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자의 배신으로 모든 걸 잃은 그녀는 가장 위험하다고 알려진 남자의 문을 두드렸다. 단지 복수를 위한 하룻밤이었지만 그는 이미 그녀를 노리고 있었다. 윤하경은 경성 상류층에서 빼어난 미모로 잘 알려져 있었지만 순진한 헌신 때문에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았다. 약혼자의 배신 이후 그녀는 더 큰 조롱거리가 되었지만 뜻밖에도 최상위 계층의 한 남자 그녀를 붙잡았다. 그는 하룻밤으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차갑고 단호한 태도로 그녀를 지배하며 그녀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매일 밤 이어지는 그의 집착은 그녀를 점점 더 궁지로 몰아갔고 벗어나려 할수록 더 깊게 얽혔다. 이것은 단순한 복수도, 순간의 방황도 아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며 그녀는 그의 숨겨진 진심과 맞닥뜨려야 했다. 이제 그녀는 선택해야 한다. 그의 집착에 휘말려 그의 세계에 갇힐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걸고 벗어날 것인지...
View More“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세요.”윤하경은 작고 고운 얼굴이었지만 차가운 표정을 지을 땐 만만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아마도 강현우 곁에 오래 있다 보니 자연스레 그에게 영향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스스로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지만 차갑게 굳은 그녀의 눈매와 표정에서는 분명 강현우와 닮은 구석이 드러났다.윤수철이 내밀었던 손은 허공에서 어정쩡하게 멈췄고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윤하경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눈빛 속에 스치듯 스산한 빛이 지나갔지만 곧 다시 평소처럼 자애로운 아버지의 얼굴로 돌아갔다.집 안에 들어선 윤하경은 곧장 주방 쪽을 살폈다. “유 집사님은요?”그녀가 두 번이나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자 윤수철은 자연스럽게 대답했다.“며칠 가족 일로 잠깐 집에 갔어. 곧 돌아올 거야.”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하경아, 우리 서재로 가서 이야기하자.”그는 윤하경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고 윤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그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서재 안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어두웠지만 그녀는 문득 책상 위에 놓인 나무 상자 하나를 발견하고 손가락을 무의식중에 움켜쥐어졌다.그토록 기다리던, 엄마의 유품이 드디어 자기 손에 들어오는 걸까.윤수철은 소파를 가리켰다.“앉아.”하지만 윤하경은 단호하게 말했다.“됐어요. 말씀만 하세요. 전 받아야 할 것만 받고 곧장 나갈 거니까요.”그녀의 말투는 단호하고 차가웠으며 더 이상 시간 낭비할 마음은 없어 보였다.윤수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하경아, 우리 사이가 꼭 이렇게까지 되어야 하니?”윤하경은 그런 뻔한 말이 가장 질색이었다. “그러니까, 말씀하시라니까요. 단, 쓸데없는 소리는 빼고요. 저 시간 많지 않아요.”윤수철은 몸을 움직이며 벽에 걸린 시계를 슬쩍 쳐다봤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책상 쪽으로 다가가 나무 상자를 열고 두툼한 서류 뭉치를 꺼냈다.“이걸 먼저 봐.”윤하경은 그걸 받아 들고 훑어봤지만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생전에 신수아의
지금 있는 곳은 2층이었고 아래로 내려간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건 아니었다.예전에 암벽 등반도 꽤 해봤던 윤하경에게 이 정도 높이는 무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발코니 아래쪽 몇 군데 발 디딜 수 있는 지점을 살펴보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동선을 계산했다. 충분히 가능했고 위험하다고 느껴지지도 않았다.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순찰 중인 경호원들을 따돌리지 않으면 아무리 탈출로가 있어도 소용없었다.그때, 묵직한 노크 소리가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하경 씨, 식사 준비됐어요. 얼른 내려오셔서 좀 드세요. 대표님께서 이따 오셔서 또 안 드신 거 보면 화내실지도 몰라요.”집사의 목소리였다.윤하경은 창밖에서 시선을 거두고 조용히 말했다.“네, 금방 내려갈게요.”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탈출 계획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강현우가 없는 틈을 타 두 시간 안에 다녀오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다. 그 가능성을 조심스레 따져보며 생각을 이어갔다.“하경 씨, 밥 좀 더 드릴까요?”집사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아니요, 괜찮아요.”식사를 마친 윤하경은 조용히 2층으로 올라가 다시 발코니로 향했다. 