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다음 날 아침, 한무천이 서씨 저택을 찾아왔다.
예령은 비에 젖은 정원을 내려다보다가 연화의 보고를 들었다.
“대문 앞에서부터 아가씨를 만나겠다고 소란을 피우고 있어요. 호위들까지 데려왔습니다.”
한무천다운 행동이었다. 파혼 이야기를 듣고도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기보다 예령이 잠시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랑채로 안내해.”
예령이 사랑채에 들어서자 무천은 주인처럼 상석에 앉아 있었다. 값비싼 비단옷과 허리춤의 옥 장식까지, 지난번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제야 얼굴을 보여주는군.”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령이 맞은편에 앉지도 않자 무천의 표정이 굳었다.
“혼례를 앞둔 여인이 예비 남편을 문전박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그 혼인은 하지 않을 겁니다.”
“상단의 인장을 돌려받고 싶어서 이러는 것이라면 이미 말했을 텐데. 급하게 쓸 곳이 있었을 뿐이야.”
“제 허락 없이 다시 사용하셨습니다.”
“곧 부부가 될 사이에 네 것과 내 것이 따로 있나?”
전생에도 수없이 들었던 말이었다.
무천은 서씨 상단의 돈을 제 것처럼 쓰면서도 예령이 거래 내역을 물으면 부부 사이에 장부를 따지는 여인은 천박하다며 화를 냈다.
그 말에 속아 예령은 번번이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따로 있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무천이 잠시 말을 잃었다.
“서씨 상단은 제 아버지가 일군 재산입니다. 공자께서는 그 돈을 쓸 권리가 없습니다.”
“공자?”
무천이 비웃듯 되물었다.
“언제부터 나를 그렇게 불렀지?”
예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무천이 화를 내면 먼저 사과했고, 약속을 어겨도 값비싼 선물을 보내 마음을 풀어 주었다. 그는 예령이 영원히 자신을 바라보리라 믿고 있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해라.”
무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례를 앞두고 불안해진 것이라면 이해하겠다. 아버지께 파혼 이야기는 실수였다고 말씀드려.”
명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실수가 아닙니다.”
“예령아.”
“공자와 혼인하지 않겠습니다.”
무천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내가 다른 여인을 만난다는 소문 때문이냐?”
“관심 없습니다.”
“혼인하면 모두 정리할 생각이었다. 사내가 혼인 전에 잠시 즐기는 일을 가지고 이렇게까지—”
“누구를 만나든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무천은 예령의 얼굴에서 질투나 분노를 찾으려는 듯 눈을 떼지 않았다.
전생의 예령이라면 다른 여자가 있다는 말만으로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혐오뿐이었다.
그 무관심이 무천을 더욱 당황하게 했다.
“돈 때문도, 여자 때문도 아니라면 이유가 무엇이지?”
“공자께서는 저보다 제가 가진 것을 더 원하니까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어?”
“직접 확인했습니다.”
예령이 눈짓하자 연화가 장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제 이름으로 가져간 비단과 보석의 대금입니다. 오늘 안으로 갚을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무천이 장부를 펼치자 얼굴이 굳었다.
“이 돈을 당장 어떻게 갚으라는 것이냐?”
“가져간 물건을 돌려주셔도 됩니다.”
“이미 다른 곳에 썼다.”
“그렇다면 진북후부에서 대신 갚아야겠지요.”
물건들이 무천과 가까운 여인들과 관리들의 부인에게 넘어갔다는 사실을 예령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는 척해야 했다.
무천은 장부를 거칠게 덮었다.
“우리 가문과 네 가문이 이미 약속을 주고받았다. 네가 싫다고 해서 혼례가 취소될 것 같으냐?”
“아버지께서 정식으로 파혼을 요청하실 겁니다.”
“진북후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받아들이게 만들겠습니다.”
무천이 예령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예령은 한 걸음 물러나 그의 손을 피했다. 그녀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를 이렇게 모욕하고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없을 이유가 있습니까?”
“네가 나 아니면 누구와 혼인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천의 입가에 잔인한 웃음이 번졌다.
“내게 버림받았다는 소문이 퍼지면 어느 가문에서 너를 받아주겠느냐는 말이다.”
