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생일날, 당시 약혼자였던 구도현은 마트 적립 포인트로 바꾼 고무장갑 한 켤레를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그러면서 정작 첫사랑에게는 경매장에서 무려 10억 원짜리 보석을 낙찰받아 선물했다. 화가 난 내가 따지자, 구도현은 오히려 돈만 밝히는 여자라며 나를 몰아세웠다. “결혼하면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게 될 텐데, 넌 당연히 내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사실 고무장갑은 결혼 전에 널 마지막으로 테스트해 보려고 준 거였어. 이 시험만 통과하면 정말 너랑 결혼하려고 했는데... 참 실망스럽다.” 어처구니없는 말에 나는 곧바로 이별을 통보했고, 구도현은 돌아서자마자 첫사랑에게 청혼했다. 그로부터 5년 후, 우리는 개인 소유의 휴양 섬에서 우연히 재회했다. 작업복 차림으로 해변에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나를 발견한 구도현은 대뜸 비아냥거렸다. “서채원, 그때는 고무장갑 같은 선물은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쓰레기나 주우면서 먹고사나 봐? 이제 와서 나한테 결혼해 달라고 매달릴 생각은 하지 마. 너 같은 여자한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테니까.” 나는 구도현의 말을 무시했다. 이 차림새로 여기에 나타난 이유는 아들의 학교 체험학습 과제가 ‘부모님과 함께 우리 집 뒷마당 청소하기’였기 때문이다. 며칠 전 애 아빠가 뒷마당을 해변까지 넓혀 놓는 바람에 청소하느라 죽을 맛이었다.
View More나는 그날의 소동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퇴근길, 회사 앞에서 또다시 낯익은 사람을 마주쳤다.“채원아...”구도현이었다.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머리도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한때 자신감 넘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섬을 떠난 뒤 구도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구도현이 두툼한 책 한 권을 내밀었다.“채원아, 이것들 기억나?”책을 펼치자, 페이지마다 구도현이 정성껏 만든 장미꽃 압화가 끼워져 있었다.“네가 선물해 준 장미꽃,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전부 간직했어. 시들기 전에 이렇게 책 사이에 끼워 뒀거든. 봐, 아직도 이렇게 예쁘잖아.”구도현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네가 그랬잖아. 장미꽃이 시들지 않는 한 날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이러지 마. 그냥 버려. 우리한테는 이제 추억할 것들도 없으니까.”그러자 뒤에서 구도현이 다급히 나를 불렀다.“혹시 공민정 때문에 그러는 거야? 그 못된 여자는 내가 쫓아냈어. 앞으로 우리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구도현, 공민정 씨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를 나 몰라라 해서는 안 되잖아. 아직 어린아이인데 엄마 없이 어떻게 살겠어?”“무... 무슨 말이야? 아이라니? 나한테는 애가 없는데?”“그날 공민정 씨가 나한테 초음파 사진 한 장을 보냈었어. 병원에서 검사받은 사진이었는데, 임신 4개월이라고 했어.”내 말을 듣자 구도현이 다급하게 소리쳤다.“채원아! 그 애는 내 애가 아니야! 내 애가 아니라고!”구도현은 절규하듯 외쳤다.“난 너 없이는 못 살아! 네가 날 받아 주지 않으면 죽어 버릴 거야!”구도현은 모든 것을 내던질 작정인지, 급기야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나를 협박했다.하지만 이번에는 구도현의 선택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마음대로 해.”나는 그 말만 남기고 뒤돌아보지 않
“이제 그만 좀 해!”여기서 끊지 않았다가는 앞으로 반년은 남편의 질투에 시달릴 판이었다.“아까 분명히 말했잖아. 나랑 다시 시작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이제 그만 미련 버리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구도현은 다급해진 듯 말을 쏟아 냈다.“아니야! 그때는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한 것뿐이야. 난 계속 널 기다리고 있었어.”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난 이미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았어. 더는 나 기다리느라 시간 낭비하지 말고, 너를 사랑해 주는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해. 이제 서로 각자의 인생을 살자.”“안 돼!”구도현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평생 너만큼 날 사랑해 줄 여자는 다시 못 만날 거야. 난 기다릴 수 있어. 네가 이혼할 때까지...”구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혁민의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지금 제 앞에서 제 아내가 이혼하기를 기다리겠다는 겁니까? 남편인 저를 아주 우습게 보시는군요.”이혁민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제 아내를 차지할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저부터 죽이셔야겠죠. 구 대표님께 그럴 실력과 배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이혁민은 재계에서도 손꼽히는 재벌가에서 태어났다. 막대한 재산을 노린 납치와 협박의 표적이 된 적도 여러 번이었다.그런 일을 겪은 탓에 어린 시절부터 군부대에서 호신술과 격투 훈련을 받았고, 태권도를 비롯한 여러 무술에도 능숙했다.두 사람이 제대로 맞붙었다가는 크게 다칠 사람이 나올 게 뻔했다.게다가 오늘은 초대 손님도 많았고 취재진까지 몰려 있었다. 내일 아침부터 ‘이혁민 대표, 자선행사에서 폭행 논란’이라는 기사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나는 얼른 이혁민에게 다가가 목을 끌어안으며 달랬다.“여보, 그만하자.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야. 기자들한테 찍히면 어떡해.”“기자들?”이혁민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어느 언론사가 감히 내 기사를 내보내겠어? 문 닫고 싶은가 보지?”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 기자들은 들고 있던 카메라를 황급히 감췄다. 누구
