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선생님, 문 닫히면 울어요?”
로테가 약속판 아래에 적힌 이름을 보고 물었다.
아델은 「세드릭 아른바흐」에서 눈을 떼고 아이를 돌아봤다. 로테는 종이 끝을 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공작도 설거지를 하느냐고 묻던 루디도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문이 닫힌다고 꼭 우는 건 아니거든. 그런데 나는 북부에서 겨울을 보내 본 적이 없어. 어떤 기분일지는 아직 모르겠어.”
“일곱째는 울었어요.”
로테가 종이를 놓았다.
아델은 곧 대답하지 않았다. 책상 서랍에 넣어 둔 쪽지가 떠올랐다.
「셋째 밤을 넘기지 마세요」
아델은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낮췄다.
“나는 오늘 너희랑 문 닫는 걸 보러 갈 거야.”
루디가 얼른 끼어들었다.
“아주 커요. 문이요. 선생님 방 문보다요.”
“들어올 때 봤어.”
“닫히는 건 못 봤잖아요.”
“그러네. 그건 못 봤지.”
루디는 아델의 손을 잡아당겼다. 로테는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아델이 다른 손을 내밀자 로테가 손끝만 올렸다.
“그 전에 밥부터 먹자. 약속판에 뭐라고 적었지?”
루디가 벽을 올려다봤다.
“밥은 같이.”
“그래. 문은 밥 먹고 같이 보러 가자.”
◇◆◇
식당 창밖으로 짐을 실은 손수레가 지나갔다.
루디가 빵을 든 손을 창 쪽으로 뻗었다. 아델은 아이의 손 아래에 접시를 받쳤다. 빵 부스러기가 접시 안으로 떨어졌다.
“할머니 왔어요!”
“아는 분이야?”
“빵 할머니요. 저기 솥이요.”
손수레 위에는 솥뿐 아니라 긴 나무판과 이불 꾸러미도 있었다. 그 뒤로 양손에 바구니를 든 사람들이 따라왔다. 어깨에 아이를 태운 사람도 보였다.
아델이 창 가까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모두 들어오는 거예요?”
알빈이 물병을 내려놓았다.
“아랫마을 사람 300명입니다. 문이 닫히기 전에 겨울집에 자리를 잡습니다.”
“300명이나요?”
“짐은 어제부터 옮겼습니다. 오늘은 남은 짐과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루디가 손가락을 펴기 시작했다. 양손을 다 펴고도 모자라자 로테의 손을 봤다.
로테는 두 손을 무릎 아래로 감췄다.
“내 거예요.”
“세는 건데.”
“밥 먹어.”
아델이 루디의 접시를 살짝 당겨 줬다.
“사람 수는 밖에서 보고, 지금은 네 빵부터 먹자.”
루디가 빵을 입에 넣었다. 볼이 불룩해졌다.
식탁 맞은편에서 세드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은 외투 깃에 흰까마귀가 수놓여 있었다. 아델도 일어나려 하자 세드릭이 손을 작게 들어 보였다.
“먼저 성문에 가겠습니다.”
루디가 급히 빵을 삼켰다.
“밥 다 먹었어요?”
세드릭이 제 접시를 내려다봤다. 접시에는 부스러기만 남아 있었다.
“다 먹었습니다, 루디 군.”
“그럼 가도 돼요.”
알빈이 공작의 의자를 뒤로 빼며 말했다.
“각하, 외출 허가가 났습니다.”
세드릭은 루디를 잠깐 보고 식당 문으로 향했다.
아델은 물을 마시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 집은 허가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네.’
◇◆◇
안뜰로 나오자 아델의 코끝이 금세 차가워졌다.
아그네스가 여며 준 로테의 옷깃이 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루디는 양철 나팔을 옆구리에 끼고 성문 쪽을 가리켰다.
“저기로 가요. 사람들이 다 저기로 와요.”
흰까마귀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문 너머로 아랫마을에서 올라오는 길이 길게 보였다. 아델이 마차에서 내려 혼자 걸어왔던 길이었다.
오늘은 혼자 걷는 사람이 드물었다.
짐을 나눠 든 이웃끼리 걸음을 맞췄고, 먼저 도착한 사람은 수레를 세운 뒤 뒤따라오는 사람을 도왔다. 성의 하인들도 겨울집 앞을 오갔다.
