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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4일 토요일 아침, 맞은편 가게의 유리문이 활짝 열렸다.
윤슬은 미용실 문턱에 걸린 발판을 털다가 그쪽을 보았다. 문 안에서 누군가 의자를 옮기고 있었다. 얼굴은 나무 카운터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좁은 골목을 건너왔다.
지난주까지 유리에 붙어 있던 종이도 모두 떼어 낸 뒤였다. 새 간판에는 글자가 네 개 있었다.
『접시 하나』
윤슬은 발판을 내려놓고 발끝으로 모서리를 맞췄다. 미용실 문을 열려는데 우주가 등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엄마, 접시 팔아?”
“밥 파는 데일걸.”
“접시도 주고?”
“접시에 밥을 담아 주겠지.”
우주는 맞은편을 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에 쥔 파란 크레파스가 윤슬의 옷에 닿기 직전이었다.
“그건 안에 두고 나와야지.”
“간판 그리려고.”
“여기서 보고 그려. 길에 나가면 안 돼.”
우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안으로 들어갔다. 파란 운동화 뒤축이 걸을 때마다 조금씩 들렸다. 윤슬은 아이를 불러 세워 운동화 끈을 다시 묶었다. 우주는 한쪽 발로 서서 맞은편을 보려고 자꾸 몸을 틀었다.
“가만히. 넘어져.”
“엄마, 저기 의자가 많아.”
“그래. 발 내려.”
끈을 묶어 준 뒤 윤슬은 우주를 구석 책상에 앉혔다. 책상 아래로 크레파스 하나가 굴러가 있었다. 그것까지 주워 올려놓자 우주가 공책을 펼쳤다.
윤슬은 예약 장부를 펴고 오늘 첫 칸을 확인했다. 토요일은 빈 시간을 찾아 끼워 넣기 어려웠다. 수건을 쌓고 가위를 닦는 동안에도 문밖에서 탁 할머니의 발소리가 들렸다.
“벌써 열었어?”
“네. 앉으세요.”
탁 할머니는 우주 책상을 지나며 작은 손바닥을 펴 보였다. 우주가 손을 올려 짝 소리를 냈다.
“오늘은 뭐 그려?”
“접시.”
“접시에 뭐 담았어?”
“아직 없어.”
“그럼 배고픈 접시구만.”
우주가 동그라미 한가운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더니 크레파스 통에서 빨간색을 골랐다.
윤슬은 할머니 어깨에 덮개를 두르고 목둘레를 여몄다. 흰 머리카락을 빗으로 가르자 할머니가 거울 속 맞은편을 턱으로 가리켰다.
“저 자리가 드디어 열리네.”
“그러게요.”
“옛날 하씨 양식당 자리잖아. 6년이나 비었지, 아마.”
빗살 사이에 걸린 머리카락을 빼던 윤슬의 손이 잠깐 멈췄다. 할머니는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을 이었다.
“유리 닦아 놓으니까 저렇게 환해. 비어 있을 땐 안이 하나도 안 보이더니.”
윤슬은 빗을 다시 움직였다. 맞은편을 확인하는 대신 할머니의 머리를 조금 숙이게 했다.
“오늘도 뒤쪽은 작게 말아 드릴게요.”
“그래, 그래. 지난번처럼만 해 줘.”
우주는 빨간 크레파스로 동그라미 안을 채웠다. 힘을 너무 주는지 책상이 조금씩 밀렸다. 윤슬이 발끝으로 책상 다리를 받쳐 주자 우주가 올려다보았다.
“엄마, 접시도 머리 깎아?”
“접시는 머리가 없어.”
“이거는 있어.”
우주가 공책을 들어 보였다. 접시 위로 짧은 선들이 삐죽 나와 있었다.
“그럼 네가 잘라 줘.”
“가위 줘.”
“그림으로 잘라.”
우주는 조금 불만스러운 얼굴로 검은 크레파스를 찾았다. 할머니가 웃다가 고개를 움직여 윤슬이 손바닥으로 머리를 받쳤다.
