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서화가 적어 둔 세 장의 기록은 다음 날 아침에도 탁자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장독대와 마루, 사랑방과 뒤주 같은 단어 옆에는 에드윈이 적은 아르데시아어 설명이 빼곡했고, 여백에는 서화가 직접 그린 작은 그림들이 붙어 있었다. 전날 밤에는 그저 집이 그리워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아침 햇빛 아래 다시 펼쳐 보니 뜻밖에도 꽤 훌륭한 생활 기록이 되어 있었다. 에드윈은 그것을 한 장씩 넘겨 보다가 조선어와 아르데시아어를 나란히 적을 수 있도록 새 종이를 가져왔고, 서화는 이번에는 단어를 더 늘리기보다 어제 적은 설명부터 제대로 다듬기로 했다.“장독대. 여기.” 서화가 첫 장을 가리키며 아르데시아어 문장을 천천히 읽다가 한 부분에 선을 그었다. “밖. 아니다. 집 밖이지만…… 집 안.”에드윈이 난감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밖인데 안이라고?”“응.”“그럼 안뜰 같은 건가?”서화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장독대가 반드시 안뜰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집의 구조에 따라 위치도 달랐다. 중요한 것은 위치보다 그곳을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항아리 뚜껑을 열어 상태를 살피고, 볕이 좋은 날이면 장을 내놓고, 비가 올 것 같으면 누구보다 먼저 뒤뜰로 나가는 곳. 어린 서화에게는 숨바꼭질을 하다가 몸을 숨기던 장소였고, 조금 자란 뒤에는 약재를 다듬던 어머니 옆에서 콩을 고르던 곳이기도 했다.“그냥 항아리 두는 곳이라고 하면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지?”에드윈의 질문에 서화가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물건 설명하면 맞다. 그런데 사는 것 설명하면 부족하다.”에드윈은 그 말을 듣고 자신이 적었던 번역을 지우지 않았다. 대신 그 옆에 작은 표시를 붙이고, 아래에 서화가 설명한 생활 모습을 덧붙였다. 완벽한 대응어가 없으면 억지로 한 단어로 바꾸지 않고, 무엇을 하는 장소인지와 서화의 기억을 함께 남기기로 한 것이다. 그러자 전날까지 단순한 낱말 목록처럼 보이던 종이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물건
윤도겸이 집에 돌아온 것은 해가 완전히 뜬 뒤였다. 대문을 넘는 순간까지만 해도 곧장 방으로 들어가 쓰러질 생각이었는데, 안채 쪽에서 풍기는 익숙한 국 냄새를 맡자 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며칠 동안 왕궁 조사실에서 식은 밥과 데운 국으로 끼니를 때운 탓인지, 집에서 나는 냄새만으로도 긴장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윤정헌 역시 별말 없이 사랑채로 향하려 했지만, 도겸은 아버지의 소매를 붙잡았다.“어디 가십니까?”“옷을 갈아입으러 간다.”“그다음에는요?”“씻어야지.”“그다음.”윤정헌이 아들을 돌아보았다.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사람답지 않게 도겸의 눈에는 쓸데없이 단호한 빛이 들어 있었다. “밥 먹으셔야 합니다. 어제도 절반밖에 안 드셨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확인한 사실이고, 조사관 둘과 나인 하나의 독립된 증언도 확보할 수 있습니다.”윤정헌의 얼굴이 아주 천천히 굳었다. “너는 집에 와서도 그 말투를 써야 하느냐?”“아버지가 자꾸 증거를 남기시잖습니까.”“내가 밥을 덜 먹은 게 언제부터 조사 대상이 됐지?”“서화가 알게 되는 순간부터요.”결국 윤정헌은 사랑채로 가지 못했다. 부자가 나란히 안채 식탁에 앉자 집을 지키던 노비들이 오랜만에 안도한 얼굴로 따뜻한 밥과 국을 내왔다. 한연화가 돌아터에 머무는 동안 집 안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원래도 떠들썩한 집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없고 서화까지 사라진 뒤로는 같은 공간이 전보다 훨씬 넓어진 것 같았다. 도겸은 무심코 맞은편 빈자리를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들었다.서화는 집에 있을 때 저 자리에 앉곤 했다. 아침부터 약초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버지에게 밥부터 먹으라는 말을 듣고, 도겸이 반찬을 집어가면 젓가락으로 손등을 때리던 자리였다. 사라진 뒤에도 누구 하나 그 자리를 일부러 비워두자고 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이 앉는 일이 드물었다.윤정헌 역시 잠시 그쪽을 바라봤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국을 한 숟갈 먹었다.도겸이 바로 말했다. “잘
