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대청 안의 평상 위에는 짙은 보라색 저고리를 입은 중년 부인이 앉아 무심하게 염주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강유영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인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곱게 관리된 얼굴에는 찬 기운이 감돌아 사람을 쉽게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는 거리감이 느껴졌다.뒤따라 들어온 어멈이 다시 한번 알렸다."부인, 손님이 오셨습니다.""부인께 문안 올립니다."강유영이 무릎을 굽혀 예를 갖추자, 공혜 부인은 그제야 시선을 들어 강유영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진국공부 사람이 내게는 무슨 일로 찾아왔느냐?""저는 진국공부의 양녀 강유영이라 합니다. 저잣거리에서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는데, 오늘 거동이 수상한 자가 이 옥여의를 찾아가지 않는 조건으로 맡기러 왔습니다. 점주가 옥여의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부인의 물건임을 알아보았기에 이렇게 가져왔습니다."강유영은 품에 안고 온 옥여의를 내밀었다.공혜 부인이 어멈에게 눈길을 주자, 어멈이 다가와 비단 보자기를 받아 들었다. 어멈은 보자기를 풀어 공혜 부인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공혜 부인은 강유영을 다시 한번 훑어보며 느긋하게 물었다."누가 팔러 왔더냐?""모르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 키의 중년 사내인데 모자를 눌러써서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을 시켜 감시하게 해두었으니 부인께서 사람을 보내 잡아 오시면 될 겁니다."강유영은 손으로 키를 가늠해 보이며 사내를 붙잡아 두었다는 사실까지 알렸다."집안에 손버릇 나쁜 자를 두어 부끄러운 꼴을 보였구나. 황씨 어멈, 이따가 사람을 시켜 이 아가씨를 따라가게 하거라."공혜 부인은 다시 시선을 내리깔며 무심하게 명했다.강유영은 입을 다물고 한 걸음 물러섰다. 이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돌아가도 좋을 듯 했다.서유가 성정이 괴팍하다고 하더니 직접 겪어보니 정말로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좋은 마음으로 물건을 돌려주고 집안의 도둑까지 잡아주었으니 다른 사람 같았으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건넸을 터였다. 하지만 공혜 부인의 얼굴에는 고마움은커녕
강유영은 점주에게 눈짓을 보낸 뒤 옥여의를 챙겨 들고 정문으로 나섰다.뒤따라 나온 서유는 전당포 안을 한 번 돌아보고는 조심스레 물었다."아씨, 정말 이 물건을 받으실 생각입니까?""왜 그러느냐?"강유영이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서유가 목소리를 낮추어 만류했다."누가 봐도 저 자가 공혜 부인의 저택에서 훔쳐 나온 물건입니다. 폐하께서 공혜 부인을 각별히 공경하시는데, 괜히 엮여서 화를 자초해서는 안 됩니다.""나도 알고 있다."강유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서유는 걱정이 가시지 않는지 다시 말을 이었다."아씨께서는 공혜 부인을 잘 모르시겠지만 저는 익히 들은 바가 있습니다. 성정이 꽤나 괴팍하신 분이니 절대 엮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오랫동안 조원철을 모시며 공혜 부인의 소문을 들어본 적이 있었기에 아씨에게 단단히 일러두어야 했다."지금 바로 이 옥여의를 공혜 부인의 저택으로 가져다드릴 생각이다. 너는 여기서 저 자가 도망치지 못하게 지키고 있거라."강유영이 낮은 목소리로 일렀다."그건 안 됩니다. 아씨 혼자 가시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 청란에게 지키라고 하겠습니다."서유가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청란은 어디에 있느냐?"강유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원철이 청란 일행을 붙여준 지 꽤 되었으나 그들이 모습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서유가 두 손가락을 입에 넣고 짧게 휘파람을 불자, 눈 깜짝할 사이에 청란이 지붕 위에서 뛰어내렸다."아씨를 뵙습니다."청란이 다가와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전당포 안에 있는 저 사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해라."강유영이 전당포 안의 중년 사내를 가리키며 명하자, 청란이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예."강유영은 서유를 데리고 마차에 올랐다.잠시 후 마차가 멈춰 서자 밖에서 서유가 알렸다."아씨, 도착했습니다."강유영이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오자, 먼저 마차에서 내린 서유가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강유영은 고개를 들어 대문 위에 걸린 현판을 바라보았다. 영안군부라는 네 글자가 힘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일부러 목소리를 위장한 듯, 탁하고 쉰 목소리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강유영은 사내를 위아래로 한 번 훑어보았다.차림새부터 무척 수상했다. 밖은 해가 쨍쨍한 대낮인데도 낡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써서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얼굴을 감추고 눈치를 보는 자가 선량한 사람일 리 없었다."물건은 여기 있습니다."감정사가 옥여의를 강유영 앞으로 밀어주며 글자가 새겨진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강유영은 시선을 내려 옥여의를 꼼꼼히 살폈다.옥의 결이 매끄럽고 윤기가 흐르는 데다 조각 솜씨 또한 정교하기 그지없었다. 