과거의 예령이라면 가장 두려워했을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알지 못하는 선택지가 있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설마 다른 사내가 생긴 것이냐?”
예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계약이 성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무겸의 존재를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그건 공자께서 알 필요 없는 일입니다.”
“정말 누군가 있군.”
“제가 누구를 선택하든 관여하지 마십시오.”
예령은 장부를 다시 무천 앞으로 밀었다.
“오늘 안으로 답이 없다면 내일 거래처에 진북후부의 보증을 요구하겠습니다.”
무천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진북후부의 재정이 어렵다는 사실이 밖으로 알려지면 그가 애써 쌓아온 체면도 함께 무너진다.
“네가 감히 나를 협박해?”
“빚을 갚으라는 말이 협박으로 들리십니까?”
무천은 한동안 예령을 노려보다가 장부를 움켜쥐었다.
“사흘을 주겠다. 그 안에 정신을 차리고 내게 사과해.”
“사흘 뒤에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그때는 나도 좋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는 만나드리지 않겠습니다.”
무천은 거칠게 문을 열고 사랑채를 나갔다. 잠시 후 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진북후부의 마차가 멀어졌다.
연화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한 공자가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먼저 움직여야지.”
예령은 무천이 두고 간 장부를 펼쳤다.
“비단과 보석이 누구에게 갔는지 오늘 안으로 확인해 줘.”
“물건을 되찾으시려고요?”
“아니.”
예령의 손끝이 장부에 적힌 상점들을 훑었다.
“한무천이 우리 돈으로 누구의 환심을 샀는지 밝혀낼 거야.”
같은 시각, 진북후부 별당으로 남자 하나가 들어섰다.
무겸은 창가에 앉아 예령에게 받은 계약서를 읽고 있었다. 이미 여러 번 살핀 문서였지만 아직 인장은 찍지 않은 상태였다.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서 아가씨가 둘째 공자와의 혼인을 거절했습니다. 빚을 갚지 않으면 진북후부의 보증을 요구하겠다고 했습니다.”
“무천의 반응은?”
“몹시 화를 내며 돌아갔습니다.”
“그 여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무겸의 손가락이 계약서 위에서 멈췄다.
“계속 지켜보아라.”
“이 정도로는 부족하십니까?”
무겸은 계약서를 천천히 접었다.
“말로 버리는 것과 돌아갈 길을 끊는 것은 다르지.”
계약서가 다시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이틀이 남았으니 기다려 봐야지.”
무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령이 정말 무천을 버릴 수 있는지.
자신과의 혼인을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진서헌의 대답은 담담했다. 무겸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오늘의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는 상처 하나만 남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의원 앞을 떠나려던 무겸이 다시 걸음을 멈췄다. 진서헌의 팔을 감싼 붕대가 소매 아래로 비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곡식값을 두고 맞서던 사내가 오늘은 예령을 대신해 칼을 맞았다.“상처가 아물 때까지 무리하지 마시오.”“의원도 큰 상처는 아니라고 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내 부인을 구하다 다친 상처요. 어찌 모른 척하겠소.”진서헌은 잠시 무겸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무겸의 말에는 빈말이 없었다. 그렇기에 진서헌 역시 가벼운 농담으로 대꾸할 수 없었다.“부인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무겸은 그제야 말에 올랐다. 진서헌은 말발굽 소리가 멀어진 뒤에도 한동안 문 앞에 서 있었다. 팔을 조금 움직이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나 자꾸 떠오르는 것은 칼날보다 자신을 붙들고 상처를 살피던 예령의 얼굴이었다.그날 저녁, 예령은 돌아온 뒤에도 쉬이 저녁상을 받지 못했다. 연화는 갈아입으려 벗어 놓은 옷에 피가 묻은 것을 발견하고 놀라 달려왔다.“마님, 어디 다치셨습니까?”“나는 다치지 않았다. 진 상단주가 나를 구하다 팔을 베였어.”연화는 안도의 숨을 내쉬다가도 핏자국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령은 옷을 한쪽에 접어 놓았다. 진서헌이 제 몸을 돌려 칼을 막아선 순간을 떠올리니 지금도 손끝이 서늘했다. 평소에는 웃으며 거래를 흥정하던 사람이었다. 오늘만큼은 그 웃음 뒤에 감추어진 용기가 고마웠다. 장터에서 들었던 옷 찢어지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때 진서헌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면 칼끝은 어디에 닿았을까.“장군님께서는 아십니까?”“의원까지 오셨다. 나보다 진 상단주에게 먼저 고맙다고 하시더구나.”말을 마친 예령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겸이 자신의 손목에 남은 작은 상처까지 알아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마차 문을 열어 주었던 것도.