김우성의 진술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다시 시작됐다. 전날 왕궁은 그에게 밤새 기억을 짜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이미 자신이 오래된 기록을 빼내고 완성된 문서를 지정된 서류함에 넣었다는 사실을 인정했고, 돈을 받은 시기와 실제 문서 이동도 일부 맞아떨어졌다. 여기서 조급해지면 그가 정말 기억하는 것과 조사관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이 뒤섞일 수 있었다. 그래서 하룻밤을 쉬게 한 뒤, 이번에는 ‘누가 시켰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일이 전달되었느냐’부터 차근차근 되짚었다.김우성은 처음 돈을 준 사람과 자신을 협박한 사람이 달랐다고 했다. 첫 번째 남자는 두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 서른 중반쯤으로 보였고 특별한 인상착의가 없었으며, 오래된 종이를 몇 장 가져다주면 품삯을 주겠다는 말만 했다. 두 번째 사람은 세 번째 일이 끝난 뒤 나타났다. 김우성이 자신이 넣은 문서가 실제 관청 명령처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그만두려 했을 때였다.“그 사람이 네가 한 일을 알고 있었느냐?” 조사관이 묻자 김우성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종이를 빼낸 날부터 적어놨다고 했습니다. 날짜하고 장소까지 다 말했습니다. 제가 아니라 해도 이미 증인이 있다고 했고요.”“증인을 보여줬나?”“아닙니다.”“그럼 실제로 증인이 있었는지는 모르는 거군.”김우성은 잠시 멈췄다가 “예.”라고 대답했다. 전날 같았으면 ‘분명 있었습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을 협박한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자신이 직접 본 것과 상대가 말한 것을 구분해서 진술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그 사람은 네게 무엇을 시켰지?”“종이를 넣으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은 꺼내라고 했고요.”“내용은 확인하지 않았다고 했지.”“예.”“그런데 어디에 넣어야 하는지는 어떻게 알았나?”“그 사람이 그림을 그려줬습니다.”조사관의 붓이 잠시 멈췄다.“무슨 그림?”“창고 안쪽을요.”“지도?”“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면 어느 쪽으로 가고, 몇 번째 문서함인지
다섯 사람의 이름 옆에 근무표와 열쇠 인수 기록, 휴가 날짜와 문서함 개폐 기록을 붙이는 데 꼬박 반나절이 걸렸다. 처음에는 적어도 한 사람쯤 모든 조건에 걸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첫 번째 사람은 문제의 보고서가 접수된 날 창고에 있었으나 다음 날 번호가 재사용될 때는 휴무였고, 두 번째 사람은 폐기 문서를 분류할 권한은 있었지만 별고 열쇠를 받은 적이 없었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역시 한두 단계에는 접근할 수 있었으나 전체 흐름을 혼자 만들 수 없었다. 마지막 사람은 문서 번호를 정리할 권한까지 있었지만, 임석주의 보수 불가 보고서가 사라진 날에는 왕실 밖에서 다른 관청의 감사를 받고 있었다.도겸은 다섯 장의 근무표를 내려놓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럼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했다는 건 아니네요. 적어도 기록대로라면요.”“기록대로라면 그렇다.” 윤정헌은 바로 덧붙였다. “그러니 기록도 확인해야 한다. 근무표가 거짓일 가능성까지 한꺼번에 열어두면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니, 우선 독립된 기록부터 맞춰.”왕실 출입 기록과 식사 지급표, 다른 관리들의 업무 일지까지 대조했다. 다섯 사람의 동선은 대체로 맞았다.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의 기록을 전부 조작해 자신의 부재를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서로 다른 부서의 기록이 지나치게 많이 일치했다. 그렇다고 다섯 사람이 공모했다고 볼 증거도 없었다. 오히려 각자가 자기 권한 안에서 평범한 일을 했고, 그 사이사이에 누군가 만들어놓은 지시와 서류가 들어간 흔적이 더 선명했다.도겸은 다시 처음부터 흐름을 적었다. 폐기 예정 문서를 수레에서 빼오라는 지시, 동쪽 별고에 임시 보관하라는 처리, 보수실로 넘기라는 명령, 훼손 보고서를 상급자 검토함으로 보내는 절차, 그 보고서가 사라진 뒤 빈 접수 번호를 다른 문서에 사용하는 과정. 각 단계의 담당자는 달랐지만 이상하게도 모두 자기 앞에 놓인 종이가 정당한 지시라고 믿었다.“한 사람이 다 할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도겸이 낮게 말했다.
