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차가운 심장이라도 따뜻한 온기로 녹여주면 언젠가는 변할 줄 알았다, 그래서 민여진은 박진성의 꼭두각시 아내로 2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그 끝은 차디찬 이혼서류 한 장이었다. “걔가 일어났어. 그 아이 대용이었던 넌 이제 필요 없어졌어.” 민여진에게는 마음을 전혀 내어주지 않던 그가 돌아온 건 오로지 민여진을 제 첫사랑 대신 감옥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당한 민여진은 배 속의 아이도 잃고 얼굴도 알아볼 수 없게 변한 채 실명까지 당해버렸다. 그녀는 악몽 같았던 짧디짧은 두 달을 버텨내며 박진성에 대한 마음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2년 뒤, 민여진은 박진성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길을 걷다가 우연히 그를 보게 되었다. 첫사랑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할 그가 웬일인지 민여진을 보자마자 화를 내며 달려들었다. 박진성은 자신이 이러면 민여진이 전처럼 다시 저를 봐줄 줄 알았는데 그녀의 눈에서는 더 이상 사랑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여진, 어떻게 해야 다시 나한테 돌아올 거야? 말만 하면 내가 뭐든 다 들어줄게!” “2년 전엔 당신이 준 구리반지도 아까워서 잘 못 꼈는데, 이젠 아니에요. 당신이 뭘 준대도 난 안 돌아가요.”
더 보기바로 문을 밀고 들어서니 진시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임재윤에게 말했다“컨디션은 어때?” 임재윤은 먼저 진시우의 뒤쪽을 바라보았고 민여진이 보이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으로 대답했다.“많이 좋아졌어.” “잘됐네. 하지만 아직 좋아하긴 일러. 수술 한 번 더 남았으니 그 수술까지 끝나야 정말 괜찮은 건지 판단할 수 있어.” “알아.”진시우가 민여진에게 말했다.“여진 씨, 나가서 아침밥 2인분 사 올 테니까 잠깐 앉아 계세요. 아, 감기약도 같이 사 올까요? 아침에 얼굴이 많이 빨간 것이 열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다시 임재윤에게 말했다. “오늘 여진 씨 집에서 나올 때 귓불까지 빨개졌더라고.”민여진은 당황하고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아니에요.” “아니긴요?” 진시우는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의사도 자기 병은 못 고친다는데 여진 씨는 의사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프지 않다고 확신하죠?”이때 병상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임재윤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대신해 설명했다. “여진이는 오늘 아침 너한테 문 열어주기 직전까지 나랑 통화하고 있었어.”그 말에 민여진은 당장이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그제야 진시우는 뭔가 깨달은 듯 웃으며 말했다. “아, 여진 씨.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할 것이지 괜히 그런 어설픈 거짓말은 왜 해요. 난 또 내 도움받기 싫어서 그러는 줄 알았잖아요.” 민여진은 확신했다.그녀가 임재윤과 통화할 때 진시우는 분명 그녀의 휴대폰 화면을 보았을 것이다.이 사람, 생각처럼 착한 사람이 아닌 은근히 속이 시커먼 타입이다.한바탕 웃고 떠든 후 진시우가 밖으로 나가자 민여진이 참지 못하고 해명했다.“나 원래 얼굴이 잘 빨개져.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이래. 그러니까...” “알아.”임재윤은 웃참이라도 하는 듯 타이핑하는 속도가 느려졌다. “하지만 내 말 때문에 얼굴이 빨개졌다고 하면... 더 좋을 것 같아.”
