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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죽하는 사람: 새벽 두 시에 반죽을 시작해요. 라디오를 켜면 손이 덜 외로워요. 오늘도 「두 시의 편지」 들으면서 밀가루 이십 킬로 치댈게요.』
≈
10월 14일 화요일 새벽 네 시 이십 분. 반달FM 4층 작가석.
서다온은 원고 뭉치를 가슴에 안고 일어났다. 창 없는 구석 자리였다. 책상 위에는 식은 우유 한 컵, 노란 형광펜 세 자루, 그리고 오늘 방송에서 읽은 사연 열한 장. 그중 맨 위 한 장에만 형광펜 줄이 세 개 그어져 있었다.
『반죽하는 사람』.
다온은 그 이름을 손가락으로 한 번 쓸었다. 1년 전부터 사흘에 한 번꼴로 메일이 왔다. 새벽 두 시에 반죽을 시작한다는 사람. 빵집인지, 국숫집인지, 만두 가게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름도 나이도 적지 않았다. 문장은 짧고 말투는 조금 무뚝뚝했다. 그런데 읽고 나면 손이 따뜻해졌다.
“다온 작가, 오늘도 그거 안고 가?”
부조정실 문틈으로 한도윤 PD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흔하나. 눈 밑이 늘 어두웠다. 손에는 언제나 서류철이 들려 있었다.
“이거요? 원고 정리하려고요.”
“사연은 서랍에 두고 가. 그거 품고 다니다 잃어버리면 시말서야.”
“안 잃어버려요.”
“지난달에 버스에 두고 내렸잖아.”
다온은 대답 대신 원고를 가방에 넣었다. 맨 위 한 장만 빼서 외투 안주머니에 넣었다. 한도윤이 그걸 보고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더 말하지 않았다.
스튜디오 유리창 너머에서 금정란 DJ가 헤드폰을 벗고 있었다. 예순넷. 회색 단발, 은테 안경. 30년째 이 의자에 앉은 사람. 금정란이 유리창 너머로 다온을 보고 손을 흔들었다. 입 모양으로 「수고했어」.
다온도 손을 흔들었다.
오늘 클로징 멘트는 다온이 썼다. 금정란이 그걸 읽었다. 「오늘도 잘 버티셨어요.」 30년 동안 바뀐 적 없는 마지막 문장. 다온은 그 앞의 세 줄만 날마다 새로 썼다.
≈
새벽 네 시 반. 반달FM 건물 밖은 아직 깜깜했다.
10월 중순의 새벽은 차가웠다. 다온은 목도리를 코까지 끌어올렸다. 버스는 없었다. 첫차는 다섯 시 십 분. 그래서 걸었다. 25분.
큰길을 따라 걸으면 가로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다온을 비췄다 놓았다. 편의점 두 곳, 문 닫은 약국, 셔터 내린 꽃집. 새벽에 깨어 있는 건 편의점과 택시와 다온뿐인 것 같았다.
안주머니에서 원고가 바스락거렸다. 다온은 걸으면서 그 문장을 속으로 읽었다.
『라디오를 켜면 손이 덜 외로워요.』
손이 외롭다는 말을 다온은 처음 들었다. 사람이 외로운 건 알았다. 손이 외로울 수도 있구나. 새벽 두 시에 혼자 밀가루를 치대는 손.
다온은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형광펜 잉크가 검지에 묻어 있었다. 노랗게.
≈
같은 시각. 반달동 큰길 버스 정류장 앞, 3층 건물 1층.
반달빵집 안은 따뜻했다. 오븐 두 대가 돌아가고 있었다. 계산대 옆 낡은 라디오에서 「두 시의 편지」 다시듣기가 흘러나왔다. 소리를 작게 줄여 둔.
강태오는 철판을 오븐에서 꺼냈다. 소금빵 스물네 개. 버터가 녹아 바닥이 지글거렸다. 위에 뿌린 굵은소금이 반짝였다.
“…오늘 반죽하는 사람님 사연 읽어 드렸는데요. 손이 덜 외롭다는 말, 작가님이 형광펜을 세 줄이나 그었대요.”
라디오에서 금정란 목소리가 말했다. 다시듣기라 한 시간 반 전의 목소리였다.
태오는 철판을 든 채로 멈췄다.
‘세 줄.’
