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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By:  예스틴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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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옷날, 나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약속했던 남자 친구가 갑자기 잠적했다. 밤이 되어서야 나는 SNS에서 남자 친구가 실수로 올린 듯한 게시물을 발견했다. [스무 살부터 스물여덟 살까지. 우리의 청춘도 이제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네.] 그 글과 함께 혼인신고서와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사진 속 낯선 여자는 송지욱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댄 채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노에 휩싸인 채 댓글 창을 눌러 따져 물으려던 순간, 내 절친 정채린이 남긴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결혼하는 거야? 정말 축하해. 드디어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결혼하는구나!]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덜덜 떨면서 정채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침묵하던 정채린이 마침내 진실을 얘기해 주었다. “맞아. 사실 두 사람은 8년 전부터 사귀고 있었어. 나 말고도 다들 알고 있던 사실이야.” “일부러 숨긴 건 아니야. 속이 좁은 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난리 칠까 봐 그랬어.” “솔직히 민하랑 지욱이가 더 잘 어울려. 그리고 두 사람이 여기까지 오는 것도 쉽지 않았어. 같은 여자로서 굳이 민하를 힘들게 하지는 마. 좀 착하게 살아.”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차갑게 식은 눈물이 오히려 뜨거운 불길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송지욱이 12년을 함께하는 동안, 송지욱은 무려 8년을 다른 여자와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한패가 되어 나를 속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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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나는 자신을 괴롭히듯 계속해서 댓글 창을 들여다봤다.

내 절친 정채린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하나같이 축하하고 있었다.

[민하는 정말 좋은 여자야. 민하를 속상하게 한다면 내가 제일 먼저 너를 가만 안 둘 거야!]

댓글을 남긴 사람은 송지욱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만 해도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렀던 사람이다.

[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다니, 정말 축하해. 오늘 밤에는 같이 먹고 죽자!]

그 댓글을 남긴 사람은 나와 같이 2층 침대를 썼던 룸메이트였다.

[다 같이 모이는 건 좋은데 내 동생과 민하의 행복을 위해 다들 입단속 잘하도록 해. 절대 걔가 알게 해서는 안 돼.]

그 댓글은 송지욱의 누나가 남긴 것이었다. 몇 년 전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내게서 2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고, 자신이 인정하는 제수씨는 나뿐이라고 했던 사람이다.

[당연한 거 아니에요? 공주님과 왕자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절대 그 마녀가 이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되죠. 걱정하지 말아요!]

그건 송지욱의 회사에 새로 들어온 어린 비서가 남긴 댓글이었다.

눈치가 없고 어리숙한 편이라 몇 번이나 해고될 뻔했지만, 내가 좋은 말을 많이 해 주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준 덕분에 무사히 인턴 기간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젖히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

송지욱이 다른 여자와 8년 동안 만났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사실을 내게 숨겼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사람이었고, 왕자와 공주의 행복을 망치려는 마녀였으며, 그들에게는 한낱 웃음거리였다.

휴대폰을 새로고침 하자 송지욱의 게시글이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졌다.

다음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됐던 송지욱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미안해. 오늘 회사에 갑자기 일이 터지는 바람에 업무를 처리하느라 지금까지 휴대폰을 볼 시간조차 없었어.”

“요즘 회사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혼인신고는 잠시 뒤로 미루자.”

“참, 오늘 SNS에서 뭐 재미있는 글 못 봤어?”

송지욱은 약간 긴장한 목소리로 서툴게 나를 떠보려고 했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너는 오늘 내 전화 계속 안 받았잖아. 그리고 나는 병원에서 엄마를 돌보느라 SNS를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어.”

“일단 일부터 봐. 혼인신고 관련해서는... 다음에 너 시간 있을 때 다시 얘기하자.”

작년에 우리 엄마는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 말로는 길어봤자 3년이라고 했다.

우리 엄마의 유일한 소망이 내가 서른이 되기 전에 송지욱과 혼인신고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단오이자 나의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우리 엄마는 아직도 병실에서 내가 혼인신고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더 이상 엄마의 마지막 소망을 이뤄줄 수가 없었다.

