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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이]
열두 시 이십 분. 나는 신부대기실 문고리를 잡고 숫자를 셌다.
삼, 이, 일.
입장 신호를 줄 때의 버릇이다. 오늘은 다른 이유로 셌다. 안이 너무 조용했다. 신부대기실은 원래 시끄럽다. 드라이어, 헤어핀 통, 누군가의 엄마. 조용한 대기실은 둘 중 하나다. 신부가 자거나, 없거나.
"언니, 들어갈게요."
대답이 없었다.
문을 열었다. 거울 앞 의자가 비어 있었다. 화장대 위에 면사포가 곱게 개켜져 있었다. 그 옆에 쪽지 한 장.
[채이야, 미안해. 나 못 하겠어.]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는 참았다. 예식장 오 년 차가 배운 것 하나. 쪽지는 세 번 읽어도 글자가 안 바뀐다.
왼손목 시곗줄에 꽂아 둔 안전핀을 딸깍 열었다 닫았다.
"……부케는?"
없었다. 흰 작약 부케가 통째로 사라졌다. 도망가면서 부케는 챙겼다. 우리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마지막까지 사진발은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무전기를 입에 댔다.
"준수야, 3층 신부대기실. CCTV. 신부님 나가신 시간."
"네? 나가셨어요?"
"조용히."
"……네."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큰어머니였다. 연분홍 한복 치맛자락이 바닥을 쓸었다.
"채이야, 세라 화장 다 됐니? 도원 쪽 회장님 벌써 오셨대."
나는 문을 등으로 막고 섰다. 웃었다. 오 년 동안 갈고닦은 웃음이다. 하객 백 명이 신부 드레스 밑단을 밟아도 유지되는 웃음.
"속눈썹 붙이는 중이에요. 손 떨린다고 아무도 들이지 말래요."
"걔가 또 예민하게."
"그러니까요. 로비 가 계시면 제가 모시고 갈게요."
치맛자락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거짓말은 하나 늘었고, 시간은 삼십 초 벌었다. 수지가 맞는 장사는 아니었다.
무전기가 지직거렸다.
"누나, 12시 14분이요. 비상계단으로 혼자요. 부케 들고, 트렁크 끌고."
"트렁크?"
"미리 계단에 갖다 놨나 봐요."
준비한 도망이었다. 계획성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다. 적어도 납치는 아니니까.
식은 오후 한 시. 남은 시간은 사십 분.
그리고 오늘 신랑은 도원그룹 회장의 손자였다.
봄빛웨딩홀은 예순한 해 된 동네 예식장이다. 재벌가 결혼식을 치를 급이 아니다. 간판 불은 봄 자 받침이 반쯤 나가 있다. 그런데 언니가 고집했다. 사촌 동생이 일하는 데서 하고 싶다고. 원장님은 그 말에 사흘을 울었고, 나는 사흘 밤을 새웠다.
기자석 열두 자리. 도원 쪽 하객 이백 명. 로비엔 카메라가 줄지어 있었다.
"채이야."
원장님이 계단을 올라왔다. 변정숙 원장님은 내 얼굴을 한 번 보면 안다. 오 년을 봤으니까.
"없니?"
"……없어요."
원장님이 벽을 짚었다. 나는 그 팔을 잡았다.
"숨 쉬세요. 제가 할게요."
"뭘 해. 신부가 없는데."
"시간이요. 그다음은 그다음에."
나는 채널을 돌렸다.
"사회자님, 식순 바꿀게요. 축가 두 곡 앞으로. 신랑 측 축사도 앞으로. 시작은 한 시 그대로, 입장만 뒤로."
"탁 실장님, 다과 한 바퀴 더요. 떡 쪽으로. 네, 떡 많이요."
"준수야, 로비 스크린에 신랑 신부 영상 한 번 더. 아니, 두 번."
원장님이 나를 멍하니 봤다.
"그게 무슨 소용이야."
"사람은 배부르고 볼 게 있으면 덜 궁금해해요."
예식장에서 배운 인간학이다. 대학에선 안 가르친다.
동기 고은비가 뛰어 올라왔다. 한 손에 하객 명단, 한 손에 휴대폰.