성벽 위에는 기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아델은 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검은 외투 사이로 투구와 장갑이 보였다.
알빈이 아델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
“겨울 문지기 기사 40명입니다.”
루디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요른도 있어요.”
짧은 수염을 기른 키 큰 기사가 성문 옆 계단을 내려왔다. 루디가 나팔을 들어 올리자 아델이 손잡이를 가볍게 짚었다.
“지금은 사람들 오가는 길이니까 내려놓자.”
루디는 나팔을 배 앞에 붙였다.
요른이 세드릭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말을 나누는 동안 알빈은 종이를 펴고 성문을 들어오는 사람들을 살폈다.
아델은 아이들과 길 가장자리로 비켜섰다.
바로 앞에서 바구니를 들고 오던 사람이 걸음을 멈췄다. 바구니 밑으로 작은 나무 신발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짐 위에 앉은 어린아이가 맨발을 흔들었다.
루디가 신발을 보자마자 앞으로 나가려 했다.
아델이 손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수레가 지나간 뒤에.”
바퀴가 눈을 밟고 지나갔다.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디가 신발을 주워 달려갔다.
“여기요! 발이 하나 없어졌어요!”
바구니를 든 사람이 웃으며 몸을 낮췄다.
“신발이 없어졌지, 발은 여기 있구나.”
루디가 짐 위의 아이를 올려다봤다. 맨발이 얼굴 앞에서 흔들렸다.
“맞네.”
루디는 신발을 건넨 뒤 돌아왔다. 빈손을 아델 앞에 펴 보였다.
“찾아 줬어요.”
“봤어. 수레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 것도.”
루디가 아델의 손을 다시 잡았다.
로테는 겨울집 문 앞에 놓인 꾸러미들을 보고 있었다.
“다 가져와요?”
“겨울에 쓸 것들을 가져오는 모양이야.”
“집은요?”
“집까지 가져오지는 못하지.”
로테는 성문 밖을 한 번 보고, 아델의 손을 고쳐 잡았다.
◇◆◇
마지막 손수레가 들어오자 문 앞이 조금 넓어졌다.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길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수레 자국과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아델은 목에 감은 천을 한 번 더 여몄다.
겨울 동안 문을 닫는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이불과 솥까지 안으로 들어온 뒤에야 그 말이 다르게 들렸다.
밖에서 물건을 사 오는 일도, 남부로 편지를 보내러 가는 일도 할 수 없었다.
알빈이 접은 종이를 세드릭에게 건넸다.
“모두 들어왔습니다, 각하.”
세드릭은 종이를 확인하고 요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요른이 성문 양쪽을 돌아본 뒤 손을 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이 문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세드릭이 아델 앞으로 왔다.
“녹임달 15일까지 문을 열지 않습니다.”
아델은 열린 문을 봤다. 멀리 길이 꺾이는 곳은 이미 흰 눈에 가려져 있었다.
“봄까지군요.”
“그렇습니다.”
세드릭이 아이들을 한 번 내려다보고 말을 이었다.
“나가려면 지금입니다.”
루디가 아델의 손을 놓았다.
손바닥에 찬 바람이 닿았다.
루디는 나팔을 양손으로 쥐었고, 로테는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두었다. 아델이 내려다보자 로테도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두 아이가 길을 비켰다.
아델은 열린 문과 아이들을 번갈아 봤다. 계단 위에서 공작을 처음 만났을 때보다 지금 문까지 가는 길이 훨씬 짧았다.
그런데 낡은 책가방은 방에 있었다. 석판과 분필통은 공부방 책상 위에 있었다.
벽에는 아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약속판에 제 이름 적었어요.”
세드릭의 시선이 아델에게 머물렀다.
“그래도 선택은 바꾸실 수 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오늘은 안 바꿉니다.”
아델은 아이들 쪽으로 손을 내렸다.
루디가 먼저 손바닥을 붙잡았다. 로테는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가 손으로 옮겼다.
세드릭이 한 걸음 옆으로 비켰다.
“문이 움직입니다. 뒤로 오십시오.”
아델은 아이들과 돌바닥에 그어진 선 뒤로 물러섰다.
요른의 목소리가 성문 아래에서 울렸다.
“문 닫습니다.”
기사들이 큰 문을 밀었다.