장갑 낀 손이 뜨거웠다. 그래도 내려놓지 않았다. 세 줄이라는 말을 한 번 더 듣고 싶었다. 라디오는 다음 사연으로 넘어갔다.
태오는 철판을 진열대 위에 내려놓았다. 소금빵을 하나씩 옮겼다. 집게로. 스물네 개. 맨 끝 하나는 일부러 조금 떨어뜨려 놓았다. 진열대 오른쪽 귀퉁이.
다섯 시까지 이십 분.
‘오늘도 오겠지.’
태오는 앞치마에 손을 닦았다. 밀가루가 하얗게 묻어났다.
≈
다섯 시 오 분. 다온은 반달빵집 앞에 섰다.
유리문 안이 환했다. 진열대에 빵이 가득했다. 김이 서린 유리 너머로 소금빵이 보였다. 다온은 그걸 보자마자 걸음이 빨라졌다.
이 빵집은 다온이 사는 건물 1층에 있었다. 다온 집은 3층. 원룸 302호. 2층은 세탁소 사무실이라 밤에는 비어 있었다. 3년 전 이 원룸으로 이사 왔을 때 1층 빵집 할머니가 소금빵 하나를 공짜로 줬다. 「새로 왔어? 새벽에 들어오는 아가씨구나.」 그 할머니는 그해 겨울에 돌아가셨다. 빵집은 손자가 이어받았다.
그 손자가 지금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키가 컸다. 흰 앞치마에 밀가루가 묻어 있었다. 머리를 짧게 깎았고, 표정이 없었다. 3년 동안 다온은 그 사람이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었다. 말도 거의 안 했다. 「드세요.」 「그래요.」 「사천오백 원이요.」 그게 다였다.
다온은 문을 밀었다. 종이 울렸다. 딸랑.
“어서 오세요.”
태오가 말했다. 다온을 보지 않고. 계산대 위 영수증 뭉치를 정리하면서.
다온은 진열대로 갔다. 소금빵 칸. 하나 남아 있었다. 오른쪽 귀퉁이에.
‘하나?’
다섯 시 오 분인데. 문 연 지 오 분. 스물네 개를 굽는다고 들었다. 벌써 스물셋이 나갔을 리 없었다.
다온은 집게를 들었다. 그때 등 뒤에서 문이 다시 열렸다. 딸랑.
“총각, 단팥빵 둘!”
목소리가 컸다. 다온이 돌아봤다. 모자를 쓴 예순 넘은 남자. 택시 기사 조끼. 오 기사님이었다. 새벽마다 이 시각에 오는 단골. 다온도 얼굴을 알았다.
“어, 작가 아가씨! 오늘도 퇴근?”
“네, 기사님.”
“오늘 방송 들었어. 반죽하는 사람 사연. 손이 외롭다는 거.”
오 기사님이 단팥빵 칸으로 가며 말했다.
“그 양반 빵집 하나 봐. 반죽을 이십 킬로씩 하는 거 보면.”
계산대 뒤에서 소리가 났다. 쨍. 스테인리스 그릇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다온이 돌아봤다. 태오가 쪼그려 앉아 그릇을 줍고 있었다. 반죽 그릇.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태오가 그릇을 들고 일어났다. 다온을 보지 않고 주방 쪽으로 들어갔다.
≈
태오는 주방 싱크대 앞에 섰다. 그릇을 물에 담갔다. 손이 조금 떨렸다.
‘빵집 하나 봐.’
오 기사님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알았다. 오 기사님은 새벽마다 그런 말을 했다. 「그 사람 택시 기사인가 봐」 「그 사람 간호사인가 봐」. 사연마다 직업을 맞히는 게 오 기사님 취미였다.
그래도 그릇을 떨어뜨렸다.
태오는 수도꼭지를 잠갔다. 주방 문틈으로 매장을 봤다. 다온이 진열대 앞에 서 있었다. 집게를 든 채로. 소금빵 하나를 보면서.
목도리를 코까지 올렸다. 눈 밑이 어두웠다. 오늘도 원고를 품에 안고 왔을 것이다. 외투 안주머니가 조금 불룩했다.
라디오에서 금정란이 그녀를 「우리 다온 작가」라고 부른 지 1년 반. 태오는 그 이름이 3층 302호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 할머니가 말해 줬다. 「3층 아가씨가 라디오 작가래. 우리가 듣는 그거.」 할머니는 그 말을 하고 웃었다. 「새벽 두 시 사람이 하나 더 생겼네.」
그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뒤, 태오는 처음으로 사연을 보냈다. 할머니가 30년 동안 보내던 그 프로에. 할머니 대신.