송지욱이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석진 곳에 쭈그리고 앉은 채 몸을 한껏 웅크렸다.

눈물이 화면 위로 쏟아져 내려 검은 글씨가 번졌다.

나는 화면을 닦은 뒤 그들이 축하 파티를 벌이기로 한 장소를 확인했다.

[골든 레스토랑 3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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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나는 자신을 괴롭히듯 계속해서 댓글 창을 들여다봤다.내 절친 정채린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하나같이 축하하고 있었다.[민하는 정말 좋은 여자야. 민하를 속상하게 한다면 내가 제일 먼저 너를 가만 안 둘 거야!]댓글을 남긴 사람은 송지욱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지난주에 만났을 때만 해도 나를 형수님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굴렀던 사람이다.[가장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다니, 정말 축하해. 오늘 밤에는 같이 먹고 죽자!]그 댓글을 남긴 사람은 나와 같이 2층 침대를 썼던 룸메이트였다.[다 같이 모이는 건 좋은데 내 동생과 민하의 행복을 위해 다들 입단속 잘하도록 해. 절대 걔가 알게 해서는 안 돼.]그 댓글은 송지욱의 누나가 남긴 것이었다. 몇 년 전 사업을 시작하겠다며 내게서 2천만 원을 빌려 달라고 했고, 자신이 인정하는 제수씨는 나뿐이라고 했던 사람이다.[당연한 거 아니에요? 공주님과 왕자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절대 그 마녀가 이 사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되죠. 걱정하지 말아요!]그건 송지욱의 회사에 새로 들어온 어린 비서가 남긴 댓글이었다. 눈치가 없고 어리숙한 편이라 몇 번이나 해고될 뻔했지만, 내가 좋은 말을 많이 해 주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꼭 알아야 할 것들을 하나하나 가르쳐 준 덕분에 무사히 인턴 기간을 마칠 수 있었다.나는 고개를 젖히며 필사적으로 눈물을 참았다.송지욱이 다른 여자와 8년 동안 만났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는데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그 사실을 내게 숨겼다.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 사람이었고, 왕자와 공주의 행복을 망치려는 마녀였으며, 그들에게는 한낱 웃음거리였다.휴대폰을 새로고침 하자 송지욱의 게시글이 갑자기 화면에서 사라졌다.다음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하루 종일 연락이 두절됐던 송지욱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미안해. 오늘 회사에 갑자기 일이 터지는 바람에 업무를 처리하느라 지금까지 휴대폰을 볼 시간조차 없었어.”“요즘 회사 일 때문에 너무 바빠서 혼인신고는 잠시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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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반짝이는 컨페티가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알록달록한 컨페티들 사이로 송지욱이 다른 여자와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익숙한 얼굴의 친구들이 휴대폰을 들고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그러나 내가 나타나는 순간, 그들의 낭만은 산산이 부서졌다.나를 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다들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아무도 나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여자는 송지욱을 힐끗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자기야, 저 사람도 자기 친구야? 그런데 왜 다들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진 거지?”“민하야, 쟤는...”나는 송지욱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최민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나는 송지욱의 여자 친구예요.”“두 사람이 8년 동안 사귀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랑 송지욱은 12년을 만났어요.”“믿기지 않는다면 내 휴대폰 앨범에 있는 영상을 보여줄게요.”앨범을 클릭하자 지난 12년 동안 쌓아 온 추억들이 고스란히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났다.수능을 앞두고 열렸던 학교 행사에서 학생 대표로 발언했던 송지욱은 당시 공개적으로 내게 고백했다.“사실 제 꿈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예서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도 제 꿈입니다.”대학교 운동장에서 손을 맞잡고 산책하던 날, 송지욱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 약지에 끼워 주었다.500만 원이 아주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송지욱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저축해서 모은 전 재산이었다.“나중에는 더 큰 걸로 해줄게.”비좁은 월세방에서 송지욱은 술에 취한 채 나를 안고 엉엉 울다가 나한테 영상을 찍으라고 강요하더니 카메라 앞에서 맹세했다.