“할머니, 잠깐만요.”
“알았어. 접시 머리 잘리는 건 봐야겠는데.”
윤슬도 입꼬리를 조금 올렸다. 우주가 크레파스를 고르는 사이, 할머니 머리에 첫 롯드를 말았다.
미용실에는 파마약 냄새가 났다. 윤슬은 문을 조금 더 열어 두었다. 차가운 바람이 발목으로 들어와도 이 정도면 견딜 만했다.
맞은편에서 나무판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짧게 몇 번 이어지다가 멈췄다. 우주는 크레파스를 내려놓고 코를 들었다.
“엄마, 빵 냄새.”
“새 가게에서 굽나 봐.”
“빨간 냄새도 나.”
“빨간 냄새가 뭐야?”
“토마토.”
문틈으로 버터 냄새가 들어왔다. 토마토를 끓일 때 나는 냄새도 조금 섞여 있었다. 윤슬은 롯드에 고무줄을 걸고 손끝에 묻은 약을 수건에 닦았다.
“아침 먹었잖아.”
“빵은 안 먹었어.”
“그건 맞네.”
할머니가 거울을 보며 말을 보탰다.
“우주야, 할머니 끝나면 같이 구경 가자.”
“언제 끝나?”
“엄마한테 물어봐.”
우주가 곧바로 윤슬을 보았다. 윤슬은 남은 머리 한 다발을 들어 올렸다.
“이거 다 말고, 기다렸다가, 머리 감으면.”
“많이 남았네.”
“그래. 그러니까 그림 마저 그려.”
우주는 의자에 무릎을 올리고 앉았다. 윤슬은 아이의 발이 책상에 닿지 않는 것까지 보고 다시 할머니 머리로 눈을 돌렸다.
잠시 뒤 유리문 너머에서 딸랑 소리가 났다. 새로 달아 놓은 종 소리였다. 탁 할머니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셰프 총각 잘생겼구만.”
“벌써 보셨어요?”
“문 앞에 나왔잖아. 키도 크고.”
윤슬은 마지막 롯드에 고무줄을 걸었다. 할머니가 고개를 돌리려 해서 다시 정면으로 맞춰 드렸다.
“움직이면 당겨요.”
“알았어, 알았어. 총각보다 내 머리가 먼저지.”
윤슬은 할머니 귀에 묻은 약을 닦고 비닐 덮개를 씌웠다. 타이머를 맞춘 뒤 손을 씻었다. 물을 잠그는 순간 책상 쪽에서 의자 끄는 소리가 났다.
“우주, 발 내려놓고 앉아.”
대답이 없었다.
윤슬은 손을 털며 돌아섰다. 구석 의자가 비어 있었다. 공책은 펼쳐진 채였고, 파란 크레파스가 책상 끝에 걸쳐 있었다.
“우주?”
열어 둔 문밖으로 파란 운동화가 보였다.
아이는 골목 양쪽을 보고 있었다. 윤슬이 수건을 집어 드는 사이 우주는 맞은편으로 건너갔다. 좁은 길에 지나가는 차는 없었지만, 윤슬은 곧바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백우주.”
우주가 유리문 손잡이에 매달렸다. 작은 몸이 뒤로 기울자 문이 천천히 열렸다. 종이 다시 울렸다.
“할머니, 잠깐만 앉아 계세요.”
“그래. 데려와.”
윤슬은 손을 닦던 수건을 내려놓고 골목을 뛰어 건넜다. 열린 문 사이로 우주의 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아저씨, 여기 뭐 파는 데예요?”
“밥 먹는 데야.”
낮은 목소리였다.
윤슬은 문을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열린 부엌 앞에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짧은 머리의 옆모습만 보였다. 남자는 도마 위에 놓인 빵을 자르고 있었다. 칼이 단단한 겉면을 지날 때마다 작은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접시는 안 팔아?”
“접시는 여기 두고 가는 거야.”
“왜?”
“다음에 밥 먹는 사람도 써야 하니까.”