칼날이 옷깃을 찢고 지나가는 순간, 진서헌의 몸이 예령 쪽으로 기울었다. 그는 그녀를 뒤로 밀어내면서도 끝내 팔을 거두지 않았다. 검은 두건의 사내가 다시 칼을 들어 올리자 장호가 사람들 사이를 가르며 달려들었다.“마님, 물러서십시오!”장호의 칼집이 사내의 손목을 내리쳤다. 짧은 칼이 돌바닥을 튀었고, 뒤따라온 호위 둘이 사내를 엎어 눌렀다. 장터의 비명은 그제야 한꺼번에 터졌다. 엎어진 좌판에서 은전이 굴러다녔지만 누구도 줍지 못했다.예령은 진서헌을 붙들었다. 짙은 남색 소매 아래로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웃으려 하자 예령의 표정이 굳었다.“움직이지 마십시오. 상처부터 봐야 합니다.”“부인께서 다치지 않으셨으니 됐습니다.”“저를 구하시려다 다치셨는데 어찌 괜찮다고만 하십니까.”예령은 목에 둘렀던 얇은 비단을 풀어 그의 팔을 감쌌다. 피가 곧장 스며들었다. 진서헌은 잠시 예령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칼끝 앞에서도 태연하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상처가 깊지 않아야 할 텐데요.”“이 정도는 괜찮습니다.”“괜찮은지는 의원이 판단할 일입니다.”예령은 장호에게 가장 가까운 의원을 부르라 이르고, 붙잡힌 사내를 돌아보았다. 두건이 벗겨진 얼굴은 낯설었다. 사내는 땅바닥에 뺨을 붙인 채 중개인이 서 있던 자리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모피를 사들이던 자들은 소동을 틈타 이미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천막 아래에는 빈 저울과 뒤집힌 나무함만 남아 있었다. 물건을 사겠다며 그토록 요란하게 사람을 모아 놓고, 정작 한 꾸러미도 챙겨 가지 않은 것이다.예령은 붙잡힌 사내를 바라보다가 장호에게 물었다.“저자가 처음부터 저를 노린 것이 맞습니까?”장호가 이를 악물었다.“예, 마님. 분명 마님을 향해 달려들었습니다. 제가 한발 늦었습니다.”“장호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우선 사람부터 살펴 주십시오.”예령은 사내의 손에 묻은 먹물을 보았다. 검지 끝과 손톱 밑이 검었다. 칼을 쥐었던 자라기보다 종일 무언가를 적던 사람의 손이었다. 순간
관문이 다시 열린 뒤 사흘째 되는 아침이었다. 성안의 장터에는 겨우내 묶여 있던 수레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남쪽에서 가져온 비단과 차, 북방의 모피와 약재가 처마 아래 쌓였고, 상인들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을 밟으며 서로의 물건을 살폈다.예령은 상단 앞에 도착한 낯익은 마차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진가상회의 표식이 새겨진 문이 열리고 진서헌이 내려섰다. 그는 예령을 발견하자 마치 어제 헤어진 사람처럼 태연히 웃었다.“부인께서 먼저 오셨군요. 저는 늦지 않으려 새벽부터 길을 나섰는데.”“예고도 없이 오신 분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아셨습니까?”“기다리시지 않을 걸 알기에 일찍 온 것입니다.”능청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가 펼쳐 보인 종이를 보고 예령은 웃음을 거두었다. 북방의 장터에 새로 들어선 상인들이 모피를 한꺼번에 사들이겠다고 나섰다는 내용이었다. 시세보다 훨씬 높은 값을 내걸었고, 사흘 안에 물건을 넘기는 상회에만 계약하겠다고 했다.“값을 잘 쳐 주겠다는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사들이겠다는 물건이 너무 많습니다. 이 고을 상회들이 겨우내 모아 둔 것보다도요.”예령은 종이를 다시 읽었다. 구매자의 이름은 낯설었지만 거래를 중개하는 곳에는 태성상단의 표식이 찍혀 있었다. 얼마 전 군량 장부 사건에서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황기문의 이름과 마주할 줄은 몰랐다.“진 상단주께서는 이 거래를 막으시려는 겁니까?”“아니요. 먼저 물건을 살피려 합니다. 부인께서도 보셔야 할 듯해서요.”“어째서 저입니까?”“부인께서는 값이 좋다는 이유만으로 선뜻 거래에 나서실 분이 아니지요. 저 역시 이번 거래가 어딘지 석연치 않습니다.”예령은 종이를 접어 돌려주었다. 말만 듣고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진서헌도 그 점을 아는지 더 설득하지 않았다. 대신 마당 끝에 세워 둔 마차를 가리켰다.“오늘 정오에 첫 물건을 공개합니다. 보시고도 시시하면 그대로 돌아오십시오.”그가 돌아가려는 순간 곽진이 말을 몰고 들어왔다. 뒤이어 무겸이 내렸다. 군영에서 돌아오는 길