그리고 그 사연을 처음 읽는 사람이 3층 302호라는 걸 알면서.
≈
다온은 소금빵을 집으려 했다. 마지막 하나.
그런데 오 기사님이 다온 옆으로 왔다.
“어, 소금빵 하나 남았네. 나 그거 하나만.”
다온이 집게를 멈췄다. 오 기사님이 다온을 봤다. 다온이 오 기사님을 봤다.
“아, 기사님 단팥빵 사신다면서요.”
“오늘은 소금빵도 땡기네.”
“저 매일 이거 사요.”
“나도 가끔 사.”
둘이 진열대 앞에서 서로를 봤다. 그때 태오가 주방에서 나왔다.
“기사님 단팥빵 두 개 드세요.”
태오가 단팥빵을 봉투에 넣었다. 그리고 소금빵 칸을 봤다. 다온을 봤다. 오 기사님을 봤다.
“소금빵은 십 분 뒤에 한 판 더 나와요.”
“그래? 그럼 기다릴까.”
“기사님 다섯 시 십오 분에 콜 받으시잖아요.”
오 기사님이 손목시계를 봤다. 「어이쿠」 하더니 단팥빵 봉투를 받아 들고 나갔다. 「작가 아가씨, 그거 먹어!」 문이 닫혔다. 딸랑.
다온은 집게를 든 채 태오를 봤다.
“십 분 뒤에 진짜 나와요?”
“…나와요.”
“근데 왜 이거 하나만 남았어요? 스물네 개 굽는다면서요.”
태오가 계산대 위 영수증을 다시 정리했다. 이미 정리된 영수증을.
“…많이 팔렸어요.”
“다섯 시 오 분에요?”
“그래요.”
다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소금빵을 집었다. 봉투에 넣었다. 계산대에 올렸다.
“이천오백 원이요.”
다온이 카드를 내밀었다. 태오가 받았다. 단말기에 꽂았다. 영수증이 나왔다. 태오가 영수증을 봉투에 넣으려다 멈췄다. 다온 검지에 묻은 노란 형광펜 자국을 봤다.
“…손에 뭐 묻었어요.”
다온이 손을 봤다. 노란 자국.
“아, 형광펜이요. 일하다가.”
“그래요.”
태오가 봉투를 건넸다. 다온이 받았다. 봉투가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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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온은 빵집을 나와 건물 옆 계단으로 올라갔다. 3층까지 서른 칸. 2층 세탁소 사무실 앞을 지나 302호.
원룸은 차가웠다. 보일러를 켜고 외투를 벗었다. 안주머니에서 원고를 꺼냈다. 책상 위에 펼쳤다. 그 옆에 소금빵 봉투.
다온은 소금빵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버터가 배어 촉촉했다. 짭짤했다. 3년째 거의 매일 먹는 맛.
먹으면서 원고를 다시 읽었다.
『새벽 두 시에 반죽을 시작해요. 라디오를 켜면 손이 덜 외로워요.』
다온은 형광펜을 들었다. 이미 세 줄 그어진 그 문장 아래에 작게 적었다.
「→ 이 사람 손도 오늘 따뜻했으면.」
그리고 원고를 파일에 넣었다. 「반죽하는 사람」이라고 적힌 파일. 1년 동안 모은 사연이 마흔두 장. 다온만 가진 파일이었다. 방송국 서랍이 아니라 자기 방 책상에 두는.
소금빵 마지막 한 입을 먹고 다온은 침대에 쓰러졌다. 커튼 사이로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래층에서 오븐 타이머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띠리리.
십 분 뒤 한 판 더 나온다는 그 소금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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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시 십오 분. 태오는 오븐에서 두 번째 소금빵 판을 꺼냈다. 스물네 개.
첫 판 스물네 개 중 스물셋은 주방 선반 위 쟁반에 그대로 있었다. 진열대에 하나만 내놓고 나머지는 숨겨 둔.
미친 짓이라는 걸 알았다. 매일 하는 건 아니었다. 오늘 같은 날만. 사연이 방송에 나간 날. 그 사연에 형광펜 세 줄이 그어진 날.
