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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택한 남편의 뒤늦은 후회

첫사랑을 택한 남편의 뒤늦은 후회

By:  딱그만큼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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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산 후, 나는 한 달 동안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데 내 남편은 첫사랑과 여기저기 여행을 다니고 있었다. 그는 나와 이혼하기로 마음먹고 나서야 비로소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남편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언제까지 철없는 짓을 할 거냐며 따져 물었다. 죽어 가는 나를 바라보던 엄마는 완전히 마음이 식어 버렸다. “이제 다시는 너를 괴롭힐 일 없을 거야.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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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그날 나는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

유산한 그날, 나는 대량 출혈과 장기 손상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가 됐다.

우습게도 나를 유산하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내 남편 한기범이었다.

내가 사고를 당한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

나는 그를 위해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고 직접 케이크도 구웠으며 집 안도 한껏 로맨틱하게 꾸며 놓았다.

각종 명품 선물 외에도 나는 한기범을 위해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을 하나 더 준비했다.

바로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

5년 동안 임신을 준비한 끝에 겨우 생긴 아이였다. 너무나 어렵게 찾아온 생명이었다.

나는 이 아이가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자,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결혼 생활을 되돌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부러 그의 생일날을 골라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퇴근한 한기범은 급히 옷만 갈아입더니 이지혜가 병원에 있어 곁에 사람이 필요하다며 다시 나가려 했다.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

“나 이렇게 많이 준비했는데... 그리고 너한테 꼭 주고 싶은 중요한 선물도 있어.”

한기범은 차갑게 내 손을 뿌리쳤다.

“설연아, 지혜가 혼자 병원에 있어. 난 지금 가 봐야 해.”

내 얼굴도 순식간에 굳었다.

이지혜가 다시 나타난 이후로 한기범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변해버렸다.

한때 가질 수 없었던, 잊지 못한 첫사랑 같은 존재. 이지혜는 한기범의 마음속에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기범아, 이지혜 씨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나보다 더 중요해?”

한기범은 귀찮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에서 꼭 그렇게 무리하게 투정 부려야겠어? 지혜는 예전에 내 목숨을 구해줬던 사람이야.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가 문제야?”

내가 따지기도 전에 그는 오히려 먼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나랑 지혜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가 계속 그렇게 의심하고 못 믿겠다면 우리도 더는 같이 못 살아.”

그는 마치 원수라도 보듯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나는 화가 치밀어 그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힘껏 밀쳐 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쾅 닫고 나갔다.

균형을 잃은 나는 그대로 테이블 모서리에 부딪힌 뒤 바닥으로 처박혔다.

온몸이 경련하는 것처럼 아픈 고통 속에서 나는 어둠 속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병상 옆에 서서 침대에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무뚝뚝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 다다랐을 때, 간절한 집착이 영혼이 되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객으로 남은 모양이다.

온몸에 튜브를 꽂은 내 모습을 보니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병실 밖에서 하룻밤 사이 머리가 희어 버린 엄마를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이 모든 비극이 한기범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나는 억울해서 몸을 떨었다. 그리고 그 강렬한 원망은 나를 한기범에게로 이끌었다.

그때 한기범은 다른 병원에 있었다.

그는 이지혜의 손을 잡은 채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넌 몸조리만 잘하면 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이지혜는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연약한 척 한기범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기범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기범 씨가 없었으면 저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예요.”

그녀의 의존하는 태도에 한기범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이지혜는 그의 곁에 바짝 기대앉아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기범 씨가 계속 이렇게 저랑 있어 주시면 설연 씨가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요?”

“상관없어.”

내 이름이 나오자마자 한기범의 표정이 혐오감으로 일그러졌다.

