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주변에서 터지는 웃음과 수군거림에 노아리는 몹시 불쾌했다.화를 억누르며 말했다.“말을 왜 그렇게 수준 낮게 하세요?”그 말을 듣자 한지수가 웃었다.“수준이 그렇게 높으신 분이 남의 연애에는 왜 끼어들었어요?”주변의 웅성거림이 더 커졌다.“겉보기엔 멀쩡한데 남의 남자나 뺏은 사람이었어?”“진짜 별로다. 난 저런 사람이 제일 싫어.”“저 회사는 지원하지 말자. 괜히 엮이기 싫다.”그나마 침착함을 유지하던 노아리의 표정이 사람들의 말에 조금씩 무너졌다.체면을 완전히 잃기 직전에, 누군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남의 연애에 끼어든 사람 말입니까? 제가 보기엔 여기 다른 사람이 해당되는 것 같은데요.”성이남이었다.강성대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상황을 마주칠 줄은 몰랐다.노아리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모습을 보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그때 전화를 마친 강서이가 돌아왔다.성이남의 말을 그대로 들은 강서이는 고개를 들었다.성이남도 비난과 경멸이 섞인 시선으로 강서이를 보고 있었다.강서이는 어이가 없어 잠깐 멈췄다.‘지금 성이남이... 나더러 남의 연애에 끼어들었다는 건가?’‘적반하장도 정도가 있지.’한지수도 성이남이 누구를 겨냥하는지 알아차리고 눈을 크게 떴다.‘세상에, 저 정도로 상황 판단을 못 하는 사람이 있어?’한지수가 따져 물었다.“말 똑바로 해요. 누가 누구 사이에 끼어들었다는 건데요?”노아리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눈에는 냉기가 비쳤지만 겉으로는 오히려 점잖은 척 성이남을 말렸다.“됐어. 사람도 많은데 괜히 일 키우지 마. 저런 사람이랑 말 섞어서 뭐 해.”노아리가 대범하게 넘어가는 척할수록 성이남은 더 억울하게 느꼈다.성이남이 한지수를 차갑게 바라봤다.“그 질문은 강 대표님께 하시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이제 강서이도 확실히 알았다.성이남이 자신을 두고 한 말이었다.“노아리 사장님이 성 대표님께 그렇게 말했나요?”강서이는 화를 내지 않았다.말투도 차분했다.대신 성이남 뒤에 서 있는 노아리
고상만은 결국 바둑돌을 탁 내려놓았다.“안 둬, 안 둬. 너랑 바둑 두는 게 제일 재미없어.”성이남이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교수님, 제가 급한 일이 좀 생겼습니다. 다음에 와서 제대로 두겠습니다.”고상만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성이남은 곧장 강성대로 향했다.노아리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디에 있는지 물으려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노아리를 발견했다.성이남은 핸드폰을 내리고 바로 그쪽으로 걸어갔다.졸업 시즌은 기업 채용 시즌이기도 했다.학교에서는 여러 회사가 채용 부스를 차릴 수 있도록 넓은 공간을 따로 내주었다.강서이와 한지수는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아침 일찍부터 나왔다.덕분에 꽤 눈에 띄는 위치를 잡았다.행사장 안쪽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두 사람은 직원들에게 부스 설치를 지시하는 중이었다.정문으로 들어온 노아리는 멀리서도 강서이를 바로 알아봤다.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강서이가 뭘 준비하고 있는지 확인하자,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면서 윌리엄 교수의 뒤를 빠르게 따라갔다.구정태 총장은 윌리엄 교수 옆에서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노아리가 윌리엄 교수의 제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라 노아리에게도 상당히 정중했다.노아리가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총장님, 저희 회사도 오늘 채용 일정이 있습니다. 가능하시다면 눈에 잘 띄는 자리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구정태가 흔쾌히 답했다.“그 정도는 어렵지 않습니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감사합니다, 총장님.”노아리는 인사를 마치자 영승반도체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다.영승반도체도 이날 강성대에서 채용을 진행할 예정이었다.다만 출발이 늦어서 좋은 자리를 잡지 못해 고민하던 참이었다.노아리는 좋은 자리를 마련해 뒀으니 당장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잠시 뒤 노아리는 영승반도체 직원들을 데리고 강서이의 부스로 향했다.강서이 쪽은 막 설치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지원자를 받을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노아리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구정태