옥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가 한눈에 보아도 값비싼 보물임을 알 수 있었다. 반면 눈앞의 중년 사내는 옷차림이 지극히 평범하여 이런 귀한 물건을 소유할 만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어떻습니까? 받으실 겁니까?"중년 사내가 초조한 기색으로 물었다."찾아가지 않는 조건으로 넘기시는 겁니까?"강유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속으로는 이 자를 이곳에 묶어두고 장물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줄 방도를 빠르게 궁리했다."그렇소."중년 사내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귀한 물건이니 미리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한 번 값을 치르고 넘기시면 나중에 절대 무를 수 없습니다."강유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은근슬쩍 그의 반응을 떠보았다. 얼굴을 가린 채 수상쩍게 구는 품이 이 옥여의도 훔쳤거나 빼앗은 장물일 가능성이 높았다."무르지 않을 테니 은자를 얼마나 쳐줄 수 있소?"중년 사내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강유영은 점주와 감정사에게 눈길을 돌렸다. 값을 매기는 것은 그들의 몫이라 그녀는 시세를 알지 못했다.감정사가 손가락을 펴 보이며 값을 매겼다."팔천 냥을 쳐드리겠습니다.""너무 후려치는구려. 이 물건은 저잣거리에서 못 받아도 삼만 냥은 호가하는 물건이오."중년 사내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강유영은 조용히 그의 태도를 관찰했다. 입으로는 불평하면서도 옥여의를 도로 가져갈 생
보흥 전당포.강유영은 아침 일찍부터 서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경성에 돌아온 지도 꽤 시간이 흘렀고, 한가할 때면 전당포 서재에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았다.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앞쪽 점포의 분주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귓가에 은자가 쏟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마음이 한결 상쾌했다.그때 점주가 수석 감정사를 데리고 다가와 굳게 닫힌 서재 문을 두드렸다."당주님."강유영은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무슨 일인가?""어서 나와서 이것 좀 봐주십시오. 물건이 하나 들어왔는데 저희끼리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점주의 말에 강유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알겠네."밖으로 나오자 점주와 감정사가 나란히 예를 올렸다.강유영이 전당포를 맡은 뒤로 실적을 올릴 때마다 수익을 나누어 준 덕분에 두 사람의 수입도 제법 많이 늘었다. 두 사람에게 그녀는 복을 가져다주는 귀인이나 다름없었기에, 인사하는 태도에도 진심 어린 존경심이 묻어났다."편히 말하게. 어찌 된 일인가?"강유영은 웃으며 손을 살짝 들어 보인 뒤 물었다. 수익을 나누는 방식을 도입한 뒤로는 모두 전당포를 자기 가게처럼 여기며 일했는데, 그들이 스스로 결정하지 못할 물건이 무엇인지 궁금했다."당주님, 손님이 가져온 물건이 최상급 양지옥으로 만든 옥여의인데 값이 보통 비싼 게 아닙니다."감정사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그게 뭐가 문제지?"강유영은 여전히 영문을 몰라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전당포에 은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좋은 양지옥 여의라 한들 값을 치르지 못할 리는 없었다."원래는 감정을 마치고 바로 받으려 했습니다. 손님도 다시 찾아가지 않는 조건으로 아예 넘기겠다고 했고요."점주가 말을 이어받았다."그런데 물건을 감정하다가 옥여의 아랫부분에서 글자 두 개를 발견했습니다.""무슨 글자인가?"강유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묻자, 점주가 대답했다."공혜라는 두 글자입니다.""공혜라……."강유영은 미간을 좁히며 그 이름을 되뇌다가 문득 기억을 떠올렸
이야기를 다 들은 조원철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사람을 보내 소지란의 사촌 오라비를 경성으로 데려올 생각이냐?""어떻게 아셨습니까?"강유영은 그의 품으로 파고들어 가느다란 팔로 목을 감싸 안으며 고개를 들었다."주소까지 적어주었으니 다른 이유가 있겠느냐. 게다가 폐하께서 하사하신 몸이라 함부로 떠날 수도 없으니 말이다."조원철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직접 가르친 아이였으니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 모를 리가 없었다."역시 예리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부릴 만한 사람이 없어서 오라버니께서 사람을 보내주셨으면 합니다."강유영이 잠을 참고 그를 기다린 것도 이 말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소지란의 사촌 오라버니가 위중하다고 하니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 데려와야 했다.조원철은 입을 다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왜 아무 말씀도 없으십니까?"강유영은 영문을 몰라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이 일을 승낙한 것이 경솔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느냐?"조원철이 마주 보며 묻자, 강유영은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무엇이 문제입니까? 나중에 소씨가 외출할 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시키면 되지 않습니까?"그녀는 소지란이 사촌 오라버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그게 아니다."