민여진은 무려 임재윤과 밤새 통화를 했다. 혹시나 이상한 잠꼬대라도 한 건 아닐지 걱정햇다.“깼어?”휴대폰 너머로 그의 목소리가 들렸고 민여진은 멋쩍게 대답했다.“나 잠들면 전화 끊겠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왜 아침까지 안 끊었어?”“끊기 싫었어.”임재윤은 솔직하게 말했다.“네가 평온하게 자는 소리가 들렸어. 그걸 들으니까 네가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았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까 봐 끊지 못했어.”민여진은 얼굴이 확 달아올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여진 씨, 일어났어요?”민여진은 머리를 정리하고 급히 문을 열었다.문 앞에 있던 진시우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순간 멈칫했다.“여진 씨, 어디 아파요?”“아니요.”민여진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왜 그렇게 물으세요?”“아프지 않은데 왜 얼굴이 그렇게 빨개요?”민여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더 붉어졌다. 문제는 휴대폰을 아직 끊지 못해 임재윤이 이 상황을 다 들었을 게 분명했다.“그냥 이불 속에 오래 있어서 그래요.”“그래요?”진시우는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말했다.“자는 동안은 이불 속에 너무 오래 있지 마요. 안에 공기가 희박해서 산소가 부족할 수도 있어요.”민여진은 더욱 민망해졌다. 임재윤에게 인사도 못 하고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여진 씨, 우선 정리 좀 해요. 문 앞에서 기다릴게요.”“네.”민여진은 문을 닫고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나왔다.진시우가 말했다.“어젯밤 내가 늦게 돌아와 혹시 자고 있을까 봐 안 들렀어요. 근데 직원이 그러는데, 누가 여진 씨의 방까지 찾아왔다고 하던데요?”“네.”어제 그 사람을 떠올리자 민여진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 사람이 자기 성이 박 씨라고 했어요.”“박? 박진성이요?”“네.”“그럴 리 없어요.”진시우는 단호하게 말했다.“박진성은 병실에서 24시간 감시받고 있고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어요. 설령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굳이 자기 성을 밝히겠어요?”“실제로는 그 사람이 아니었
민여진의 눈가는 금세 붉어졌다. 코끝이 시큰해져 훌쩍이며 한참 후 입을 열었다.“휴대폰 두 개 있었어?”“빌린 거야.”임재윤의 답장은 조금 느렸다.“괜찮아?”“뭐가?”“오늘 돌아갈 때 누가 널 따라갔잖아. 시우가 말해줬어. 놀라진 않았어?”민여진은 오늘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누군가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일이었다. 게다가 이 사람은 분명히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임재윤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그녀는 애써 괜찮은 척 말했다.“아니야, 괜찮아.”“정말?”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서 임재윤이 말했다.“미안해.”“응?”민여진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내가 시우한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할 걸 그랬어. 널 혼자 먼저 보내서 이런 일이 생겼어. 내가 너무 생각이 짧았어.”“그게 왜 너 때문이야. 오늘이 처음도 아닌걸. 나 혼자 호텔로 돌아오는 건 익숙해.”민여진은 단호히 말했다.“게다가 날 걱정해서 빨리 쉬게 해주고 싶었던 거잖아...”“그래도 내가 좀 더 잘 처리해야 했어. 널 따라온 사람 때문에 겁났을 거 아냐.그때 내가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임재윤이 말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깊은 자책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을 것이다.민여진의 기분은 조금 풀렸다.“그렇게 말하지 마. 누가 그럴 줄 알았겠어. 나도 예상 못 했어. 이번 일을 겪고 나니까 오히려 좋아. 이제 누가 날 노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앞으로는 더 조심할 수 있게 됐어. 이제 혼자 다니는 일은 없을 거야”임재윤은 침묵 속에서 답장했다.“넌 여전히 착하네. 하지만 억지로 버티지 않아도 괜찮아.”민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익숙해졌어.”감옥에 있을 때 그녀는 괴롭힘을 당해도 울면 안 됐다.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더 심하게 폭력을 당했기에, 그녀는 말없이 맞아야 했다. 그 이후로 억울한 일이 있어도 말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그 습관 내가