강서이는 다음 날 업무 일정을 정리하는 중이었다.곧 졸업 시즌이라 신규 채용 준비로 처리할 일이 많았다.그래도 한지수의 흥을 맞춰 줬다.[네가 그렇게 신날 일이라면, 갑자기 벼락부자가 됐거나 민도하가 망했거나 둘 중 하나겠네.]한지수가 크게 웃었다.[민도하 망한 것보다 더 재밌어.]그렇게까지 말하니 강서이도 궁금해졌다.“빨리 말해. 뜸 들이지 말고.”[민도하 약혼녀가 바람났어! 하하하하!]한지수는 실컷 웃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렇게 재미있는 일을 혼자만 아는 게 아까웠다.한지수는 톡을 열어 연락처에서 민도하 번호를 찾은 뒤 친구 추가를 눌렀다.예전에 강서이가 입원했을 때, 걱정이 되어 김설에게 민도하 번호를 받아 둔 적이 있었다.당시에는 민도하와 전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전원이 꺼져 있었다.나중에 강서이와 민도하가 완전히 갈라선 뒤에는 번호를 지울까도 생각했다.하지만 왠지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아 남겨 뒀다.그 예감이 맞았다.민도하는 생각보다 빠르게 친구 요청을 받아 줬다.누구인지 묻지도 않았다.‘이런 사람들은 원래 친구 추가도 잘 안 받아 주는 거 아닌가?’그건 중요하지 않았다.친구가 되자마자 한지수는 ‘평온한 하루’라는 제목의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평온해서 고른 건 아니었다.연인에게 바람맞은 남자가 멍하니 서 있는 이모티콘의 그림이 지금 상황과 너무 잘 맞았다.조금 뒤 민도하에게서 물음표 하나가 왔다.한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SNS에 실연과 바람을 놀리는 이모티콘을 스무 개나 연달아 올렸다.게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락처에 ‘진짜 개’로 저장된 사람이 댓글을 남겼다.[?]‘끼리끼리 논다더니.’답장하는 꼴까지 똑같았다.‘흥.’‘남자는 다 똑같아.’멀리 K시에 있던 ‘진짜 개’는 이유도 없이 재채기를 한 번 했다....한지수가 쉬는 동안, 강서이는 한지수를 데리고 강성대에서 진행하는 그로스캐피탈 채용 행사에 나갔다.강서이의 말은 간단했다.“너도 엄연히 그
한지수가 막 불평을 끝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매니저에게서 온 전화였다.받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한지수가 전원을 끄려고 하자 강서이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연결되자마자 상대가 언성을 높였다.[한지수, 너 어디야? 당장 와서 전 대표님한테 사과해! 내가 얼마나 어렵게 따낸 자리인데 투자자한테 그렇게 행동해?][전 대표님이 너 좋다고 하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얼굴에 술을 뿌리고 돼지라고 욕을 해? 그런 배우가 어디 있어?][당장 가서 사과하고 용서받아. 안 그러면 회사에서 너 내보낼 거야!]강서이는 더 들을 생각이 없었다.전화 너머에서 고함치는 매니저에게 차갑게 말했다.“그럼 내보내세요.”[누구세요?]한지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상대가 날카롭게 물었다.“제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대신 한 가지는 알려드리죠.” “소속 배우에게 술자리 접대나 사적인 관계를 강요하는 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필요한 법적 책임은 끝까지 묻겠습니다.”매니저가 비웃듯 웃었다.[우리가 한지수한테 접대나 스폰을 강요했다는 증거라도 있어요? 한지수는 우리 회사랑 10년 전속계약을 했어요.] [회사의 정당한 일정에 협조하지 않으면 계약 위반이고 위약금도 청구할 겁니다.]강서이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위약금은 제가 내죠. 대신 불법적인 강요가 있었다면 그 책임도 묻겠습니다. 지금 이 전화도 증거가 될 수 있다는 건 아시죠?”상대는 녹음 중이라고 생각했는지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한지수가 꼬치 막대를 입에 문 채 말했다.“서이야, 너무 화끈하게 질렀어. 내 위약금 엄청 세.”“돈으로 해결되는 게 무슨 문제야.”강서이가 한지수 손에서 꼬치 막대를 빼앗았다.한지수의 눈이 반짝였다.“강 대표님! 평생 모실게!”“이런 일로 기분 망치지 마. 변호사 붙여서 계약 해지부터 처리할게. 아예 회사도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너 한 명만 계약하자.”“너 다리 꽉 붙잡고 절대 안 놔줄 거야!”강서이가 뒤를 봐주겠다고 하자
