 오태주가 창문을 반쯤 닫았다. 오후도 아닌데. "업무 협조 요청을 이렇게 쓰는 사람은 못 데려와요. 딴 데 마음이 가 있어서."일은 금방 궤도에 올랐다. 파란등대 팀은 여섯 명이었다. 다들 바다 게임을 5년 넘게 만든 사람들이었다. 세계관은 탄탄했고, 등대 불빛 연출은 이미 반쯤 만들어져 있었다. 서윤은 거기에 편지를 얹었다.회의는 순조로웠다. 너무 순조로웠다."편지 글자 수는 80자로 할게요.""네, 좋습니다.""등대 불빛이 편지를 비추는 시간은 3초로요.""네, 알겠습니다.""색 개인화도 넣을게요.""공수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마 될 거예요."아마 될 거예요. 서윤은 그 문장에서 멈췄다. 12층이었으면 '아마'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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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보고 싶으면 간다

부산 2주 운영 매뉴얼 제7항(추가). 보고 싶으면 간다. 공수 따지지 않는다.(작성: 차이현. 작성 장소: 서울발 부산행 고속열차 11호차. 글씨가 처음으로 조금 흔들렸다. 기차 탓이었다.)서윤이 부산으로 떠난 월요일, 이현은 깨달았다.12층 회의실은 조용하면 넓었다.오전 열 시, 까치 2차 업데이트 문구 검토 회의. 서윤의 자리에는 민지가 앉았다. 민지는 서윤의 기획서 양식을 열고, 서윤의 말투로 발표를 시작했다. 연습을 한 게 분명했다."냅킨색 선택 시 안내 문구는 '따뜻한 종이색'으로 하겠습니다.""'따뜻한'은 주관적이에요."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습관이었다. "유저마다 느끼는 게 달라요.""주관적인 게 감성이에요." 민지가 말했다."감성이랑 정보는 다르죠.""결과는 같죠."이현은 말을 멈췄다. 민지를 봤다. 민지는 태연하게 서윤의 레이저 포인터를 들고 있었다. 서윤이 부산에 안 가져간 여분이었다."……그거 누구 대사예요?""선배가 작년 추석 회의 때 하신 말이요. 제가 씨름 방에 다 정리해 놨거든요. 반박 대응집이요."회의실 사람들이 동시에 커피를 마셨다. 팀장만 마시지 않았다. 팀장은 턱을 괴고 이현을 보고 있었다.회의는 이십 분 만에 끝났다. 민지의 반박 대응집은 훌륭했다. 서윤의 문장을 정확히 옮겼다. 그런데 이현은 한 번도 이기지 못했고, 한 번도 지지 못했다. 이상한 회의였다. 공을 던지면 벽이 받아 주긴 하는데, 벽이라서 공이 그대로 돌아왔다. 서윤은 늘 다른 각도로 돌려보냈다.회의가 끝나고 팀장이 이현을 불러 세웠다."차 선임.""네.""얼굴이 흐리다. 반박할 사람이 없으니까.""……멀쩡합니다.""멀쩡한 사람은 회의록에 '정 선임 복귀 후 재논의'를 여섯 번 안 쓴다."이현은 회의록을 봤다. 여섯 번이었다. 그는 파일을 닫았다.화요일, 수요일은 비슷했다. 낮에는 냅킨색을 테스트했고, 밤 아홉 시에는 화면 속 서윤을 봤다. 화면 속 서윤은 파란등대 사람들이 반대를 안 한다고 투덜거렸다. 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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