두꺼운 나무 문이 움직이며 바닥을 긁었다. 루디가 발끝을 들었다. 로테는 문틈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밖으로 이어진 길이 좁아졌다.
아델은 문이 완전히 맞붙을 때까지 보고 있었다. 이어 긴 빗장이 들려 올라갔다. 여러 손이 빗장을 받쳐 문 안쪽 걸쇠에 걸었다.
묵직한 소리가 발밑까지 전해졌다.
루디가 아델의 손을 당겼다.
“이제 못 나가요.”
“응. 봤어.”
“선생님도요.”
아델은 문에서 눈을 떼고 루디를 봤다.
“나도 여기 있어.”
로테의 손가락이 아델의 손등에 붙었다.
◇◆◇
안뜰 사람들이 흩어지고 나서야 빵 냄새가 났다.
루디가 코를 들었다.
“겨울빵!”
아그네스가 부엌 문 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 아이들 데리고 이리 오세요. 할머니가 첫 빵을 꺼내셨어요.”
부엌 안은 안뜰보다 훨씬 따뜻했다. 아델은 문턱에서 아이들의 신발에 묻은 눈부터 털었다.
밀가루 묻은 손을 앞치마에 닦던 할머니가 웃었다.
“우리 공작님 아이들 왔네. 선생님도 같이 오셨구나.”
긴 나무판과 솥은 벌써 제자리를 찾은 뒤였다. 아델이 창밖에서 봤던 이불 꾸러미는 부엌 구석의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할머니는 갓 꺼낸 빵을 천 위에 놓았다.
“겨울집 자리부터 보고 오랬더니 이 녀석들이 먼저 생각나서 말이야.”
루디가 두 손을 내밀었다.
“내가 먼저!”
“뜨거우니 천째 받아.”
할머니가 작은 빵을 천에 싸서 루디에게 건넸다. 로테에게도 하나를 주려던 순간, 루디가 팔꿈치로 나팔을 끌어 올렸다.
빵을 받은 손은 그대로 두고 다른 손으로 나팔을 잡았다.
짧고 큰 소리가 부엌에 울렸다.
아델이 손을 뻗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부엌의 사람들이 돌아봤고, 열린 문 앞을 지나던 사람들도 멈췄다. 안뜰에서 짐을 내리던 기사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루디는 빵을 높이 들었다.
“첫 빵 나왔어요!”
잠깐 조용해졌다가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으로 해도 다 듣는다, 녀석아.”
아델은 루디가 나팔을 다시 들기 전에 손을 받쳤다.
“빵 받으러 온 사람 귀 바로 옆에서는 불지 말자.”
루디가 아델을 올려다봤다.
“다 알아야 되는데요.”
“그럼 문 앞에서 말로 알려 주면 돼. 지금은 빵이 뜨거우니까 두 손으로 들고.”
루디는 나팔을 옆구리에 끼웠다. 빵 밑을 양손으로 받치자 천이 조금 흘러내렸다.
아델이 천 끝을 다시 접어 줬다.
로테는 자기 빵을 받지 않고 할머니를 보고 있었다.
“다 있어요?”
“무엇이?”
“빵.”
할머니가 나무판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것부터 나누고, 또 구울 거야. 할머니가 봄까지 이 부엌에서 구울 거거든.”
로테가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는 로테의 손에 빵을 얹고 아델에게도 하나를 건넸다.
“선생님 몫.”
“저까지요?”
“아이들만 먹고 선생님은 구경하나?”
아그네스가 곁에서 천을 하나 더 꺼냈다.
“그러면 같이 먹는 약속에 어긋나요.”
할머니가 아델의 손에 천을 꼭 쥐여 줬다.
“그 약속 좋네.”
아델은 따뜻한 빵을 받았다. 문이 닫힌 성의 부엌에서 할머니는 다음 빵 반죽을 가져오고 있었다.
겨울집 문 앞에는 아직 짐이 쌓여 있었지만, 사람들은 벌써 저녁에 함께 먹을 음식을 이야기했다.
왕도에서 들은 소문과는 소리부터 달랐다.
아델은 빵을 한 조각 떼어 입에 넣었다.
루디가 곧 물었다.
“맛있죠?”
아델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디도 빵을 크게 물었다.
◇◆◇
해가 낮아지자 안뜰에서 마지막 빈 수레가 옮겨졌다.