마지막 하나를 그녀가 가져가는 걸 보고 싶었다.
태오는 쟁반 위 스물세 개를 진열대로 옮겼다. 두 번째 판까지 마흔일곱 개. 오늘은 소금빵이 남을 것이다. 남으면 저녁에 동네 경로당에 갖다 드리면 된다. 할머니가 하던 대로.
계산대 옆 라디오에서 다시듣기가 끝나고 음악이 나왔다. 오래된 노래. 할머니가 좋아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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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한 시 이십 분. 다음 날, 10월 15일 수요일.
태오는 빵집 셔터를 반만 올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켰다. 오븐 예열 버튼을 눌렀다. 앞치마를 맸다. 손을 씻었다.
그리고 계산대 옆 라디오 앞에 섰다.
낡은 라디오였다. 할머니가 30년 쓴. 은색 테두리가 벗겨지고 손잡이에 테이프가 감겨 있었다. 주파수 다이얼 위에도 투명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다이얼이 돌아가지 않게. 한 주파수에 고정해 둔.
반달FM. 「두 시의 편지」.
할머니가 붙인 테이프였다. 태오는 그걸 떼지 않았다. 3년 동안.
전원을 켰다. 잡음 사이로 음악이 흘렀다. 아직 한 시 반. 「두 시의 편지」 앞 프로그램.
태오는 밀가루 포대를 뜯었다. 이십 킬로. 반죽기에 쏟았다. 물, 소금, 이스트, 버터. 반죽기가 돌았다. 웅웅.
그 소리 속에서 태오는 앞치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메일 앱. 새 메일. 받는 사람 칸에 이미 주소가 있었다. 「두 시의 편지 사연함」.
보내는 사람 이름 칸. 「반죽하는 사람」.
태오는 밀가루 묻은 엄지로 화면을 눌렀다. 천천히. 한 글자씩.
「어제 사연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형광펜 세 줄 그었다는 말 들었어요. 그 말 듣고 소금빵을 하나 남겨 뒀어요. 누가 가져갔는지는 비밀이에요.」
쓰고 나서 오래 봤다. 마지막 문장을 지웠다. 다시 썼다. 또 지웠다.
결국 이렇게 남겼다.
「어제 사연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도 반죽해요. 손이 어제보다 덜 외로워요.」
보내기를 눌렀다.
두 시. 라디오에서 시그널 음악이 흘렀다. 금정란 목소리.
“새벽 두 시예요. 「두 시의 편지」, 금정란입니다. 오늘도 깨어 계신 분들, 반가워요.”
태오는 반죽기를 멈췄다. 반죽을 꺼내 작업대에 올렸다. 손바닥으로 눌렀다. 밀고, 접고, 다시 밀고.
3층 302호는 지금 비어 있을 것이다. 그녀는 방송국 작가석에 있을 것이다. 창 없는 구석 자리에서. 지금쯤 그의 메일을 열고 있을지도 몰랐다.
태오는 반죽을 밀었다. 손이 덜 외로웠다.
(1화 끝)
『반죽하는 사람: 내일도 반죽할게요. 내일도 라디오 켤게요. 내일 그 자리에 다른 게 나와도 다이얼은 안 돌릴게요. 테이프 붙어 있으니까.』≈12월 31일 수요일 새벽 한 시 오십 분. 반달FM 4층.다온은 스튜디오 문 앞에 서 있었다. 원고 뭉치를 안고. 마지막 원고였다. 「두 시의 편지」 30년 마지막 방송. 사흘 밤을 새워 쓴. 30년 동안 사연을 보낸 사람들 이름을 다 넣고 싶었는데 다 넣을 수가 없었다. 게시판에 남은 이름만 이천 개가 넘었다.복도가 이상하게 붐볐다. 평소 새벽 두 시면 다온과 한도윤과 금정란, 셋이 전부였다. 오늘은 보도국 야간 기자, 교통 캐스터 나보람, 엔지니어 둘, 그리고 낮 프로 PD 몇이 복도에 서 있었다. 다들 종이컵을 들고. 30년 마지막 방송을 보러.보람이 다온에게 다가와 우유 종이컵을 내밀었다.“작가님, 괜찮아?”“몰라. 진짜 모르겠어.”“울지 마. 