“이번 생에는 꼭 한예서를 호강시켜 주겠습니다.”“평생 한예서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회사의 상장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나와 송지욱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친구들의 짓궂은 농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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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예서야!”송지욱이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그리고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해 보니 오늘 엄마의 안색이 평소보다 훨씬 좋았다.엄마는 내게 갓 깎은 사과를 건네며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예서야, 혼인신고 했지? 사진도 찍는다더니 예쁘게 찍었어? 어서 엄마한테 보여줘 봐.”순간 숨이 막히고 코끝이 찡했다.엄마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차마 진실을 알게 할 수는 없었다.내가 겨우 용기를 내어 솔직하게 털어놓으려는 순간, 송지욱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왔다.송지욱은 침대 옆에 앉더니 늘 그랬듯이 자연스럽게 우리 엄마를 마사지해 주면서 나지막하게 웃으며 말했다.“예서가 사진이 안 예쁘게 나왔다고 사진관에 다시 보정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혼인신고는 이틀 뒤쯤에 하려고요. 혼인신고 하게 되면 꼭 알려드릴게요, 장모님.”갑자기 장모님이라는 호칭에 우리 엄마는 감동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래서인지 우리 둘 사이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송지욱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내가 빠져줬잖아. 그런데 대체 왜 이러는 거야?”송지욱은 예전처럼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예서야, 우리 12년 동안 만났잖아. 정말 나랑 헤어질 수 있어? 아쉽지 않겠어?”아쉽다고 해서 뭐가 달라진단 말인가.송지욱은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었는데 말이다.나는 빨개진 눈으로 송지욱을 노려보며 차갑게 비웃음을 흘렸다.“아쉽든 아쉽지 않든 정리해야 하는 건 맞지.”내가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하자 송지욱이 몸을 틀어 내 앞길을 막아섰다.송지욱은 내 어깨를 잡더니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나를 꽉 끌어안았다.“하지만 난 너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송지욱이 너무 세게 끌어안은 탓에 아무리 밀어내려고 해도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대학교 때 너에게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 주려고 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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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나는 여전히 송지욱이 마련해 준 신혼집에서 지내며, 낮에는 출근하고 저녁에는 병원에 가서 엄마를 돌봤다.송지욱은 자신의 아내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보내느라 나에게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연락이 없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는 해방이나 다름없었다.퇴근 후 나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호떡을 사서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병상 앞에 젊은 여자 두 명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나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로 다가갔고, 그들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정채린과 최민하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채린아, 왜 이 사람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거야?”엄마는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설명했다.“채린이는 내가 심심할까 봐 자기 친구를 데리고 와서 말벗을 해 준 거야.”“나는 민하를 오늘 처음 봤는데 정말 마음에 들어. 이렇게 다정하고 예쁜 아이인데 남편이 다른 여자랑 바람을 피운다지 뭐니? 정말 못됐어.”“민하야, 이모 말 잘 들어. 남의 가정을 파탄 내는 여자는 반드시 벌받게 돼 있어.”최민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그러고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힐끗 바라본 뒤 우리 엄마를 향해 부드럽지만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이모, 이모 말씀이 맞아요. 다른 사람 남편을 넘보는 여자는 반드시 벌받을 거예요.”“그런데 이모 딸은 언제쯤 벌을 받나요? 아, 아니다. 이미 벌을 받았네요. 단지 벌을 받은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 이모일 뿐이죠. 위암 말기라니, 그 정도면 저도 만족할게요.”