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 기획서 제1조. 목적지는 양측 합의로 정한다.(기획서는 두 부. 작성자 둘. 목적지 둘. 합의는 없었다. 큰이모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7월 셋째 주 토요일, 서윤의 오피스텔 거실.테이블 위에 A4가 두 부 놓여 있었다. 둘 다 회사 기획서 양식이었다. 서윤이 만든 양식을 이제 둘 다 썼다.왼쪽은 서윤의 것. 문서명 '여름휴가 기획서 v1.0'. 목적지 제주. 4박 5일. 일정표가 30분 단위로 짜여 있었다. 오름 두 개, 해변 세 곳, 카페 여섯 곳, 시장 하나. 이동 동선에 형광펜.오른쪽은 이현의 것. 문서명 '여름휴가 기획서 v1.0'. 목적지 강원도 산속 펜션. 3박 4일. 일정표에는 한 줄뿐이었다.'일정: 없음.'"이게 기획서예요?" 서윤이 종이를 들어 올렸다."네.""일정이 없잖아요.""그게 기획이에요. 쉬는 거요.""쉬는 것도 기획이 있어야죠. 몇 시에 일어나고, 뭘 먹고, 어디서 쉬는지.""그건 가서 정하면 돼요.""가서 정하면 결국 아무것도 안 해요.""아무것도 안 하는 게 목표예요."서윤은 이현의 기획서를 뒤집었다. 뒷면도 비어 있었다. 그녀는 빨간 볼펜을 들었다. 이현이 재빨리 기획서를 도로 가져갔다."검토 요청 안 했어요.""제 기획서는 검토하시려던 거 아니에요?"이현이 서윤의 제주 기획서를 들여다봤다. 30분 단위 일정표. 그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첫날 오후 두 시 오름, 세 시 반 해변, 다섯 시 카페, 여섯 시 반 시장. 이동 시간이 비현실적이에요. 렌터카로 오름에서 해변까지만 사십 분이에요.""빠르게 가면 돼요.""휴가 때 빠르게 가면 그건 출장이에요.""차이현 씨 기획은 그냥 잠자기예요.""차이현 씨요?" 이현이 서윤을 봤다. "성 붙었어요."서윤은 입을 다물었다. 싸울 때는 성이 자꾸 돌아왔다. 설 이후로 다섯 달, 호두과자 줄에서 뺀 성이 회의실과 휴가 기획서 앞에서만 슬그머니 되살아났다."……이현 씨 기획은 잠자기예요.""고치셔도 늦었어요. 들었어요."씨름은 한
Zuletzt aktualisiert : 2026-10-15 Mehr le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