"기자 하나가 계속 3층 올라오려고 해."
"엘리베이터 3층 막아. 점검 중이라고 붙이고."
은비가 눈을 좁혔다.
"……무슨 일 있지."
"나중에."
은비는 묻지 않고 내려갔다. 오 년 같이 뛴 사람은 질문을 아낀다.
난간 너머로 로비가 보였다. 하객들 사이로 바늘꽂이 단 앞치마가 옷 가방을 안고 폐백실 쪽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 아빠다. 하가네 한복집. 봄빛 폐백실에 폐백 한복을 대고 고치는 집이자 우리 집. 오늘은 조카 결혼식이라고 새벽 네 시부터 불을 켜고 폐백 한복을 다렸다. 식에는 안 앉는다고 했다. 큰집이랑 한자리에 있으면 서로 체한다고.
아빠가 고개를 들었다. 3층 난간의 딸을 보고 옷 가방을 번쩍 들어 보였다. 고름 잘 달렸지? 하는 얼굴이었다.
나도 흔들었다. 웃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언니한테 여섯 번째 전화를 걸었다.
열 번째쯤에 인정했다. 언니는 안 돌아온다.
[재헌]
열두 시 삼십 분부터 이상했다.
축가가 앞으로 왔다. 식순표에는 없던 순서다. 로비 스크린에 우리 사진이 세 번째로 돌았다. 세 번 만나서 찍은 사진은 한 장뿐이다. 그 한 장이 세 번 돌았다. 둘 다 카메라가 아니라 옆을 보고 있었다.
"떡이 계속 나옵니다."
비서실장 백승호가 수첩을 덮으며 말했다.
"로비에 떡이 세 번째 돌았습니다. 하객들이 배가 부릅니다."
"그래서."
"식장 쪽에서 시간을 끄는 것 같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 실장은 늘 옳다. 그래서 대답할 필요가 없다.
"나가 보고 올까요."
"아니. 누가 올 거야."
누군가 시간을 끌고 있다면, 이유를 말하러 오는 것도 그 사람이다. 호텔에서 배운 규칙이다. 사고를 낸 쪽이 아니라 사고를 막는 쪽이 먼저 문을 두드린다.
열두 시 사십 분.
노크.
"들어오세요."
여자가 들어왔다. 검은 정장. 허리에 남색 파우치. 손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하채이.
나는 창가에 서 있었다. 왼쪽 커프스 단추를 돌리고 있었다. 버릇이다. 고칠 생각은 없다.
"신부님 사촌이기도 합니다."
"압니다."
시계를 봤다.
"이 분 드리죠. 곧 사진 찍자고 부를 겁니다."
여자가 손목에서 안전핀을 한 번 열었다 닫았다. 딸깍.
"신부님이 떠나셨습니다. 12시 14분, 비상계단으로요."
단추를 돌리던 손이 멈췄다.
일 초. 이 초.
놀랍지 않았다. 그게 좀 놀라웠다. 세 번 만났다. 세 번 다 이십 분을 안 넘겼다. 세 번 다 둘이서 창밖만 봤다. 떠날 사람이면 그때 떠났어야 했다. 식 사십 분 전이 아니라.
"……그래서요."
여자의 눈썹이 올라갔다. 잘못 들었나 하는 얼굴.
"그래서, 정하셔야죠. 지금 알리면 기자들이 바로 씁니다. 시간은 제가 이십 분 더 벌 수 있어요."
"이미 벌고 있군요. 축가가 앞으로 왔던데."
"네."
창밖. 로비 앞에 검은 차들.
"취소하죠."
쉬웠다. 쉬운 말이 제일 비싸다는 건 나중에 안다.
[채이]
너무 쉽게 나온 말이라 숨이 막혔다. 이 사람한테 오늘은 오후 일정 하나가 취소되는 날이구나.
"그러면 이 홀은 끝나요."
"무슨 뜻입니까."
"내일 기사 제목이요. 도원 후계자 결혼식, 봄빛에서 깨지다. 사람들은 신부가 도망갔는지 예식장이 망쳤는지 안 따져요. 그냥 여기가 재수 없는 데가 돼요."