‘이 늦은 시간에 누가 왔지?’강서이는 잠시 망설이다 현관 앞으로 갔다.인터폰 화면을 확인하자 곧바로 눈이 반짝였다.곧장 문을 열었다.“자기야, 웬일이야?”한지수는 온몸이 잔뜩 젖은 채 들어왔다.현관 앞 여행 캐리어도 내버려 둔 채 강서이부터 꽉 끌어안았다.“나 너한테 충전하러 왔어.”강서이를 꼭 끌어안은 채 목에 얼굴까지 묻고 있었다.강서이는 금세 한지수의 기분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다.마주 안은 채 몸을 살짝 좌우로 흔들었다.“밥은 먹었어?”“아니. 배고파 죽겠어.”“그럼 꼬치 먹으러 갈래?”“좋지.”한지수가 한마디 덧붙였다.“술도 조금 마시자.”“콜.”강서이는 발로 캐리어를 안쪽으로 끌어당겼다.“우리 자주 가던 데로 가자.”“좋아.”“그럼 이제 옷 갈아입어도 되지?”한지수는 아직도 강서이를 놓지 않았다.“네 몸에서 내가 못 본 데가 어디 있다고. 새삼스럽게 왜 그래.”30분 뒤 두 사람은 강성대에서 2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꼬치구이집에 앉아 있었다.사장도 예전 그대로였고 맛도 기억 속 그대로였다.달라진 건 대학생 특유의 풋풋함이 두 사람에게서 사라졌다는 점뿐이었다.둘 다 술이 약한 편은 아니었다.맥주만 마시기에는 싱겁다면서 한지수가 소주를 주문했다.강서이도 말했다.“나도 소주.”한지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강서이가 덧붙였다.“내일 주말이잖아. 아침 일찍 출근 안 해도 돼.”하지만 한지수는 알고 있었다.일밖에 모르는 강서이에게 주말이란 사실상 없는 말이나 다름없었다.그렇게 말한 건 자신과 제대로 시간을 보내 주겠다는 뜻이었다.두 사람은 안주를 먹으면서 대학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한지수가 웃으며 말했다.“나 아직도 기억해. 너 그때 진짜 바빴잖아. 수업 있으면 수업 듣고, 비는 시간엔 민도하 도와주러 가고.”“무슨 배터리도 안 닳는 기계처럼 살았어. 개강하고 두 달 동안 같은 기숙사 방을 쓰면서도 우리 둘이 열 마디나 했나?”그러다 짓궂게 웃었다.“2학년 때였나? 어느 날 밤 네
차가 15분쯤 달리다 신호에 걸려서 멈췄다.빨간불이 계속되는 시간은 60초였다.강서이는 신호등을 거의 10초 가까이 바라보다가 차 안의 정적을 깼다.“상처는 왜 아직도 안 나았어?”“좀 심하게 다쳤어. 회복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거의 다 나았어.”민도하가 대답했다.강서이가 다시 물었다.“5월 20일에는 어디 있었어?”민도하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대답했다.“약혼식.”오래전부터 머릿속에 새겨 둔 답처럼 전혀 막힘이 없었다.강서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맞았다.5월 20일은 민도하와 노아리의 약혼식 날이었다.약혼식의 주인공인 민도하가 자리를 비울 리 없었다.‘내가 괜한 생각을 했네.’신호등의 초록불이 켜졌다.잠시 흔들렸던 마음도 다시 가라앉았다.그 뒤로 강서이는 입을 열지 않았다.호텔 앞에 민도하를 내려 준 뒤 곧바로 차를 몰고 떠났다.차는 흐릿한 빗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민도하는 그 방향을 말없이 바라봤다.늘 차갑게만 보이던 얼굴에 희미한 쓸쓸함이 지나갔다.이내 감정을 거두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로비 한쪽.성이남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목격했다.노아리를 문병한 뒤 호텔로 돌아왔는데, 마음이 유난히 답답해서 바람이라도 쐴 생각으로 내려온 참이었다.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결국 로비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하필 타이밍이 절묘했다.못 본 척하기도 힘들 정도였다.강서이가 직접 민도하를 호텔까지 데려다줬다.노아리는 민도하의 아버지가 편찮아서 병원에 남지 못하고 집으로 갔다고 했다.‘이게 민도하가 말한 집에 간다는 거였나?’기가 막혔다.강서이도 마찬가지였다.민도하와 노아리가 공개적으로 약혼한 사이라는 걸 알면서, 굳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것처럼 보였다.‘이러면 내연녀가 강서이 아닌가?’‘진짜 선이라는 게 없네.’배준석이 그런 강서이를 좋아한다는 생각까지 들자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결국 성이남은 배준석에게 전화를 걸어서 술을 마시자고 했다.배준석이 도착했을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