그리고 곧 경호원들이 집 한 바퀴를 도는 데 대략 10분 정도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 시간만 잘 노리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계획이 서자 그녀는 재빨리 방을 나와 아래층으로 향했고 그녀가 내려오자 집사가 다가와 조심스레 말했다.“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만 주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윤하경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물을 따라 마시며 말했다.“좀 피곤해서요. 낮잠 좀 잘게요. 점심은 건너뛸게요. 깨우지 마시고 일어나면 알아서 챙겨 먹을게요.”집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 식사 준비해 둘게요.”“고마워요.”짧게 웃은 윤하경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발코니에 앉았다. 그리고 경호원들의 그림자가 코너를 돌아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순간을 기다렸다.마침내, 그들이 시
그 말을 끝으로 윤하경은 전화를 끊으려 했다.“잠깐만 하경아!”윤수철이 다급하게 붙잡았다.“나를 안 만나도 좋지만... 네 엄마에 관한 얘기, 정말 듣고 싶지 않아?”윤하경은 전화를 끊으려던 손을 멈추더니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아버지, 꼭 이렇게까지 비열하게 나와야 해요? 매번 엄마를 핑계 삼아서 저를 흔들려는 건 똑같네요.”“윤수철.”그녀는 그의 이름을 또박또박 불렀다. 이제 그를 ‘아빠’라고 부를 감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윤하경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곤 또박또박 말했다.“마지막으로 말할게요. 당신은 엄마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도 없어요. 그리고 또다시 엄마 얘기 꺼내면...”“너, 결혼한다면서? 강현우랑?”그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수철이 불쑥 끼어들었다.그러자 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누가 말했는데요?”강현우가 자신과 결혼하겠다고 한 지 며칠 되지도 않았다.‘어디에도 소문이 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윤수철이 알았을까? 혹시 현우 씨가 일부러 얘기한 건 아닐까?’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강현우는 그녀와 윤수철 사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윤수철에게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냈을 리 없었다.그런 윤하경의 침묵 속에서 윤수철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하경아, 어쨌든 나는 네 아버지야. 네가 나를 인정하든 안 하든,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면... 당연히 아버지랑 상의하는 게 순서 아니겠어? 그리고 네 엄마가 예전에 남기고 간 것도 이제는 네 손에 넘겨줘야 하지 않겠니?”앞부분까지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마지막 문장에서 윤하경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엄마가 남긴 것...’그건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었다.“또... 절 속이려는 거죠?”윤하경의 목소리는 낮고 냉담했다.“항상 무슨 일만 생기면 그 얘기를 미끼 삼아서 나를 끌어내려 했잖아요. 이번에도 또 그거 하나로 내가 돌아올 줄 알았다면 정말 착각이에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넌... 날 그렇게밖에
비록 강현우의 말투는 무심한 듯 흘려보냈지만 남자는 여전히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고 머릿속으로 필사적으로 의뢰인에 대한 단서들을 떠올렸다.얼마나 지났을까. 강현우가 거의 인내심을 잃을 무렵, 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생각났습니다. 그 남자... 처음 만났을 때, 눈썹 근처에 흉터가 있었습니다.”“그게 끝이야?”강현우가 말하기도 전에 우지원이 발끈하며 의자를 걷어찼다.“그딴 흉터 하나로 뭘 어쩌라고? 유용한 정보는 하나도 없잖아, 젠장.”그러고는 돌아서서 툭툭한 말투로 강현우에게 말했다.“형, 이 자식 입에서 나올 정보는 더 이상 없는 것 같네요. 그냥 정리하죠.”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짧게 한 마디만 뱉었다.“알아서 처리해.”말을 마친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 안에서는 누군가의 비명이 들려왔고 강현우는 무표정하게 눈썹을 한번 찡그렸다.잠시 후 곧 문이 열리고 우지원이 웃으며 따라 나왔다.“형, 아까는 그렇게 세게 나가더니... 막상 겁만 좀 줬더니 바로 오줌 지리더라니까요. 진짜 더러워 죽겠네.”강현우는 아무 반응 없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우지원이 곧장 옆으로 붙으며 말했다.“근데 형, 걔 말이 맞다면... 노선랑 시간은 의뢰인이 직접 지정했다는 거잖아요? 그럼 표적은 형이 아니라, 윤하경 씨였던 거예요.”강현우는 이를 악물고 낮게 말했다.“계속 말해.”“밖에서 형수님 해치고 싶어 할 만한 놈들... 그 집 안에 있는 인간들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형이 형수님 붙잡아둔 건, 진짜 신의 한 수였던 거 같아요. 지금 밖은 생각보다 훨씬 위험해요.”우지원은 자신이 기막히게 잘 짚었다는 듯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그렇죠? 저 좀 똑똑한 거 맞죠?”그러자 강현우가 옆을 돌아보며 말없이 그를 흘깃 보았다.“그렇게 똑똑하면 하루 안에 잡아 와.”그 말에 우지원의 얼굴이 바로 굳었다.“하, 하루요...? 형, 근데 지금 단서가 끊겼는데...”하지