남자가 잘라 낸 빵 한 조각을 작은 접시에 옮겼다. 우주는 나무 카운터 끝에 턱을 걸치려다 닿지 않자 발뒤꿈치를 들었다.
남자가 접시를 들고 부엌에서 나왔다.
윤슬은 그제야 얼굴을 보았다.
진이든이었다.
문손잡이를 쥔 손이 미끄러졌다. 윤슬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문을 붙들었다. 종이 작게 흔들렸다.
이든은 우주 앞에서 무릎을 굽혔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접시를 내밀었다.
“빵 먹어 볼래?”
“진짜?”
“뜨거우니까 조금씩.”
우주는 왼손으로 빵을 집었다. 이든의 눈이 그 손에 잠깐 멈췄다. 이어 입으로 가져가는 빵을 보고 접시를 조금 더 가까이 받쳤다.
“입 데지 않게 불어.”
우주가 입술을 내밀고 빵을 불었다. 부스러기가 접시 안으로 떨어졌다. 윤슬은 그 작은 소리까지 들었다.
‘7년 전, 너를 붙잡지 않기로 했지.’
‘3년 뒤 겨울에 다시 보기로 했는데.’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윤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든도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우주가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씹는 동안, 접시를 든 이든의 손은 그대로였다.
윤슬이 기억하던 얼굴보다 조금 말라 있었다. 눈 아래와 턱 옆이 달라졌는데, 입을 다물 때의 모양은 같았다. 윤슬은 그쪽을 보지 않으려 우주의 어깨로 눈을 내렸다.
아이의 점퍼 목깃이 안으로 접혀 있었다.
아침에 바로 펴 주지 못했다.
윤슬은 문 안으로 들어가 우주의 목깃을 꺼냈다. 손끝이 점퍼 천을 한 번 놓쳤다.
“엄마, 빵 줬어.”
“우주, 가자.”
“아직 남았는데.”
윤슬은 아이의 오른손을 잡았다. 우주는 빵을 쥔 왼손을 들고 접시와 엄마를 번갈아 보았다.
이든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움직임에 윤슬은 한 걸음 물러섰다. 이든은 더 가까이 오지 않았다. 작은 접시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그게 다였다.
“엄마, 이거 놓고 가?”
윤슬은 우주의 손에 있는 빵을 보았다.
“들고 와.”
우주가 빵을 꼭 쥐었다. 윤슬은 아이 손을 잡고 문밖으로 나왔다. 딸랑 소리가 등 뒤에서 한 번 더 났다.
골목을 건너기 전, 낮은 목소리가 따라왔다.
“……윤슬?”
윤슬은 돌아보지 않았다.
우주의 걸음이 엄마보다 짧았다. 잡은 손이 당겨지자 아이가 팔을 조금 들었다. 윤슬은 그제야 속도를 늦췄다.
스무 걸음이면 되는 길이었다. 미용실 앞까지 오자 우주가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엄마, 손 꽉 했어.”
윤슬은 손가락을 풀었다.
“미안.”
“나 안 넘어져.”
“알아. 안 넘어지지.”
윤슬은 아이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뒤따라 들어가 문을 닫으려다가, 파마약 냄새 때문에 조금 남겨 두었다.
탁 할머니는 덮개를 쓴 채 거울로 둘을 보고 있었다.
“빵 얻어 왔네.”
“뜨거워.”
우주가 입을 벌리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그럼 천천히 먹어야지. 물 좀 마셔.”
윤슬은 종이컵에 물을 따라 아이 책상에 놓았다. 컵 바닥이 책상에 닿으면서 물이 조금 넘쳤다. 휴지를 뽑아 닦는데 타이머가 울렸다.
할머니가 덮개 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급하게 안 해도 돼. 우주부터 앉혀.”
“괜찮아요.”
윤슬은 우주 의자를 당겨 주고 손을 씻었다. 할머니 머리 뒤쪽의 롯드를 하나 풀어 모양을 확인했다. 익숙한 일이었다. 머리끝을 손가락에 걸고 탄력을 보는 것부터 다시 말아 올리는 것까지, 손은 평소처럼 움직였다.