우리 엄마는 창백해진 얼굴로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며 최민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정채린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혼인관계증명서를 우리 엄마 앞에 내던지며 말했다.“헛소리라니요? 민하 말은 사실이에요. 한예서가 바로 그 불륜녀예요!”“이것 보세요. 민하는 이미 지욱이랑 결혼했어요. 둘은 법적으로 부부라고요. 한예서는 지욱이한테 아내가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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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눈을 떴을 때, 가슴이 너무 아팠다. 조금만 움직여도 뼈가 갈라질 것 같은 통증이었다.내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침대 옆에 있던 송지욱이 서둘러 나를 부축해 주었다.“예서야, 뭐 하려고? 나한테 시켜.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서 함부로 움직이면 아플 거야.”송지욱은 세심하게 침대 각도를 조절해 내가 편하게 기대도록 한 뒤 회사에 연락했다.“예서가 다쳤어. 간병인한테 맡기는 건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내가 직접 돌봐야겠어.”“이 비서, 나 당분간 회사에 못 나갈 것 같아. 팀장들이랑 같이 회사 업무 좀 처리해 줘.”나는 송지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듣고 싶지 않았다.내가 알고 싶은 건 엄마가 괜찮은지였다.엄마는 살았을까?나는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때 엄마의 주치의 안성진이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오며 화가 난 얼굴로 말했다.“제가 몇 번이나 말씀드렸죠. 한미윤 씨는 상태가 매우 위중해서 언제든 생명이 위험할 수 있으니 반드시 24시간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고요.”“보호자분들, 너무 무책임하신 것 아닙니까? 어떻게 환자를 혼자 병실에 내버려둘 수 있죠? 저희가 발견했을 때 환자분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고, 사후경직까지 시작되고 있었어요.”송지욱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의사를 바라봤다. 당시 상황이 너무나 급박했던 탓에 송지욱은 한예서를 구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한미윤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다.한미윤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날 줄은 몰랐다.송지욱은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나를 꽉 끌어안더니 내 등을 토닥이면서 위로를 건넸다.“예서야, 자책하지 마. 어머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신 건 네 탓이 아니야.”“울고 싶으면 나한테 안겨서 실컷 울도록 해.”지금 이 순간에도 송지욱은 우리 엄마의 죽음이 단순히 보호자가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벌어진 사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가슴속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오른 나는 온 힘을 다해 송지욱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그 탓에 가슴의 상처가 벌어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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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송지욱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자,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최민하가 보였다.최민하는 눈시울이 빨갛게 물든 채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눈물을 글썽이고 있어서 마치 상처 입은 토끼처럼 애처로워 보였다.송지욱은 곧바로 마음이 약해져 자기도 모르게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물었다.“민하야, 여기는 웬일로 왔어?”최민하는 송지욱의 품을 파고들면서 말했다.“내가 여기 안 왔으면 예서 씨가 나한테 또 무슨 누명을 씌웠을지 모르니까.”“예서 씨가 자기 엄마를 죽인 사람이 나라고 한 거 아니야? 흑흑, 난 그런 적 없어.”“나는 그냥 예서 씨 어머님이 편찮으시다는 말을 듣고 채린이한테 부탁해서 같이 병문안을 왔을 뿐이야.”“그런데 병실 앞에 도착했을 때 우연히 예서 씨랑 예서 씨 어머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 얘기를 들어 보니까 예서 씨 어머님은 죽은 척하고, 예서 씨는 그 죄를 나한테 뒤집어씌울 생각이었어. 그렇게 해야 네가 나를 혐오해서 나를 떠날 테고, 두 사람은 계속해서 네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으니까.”“지욱아, 너는 두 사람한테 그렇게 잘해줬는데 두 사람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너를 속이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가 예서 씨한테 따졌더니, 예서 씨는 자기 계략이 들통난 걸 알고 나를 죽이려고 했어!”“지욱아, 나 무서워. 진짜 너무 무서워. 나 아까 죽을 뻔했어. 평생 너를 못 볼 뻔했고!”최민하는 송지욱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 울었다.