이 소식은 마치 가슴 깊은 곳에서 터진 폭탄과 같은 것이었다. 민여진은 덜덜 떨리는 몸을 멈출 수 없자 침착하자며 자신을 다독였다. 예전에 진시우가 박진성은 중병을 앓고 있어 당분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민여진은 얼굴을 문지르자 손에 눈물이 잔뜩 묻어 있는 걸 알게 됐다.“민여진 씨...”직원이 문가에서 조심스럽게 속삭였다.“프런트 직원을 데려왔어요.”민여진은 심호흡하고 프런트에 물었다.“방금 제 방 번호를 물었던 남자를 기억하세요?”프런트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걸 인식하고, 곧바로 입을 열었다.“네, 기억나요.”민여진은 떨리는 혀를 누르며 물었다.“그 사람 어떻게 생겼나요?”“음... 키 크고 마른 편이었어요. 후드 티에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잘 안 보였는데, 인상은 꽤 좋았던 것 같아요.”프런트 직원은 최대한 당시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민여진은 잠시 얼어붙었다. 키 크고 마른 체형은 박진성과 비슷하다. 하지만 박진성은 후드 티를 입은 적 없었다. 그는 늘 정장을 입었다. 박씨 가문은 사적인 자리에서도 이미지를 중요시해 캐주얼한 옷을 입는 일이 거의 없었다.민여진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아, 맞다!”프런트 직원이 갑자기 손뼉을 쳤다.“그 사람 턱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었어요. 꽤 오래된 상처 같았고, 고개를 들 때 그 흉터가 유독 인상 깊었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민여진은 힘이 빠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박진성이 아니었다. 박진성의 얼굴에 흉터 따위 있을 리 없었다. 그는 그런 흠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는 애초부터 박진성이 아니었다.“민여진 씨!”직원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가슴 한구석의 돌덩이는 떨어져 나간 듯했지만 민여진의 얼굴은 여전히 새하얗다.그 남자가 박진성이 아니라면, 왜 박씨라고 일부러 말했을까? 분명 박진성이 그녀를 찾고 있다고 오해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사람
“뭐라고?”진시우의 얼굴은 순식간에 굳어졌다. 옆에 앉은 임재윤을 힐끔 보고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여진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육감이에요. 누군가 계속 날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뒤에서 자꾸 발소리도 들리고, 내가 멈추면 그 사람도 멈췄어요. 내 귀는 원래 예민해서 틀리지 않을 거예요.”그 말을 들은 진시우의 표정은 다시 심각해졌다. “여진 씨, 다음부터 나랑 같이 다녀요. 오늘 밤 재윤의 병실에 침대 하나 마련해 둘 테니까 내가 혹시 늦게 오면 거기서 잠깐 쉬고 있어요. 일 끝나고 데리러 갈게요.”"네, 그렇게 할게요."통화를 마친 민여진은 다시 커튼을 닫았다. 빛이 싫은 게 아니라, 혹시라도 맞은편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불안했기 때문이다.민여진은 침대에 가만히 앉아 있었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그녀는 숨도 쉬지 않고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조심스레 말했다. “민여진 씨, 계세요?”호텔 직원의 목소리였다.긴장했던 민여진의 몸은 그제야 조금 풀렸다. 그리고 문으로 다가가 살짝 문을 열며 물었다. “무슨 일이죠?”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시우 씨께서 앞으로 민여진 씨는 레스토랑 이용하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식사를 객실로 가져오기로 했어요.”진시우가 준비해 준 걸 알고 민여진은 안도하며 말했다. “들어오세요.”직원은 식사를 정리하면서 말을 꺼냈다. “민여진 씨는 진시우 씨 외에도 이곳에 아는 분 계세요?”민여진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왜요?”“아, 별일은 아니고요. 민여진 씨께서 올라가신 후 성이 박 씨인 남자 분이 프런트에서 민여진 씨의 방 번호를 물었어요.”쾅!민여진은 손에 들고 있던 소품을 떨어뜨리고 얼굴이 새하얘지면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뭐라고요?”직원이 깜짝 놀라며 반복했다.“성이 박 씨인 남자 분이 민여진 씨 방 번호를 물었어요.”직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근데 걱정하실 필요는