“잘 나와요.”
“그러면 됐지.”
할머니는 더 묻지 않았다. 윤슬이 덮개를 벗기고 샴푸대 쪽으로 모시자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우주는 물을 마신 뒤 남은 빵을 베어 물었다. 윤슬은 샴푸대에 물을 받으며 맞은편을 보지 않았다.
▷
그날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윤슬은 머리를 감기고, 말리고, 잘랐다. 예약 장부에 적힌 이름을 확인할 때마다 손목시계도 함께 보았다. 약속한 시간보다 늦지 않게 끝내려면 손을 쉬게 둘 틈이 없었다.
우주가 맞은편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점심을 먹고 난 뒤였다.
“엄마, 거기 의자 열 개야.”
윤슬은 아이 입가를 닦던 휴지를 접었다.
“세어 봤어?”
“긴 데 여섯 개. 작은 데 두 개, 두 개.”
“잘 셌네.”
“아저씨 혼자 다 앉아?”
“손님들이 앉지.”
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빈 도시락을 윤슬 쪽으로 밀었다.
“접시 아저씨는 빵 또 줘?”
윤슬은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가게에 혼자 들어가면 안 돼.”
“왜?”
“엄마한테 말하고 가야 해. 길도 같이 건너고.”
우주가 운동화 앞코를 맞붙였다. 꾸중을 들을 때마다 하는 행동이었다. 윤슬은 아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빵 먹은 건 괜찮아. 혼자 간 게 안 되는 거야.”
“그럼 말하면 돼?”
윤슬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우주가 눈을 들어 엄마 얼굴을 보았다.
“엄마?”
“응. 먼저 말해.”
“알았어.”
아이는 손가락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아직 찾는 듯 손바닥을 폈다가 털었다. 윤슬은 손을 씻고 오라고 했다.
우주가 작은 발판에 올라 수도꼭지를 돌리는 동안 윤슬은 구석 책상을 정리했다. 아침에 그리던 접시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가득했다. 테두리 밖에 짧은 선을 더 그어 놓았는데, 머리인지 빵인지 알 수 없었다.
윤슬은 공책을 덮지 않고 한쪽으로 밀어 두었다.
오후 손님이 문을 열며 맞은편에 사람이 많다고 했다. 윤슬은 자리를 안내하고 덮개를 둘렀다. 빗을 집는 손에 가위집 끝이 걸렸다. 가위집을 바로 세운 뒤 머리카락을 나눴다.
유리문 너머로 접시 하나의 문이 열리고 닫혔다.
그때마다 윤슬은 거울 속 손님의 머리만 보았다.
우주가 책상에서 졸기 시작했을 때 탁 할머니가 다시 내려왔다. 파마가 잘 나왔다며 뒤통수를 한번 만지고, 아이 점퍼를 챙겼다.
“내가 데리고 올라갈게. 끝나고 와.”
“오늘도요?”
“졸려서 연필을 코에 넣겠어.”
우주가 눈을 비볐다.
“안 넣어.”
“그래, 그래. 그럼 할머니랑 가자.”
윤슬은 아이 점퍼 지퍼를 끝까지 올려 주었다. 우주가 파란 공책도 챙기겠다고 해서 가방에 넣었다. 할머니가 손을 내밀자 우주는 이번에는 바로 잡았다.
“엄마한테 말했어. 나 할머니 집에 가.”
“그래. 끝나면 데리러 갈게.”
아이와 할머니가 골목 끝으로 걸어갔다. 윤슬은 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이 모퉁이를 도는 것까지 보았다.
맞은편에서는 그릇 놓는 소리가 났다.
윤슬은 미용실로 들어가 예약 장부를 펼쳤다. 마지막 손님의 시간 아래에 줄을 하나 그었다. 더 적을 것은 없는데 펜 끝을 한동안 떼지 못했다.
▷
밤에는 모과빌라의 작은 부엌에서 물을 끓였다.