조원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병세가 위중하다는데 오는 길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쩔 셈이냐?"강유영은 그의 지적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소지란이 가엾다는 생각에 미처 그 점까지는 헤아리지 못했었다. 사람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조원철의 가르침을 또 깜빡 잊은 것이었다."이미 약조한 일이니 내일 사람을 보내마. 앞으로는 일을 처리할 때 좀 더 신중하거라."조원철은 그녀를 품에 꼭 안으며 당부했다."설마 소씨가 생떼를 부리진 않겠지요……."강유영은 마음이 불안해졌다. 중병을 앓는 환자에게 장거리 이동은 무리였기에 조원철이 우려하는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사람을 보낼 때 사촌 오라비에게 나와 소지란 사이
"자네는 입이 너무 무거운 게 흠이군."건정제는 자세를 바꾸어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기댔다. 경계심을 한결 늦춘 기색이었다."스물일곱이나 먹은 사내가 마음에 품은 여인이 정말 없단 말인가?""인연이 나타나면 그때 폐하께 은전을 청하겠습니다."조원철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건정제는 그의 공손한 태도에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좋네.""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조원철은 예를 올리고 한 걸음 물러선 뒤 전각을 나섰다.조원철이 나가는 것을 본 건정제는 사람을 불렀다."여봐라.""폐하."고익이 나와 허리를 숙였다."사람을 시켜 조원철의 주변에 여인이 있는지, 선위 장군부의 적녀와 왕래가 있는지 철저히 조사하거라."건정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명하자, 고익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예,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전각 밖에서 대기하던 청류는 안의 대화를 엿듣고는, 밖으로 나온 조원철에게 다가와 낮게 말했다."세자, 폐하께서 또 세자를 떠보셨습니다."이대로 가다가는 조원철과 강유영의 관계도 오래 숨기지 못할 듯했다.조원철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며 걸었고, 청류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공혜 부인께 사람을 보내 내가 늦은 시간에 찾아뵙겠다고 전하거라."조원철이 불쑥 입을 열자, 청류는 잠시 멈칫하더니 서둘러 대답했다."예."공혜 부인은 태후의 올케이자 건정제의 외숙모였다. 건정제는 어린 시절 후궁들의 모함과 배척을 받아 외진 궁궐에 방치된 적이 있었다. 의식주가 변변치 않고 하인들의 박대까지 받던 시절, 외숙모가 몰래 은자와 사람을 보내 보살펴준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건정제는 외숙모를 늘 깊이 공경하여 보위에 오른 뒤 공혜 부인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게다가 그녀는 과거의 은혜를 내세워 권세나 부귀를 탐한 적이 없었기에 건정제는 더욱 고마움을 느끼며 각별히 대우했다.하지만 지금까지 조원철과 공혜 부인은 아무런 왕래가 없었다. 청류는 의아했으나 주군의 명대로 따르기로 했다.해시가 거의 다 지나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초여름의 이른 아침.경성 진국공부의 사당 주변은 아침부터 자옥한 안개로 휩싸였다.조용한 사당 안에서는 승려가 경을 읊는 소리가 이따금씩 흘러나오고, 정원 내 청동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사당을 지키는 시녀와 하인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준비하고 있었다.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서 처마 길을 따라 뒤뜰을 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퍼진 근육통 때문에 걸음걸이가 다소 어색했다.좌측 쪽문이 갑자기 열리더니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와 가늘고 여린 그녀의 허리를 가로챘다. 상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녀를 끌고 뒤뜰에
강유영은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뒤돌아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한 탓에 다리가 바닥에 꽁꽁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들어오거라.”조원철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명령했다.강유영은 누가 보기라도 할까 두려워,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내실로 들어갔다.“언제 오셨나요?”잠깐 오씨 어멈의 저녁을 챙기러 나갔다 온 사이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지금쯤이면 밖에서 왕 소저와 저녁 식사를 해야 하지 않나?’조원철이 다가오더니 문을 닫았다.강유영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서 그와 거리를 벌리고 고개를
“기특하기도 하지. 어서 이리 와서 앉으렴.”한씨는 웃으며 강유영을 향해 손짓하더니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렸다.밖에서 강유영에게 잘해주는 것은 인자한 진국공 부인의 명성을 위해서였다.강유영은 약상자를 장 의원에게 건네고는 고분고분 그쪽으로 다가갔다.장 의원은 그녀와 시선을 교환하고는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는 강유영의 처지를 잘 알기에, 그녀의 거짓말을 까발리지 않았다. 장 의원은 손을 뻗어 한씨의 손목에 대고 진맥을 시작했다.한씨의 옆에 앉은 강유영은 불안하게 병풍 뒤쪽을 힐끔거렸다.조원철은 탁자 앞에 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