방송 중에 울면 사고야.”“선생님이 지난번에 팔 초 울었어.”“그러니까 둘이 울면 십육 초야.”다온이 웃었다. 보람도 웃었다. 그리고 보람이 다온 팔을 꽉 잡았다.스튜디오 안에서 금정란이 헤드폰을 쓰고 있었다. 빨간 머플러. 크리스마스이브 때 했던. 「마지막 날엔 이거 해야지.」부조정실에서 한도윤이 콘솔 앞에 앉아 있었다. 손에 서류철. 그런데 열지 않았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채로.≈같은 시각. 반달빵집.태오는 반죽기를 돌리지 않았다. 작업대 앞에 서서 라디오를 보고 있었다. 할머니 라디오. 다이얼 위 테이프.오늘이 마지막이었다. 내일부터 새벽 두 시 이 주파수에선 재방송이 나온다고 했다. 낮 프로
『반죽하는 사람: 크리스마스이브엔 밤을 새워요. 슈톨렌에 슈가파우더를 뿌리면 눈 온 것 같아요. 올해는 누가 옆에서 리본을 묶어 주면 좋겠어요. 혼자 묶으면 자꾸 풀려요.』≈12월 23일 화요일 밤 열한 시. 반달FM 4층 작가석.다온은 달력을 봤다. 책상 옆 벽에 붙은 탁상 달력. 12월 장. 31일에 빨간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한도윤 PD가 그어 놓은. 그 옆에 작게 「마지막 방송」.여드레.일요일 빼고 일곱 번의 방송.다온은 동그라미에서 눈을 떼고 원고를 봤다. 크리스마스이브 특집.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 — 크리스마스에도 일하는 당신에게」. 사연 열둘. 응급실, 소방서, 편의점, 택시, 경비실, 물류 센터. 그리고 반죽하는 사람.반죽하는 사람 사연은 맨 마지막에 놓았다.『올해는 누가 옆에서 리본을 묶어 주면 좋겠어요. 혼자 묶으면 자꾸 풀려요.』다온은 그 문장에 형광펜을 그었다. 두 줄. 그리고 생각했다. 리본. 슈톨렌. 반달빵집도 크리스마스 케이크 대신 슈톨렌을 팔았다. 할머니 때부터. 진열대 앞에 「슈톨렌 예약 받습니다」 종이가 일주일째 붙어 있었다. 미소 글씨로.다온은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마스에 슈톨렌 파는 빵집은 많다.≈12월 24일 수요일 새벽 한 시. 반달빵집.태오는 셔터를 반만 올리고 들어왔다. 평소보다 반 시간 일찍. 오늘은 밤을 새워야 했다.작업대 위에 슈톨렌 반죽이 줄지어 있었다. 어젯밤 열 시까지 빚어 둔 것. 서른 개. 예약이 스물여섯, 매장용 넷. 할머니 때는 마흔 개였다. 태오는 서른 개가 한계였다.오븐 두 대를 예열했다. 첫 판 열 개를 넣었다. 타이머를 맞췄다. 사십 분.라디오를 켰다. 할머니 라디오. 테이프 붙은 다이얼. 「두 시의 편지」까지 한 시간.
『택시 오 기사: 비 오는 새벽에 작가 아가씨를 태워다 줬어요. 빵집 앞에 내려 줬는데 빵집 총각이 유리문 안에서 나를 째려보더라고요. 30년 택시 몰면서 그런 눈은 처음 봤어요. 총각, 나 기사야.』≈12월 5일 금요일 오후 네 시. 반달FM 4층 회의실.한도윤 PD가 공문 한 장을 탁자에 놓았다. 이번엔 마케팅팀 중간 집계가 아니었다. 방송국 공식 청취율 조사 결과. 11월분.「두 시의 편지 — 0.6%」.다온은 그 숫자를 오래 봤다. 0.3에서 0.6. 두 배였다. 두 배인데 1%의 절반을 겨우 넘었다.“국장님이 이거 보시고 뭐라고 하셨는지 알아?”한도윤이 의자에 몸을 던지듯 앉았다.“「두 배네. 근데 0.6이네.」 끝.”금정란이 보온병 뚜껑을 열며 웃었다.“국장님 말 잘하시네.”“선생님, 웃을 일이 아니에요.”“웃어야지. 0.3이 0.6 됐는데. 30년 동안 이렇게 오른 적 없어.”금정란이 다온을 봤다. 안경 너머로.“다온 작가가 한 거야.”다온은 고개를 저었다.“청취자분들이 한 거예요. 사연 보내 주신 분들이. 게시판에 쓰신 분들이. 오 기사님이 택시 손님들한테 다 틀어 준대요.”“그 오 기사님 사연은 언제 읽어?”“…다음 주요. 월요일에.”다온은 대답하면서 서류철 안 오 기사님 사연을 생각했다. 