우주는 씻고 나온 뒤 식탁에 앉아 그림일기 공책을 펼쳤다. 잠옷 소매가 길어 윤슬이 한 번 접어 주었다. 아이는 파란 크레파스로 먼저 사람을 그렸다.
“엄마, 아저씨 옷은 무슨 색이었지?”
컵을 꺼내던 윤슬이 멈췄다.
“누구.”
“접시 아저씨.”
윤슬은 컵을 내려놓았다.
“잘 못 봤어.”
우주는 크레파스 통을 들여다보다가 파란색을 그대로 썼다. 긴 다리 아래에 동그란 발을 붙이고 손에는 작은 접시를 그렸다.
“이 사람은 키가 커서 여기까지야.”
공책 윗부분에 머리가 닿았다. 우주는 머리 위에 선을 더 그리려다가 자리가 없자 옆으로 짧게 붙였다.
윤슬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아이가 글씨 쓰는 것을 보았다. 우주가 연필 끝으로 칸을 짚었다.
“엄마, 맞은편은 붙여?”
“응.”
“접시 아저씨는?”
“그건 띄어.”
아이는 한 칸을 비우고 다음 글자를 썼다. 받침을 쓰다 말고 하품을 해서 윤슬이 공책을 조금 당겨 주었다.
“내일 마저 쓸까?”
“오늘 건데.”
우주는 눈을 비비고 끝까지 썼다. 다 쓴 뒤에는 윤슬에게 읽어 달라고 하지 않았다. 연필을 내려놓고 두 팔을 뻗었다.
윤슬은 아이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이불 밖으로 나온 발을 넣어 주자 우주가 몸을 옆으로 말았다.
“엄마도 자.”
“컵만 씻고.”
“불 꺼.”
“응.”
윤슬은 방문 옆 스위치를 눌렀다. 우주의 눈이 감긴 것을 보고 문을 조금 열어 둔 채 나왔다.
거실 불은 끄지 않았다.
컵을 씻고 물기를 닦은 뒤에도 윤슬은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파란 사람은 접시를 들고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사람이 왼손을 높이 올리고 있었다.
윤슬은 공책 모서리를 눌렀다.
낮에 잡았던 유리문 손잡이는 차가웠다. 우주의 손은 따뜻했다. 그 사이에 이든이 서 있었다.
식탁 위 휴대전화가 잠깐 밝아졌다. 내일 첫 예약을 확인하는 알림이었다. 윤슬은 화면을 보고 나서 다시 공책으로 눈을 내렸다.
내일도 맞은편 문은 열릴 테니까.
윤슬은 아침에 쓸 수건을 챙기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펼쳐진 공책을 그대로 두고 의자를 식탁 안으로 밀었다.
『맞은편에 접시 아저씨가 왔다. 빵이 뜨거웠다. 손이 아니고 입이.』
(1화 끝)
우주는 사진이 없는 장 위에 손바닥을 올렸다.“여기는 나중에 넣어?”“응. 또 찍으면.”“나 안 잘 때 찍어.”윤슬은 아이 손 밑에서 투명한 주머니를 펴 주었다. 우주는 빈 칸을 하나씩 짚다가 앨범을 덮었다. 아침을 먹으러 가면서도 의자는 식탁 끝에 그대로 두었다.윤슬은 의자를 안으로 밀려다 멈췄다. 두 사람이 앉아 쓰던 식탁에는 의자가 하나 더 있었다. 우주 가방을 놓거나 빨래를 잠깐 걸쳐 두던 자리였다.의자에 걸린 수건만 걷어 빨래 바구니에 넣었다.▷4월 25일 토요일 아침, 우주는 미용실 거울 앞에서 모자를 고쳐 썼다.파란 챙을 눈썹까지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윤슬이 가방에 물병을 넣는 동안에도 고개를 옆으로 돌려 보았다.“엄마, 나 안 보여?”“다 보여.”“눈은?”“챙 때문에 조금.”우주는 모자를 뒤로 돌려 썼다. 거울 속에서 눈이 다 보이자 입을 벌리고 웃었다.윤슬은 예약 장부를 다시 확인했다. 오전 예약 두 칸 사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마지막 손님의 파마가 끝나는 시간을 손목시계로 세어 본 뒤 장부를 덮었다.“엄마는 조금 늦게 가. 아저씨랑 먼저 가 있어.”“얼마나?”“점심 먹기 전에는 갈 거야.”“그럼 빵 남길게.”“네 것은 다 먹어.”“엄마는?”“엄마 것도 있어.”말을 마치자 유리문 밖으로 이든이 보였다. 앞치마 대신 얇