아델은 아이들과 공부방에 있었다. 루디는 석판 위에 큰 문을 그리다가 손을 멈췄다.
“문 닫는 날엔 빵 먹어요.”
“빵만 먹었어?”
“신발 찾아요.”
“그것도 했지.”
루디가 석판 아래에 작은 신발을 그렸다. 모양을 고치려다 빵 부스러기가 소매에서 떨어졌다.
아델이 천을 건네자 루디는 부스러기부터 모았다.
로테는 약속판 앞에 서 있었다.
아델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던 로테가 낮게 말했다.
“여기.”
“응?”
“선생님 이름.”
아델이 곁으로 가 섰다.
“그대로 있네.”
로테는 더 말하지 않았다. 아델의 이름 아래 적힌 공작의 이름을 보고, 다시 아델의 이름으로 손가락을 옮겼다.
창밖에서 빛이 바뀌었다.
안뜰과 건너편 창들이 한꺼번에 밝아졌다. 아델은 처음 도착한 날처럼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닫힌 흰까마귀 문에도 등불 빛이 닿았다.
루디가 창 앞으로 왔다.
“이제 저녁이에요.”
“그럼 석판을 정리하고 내려가자.”
로테는 약속판에서 손을 뗐다.
식당에 내려갈 때 아델은 일부러 두 아이 사이에서 걸었다. 계단 중간에서 루디가 먼저 달려가려다 멈췄다.
손을 잡고 있으니 혼자 빨리 갈 수 없었다.
“선생님 걸음 느려요.”
“계단에서는 이만큼만.”
루디가 발을 한 칸 아래로 옮겼다. 로테도 반대쪽에서 같은 칸을 밟았다.
◇◆◇
아이들을 방에 보내고 돌아오니 아델의 방은 조용했다.
아델은 책가방을 의자에 올렸다. 낮에는 손을 들고 있느라 몰랐던 손바닥의 분필 가루가 가죽에 묻었다.
천으로 닦은 뒤 책상 서랍을 열었다.
쪽지는 아버지가 준 분필통 옆에 있었다.
아델은 접힌 종이를 펴지 않고 잠깐 내려다봤다. 서랍 안쪽에 넣으려다 멈추고, 처음 있던 자리에 다시 놓았다.
남아 있기로 한 것과 무섭지 않은 것은 다른 일이었다.
창가로 가자 성문 위 등불이 보였다. 빗장은 여기서 보이지 않았지만, 닫힌 문은 낮보다 더 또렷했다.
아델은 창 덮개를 닫았다.
복도 쪽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똑.
아델이 손을 멈췄다.
똑. 똑.
창 덮개에서 손을 떼고 방문 쪽으로 돌아섰다.
똑. 똑.
다섯 번이었다.
아델은 잠깐 기다렸다. 다시 두드리는 소리는 없었다.
“누구세요?”
대답도 없었다.
아델이 문고리를 잡았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천천히 문을 열자 복도 등불이 발끝까지 들어왔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델은 고개를 내밀어 양쪽을 살폈다.
복도 끝에 로테가 서 있었다. 잠옷 위에 겉옷을 걸쳤고, 발에는 실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작은 손으로 옷 앞섶을 쥐고 있었다.
아델이 문밖으로 한 걸음 나갔다.
로테가 먼저 물었다.
“무서워요?”
아델은 빈 복도를 한 번 더 봤다. 아이에게 다가가다가 걸음을 멈췄다.
“……조금.”
로테가 쥐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나도.”