강현우가 마지막 질문을 던졌지만 그는 여전히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통증에 이마엔 이미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입이 풀리자마자 그는 이를 악물고 강현우를 노려봤다.“당신들 지금 하는 짓, 다 불법인 거 알죠?”강현우는 짜증 난 듯 짧게 혀를 찼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다시 총을 집어 들었다.이번엔 바로 그 남자의 다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으아악!”남자는 의자에 묶인 채로 비명을 질렀고 주변에 있던 우지원은 곧장 손짓해 입을 막게 했다. 강현우는 다리를 꼬고 몸을 뒤로 젖히며 말없이 그를 내려다봤다.“기회는 이제 한 번 남았어. 누가 널 보냈는지, 그리고 그놈이 노린 게 나인지, 아니면 윤하경인지.”강현우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분위기는 순간 차가워졌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강현우를 노려봤지만 그 순간 총을 쏠 때조차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던 그 눈빛 앞에선 버티는 것도 점점 힘들어졌다.그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낮게 말했다.“우린 의뢰인의 정보 따위는 묻지 않습니다. 그게 우리 업계 생존 법칙이니까요. 죽이시든 고문하시든, 빨리 끝내시죠. 난 돈 받고 일한 것뿐입니다.”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그제야 강현우의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스치더니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가며 묘하게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의외로 직업윤리는 철저하네?”그리고 손짓으로 우지원을 불렀다.“가족 있는지 좀 알아봐. 이렇게 충직한 사람이면 죽을 땐 같이 보내줘야지.”그 말은 차라리 속삭이는 것처럼 부드러웠지만 방 안의 공기를 순식간에 얼려버릴 만큼 서늘했다.“안 돼요! 제발, 가족은 건드리지 마세요!”그제야 남자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졌다. 아까까진 이를 악물고 버티던 사람이 지금은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제발... 대표님... 가족들은 아무 잘못도 없어요...”사람이란 게 참 간사한 법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입에 담기 힘든 욕을 퍼붓던 사람이 이제는 땅에 머리를 조아릴 듯 비굴하게 매달렸다.강현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지금 제 부탁 들어주신다는 거예요?”그러자 강현우는 낮고 느린 목소리로 답했다.“내가 언제 들어준다고 했어?”윤하경은 그의 웃는 듯한 눈빛을 보고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아까 분명 그렇게 말했잖아요!”“생각해 본다고 했지, 들어준다고는 안 했어.”강현우는 느긋하게 손을 씻고 옆에 있던 수건으로 손을 닦았고 고개를 숙여 윤하경을 내려다봤다.“말해봐.”윤하경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잠시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그럼... 말씀드릴게요. 근데 화내지 않으셔야 해요.”강현우는 대답 대신 가볍게 한쪽 눈썹만 올렸고 윤하경은 망설이다가 결국 솔직히 털어놨다.“사실은... 내일부터 밖에 좀 나가도 될까요? 여기만 있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저 절대 함부로 돌아다니지도 않고 뱃속 아기도 절대 다치게 하지 않을게요.”며칠 동안 있었던 일들을 통해, 윤하경도 이제야 강현우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절대 아기에게 위험한 일은 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했다하지만 강현우는 차갑게 그녀를 흘끗 쳐다보고는 단칼에 잘라 거절했다.“안 돼.”윤하경은 올라가던 입꼬리를 힘없이 떨어뜨렸다.“왜요?”“그냥. 여기서 얌전히 있어.”강현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바로 침실로 향해버렸고 윤하경은 뒤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작게 입을 삐죽이며 강현우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거짓말쟁이...”괜히 강현우한테 들켰다가는 또 혼날까 봐 윤하경은 작은 소리로 말했다.그녀가 방으로 돌아왔을 때, 강현우는 막 침대에 누운 참이었다.그런데 마침 침대 옆 협탁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윤하경은 무심히 스쳐 지나가다가 화면을 슬쩍 봤는데 발신자가 우지원이었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분이 상한 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러나 우지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금방 잠들 것 같던 강현우가 다시 침대에서 일어나 옷장으로 향했다.정장을 갈아입은 그는 잠시 윤하경 곁에 머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