다섯 장의 문서 아래에 같은 오래된 틀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에도 왕궁은 곧바로 송환 문서의 작성자를 찾지 않았다. 수십 년 전 서식과 최근 문서의 여백이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옛 기록을 베꼈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관청 서식은 오래 살아남았고, 한 번 만들어진 형식이 다른 부서로 옮겨가며 수십 년 동안 변형되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윤정헌은 서이경에게 가장 먼저 최근 문서가 아니라 그 오래된 송환 서식 자체의 계보를 확인하게 했다. 언제 처음 사용되었고, 어느 관청에서 쓰였으며, 이후 어떤 서식으로 바뀌었는지 알면 ‘같은 틀’이라는 사실이 특별한지부터 판단할 수 있었다.결과는 반나절 만에 나왔다. 문제의 송환 서식은 외지인이나 표류민을 원래 거처로 돌려보낼 때 사용하던 일반 문서가 아니었다. 서쪽 수로 일대에서 임시로 사용된 보조 양식에 가까웠고, 공식 명칭조차 따로 없었다. 현지에서 보호 중인 사람을 다른 관청이나 가족에게 인계할 때 필요한 사항을 빠뜨리지 않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였다. 남아 있는 사본도 많지 않았고, 지금까지 확인된 것은 모두 폐도진과 서쪽 나루 주변에서 작성된 것이었다.도겸은 서이경이 정리한 표를 읽다가 물었다. “그럼 최근 사람이 우연히 같은 여백을 썼을 가능성은 조금 낮아진 겁니까?”“조금은요. 하지만 아직 그것만으로 일부러 베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서이경은 오래된 문서와 최근 문서를 나란히 놓고 손끝으로 빈칸을 짚었다. “다만 이상한 점은 있습니다. 이 서식은 사람이 이동하는 걸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름이나 특징을 적는 칸, 현재 머무는 곳, 보내는 곳, 인계하는 사람, 도착 뒤 확인할 사람까지 순서가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 최근 다섯 문서는 그 자리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항목만 물품에 맞게 바꿨습니다.”도겸이 자세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구조가 보였다. 오래된 문서에서 ‘보호 중인 사람의 특징’을 적던 자리는 최근 문서에서 석재의 재질과 크기를 적는 칸이 되었고, ‘현재 머무는 곳’은 보
죽은 관리의 이름이 적힌 인계서는 새벽까지 왕궁 조사실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누구도 그 문서를 곧바로 치우거나 무효라고 붉은 줄을 긋지 않았다. 서부 제방 제삼 보수창은 삼 년 전에 폐쇄되었고, 물품을 받았다고 적힌 관리 박원길은 열두 해 전에 죽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더 볼 것도 없는 가짜 문서였지만, 윤정헌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대로 두라고 했다. 누군가가 실수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쓴 것인지, 오래된 서식을 베끼다가 확인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책임질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돌의 기록을 보내려 한 것인지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었다.도겸은 밤새 세 장의 문서를 시간순으로 늘어놓았다. 돌아터에서 서부 폐기 잔석 제칠호, 왕실 내고에서 수로 공사용 기초석, 동쪽 별고를 거쳐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구관 보수용 석재. 실제 흰 돌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는데 장부 속 물건은 이름과 관할을 바꾸며 세 번이나 이동했다. 마지막에는 폐쇄된 창고와 죽은 관리에게 넘겨질 예정이었다. 도겸은 한동안 그 흐름을 바라보다가 문득 빈 종이를 끌어당겨 반대로 적기 시작했다.“뭘 하느냐?” 윤정헌이 묻자 도겸은 종이를 돌려 보여주었다. “없애는 과정을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돌아터의 돌을 제칠호로 만들고, 제칠호를 왕실 공사용 석재로 만들고, 그걸 다시 죽은 사람이 받는 물건으로 만들었다면, 저희가 지금 해야 할 건 범인을 찾기 전에 이 세 이름이 같은 실물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다는 걸 공식 기록에 남기는 것 아닙니까? 그래야 마지막 장부가 완성돼도 돌아터의 돌이 장부 밖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윤정헌의 눈이 아들의 종이에 오래 머물렀다. 도겸이 적은 것은 새로운 이름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름을 하나로 합치지 않는 방법이었다. ‘서부 폐기 잔석 제칠호로 등록된 물품은 돌아터 수변의 백색 소석을 가리키는 것으로 의심되나 실물 동일성 최종 확인 전.’ 그 아래에는 ‘왕실 수로 공사용 기초석 일점 및 이후 파생된 이관 기록은 동일 물품을 대상으로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