(4화 끝)
“선생님, 공작님은 왜 전쟁 책만 읽어요?”로테가 서재 문 옆에 서서 물었다. 아델은 두드리려던 손을 내렸다. 문틈으로 세드릭의 검은 외투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책이 보였다.며칠 전 그 창 앞에서 봤던 공책은 보이지 않았다. 아델은 문 안쪽을 더 들여다보지 않고 로테에게 몸을 낮췄다.“왜냐하면—공작님께 필요한 책인가 봐. 다른 책도 읽으시는지는 나도 모르겠어. 여쭤볼까?”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책은 안 읽어요.”“읽어 달라고 해 봤어?”“전에.”로테가 양손을 벌렸다. 꽤 두꺼운 책을 나타내는 듯했다.“큰 거 가져왔어요.”안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가 멎었다.“들어오십시오.”아델이 문을 열자 루디도 뒤에서 뛰어왔다. 계단을 올라오느라 볼이 빨갰다. 손에는 양철 나팔 대신 작은 석판이 들려 있었다.“나도 숙제 다 했어요!”“뛰지 않기로 했지.”루디가 문턱에서 걸음을 줄였다. 남은 두 걸음은 발뒤꿈치부터 천천히 내려놓았다.“이제 안 뛰어요.”“돌아갈 때도 그렇게 하자.”세드릭은 책을 덮고 아이들을 봤다. 로테가 곧장 책상 가까이 갔다. 책등의 글자를 짚던 손가락이 중간에서 멈췄다.“전투.”“그렇다.”“또요.”세드릭이 책을 내려다봤다. 루디는 옆에서 까치발을 들었다.“싸우는 거예요? 몇 명이요?”
“선생님, 왜 책장 뒤에 책이 있어요?”루디가 책장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바닥에 댄 볼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을 틈으로 밀어 넣었다.아델은 젖은 천을 바구니에 내려놓았다.“왜냐하면—떨어졌을 수도 있고, 누가 넣어 두었을 수도 있어. 꺼내 봐야 알겠네. 먼저 손은 빼자.”“거의 닿아요.”“손이 들어간다고 팔도 들어가는 건 아니야.”루디가 팔꿈치를 한 번 더 밀었다. 책장 모서리에 소매가 걸렸다.“팔은 안 들어가요.”“직접 확인했구나. 이제 나와.”아델이 소매를 빼 주자 루디는 바닥에 앉은 채 손을 폈다. 손끝에 회색 먼지가 붙어 있었다.“책도 잡았어요. 조금.”“어디 다친 데는 없어?”루디가 손가락을 하나씩 움직였다. 아델은 손바닥까지 살핀 뒤 천으로 닦아 줬다.깊은눈달 3일의 공부방에는 의자가 모두 가운데로 모여 있었다. 책상 위에는 짧은 분필과 종이, 천 조각이 따로 놓였다. 겨울 동안 수업할 방을 정리하자고 했더니 루디가 의자 밑에 먼저 들어갔다.로테는 그 옆에서 종이 모서리를 맞추고 있었다. 아델이 준 작은 수건도 반듯하게 접어 놓았다.“로테, 그 천은 닦으라고 준 건데.”로테가 접힌 천을 내려다봤다.“깨끗해요.”“맞아. 그런데 먼지를 닦으면 더러워질 거야.”“다시 빨아요?”“응. 빨아서 말리면 또 쓸 수 있어.”로테는 잠깐 생각하더니 가장 가까운 의자 다리를 닦았
“선생님, 왜 공작님이 선생님을 불러요?”로테가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고 있었다. 아델은 세수하고 온 아이의 옷깃을 바로 펴 주다가 손을 멈췄다.「내일 성벽에 오십시오. 해 지기 전에.」밤에 문 밑으로 들어왔던 종이는 어머니께 쓴 편지 옆에 놓여 있었다.“왜냐하면—내가 물어본 것에 답해 주시려는 것 같아.”“편지요?”“응. 직접 들어 봐야 알겠지만.”로테가 종이 끝을 눌렀다.“안 된다고 또 하면요?”“왜 안 되는지 다시 물을 거야.”루디는 의자를 당겨 놓고 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종이를 거꾸로 들여다보다가 고개도 함께 기울였다.“성벽에서요?”“그렇게 적혀 있네.”“높은 데서 말하면 더 잘 들려요?”“왜냐하면—높아서 잘 들리는 건 아니야. 가까이 서서 말해야 잘 들리지.”루디가 의자에서 내려와 아델 바로 앞에 섰다.“편지 보내 주세요.”