“널 기다리는 건 내가 원해서야. 네가 일부러 날 붙잡고 있는 게 아니야. 게다가 너도 자유롭고 나도 자유로워. 내가 언젠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너와 친구로 지내는 이 시간이 정말 좋아. 그리고 널 기다릴 수 있어. 네가 정말로 날 받아 줄 마음이 생길 때까지.”임쟁윤의 말은 너무도 담담하고 단단해서 민여진은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그녀는 당황스럽고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재윤아, 네가 나중에 후회할 일을 하길 바라지 않아.”“지금 널 포기하는 게 바로 내가 평생 후회할 선택이야.”임재윤은 핸드폰 너머로 더욱 힘 있게 말하자 민여진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얼마 후 간호 실장은 환자가 휴식이 필요하다고 민여진에게 말했다.“일단 돌아가. 시우가 곧 도착한다고 문자 왔어. 늦었으니까 먼저 돌아가서 쉬고 나중에 다시 와.”민여진은 걱정이 되었지만 임재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문을 열고 병실을 나섰다.그녀는 호텔까지 가는 길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혼자서도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계속 누군가가 뒤를 따라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가 발걸음을 빠르게 하면, 뒤쪽의 발소리도 덩달아 빨라졌다. 마치 시각 장애인 옆에서 일부러 같은 속도로 걷는 사람처럼 매우 교묘하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일부러 아니라면 믿기 어려웠다.민여진은 앞이 보이지 않아 불안한 마음에 사람들 말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성급히 걸어갔다.“저기요 실례합니다.”얼굴이 창백하고 당황한 민여진이 갑자기 다가오자 대학생 몇 명은 놀랐다. 하지만 곧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세요?”민여진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이런 행동이 다소 무례하다는 걸 알지만, 누군가에게 실례를 끼치는 것보다 위협을 받는 것이 더 두려웠다.“저… 제가 앞이 안 보여서요. 여기가 낯설고 길을 잘 모르겠어요. 혹시 센트럴 호텔까지 함께 가 주실 수 있나요?”학생들은 원래도 심심해 어디 갈지 고민 중이었기에
“나를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지금 그녀 옆에는 모든 걸 포기하더라도 함께 있어 주는 사람이 있거든. 사진을 본 적 있는데, 행복해 보였어. 그거면 돼. 나는 그저 이 실수를 잊지 않고 내가 지켜주고 싶은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 되는 거야.”‘지켜주고 싶은 사람’이라는 구절에서 음성 안내가 살짝 멈춘 듯했다. 마치 민여진을 들으라는 듯이.민여진은 귀가 화끈하게 달아올랐다.“그녀는 나에게 존중이라는 게 뭔지를 가르쳐주고, 뭐가 제일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줬어. 아마 이건 하늘이 준 시험이 아니었을까. 내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가장 좋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가장 좋은 모습.’지금의 임재윤은 확실히 그런 사람이었다. 민여진이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임재윤은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물 있어?”“있어.”민여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의 위치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던 그녀는 물을 반 정도 채워 임재윤에게 건넸다.“여기.”하지만 임재윤은 컵을 받지 않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진아, 내가 너를 그녀의 대체품으로 생각해서 이러는 건 아닌지, 충분히 내 마음을 의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처음 극장에서 널 만났을 땐 네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이 신경 쓰이긴 했어. 하지만 진짜 내 마음을 끌어당긴 건 너의 온화한 모습과 성격이었어. 그녀와는 이미 오래전에 끝난 사이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해도 될 만큼 먼 과거라고. 나는 널 그녀의 그림자로 보지 않아. 진심으로 너를 좋아해.”그의 말은 이미 준비된 듯 타자의 간격 없이 쭉 이어졌다.민여진은 앞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육감만으로도 그의 눈동자 속 뜨거운 열망과 희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임재윤의 손은 점점 달아올랐고, 화끈한 열기에 민여진은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솔직히 민여진은 임재윤의 마음이 싫지 않았다. 다만...“재윤아, 너도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나도 너한테 솔직하게 말해야 할 게 있어.”그녀는 깊게