송지욱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최민하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그만 울어. 내가 있잖아.”“내가 잘 조사해 볼 테니까 걱정하지 마.”송지욱은 고개를 돌려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두 여자 중 한 명은 12년 동안 사랑한 여자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8년 동안 여자 친구 몰래 만났던 여자였다.송지욱은 대체 누구를 믿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최민하 뒤에 있던 정채린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지욱아, 민하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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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병원장의 사과를 들은 뒤 송지욱은 어두운 얼굴로 전화를 끊었다.그러고는 여전히 훌쩍이고 있는 최민하를 품에 꼭 안은 채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한예서, 너 정말 낯설다.”“어쩌다가 이렇게 못된 사람이 된 거야? 어머님한테 죽은 척하라고 시키고, 민하한테 살인 누명까지 씌우려는 비열한 수법을 생각해 내?”“죽은 척하다니. 천벌을 받을까 봐 두렵지도 않아? 그러다가 너희 엄마 정말 돌아가시면 어쩌려고 그래?”최민하는 나를 곁눈질로 힐끗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그리고 내 절친이었던 정채린은 팔짱을 낀 채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 상황에서는 최민하와 경쟁하는 것도, 송지욱이 내 말을 믿게 만드는 것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지금 내가 알고 싶은 건 엄마의 시신이 대체 어디로 갔냐는 거였다.엄마의 주치의인 안성진 선생님은 훌륭한 의사였고 인품 또한 좋았다.그런 분이 최민하와 정채린에게 매수됐을 리는 절대 없었다.안성진 선생님이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단호하게 말한 이상, 엄마가 세상을 뜬 건 확실했다.그러나 병원에서는 엄마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나는 이를 악물고 정채린과 최민하를 노려봤다.일어설 힘만 있었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죽여 버리고 나도 죽었을 것이다.그들은 죽은 사람조차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잔인한 인간들이었다.‘분명 저 두 사람이 우리 엄마의 시신을 훔쳐 갔을 거야!’‘우리 엄마를 돌려줘!’나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나무 티슈 케이스를 움켜쥐고 소리를 지르며 최민하를 향해 힘껏 내던졌다.“이 빌어먹을 년! 우리 엄마는 이미 돌아가셨어. 그런데 내게 누명을 씌우겠다고 우리 엄마의 시신까지 모욕해? 천벌을 받을까 봐 두렵지도 않아?”“우리 엄마를 돌려줘!”송지욱은 재빨리 손을 뻗어 최민하의 머리를 향해 날아가던 티슈 케이스를 맨손으로 막아냈다.티슈 케이스는 나무로 만들어져 단단한 데다가 모서리도 날카로웠다.그 탓에 송지욱의 손등이 금세 붉게 부어올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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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날 이후로 송지욱은 단 한 번도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송지욱이 내게 보내기로 한 치료비마저 최민하가 중간에서 가로챘다.돈이 떨어지자 나는 VIP 병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병실로 또다시 옮겨졌다.환경은 열악했고, 약도 기본적인 것들뿐이었다. 몸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한 달 뒤, 마지막 남은 돈까지 전부 떨어지자 나는 결국 퇴원할 수밖에 없었다.가슴 위로 길게 구불구불 이어진 짙은 붉은 흉터를 쓰다듬자, 엄청난 증오가 나를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퇴원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경찰서로 가서 신고하는 것이었다.“저 신고하려고요. 누군가 제 엄마의 시신을 훔쳐 갔어요.”경찰은 신속하게 움직였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 병원 CCTV를 통해 엄마의 시신이 어디로 옮겨졌는지 밝혀냈다.손가락 몇 번만 움직이면 금방 진실을 밝혀낼 수 있었는데, 송지욱은 그조차도 하지 않고 겨우 말 몇 마디만 듣고 최민하를 믿었다.정말 우스운 일이었다.CCTV 영상을 통해 최민하와 정채린이 함께 우리 엄마의 시신을 옮긴 것으로 확인되었다.경찰은 두 사람의 결제 내역까지 추가로 확인했다.최민하는 중고 거래 사이트를 통해 냉동고 하나를 구매했다.경찰은 엄마의 시신이 최민하가 구매한 냉동고 안에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한예서 씨, 지금 즉시 출동하겠습니다. 반드시 용의자를 체포해서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어머님의 시신도 꼭 찾아드리겠습니다.”나는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단순히 감옥에 보내는 건 최민하에게 너무 관대한 처벌이었다.SNS에 최민하가 자랑스럽게 올린 최고급 예식장 사진을 본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나는 최민하가 가장 찬란하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철저하게 진흙탕 속으로 처박히게 할 것이다.