공민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구도현의 팔을 붙잡은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구도현, 너 지금 무슨 뜻이야? 난 네 약혼녀인데, 어떻게 내 편은 안 들고 남의 편을 들어?”구도현은 담담하게 공민정을 바라봤다.“네가 내 약혼녀라고 해서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감싸 줄 수는 없잖아.”구도현이 끝내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은 공민정은 그의 양복 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힘없이 내려놓았다.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 이제 알겠네. 전부 서채원 씨 때문이지? 아직도 서채원 씨랑 다시 잘해 보고 싶은 거잖아. 아직도 못 잊은 거야? 그러면 나는 뭐가 되는데? 내가 지금까지 네 곁에서 보낸 세월은 다 뭐였냐고!”구도현은 고개를 저었다.“그때 채원이한테 고무장갑을 선물해서 진심을 시험해 보라고 한 사람도 너였잖아. 난 네 말대로 했다가 결국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어.”구도현은 씁쓸하게 웃었다.“그렇게 5년 동안 채원이를 찾아 헤맸는데, 이제야 알겠어. 그때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멍청한 짓?”공민정이 성큼 다가와 구도현의 멱살을 움켜쥐었다.“그때 서채원 씨랑 결혼했으면 그거야말로 진짜 멍청한 짓이었을 거야! 네 돈 보고 접근한 거라고! 네가 우울증에 빠져 죽으려고 할 때 그 여자가 나타난 게 정말 운명적인 만남이었다고 믿는 거야?”“채원이는 착한 사람이니까! 날 사랑했으니까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곁에 있어 준 거야! 너처럼 내 돈을 끝까지 뜯어먹을 생각밖에 없는 여자가 아니라고!”여기까지 말이 나온 이상 구도현도 더는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동안 공민정에게 쌓였던 불만을 쏟아 냈다.“넌 돈 많은 늙은 남자한테 가겠다고 날 버렸잖아. 그러다 실컷 이용당하고 버림받고 나서야 다시 날 찾아왔지.”“다시 만나기 시작한 뒤로는 하루가 멀다고 온갖 핑계를 대며 돈을 요구했어. 너한테 별장까지 사 줬는데도 모자라서 네 남동생한테도 집 한 채를 사 달라고 했잖아!”구도현의 말이 갈
그 말이 떨어지자, 해변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소란스럽던 사람들마저 숨을 죽였다.이혁민은 다시 내게 시선을 돌렸다.“이씨 가문 안주인이라는 이유로 특별 대우받는 게 싫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한테나 이런 취급을 당할 필요는 없잖아. 앞으로 이런 일 생기면 내 이름부터 대. 당신 뒤에는 내가 있으니까.”나는 긴장한 채 침을 삼켰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도둑으로 몰렸을 때도, 전 남자 친구에게 온갖 모욕을 당할 때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그런데 이혁민이 내 편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는 순간, 애써 참아 왔던 눈물이 쏟아졌다.내가 울기 시작하자 이혁민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황급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랬다.“울지 마, 응?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혼내는 것처럼 들렸어?”평소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던 이혁민이었지만, 내 눈물 앞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다.이혁민이 내 눈물을 닦아 주는 사이,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직원이랑 경호원을 어디서 고용한 거야? 일 처리가 저게 뭐야?”“이씨 가문 사모님도 못 알아보다니. 자기 집 마당에서 아이 체험학습 과제를 도와주고 계셨던 건데, 청소부 취급을 했다는 거잖아.”경호원 한 명이 땀에 젖은 손바닥을 연신 비비다가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다.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이혁민에게 말을 건넸다.“이 대표님, 전부 오해였습니다. 이분이 사모님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저희는 그저...”“그저 제 아내를 도둑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까?”이혁민이 천천히 주먹을 움켜쥐었다.경호원은 말문이 막힌 채 연신 고개를 숙였다.“이 대표님, 이번 일은 저희 잘못입니다. 부디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용서라...”이혁민이 경호원을 바라봤다.“제가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으로 보이십니까?”경호원은 이번에는 내게 애원하는 눈빛을 보냈다.“사모님,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사모님도 몰라뵙고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제발 이 대표님께 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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