“나는 아주 잘 들었어.”“공작님한테도 이렇게 해요.”로테가 아델의 소매를 잡았다.“선생님은 커.”루디는 아델의 머리까지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걸음 물러났다.“그럼 안 올라가도 되잖아요.”아델은 웃음을 삼키며 종이를 접었다.“성벽에서 보여 주실 게 있는 모양이야. 너희도 아래까지 같이 가자. 나는 올라가고, 너희는 아그네스와 기다리는 거야.”로테가 곧장 물었다.“다녀와요?”“응. 아래로 돌아올게.”“해 지면.”“해가 진 뒤에도 돌아와.”로테는 그제야 소매를 놓았다.아델은 종이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어머니께 쓴 편지는 보내지 못한 채였지만, 오늘은 적어도 그 옆에 답을 둘 수 있을 것 같았다.◇◆◇문닫는달 26일의 해는 안뜰 돌바닥을 길게 비췄다.아델은 아이들과 성벽 아래까지 걸었다. 루디는 눈을 치운 길 가장자리만 골라 밟았다. 발자국 하나가 어긋나자 뒤로 돌아가 다시 디뎠다.“이건 안 센 거예요.”“걸은 건 걸은 거지.”“그럼 두 번이에요?”“뒤로 갔다가 앞으로 왔으니 두 걸음 더 걸었네.”루디는 제 발을 내려다봤다.“돌아가면 많아져요.”“그
“선생님, 편지는 겨울에 못 가요?”루디가 아델 앞에 놓인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종이 귀퉁이가 책상 밖으로 밀려 나와 있었다.아델은 잉크병을 안쪽으로 옮긴 뒤 종이를 바로 놓았다.“왜냐하면—사람이 가져가야 하는데, 성문이 닫혀 있으니까. 보내는 방법이 있는지는 물어봐야겠어.”“종이는 작잖아요.”루디가 엄지와 검지 사이를 좁혔다.“이만큼 접으면 문 밑으로 가요.”“문 밑으로 나가도 우리 어머니 집까지 혼자 걸어가지는 못하지.”“내가 던지면요?”“네가 던질 수 있는 곳보다 훨씬 멀어.”루디는 창으로 다가가 아래를 봤다. 눈이 치워진 안뜰 너머로 흰까마귀 문이 보였다.“아주 세게.”“그럼 편지를 주우러 안뜰에 내려가야 할걸.”루디가 제 팔을 한번 흔들어 보다가 돌아왔다.문닫는달 25일이었다. 창가에 놓아둔 물그릇이 차가워서 아델은 책상 가운데로 옮겼다. 로테는 맞은편에 앉아 깃펜 끝을 살피고 있었다.“이걸로 써요?”“응. 처음에는 내가 손을 잡아 줄게. 너무 힘주면 끝이 벌어지거든.”루디가 의자를 당겼다.“분필은요?”“분필은 종이에 쓰고 접으면 다른 쪽에 묻어. 편지 받은 사람이 읽기 어려워져.”“안 접으면 돼요.”“그럼 가져가는 사람이 다 읽을 수도 있지.”루디가 종이를 양손으로 가렸다.아직 아무것도 쓰지 않은 종이였다.“읽으면 안 돼요.”“그럼 다 쓴 뒤에는 접자.”아델은 작은 종이 두 장을 아이들 앞에 놓았다. 제 앞의 종이는 조금 더 컸다. 남부에 있는 어머니께 쓸 편지였다.로테가 아델의 종이를 보고 물었다.“누구한테요?”“우리 어머니.”“선생님 엄마.”“맞아.”루디가 고개를 기울였다.“선생님도 엄마한테 수업해요?”“어릴 때는 어머니가 나한테 가르쳐 주셨지.”“편지도요?”“응. 글씨를 너무 작게 쓰면 읽기 힘들다고 하셨어.”루디가 제 종이를 당겼다.“나는 크게 써요.”“그러다 한 글자로 종이를 다 쓰면?”루디가 잠깐 생각하더니 손을 내밀었다.“큰 종이 주세요.”◇◆◇아델은 루
“선생님, 공작님은 왜 우유 안 마셔요?”로테가 쟁반 끝에 놓인 빈 잔을 가리켰다. 부엌 문 옆에 선 아델은 아이의 시선을 따라 잔을 봤다.“왜냐하면—그건 나도 아직 모르겠어. 공작님이 우유 안 드시는 걸 봤니?”“잔은 놓아요.”“마시지는 않고?”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부엌 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다. 문닫는달 20일, 해가 진 뒤부터 공부방 돌바닥까지 차가워졌다. 양말을 신은 루디가 발을 번갈아 들기에 아델은 따뜻한 것을 마시고 자자며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왔다.