“경찰관님, 지금 체포하러 간다면 오히려 상대방이 눈치를 채고 손을 쓸지도 몰라요.”“사흘 뒤 최민하의 결혼식에 용의자 정채린도 참석할 거예요.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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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그 영상에는 최민하가 친구들과 함께 수다를 떠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최민하는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계속 눈을 흘겼다.“정채린 그 멍청한 년이 나한테 생일 선물을 달라잖아.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봐.”“내가 걔랑 어울리는 이유는 한예서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야. 그리고 또 못생긴 데다가 몸매도 별로여서 같이 있으면 내 미모가 더 돋보이거든. 그런 주제에 감히 나랑 친구가 되려고 해?”“지욱이 절친이라는 놈은 가난한 데다 촌스럽기까지 해. 아마 평생 남의 뒤나 졸졸 따라다니겠지.”“지욱이 누나도 정말 뻔뻔하다니까. 곧 서른다섯인데 아직도 결혼하지 않고 친정에 얹혀살면서 남동생 등골이나 빼 먹잖아. 정말 기생충 같은 여자라니까. 지욱이 돈은 내 돈이나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무슨 자격으로 내 돈을 써? 지욱이랑 결혼하면 가장 먼저 지욱이 누나부터 쫓아낼 거야!”...최민하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욕했다.그리고 영상은 최민하의 광기 어린 비명과 함께 끝났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민하의 편을 들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색이 좋지 않았다.그들은 평소 다정하고 귀엽던 최민하에게 그런 어두운 이면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심지어 송지욱마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연신 뒷걸음질 쳤다.송지욱은 들고 있던 부케를 떨어뜨리고는 두려움 가득한 눈빛으로 최민하를 낯선 사람 보듯 바라보며 물었다.“민하야, 그 사람들은 전부 내 친구들이고 가족이야.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너 정말 무서운 애였구나.”최민하는 눈물을 머금은 채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최민하가 해명하려는 순간, 정채린이 달려들어 최민하를 바닥에 쓰러뜨렸다.정채린은 최민하의 몸 위에 올라타 씩씩거리며 뺨을 때리고 웨딩드레스를 잡아당겼다.“나는 너를 친구로 생각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이 나쁜 년! 내가 얼굴도 못생기고 몸매도 별로라고? 너는 겉과 속이 다른 빌어먹을 년이야! 죽여 버리겠어!”송지욱의 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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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경찰은 송지욱에게 일련의 증거 자료와 함께 체포영장을 제시했다.송지욱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최민하를 분노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충격에 온몸이 덜덜 떨렸다.송지욱은 속았다.거짓말을 한 건 한예서가 아니라 최민하였다.그리고 한예서의 엄마는 정말로 돌아가셨다. 최민하와 정채린이 함께 몰아붙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심지어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미윤의 시신까지 훔쳐 갔고, 적반하장으로 모든 잘못을 한예서에게 뒤집어씌웠다.‘내게 오해받았을 때 예서는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나는 죽일 놈이야! 예서한테 너무 미안해.’최민하와 정채린은 경찰에게 끌려갔다.내 앞을 지나갈 때, 평소 외모에 그렇게 신경을 쓰던 정채린은 화장이 번질 정도로 엉엉 울면서 말했다.“예서야, 미안해.”“너는 진심으로 나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열등감과 허영심 때문에 계속 몰래 너를 견제했어. 심지어 다른 사람을 도와 네게 상처를 줬고, 나를 아껴 주셨던 이모까지 죽게 했어. 정말 미안해...”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수갑을 찬 채 끌려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봤다.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우리 엄마는 이미 세상을 떴는데 말이다.지금 후회하는 이유도 자신이 감옥에 갈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정채린, 너는 내 친구가 될 자격이 없어.’경찰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나는 난장판이 된 결혼식장을 한 번 훑어본 뒤 자리를 뜨려고 했다.경찰이 조금 전 엄마의 시신을 찾아냈으니 이제는 엄마를 집으로 모셔 가야 했다.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내 앞길을 막았다.맨 앞에 선 사람은 당연하게도 송지욱이었다.송지욱은 후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미안해, 예서야. 내가 사람을 잘못 봐서 너한테 상처를 줬어.”“어머님을 데리러 가려는 거지? 나도 같이 갈게. 그동안 오랜 시간 알고 지내면서 나는 어머님을 우리 엄마처럼 생각하고 있었어. 가자. 우리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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