군영을 떠난 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섰을 때에도 예령은 한동안 창을 닫지 않았다. 눈발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횃불 아래 서 있던 무겸의 모습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연화가 추위에 감기라도 들겠다며 몇 번이나 청하고 나서야 예령은 창을 내렸다.이튿날 새벽에는 밤새 내리던 눈이 멎었다. 마당에 찍힌 발자국이 희미한 푸른빛을 띠었고, 처마 밑에서는 얼음 녹는 물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예령이 아침상을 물린 참에 연화가 작은 나무함과 서신 한 통을 가져왔다.“마님, 군영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장군님께서 전하라 하셨답니다.”함 안에는 매화 무늬가 새겨진 은제 손난로가 들어 있었다. 가장자리가 닳고 뚜껑에는 작은 흠집이 있는, 새 물건은 아니었다. 함께 온 서신에는 밤사이 북쪽 초소를 살필 일이 생겨 이틀쯤 군영에 머물겠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끝에는 추운 날 먼 길을 다니지 말고 손을 따뜻이 하라는 짧은 당부가 붙어 있었다.예령은 서신을 접고 손난로를 들어 보았다. 어젯밤 자신에게 겉옷을 둘러 주던 사람이 떠올랐다. 새 물건을 구할 겨를도 없이 평소 쓰던 것을 보냈을 터였다.“장군께서는 손이 시리지 않으시다더냐?”“그것까지는 듣지 못했습니다.”“군영에 심부름 가는 사람이 있으면 숯과 두툼한 장갑을 함께 보내라. 이 손난로도 돌려드릴까 했는데, 그러면 괜한 마음을 쓰신 셈이 되겠구나.”연화는 웃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예령은 함을 덮은 뒤 서신을 다시 펼쳤다. 낯선 불빛을 보았다는 전갈이 그리 위중한 일은 아니기를 바랐다. 무겸은 염려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만, 초소에 관한 일만큼은 직접 확인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아침이 밝자 예령은 상단으로 향했다. 관문이 열린 뒤 들어온 수레가 창고 앞에 서 있었고, 일꾼들은 평소의 속도로 곡식을 날랐다. 얼어붙은 강을 건너던 며칠이 먼일처럼 느껴질 만큼 마당은 평온했다. 예령은 그때 짐을 졌던 이들의 품삯이 빠짐없이 지급되었는지 살피고, 손을 다친 일꾼에게 며칠 더 쉬도록 했다.점심이 지나자 상단
군영의 잔치가 끝나 갈 무렵, 밤하늘에는 다시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낮 동안 녹았던 눈이 찬바람에 얼어붙으면서 처마마다 가느다란 고드름이 맺혔다. 마당을 밝히던 횃불은 하나둘 꺼지고,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병사들의 목소리도 차츰 잦아들었다.예령은 무릎 위에 놓인 무겸의 겉옷을 가지런히 접었다. 돌려주려던 참에 막사 쪽에서 급히 걸어오는 병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곽진에게 몇 마디를 전한 뒤 물러났고, 곽진은 곧장 무겸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보고했다.무겸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 남아 있던 온기가 사라졌다.“먼저 들어가 보겠소.”예령이 고개를 들었다.“급한 일입니까?”“북쪽 초소에서 전갈이 왔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그는 곽진에게 예령을 마차까지 모시라고 이른 뒤 막사로 향했다. 예령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병사들과 한솥밥을 나누던 사람과 지금 걸어가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새삼 낯설었다. 