「택시 오 기사」라는 이름으로 일주일에 두 통씩 오는. 손님 얘기, 새벽 도로 얘기, 반달빵집 단팥빵 얘기. 오 기사님은 사연마다 단팥빵이 나왔다.≈12월 6일 토요일 새벽 네 시 십 분. 반달FM 건물 1층 현관.비가 왔다. 겨울비. 차가운. 다온은 현관 유리문 안쪽에 서서 밖을 봤다. 빗줄기가 가로등 불빛에 하얗게 보였다. 큰길이 젖어 번들거렸다.우산이 없었다. 가방 안에 접이식 우산이 있었는데 지난주에 살이 부러져 버렸다. 새로 사야지 하면서 일주일이 지났다.25분. 걸으면 다 젖을 것이다. 첫차는 다섯 시 십 분. 한 시간을 현관에서 기다릴 수도 없었다.다온이 목도리를 머리에 뒤집어쓰려는데 큰길에서 경적이
『반죽하는 사람: 누가 저한테 사연을 써 보라고 했어요. 그래서 써요. 원래 쓰고 있었다는 말은 못 했어요. 반죽이 다 부풀면 말할게요.』≈11월 29일 토요일 오전 열한 시. 반달FM 4층 회의실.한도윤 PD가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놓았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었다.“마케팅팀 중간 집계야. 공식 아니고. 0.5%.”다온은 그 숫자를 봤다. 0.5. 두 달 전 0.3이었다.“올랐어요.”“올랐지. 0.2. 두 달 만에.”“국장님은요? 뭐라세요?”“국장님은 1%가 아니면 다 똑같대.”한도윤이 종이를 접었다. 그런데 버리지 않고 서류철에 넣었다. 다온은 그걸 봤다.“그래도 게시판은 하루 오십 개 넘어.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 코너 사연이 매일 열 통씩 와. 물류 센터, 응급실, 경비실, 편의점. 지난주엔 소방서에서도 왔어.”한도윤이 서류철을 덮었다.“다온 작가. 0.5로는 안 돼. 근데 0.5까지 온 건 네가 한 거야. 그건 알아 둬.”다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만 끄덕였다. 목이 조금 메었다.≈열두 시. 반달빵집.다온은 밤샘 회의를 마치고 바로 빵집으로 왔다. 잠을 못 자 눈이 따가웠다. 창가 탁자에 앉아 메뉴판을 봤다. 낮 메뉴. 샌드위치 세 가지. 햄치즈, 에그마요, 감자.“감자 샌드위치랑 우유요.”계산대에서 미소가 「네!」 했다. 주방에서 태오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식빵 두 장, 으깬 감자, 오이, 햄 한 장. 반으로 잘라 접시에 담았다. 칼질이 반듯했다. 한 달 동안 반 근 식빵을 자른 손.태오가 접시를 들고 직접 왔다. 미소 대신.“드세요.”“감사합니다, 사장님.”다온은 샌드위치를 집었다. 감자가 부드러웠다. 오이가 아삭했다. 후추가 조금.태오가 접시를 내려놓고 돌아서려다 멈췄다. 다온 얼굴을 봤다.“…안 주무셨어요?”“밤샘 회의요. 청취율 중간 집계 나왔어요.”“…어떻게 나왔어요?”태오 목소리가 조금 빨랐다. 평소보다.“0.5%요. 0.3에서 올랐어요. 근데 1% 돼야 안 없어진대요.”태오가
『택시 오 기사: 30년 전에 빵집 누님이 그러더라고요. 비밀은 반죽 같은 거라고. 너무 치대면 질겨진대요. 그래서 저는 안 치대요. 근데 입이 근질근질해요.』≈11월 22일 토요일 새벽 다섯 시 십이 분. 반달빵집.다온은 소금빵 봉투를 받아 들고도 나가지 않았다. 계산대 옆 벽. 할머니 사진 앞에 섰다. 일주일째였다. 7일 동안 매일 아침 다온은 그 사진 앞에서 1분씩 서 있었다.태오는 계산대 뒤에서 그걸 보고 있었다. 일주일째.“사장님.”“…네.”“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태오가 영수증을 쥔 채로 멈췄다.“…왜요?”“그냥요. 3년 전에 이사 왔을 때 소금빵 공짜로 주셨거든요. 인사도 제대로 못 했어요. 그해 겨울에 돌아가셨잖아요. 이름도 모르고.”다온이 사진을 보며 말했다. 태오를 보지 않고. 