머릿속이 하얗게 멍해지는 순간, 그제야 민여진은 그동안 임재윤의 행동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가 그녀한테 신경이 쓰였던 이유도, 그녀의 작은 불편함까지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도, 심지어 계단에서 발을 헛디딜 뻔할 때 미리 손을 내밀었던 이유가 전부 전 여자 친구가 민여진과 같은 시각장애인이었기 때문이었다.“그랬구나...”민여진은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마치 무언가가 할퀴는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나한테 고백한 것도 그러면 전 여자 친구가 생각나서인가? 나한테서 전 여자 친구의 흔적이라고 찾고 싶었던 걸까?’이런 생각이 들자, 민여진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과거 박진성한테 민여진은 문채연의 대리 품이었는데 임재윤한테서도 누군가의 대리 품이라니.“그런데도 사귄 거면 많이 사랑했나 봐? 그런데 왜 헤어진 거야?”임재윤은 민여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내 잘못이 컸어.”“잘못?”“응.”그의 숨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나를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믿고 기고만장했었지. 바쁘다는 이유로 항상 일찍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면서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별로 없었어. 시각장애인인 그녀는 나를 위해 자유를 포기했고 친구도 없어서 속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조차 없었는데, 나는 그 외로움을 외면했고 심지어 제일 힘들어할 때 연락조차 되지 않았어.”민여진은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같은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서,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눈앞이 캄캄한 세계에서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있으며 도망치고 싶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불안함과 무력함이 어떤 건지,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힘들었겠네.”“그랬겠지.”임재윤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그래서 도망쳤나 봐.”“도망치다니?”민여진은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맑은 눈동자에는 어리둥절함과 혼란이 가득 차올랐다.“왜 도망쳤다고 말하는 거야?”임재윤은 긴 침묵 끝에 대답했다.“내가 나쁜 놈이었어. 그 여자가 나를 떠나겠다고 했을 때 잃는 게 두려워서
“여진아, 가지 마.”휴대전화를 손에 든 임재윤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왜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영문을 몰랐던 민여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가다니? 나 계속 여기 있잖아. 어딜 간다는 거야?”임재윤은 민여진을 쓸쓸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꿈꿨어. 네가 나를 떠나는 꿈. 안진 마을로 돌아간 게 아니라 내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서 계속 너를 찾아 헤매며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갔어.”간신히 손을 뻗어 민여진의 손가락을 잡은 임재윤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그가 불안함에 떨고 있었다. 그녀가 떠날까 봐.민여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재윤아, 그건 그냥 꿈이야. 게다가 네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너를 피하겠어.”가쁜 숨을 몰아쉬던 임재윤은 그녀의 손을 꽉 잡고 나서야 진정된 듯 답했다.“네가 실망할까 봐 두려워.”“그럴 리가 없잖아.”민여진은 웃음을 지었다. 임재윤은 단 한 번도 그녀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안 해도 되는 걱정을 하고 그래. 난 항상 너 같은 친구가 있어서 영광이라고 생각해.”민여진의 말에 순간 임재윤의 얼굴에는 쓸쓸함이 서렸다.“친구일 뿐이야?”실망이 묻어난 그의 말에 민여진은 말문이 막혔다. 임재윤은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급히 타자를 했다.“여진아, 혹시 내가 원망스러워? 너를 좋아한다면 지난 일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줘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하고 너한테 숨긴 거 때문에 많이 상처받았어?”민여진은 당황해하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야. 전에도 말했지만, 누구나 비밀은 있는 법이잖아.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대답하기 힘든 일이 있을 수도 있지. 그것 때문에 미안해할 거 없어.”“하지만, 다른 문제도 아니고 전 여자 친구 얘기잖아. 너한테 좋아한다고 고백까지 했는데 그 문제에 대해서는 네 앞에서 솔직하게 털어놔야 했어. 그래야 너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을 거 아니야.”민여진이 부정하려는 순간 임재윤은 자신을 스스로 비웃으며 타자를 이었다.“아니면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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