무겸에게는 잠시의 평온마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곽진이 다가와 말했다.“부인, 바람이 차갑습니다. 안에서 기다리시지요.”“장군께서는 늘 저렇게 밤늦게까지 일을 보십니까?”“전쟁 중에는 밤낮이 따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한결 나아진 편입니다.”담담한 대답이었으나 예령은 그 말에 담긴 세월을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그녀가 후부에서 처음 만났던 무겸은 다리를 다친 채 사람들의 시선에서 물러나 있던 사내였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누구도 그의 지난 상처를 먼저 떠올리지 않았다. 병사들은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마음을 놓는 듯했다.“곽진 님은 장군을 오래 모셨지요?”“예. 북방에 처음 오셨을 때부터 함께했습니다.”“그때도 지금과 같으셨습니까?”곽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희미하게 웃었다.“지금보다 말씀은 더 없으셨습니다. 다만 병사들이 굶는 꼴은 그때도 보지 못하셨지요.”예령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겸이 어떤 사람인지는 이미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그를 오래 지켜본 이들의 입을 통해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 무렵, 군영의 취사장에서는 구수한 고기 국물 냄새가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훈련을 마친 병사들이 말없이 지나갔을 마당에 긴 탁자가 놓이고, 커다란 솥에서는 김이 쉴 새 없이 솟았다. 눈이 녹아 질척해진 길 위로 장작을 나르는 발소리와 웃음소리가 뒤섞였다.예령이 마차에서 내리자 곽진이 다가와 예를 갖췄다.“부인, 장군님께서는 막사에서 잠시 일을 보고 계십니다. 먼저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렇게 많은 음식을 준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병사들이 며칠 전부터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다만 솥을 지키는 자들이 먼저 맛을 본다며 국물을 너무 퍼 마셔서 걱정입니다.”그 말에 예령이 웃었다. 연화는 가져온 보자기를 풀어 떡을 내놓았다. 갓 지은 떡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곳에 품고 온 덕분에 아직 말랑했다. 곽진이 그중 하나를 집으려다 연화의 눈길을 보고 손을 거두었다.“그건 장군님 드릴 것입니다.”“아직 손도 대지 않았다.”“손을 뻗으셨잖아요.”곽진은 억울하다는 듯 예령을 바라보았고, 예령은 모른 척 보자기를 다시 여몄다.잠시 뒤 무겸이 막사에서 나왔다. 군복 위에 두른 검은 겉옷에는 찬 기운이 묻어 있었다. 그는 예령을 발견하자 곧장 걸음을 옮겼다.“오래 기다렸소?”“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먼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볼 만한 것이 있소?”“장군께서 아시면 곤란해하실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무겸이 곽진을 돌아보자 그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장군님, 아직 술은 한 방울도 나가지 않았습니다.”“내가 술을 물었느냐?”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무겸은 못 들은 척 예령에게 안쪽 자리를 권했다. 탁자에는 투박한 사발과 나무젓가락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화려한 그릇은 없었지만 누군가 정성껏 닦아 둔 흔적이 역력했다.그때 취사장을 맡은 늙은 병사가 커다란 쟁반을 들고 나타났다. 그는 예령 앞에 유독 큰 만두를 내려놓고는 뿌듯하게 수염을 쓸었다.“부인께 드리려고 속을 넉넉히 넣었습니다.”“이걸 혼자 다 먹으란 말씀이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