목소리가 담담했다. 너무 담담했다.태오는 영수증을 내려놓았다. 할머니 이름을 말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동네 사람 절반이 알았다. 그런데 다온이 그걸 묻는 이유를 태오는 알았다. 일주일 전 금정란 선생님 방송. 반죽하는 할머니.이름을 말하면 다온은 어떻게 할까. 금정란 선생님한테 전할까. 할머니가 30년 동안 숨긴 이름을.태오가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문이 열렸다. 딸랑.“총각! 단팥빵 둘!”≈오 기사님은 모자를 벗어 털며 들어왔다. 찬바람이 같이 들어왔다. 그리고 계산대 옆 벽 앞에 선 다온을 봤다.“어, 작가 아가씨. 순례 누님 사진 보고 있어?”다온이 돌아봤다.“순례 누님이요?”“그래, 순례 누님. 여기 할머니. 반달빵집 순례 누님이지. 이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 없어.”오 기사님이 단팥빵 칸으로 가며 말을 이었다.“30년 전에 내가 택시 처음 몰 때부터 여기서 단팥빵 사 먹었어. 새벽 네 시 반에 오면 누님이 문 열기 전인데도 뒷문으로 줬어. 「기사 양반 배고프지」 하고.”태오가 계산대 뒤에서 오 기사님을 봤다. 오 기사님은 그 눈빛을 못 봤다. 아니, 봤는데 무시했다.“누님이 라디오를 그렇게 좋아했어.
『반죽하는 사람: 할머니는 반죽을 치대면서 혼잣말을 했어요.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고 물으면 라디오한테 한다고 했어요. 라디오가 대답은 안 해도 다 듣는다고.』≈11월 15일 토요일 새벽 두 시 이십팔 분. 반달FM 4층 스튜디오.다온은 작가석에서 유리창 너머를 보고 있었다. 금정란이 마이크 앞에 앉아 원고를 넘겼다.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 코너 차례. 오늘 사연은 반죽하는 사람. 다온이 맨 앞에 놓았다.코너를 시작한 지 4주. 게시판 글이 하루 서른 개를 넘었다. 청취율은 아직 몰랐다. 다음 달 첫 주에 나온다고 했다. 한도윤 PD는 매일 새벽 게시판 숫자를 세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금정란이 원고를 들었다. 큐 사인. 다온이 부조정실 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도윤이 노래 볼륨을 내렸다.“두 시 반이에요. 「새벽에 일하는 사람들」, 오늘은 다시 반죽하는 사람님이에요. 이분 사연 기다리시는 분들 많죠. 게시판에 「반죽하는 사람 언제 나와요」가 제일 많대요.”금정란이 웃었다. 그리고 읽었다.“할머니는 반죽을 치대면서 혼잣말을 했어요. 누구한테 하는 말이냐고 물으면 라디오한테 한다고 했어요. 라디오가 대답은 안 해도 다 듣는다고.”금정란이 거기서 멈췄다.다온은 원고를 따라 읽다가 고개를 들었다. 다음 문장이 있었다. 「그래서 저도 반죽하면서 라디오한테 말해요. 할머니처럼.」 금정란은 그 문장을 읽지 않았다.유리창 너머 금정란이 원고를 쥔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마이크가 켜져 있었다. 숨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부조정실에서 한도윤이 몸을 일으켰다. 손이 콘솔 위 페이더로 갔다. 노래를 올릴까 말까.삼 초. 사 초. 라디오에서 삼 초 침묵은 사고였다. 오 초는 큰 사고.금정란이 고개를 들었다.“…죄송해요, 여러분.”목소리가 젖어 있었다.“이 사연 읽다가 옛날 생각이 나서요. 30년 전부터 우리 방송에 사연 보내 주시던 분이 계셨어요. 이분도 반죽하는 분이셨어요. 반죽하는 할머니. 그분도 라디오한테 혼잣말한다고 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