"……"
"여기서 결혼하고, 돌잔치 하고, 칠순까지 한 분들이 있어요. 매주 와요. 그분들이 이제 여기 오기 싫어지는 거예요. 동네 예식장은 그 한 줄이면 문 닫아요."
"그건 당신네 사정입니다."
"알아요. 그래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제 사정이니까."
사정을 말하는 데 이 분은 짧았다. 신부 부모님 감사 인사도 이 분은 넘기는데. 그래도 끝까지 말했다. 내 사정은 내가 말해야 한다. 아무도 대신 안 해 준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회장님». 그는 받지 않았다. 곧 문자가 왔다. 그는 소리 내어 읽었다. 나한테 들으라는 건지, 자기한테 확인하는 건지 모를 목소리로.
"식이 깨지면 대표 자리는 민혁이에게 간다. 나는 한 번 말한 건 안 바꾼다."
휴대폰이 탁자 위에 엎어졌다.
"할머님이세요?"
"여든둘이십니다. 말을 바꾼 적이 없죠."
그가 웃었다. 눈만. 가늘어졌다가 금방 돌아왔다. 웃음이라기보다 한숨의 다른 모양이었다.
"보다시피 나도 사정이 생겼네요."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재헌아, 신부는?"
회색 양복의 남자가 웃으며 들어왔다. 입은 웃는데 눈은 출근 전이었다. 하객 명단에서 본 얼굴. 강민혁. 도원호텔 전무. 신랑의 사촌형.
"아직 준비 중이라던데. 좀 늦네?"
"축가 두 곡 들으시면 됩니다."
신랑은 한 음도 안 흔들렸다. 나는 속으로 감탄했다. 저 목소리는 예식장에서도 쓸 데가 많다. 예를 들면 신부 아버지가 우실 때.
"그래? 오늘 기자가 좀 많아서 걱정했지."
강민혁이 나를 흘끗 봤다. 명찰에서 눈이 잠깐 멈췄다.
"수고해요, 매니저님."
문이 닫혔다. 공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조금만. 방금 나간 사람은 향수를 너무 많이 뿌렸다. 식장 동선에서는 그런 하객을 신부 옆에 안 세운다.
[재헌]
형은 알고 있다.
확실하진 않다. 그런데 형은 신부가 늦는다는 말을 걱정하는 얼굴로 하지 않았다. 기다리는 얼굴로 했다.
나는 단추를 돌렸다. 빨리.
"하채이 씨."
"네."
"신부 드레스. 대기실에 있습니까."
"있어요. 언니는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갔더라고요. 근데 그게 왜요."
나는 그녀를 봤다. 위에서 아래로. 정장, 파우치, 무전기, 반쯤 풀린 머리.
무대 치수를 재는 기분이었다. 틀린 비유는 아니다. 무대가 필요했다.
"키가 비슷하네요. 사촌이라 그런가."
[채이]
"잠깐만요. 잠깐만."
한 걸음 물러났다. 등이 문에 닿았다. 예식장 문은 생각보다 딱딱하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려는지 알 것 같은데, 그거 말이 안 돼요."
"압니다."
"하객이 이백 명이에요. 기자가 열두 명이고."
"그래서 해야 합니다. 취소하면 둘 다 끝납니다. 이 홀도, 나도."
그가 시계를 봤다.
"열두 시 사십육 분. 입장까지 몇 분입니까."
"원래대로면 십사 분. 제가 늘리면 삼십 분."
"삼십 분이면 충분합니까. 드레스, 화장, 머리."
"그걸 왜 저한테 물어요."
"여기서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당신이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손목의 안전핀을 찾았다. 열려다 말았다. 손이 떨려서 찔릴 것 같았다.
문밖에서 축가 첫 소절이 흘렀다. 내가 앞당긴 곡이다. 내가 돌린 시계가 이제 나를 재촉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왔다. 턱 아래 작은 면도 자국이 보였다. 오늘 아침 이 사람도 손이 떨렸던 걸까. 이 와중에 그런 게 궁금한 나도 참 직업병이다.
"하채이 씨."
"……네."
"당신이 서요. 신부 자리에."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