루디가 발뒤꿈치를 들고 쟁반을 들여다봤다.“내 잔이에요?”“아직 아무 잔도 정하지 않았어.”“그럼 큰 거.”“두 손으로 잡기 편한 걸 고르자.”루디는 가장 큰 잔에 손을 뻗었다가 손잡이가 없는 작은 잔을 잡았다. 양손으로 감싸니 손가락 끝이 맞닿았다.“이건 안 떨어져요.”“뜨거울 때는 잡지 말고. 내가 식힌 다음에 줄게.”아델은 아이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화덕 위에 냄비를 올렸다. 빵집 할머니가 불을 줄여 주고 긴 나무 주걱을 건넸다.“바닥에 붙지 않게 저어요.”“이렇게요?”“그렇지. 아이들 입 데지 않게만 하고.”루디가 냄비 쪽으로 코를 내밀었다.“벌써 먹으면 안 돼요?”아델은 주걱을 움직이며 고개를 저었다.“찬 우유를 따뜻하게 만드는 중이야.”“따뜻하면 바로요?”“너희가 마실 수 있을 만큼 식으면.”루디가 입술을 내밀었다.“따뜻하게 했다가 식혀요?”“펄펄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다르거든.”로테는 냄비 위로 올라오는 김을 보고 있었다. 앞머리 아래 눈이 천천히 움직였다.“공작님도.”아델이 주걱을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같이 마시자고 부를까?”“네.”“안 드실 수도 있어.”로테가 아델을 올려다봤다.“왜요?”“왜냐하면—싫어하는 음식일 수도 있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거든. 불러 보고 여쭤보자.”루디가 제 잔을 내려놓았다.“내가 불러요!”“계단에서 뛰지 않기.”“걸어서 빨리!”“그건 뛰는 거랑 어떻게 다를까
“선생님, 왜 묘지는 지도에 안 그려요?”루디가 종이 위 빈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끝에는 아침에 만진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아델은 종이가 밀리지 않게 모서리를 눌렀다.“왜냐하면—아직 거기까지 안 가 봤거든.”“성 안인데요.”“성 안이라고 내가 전부 아는 건 아니야.”“집사님은 알아요.”“그럼 모르는 곳은 집사님께 물어보고 그리자.”루디가 의자에서 몸을 길게 뺐다. 책상 위에는 본성과 부엌, 겨울집이 서툰 네모로 그려져 있었다. 뒤 언덕은 비어 있었다.공부방 창턱에서는 종이새 두 마리가 천천히 돌았다. 작은 날개를 안으로 접은 새가 긴 꼬리의 새와 닿았다가 떨어졌다.로테가 자리에서 일어나 꼬리 끝을 바로잡았다.“여기는 있어요.”로테는 새 아래에 놓인 종이를 가리켰다.「이 자리는 아이들이 잘 볼 수 있습니까.」그 밑에는 로테가 며칠 전 꾹꾹 눌러 쓴 대답이 있었다.「네.」루디는 창 쪽을 한 번 보고 다시 지도에 얼굴을 들이밀었다.“공부방도 그려요. 내 새 있는 데.”아델은 본성 네모 안에 작은 칸을 만들었다.“여기가 공부방.”“너무 작아요.”“종이를 실제 방만큼 크게 만들 수는 없잖아.”루디가 팔을 벌려 종이 길이를 쟀다.“방보다 작은 건 맞네.”로테가 의자에 돌아와 앉았다. 아델이 놓아 둔 분필을 들고 작은 칸 안에 짧은 선을 그었다.“창.”“좋아. 창이 어디 있는지 알면 방도 찾기 쉽겠다.”아델은 문닫는달 16일이라고 적은 석판을 옆으로 밀었다. 오늘 걸어 볼 곳을 적으려던 참이었다.루디가 빈 언덕에 다시 손을 댔다.“여기는 걸어서 그려요?”“응. 눈을 치워 둔 길로만.”로테의 분필이 멈췄다.아델은 두 아이를 번갈아 봤다.“가기 싫은 곳이 있으면 말해 줘. 지도에 빈 곳이 있어도 괜찮아.”로테는 분필을 내려놓았다.“길만.”“우선 길만 가 보자.”루디가 곧장 의자에서 내려왔다.“내가 셀래요!”◇◆◇외투를 입히는 동안 루디의 발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하나, 둘, 셋.”아델이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