우주는 유리문을 놓고도 한 번 더 뒤를 돌아봤다. 이든이 다시 칼을 든 것을 보고서야 윤슬 옆으로 붙었다.“엄마, 아저씨는 맨날 저기서 자?”“가게 뒤에 방이 있어.”“빵 옆에서?”“빵은 부엌에 있고.”우주는 가방 끈을 끌어 올렸다. 윤슬은 아이 어깨에서 뒤집힌 끈을 펴 주고 빌라 쪽으로 걸었다. 우주는 모과나무를 지날 때까지 식당 창을 두 번 더 봤다.▷4월 18일 토요일, 윤슬은 마지막 손님의 목에 붙은 머리카락을 털었다.거울 아래에는 우주가 그린 종이가 놓여 있었다. 파란 지붕 밑에 네모난 창이 세 개였다. 실제 집에는 없는 큰 창도 하나 그려져 있었다.“이건 어디야?”손님이 나간 뒤 윤슬이 물었다.“우리 집.”“창이 이렇게 많아?”“내 방에 하나 더.”“왜?”“아저씨네 보게.”윤슬은 빗에 낀 머리카락을 빼다가 손을 멈췄다. 빌라에서는 맞은편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우주는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 창을 하나 더 그렸다.“집에서는 잘 자면 돼.”“나 잘 자.”“아침에는 누가 깨워도 눈 안 뜨잖아.”“눈도 자는 거야.”윤슬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주는 대답을 잘했다고 여겼는지 종이 아래에 자기 이름을 크게 썼다.미용실 바닥을 쓸고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담았을 때, 맞은편에서 철구가 손을 흔들었다. 우주가 문 앞으로 달려갔다가 윤슬을 돌아봤다.
윤슬은 대답 대신 빵이 든 통을 우주 쪽으로 밀었다. 우주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불고, 윤슬 앞에도 빵 한 조각을 놓았다.“엄마도 먹어.”“먹고 있어.”“더.”윤슬은 아이가 놓아 준 빵을 집었다. 예약 장부 옆 영수증이 열린 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뒤집혔다. 윤슬은 빈 통으로 한쪽 끝을 눌러 두었다.▷토요일 예약 장부에는 빈 줄이 거의 없었다.윤슬은 손님 머리에 파마 약을 바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샴푸대에는 씻어야 할 수건이 쌓여 있었고, 다음 손님은 창가 의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4월 11일. 장부 위에 적힌 날짜 옆으로 하원 시간이 작게 쓰여 있었다.탁 할머니는 아침에 허리가 뻐근하다며 오늘은 계단을 덜 오르겠다고 했다. 윤슬은 우주를 데려다주고 돌아올 시간을 비워 두었지만, 앞 손님의 염색이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많이 남았어요?”거울 속 손님이 물었다.“조금만 더요. 안쪽부터 확인할게요.”윤슬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풀어 보았다. 시간을 줄이려고 서두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시 말아 고정하고 손을 씻었다.맞은편 유리문 너머로 철구가 빈 접시를 들고 움직였다. 이든은 카운터 끝에 놓인 주문서를 보고 있었다.윤슬은 휴대전화를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직 번호를 묻지 않았다.기다리는 손님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문을 열었다. 골목으로 나오자 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윤슬은 건너지 않고 손으로 오라고 했다.이든은 철구에게 짧게 말을 건넨 뒤 가게 밖으로 나왔다.“무슨 일 있어?”윤슬은 앞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오늘 하원만.”이든이 미용실 안을 한 번 보았다. 창가 손님이 잡지를 넘겼고, 파마 기계의 짧은 소리가 문밖까지 들렸다.“할게.”“4시 반. 모과 어린이집.”“알아. 길은 우주가 알려 줬어.”“선생님한테는 내가 전화할게. 네가 간다고.”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윤슬은 가위집에서 빠져나온 빗을 안으로 밀었다. 부탁은 끝났는데 손이 다른 일을 찾았다.“바쁘면 말해. 내가 손님한테 양해 구하고 가면 돼
윤슬은 받은 빗을 선반 위에 놓았다. 빗살이 아래로 가게 놓았다가 다시 뒤집었다.맞은편 의자에 앉은 이든은 손을 무릎에 올려놓고 있었다. 평소 손님을 앉히던 자리였다. 윤슬은 의자 높이를 낮추는 발판을 밟으려다 발을 거뒀다.“불편하면 뒤로 조금 밀어.”“괜찮아.”이든의 무릎과 윤슬의 무릎 사이에 바닥 타일의 줄이 놓여 있었다. 윤슬은 그 줄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뭐부터 듣고 싶어?”이든이 입을 열기까지 조금 걸렸다.“언제 알았어.”“네가 떠나고, 다음 달.”윤슬은 귀 뒤로 넘긴 앞머리를 다시 눌렀다.“1월 둘째 주였어. 8주라고 하더라.”이든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움직였다. 날짜를 세지는 않았다. 바지에 생긴 주름을 펴다가 손을 멈췄다.“혼자 갔어?”“응.”“그때도 혼자 살았잖아.”“살고 있었지.”윤슬은 의자 끝에 놓인 수건을 집었다. 손님 목에 둘렀다가 세탁하려고 빼 두었다. 접힌 자리가 어긋나 있어 모서리를 맞췄다.“전화할까 했어. 병원 나와서.”이든이 윤슬을 보았다.“안 했어.”“왜.”“말하면 돌아올 거잖아.”윤슬은 수건을 무릎에 내려놓았다.“연수고 뭐고, 다 두고 올 사람이었으니까.”이든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자 팔걸이를 잡았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안 왔을 거라고는 못 하겠어.”“알아.”“그래도 알았어야 했어.”윤슬은 수건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응. 그건 알아.”더 보탤 말은 없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놓고 소식을 전하면, 이든은 돌아올 테니까. 그걸 알고도 말하지 않은 것은 윤슬이었다.“우리 붙잡지 않기로 했잖아. 연락도 하지 않기로.”“했지.”“3년 뒤 겨울에 둘 다 혼자면 다시 보기로 했고.”이든의 시선이 선반 위 빗에 잠깐 머물렀다.“그때 말하려고 했어. 네가 돌아오면.”윤슬은 무릎 위 수건을 한 번 더 접었다. 더 작게 접을 필요는 없었는데 손이 멈추지 않았다.“그때는 우주도 같이 데리고 나갈 수 있겠다 싶었어.”“골목에 왔어?”“세 번.”짧게 답하자
우주가 골목 끝에서 한 번 더 손을 당겼다.“엄마, 여기 밝은 데.”빌라 입구의 등이 켜져 있었다. 아이는 불빛 아래로 먼저 발을 넣고 새로 짧아진 머리를 만졌다. 윤슬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현관에서 신발을 벗은 우주가 양손을 폈다.“아저씨는 뭘 기다려?”윤슬은 아이 점퍼의 지퍼를 내려 주었다.“언제?”“아까. 가게 앞에서.”점퍼 안쪽에 머리카락 하나가 남아 있었다. 윤슬은 손톱으로 집어 떼고 옷을 걸었다.“가게 문 닫고 있었겠지.”우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고 욕실로 들어가 발판을 당겼다. 물 흐르는 소리가 난 뒤에도 윤슬은 현관에 서 있었다.가방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선우가 보내 준 사진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머리가 똑같아진 두 아이가 나란히 웃고 있었다.윤슬은 화면을 끄고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4월 8일 수요일 아침, 우주는 빌라 계단을 내려오며 가방 끈을 고쳐 멨다.“엄마, 이쪽.”아이가 모과나무 쪽으로 발을 돌렸다. 윤슬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골목 바깥쪽을 가리켰다.“오늘은 저쪽으로 가자.”“또?”우주가 멈춰 섰다.그 길로 가면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접시 하나 앞을 지나게 됐다. 유리문 안에서 빵을 자르는 손이나 카운터를 닦는 이든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윤슬은 요 며칠 골목 어귀를 돌아서 다녔다.“여기도 길 있잖아.”“아저씨 집 앞에도 있어.”“알아.”“엄마는 왜 저 집 앞만 돌아가?”윤슬은 아이 가방에서 한쪽으로 기운 물통을 바로 넣었다. 뚜껑이 잘 잠겼는지 확인하고 지퍼를 끝까지 올렸다.“엄마가 생각할 게 있어서.”우주가 윤슬의 얼굴을 올려다봤다.“걸으면서?”“응.”“그럼 천천히 가.”아이는 먼저 달려가지 않았다. 윤슬 옆에 붙어 작은 걸음으로 걸었다. 파란 운동화 앞코가 바닥의 금을 넘을 때마다 가방에 달린 고리가 흔들렸다.윤슬은 아이 손을 조금 느슨하게 잡았다.“우주는 빨리 가도 돼.”“손 잡았잖아.”우주가 잡힌 손을 들어 보였다. 윤슬은
윤슬은 공책을 덮어 가방 옆에 놓았다. 예약 장부에는 다음 토요일 오후가 한 칸 비어 있었다. 우주 머리를 깎으려고 남겨 둔 자리였다.방 안에서 이불 끌어당기는 소리가 났다. 윤슬은 장부를 닫고 아이 곁으로 갔다. 베개 아래에 눌린 머리카락을 빼 주자 우주가 잠결에 고개를 돌렸다. 귀를 덮은 머리끝이 손등을 간질였다.▷4월 4일 토요일, 우주는 미용실 의자 앞에서 두 발을 붙이고 섰다.“다음에.”윤슬은 아이 목에 두를 작은 수건을 펴 들었다.“오늘 하기로 했잖아.”“내일.”“내일도 머리는 깎아야지.”우주는 귀를 양손으로 덮었다. 머리카락까지 눌려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왔다.윤슬은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귀 안 자르는 거 알지?”“아는데.”“그럼 앉자.”“싫은 건 알아도 싫어.”윤슬은 펴 놓은 수건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예약한 손님이 늦는다는 연락을 해 와서 잠깐 틈이 났다. 그사이에 끝낼 생각이었지만 우주는 의자 가까이에도 가지 않았다.“머리가 눈 찌르잖아.”“눈 감으면 돼.”우주가 눈을 꼭 감았다. 그러고는 한쪽만 살짝 뜨고 윤슬의 손을 살폈다.가위는 아직 허리 가위집에 있었다.“엄마, 조금만 잘라.”“응. 조금만.”“조금보다 더 조금.”“먼저 앉아 봐.”윤슬은 아이를 안아 의자 위에 놓았다. 높이를 맞추려고 받침을 올리고 덮개를 펼치자 우주의 턱이 벌써 가슴 쪽으로 내려갔다.지난번에도 이 자리에서 울었다. 목에 머리카락이 붙는다고 울고, 털어 주려고 덮개를 풀면 아직 안 끝났느냐고 울었다. 윤슬은 오늘 쓸 수건을 두 장 준비해 두었다.“목에 안 들어가게 할게.”우주는 수건을 두른 목을 만졌다.“여기 다 막아.”“막았어.”“뒤도.”윤슬은 목덜미 쪽을 한 번 더 접었다. 우주가 고개를 움직일 수 있을 만큼만 덮개를 여미고 빗을 꺼냈다.빗살이 앞머리를 지나기도 전에 아이의 어깨가 올라갔다.“아직 안 잘랐어.”“지금 자르잖아.”“빗는 거야.”우주의 입이 벌어졌다. 윤슬은 가위를 꺼내려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