“틈만 나면 트집 잡고 우리 사이를 의심하며 억지 부리는 여자야. 누가 그런 결혼 생활을 계속하겠어? 그런 일상에 진절머리가 나. 정 안 되면 그냥 이혼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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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그날 나는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유산한 그날, 나는 대량 출혈과 장기 손상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가 됐다.우습게도 나를 유산하게 만든 장본인은 다름 아닌 내 남편 한기범이었다.내가 사고를 당한 날은 그의 생일이었다.나는 그를 위해 한 상 가득 음식을 차리고 직접 케이크도 구웠으며 집 안도 한껏 로맨틱하게 꾸며 놓았다.각종 명품 선물 외에도 나는 한기범을 위해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을 하나 더 준비했다.바로 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이었다.5년 동안 임신을 준비한 끝에 겨우 생긴 아이였다. 너무나 어렵게 찾아온 생명이었다.나는 이 아이가 우리 두 사람에게 주어진 귀한 선물이자,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결혼 생활을 되돌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그래서 일부러 그의 생일날을 골라 이 기쁜 소식을 전하려 했다.하지만 퇴근한 한기범은 급히 옷만 갈아입더니 이지혜가 병원에 있어 곁에 사람이 필요하다며 다시 나가려 했다.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팔을 붙잡았다.“나 이렇게 많이 준비했는데... 그리고 너한테 꼭 주고 싶은 중요한 선물도 있어.”한기범은 차갑게 내 손을 뿌리쳤다.“설연아, 지혜가 혼자 병원에 있어. 난 지금 가 봐야 해.”내 얼굴도 순식간에 굳었다.이지혜가 다시 나타난 이후로 한기범은 마치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변해버렸다.한때 가질 수 없었던, 잊지 못한 첫사랑 같은 존재. 이지혜는 한기범의 마음속에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나는 애처로운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기범아, 이지혜 씨가 너한테 그렇게 중요해? 나보다 더 중요해?”한기범은 귀찮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이런 상황에서 꼭 그렇게 무리하게 투정 부려야겠어? 지혜는 예전에 내 목숨을 구해줬던 사람이야. 지금 힘든 일을 겪고 있는데 내가 좀 도와주는 게 뭐가 문제야?”내가 따지기도 전에 그는 오히려 먼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나랑 지혜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네가 계속 그렇게 의심하고 못 믿겠다면 우리도 더는 같이 못 살아.”그는 마치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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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한기범은 이지혜의 수액이 끝날 때까지 곁을 지킨 뒤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줬다.내가 보기에도 이지혜는 한기범이 돌아가길 원하지 않았고, 한기범 역시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한기범의 팔을 붙들고 연약한 얼굴로 말했다.“기범 씨, 요즘 정말 우울해요. 이제 좀 괜찮아지면 저랑 어디 좀 다녀와 주실래요?”한기범의 얼굴에 곧바로 안쓰러운 기색이 떠올랐다.“그래.”이지혜네 아버지가 경영 악화로 파산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잘나가던 부잣집 아가씨에서 하루아침에 몰락한 집안의 딸이 된 이지혜의 심정을 한기범은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게다가 감정의 영향을 받아 몸조차 좋지 않으니 한기범은 온통 그녀를 챙겨줄 생각뿐이었다.“지혜야, 어디 가고 싶은지 말해. 내가 다 알아볼게. 너도 알잖아. 이제 나는 널 챙겨줄 능력이 있어.”이지혜의 얼굴이 환해졌다.“기범 씨, 고마워요. 기범 씨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그들 앞에 서 있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씁쓸하게 웃었다.한기범은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결혼할 때 신혼여행조차 가지 못했다.그는 결혼한 지 5년이 되도록 나와 여행을 가자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나와 함께 쇼핑하러 간 횟수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나는 그가 힘들게 일한다는 걸 알았기에 불평 한마디 없이 그의 생활을 세심하게 챙겼다.아내로서의 본분을 다하며 그를 뒷바라지했지만 내게 돌아온 건 냉대와 무시뿐이었다.나도 한때는 한기범의 마음을 다시 나에게 돌려보려고 애쓴 적이 있었다. 그러나 화장을 해도, 예쁜 옷을 입어도 한기범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지혜만 나타나면 그의 눈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았으니까.그가 이지혜 때문에 나와 집을 버려두고 나갈 때마다 나는 그와 다투곤 했다.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나를 무시하며, 오히려 내가 철이 없다며 비난했다.나는 의식을 잃기 전에도 이 상황에 대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죽음을 앞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한기범은 이지혜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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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휴대폰 너머로 차가운 기계음만 들려왔다.아무 응답도 없자 한기범은 몇 초간 멍하니 서 있다가 화가 난 얼굴로 휴대폰을 집어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그는 또 이지혜에게 돌아갔다.사랑하는 첫사랑과 함께한 여행이라 해도, 한 달 내내 이어진 빡빡한 일정 탓에 한기범은 피곤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한기범이 밥을 먹고 싶다고 하자 이지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그럼 제가 배달시킬게요. 기범 씨는 뭐 드시고 싶으세요?”한기범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불쾌감이 스쳤다.며칠째 식당과 길거리 음식만 먹은 탓에 그의 예민한 위장은 이미 여러 번 탈이 났다.하지만 이지혜는 그런 것까지 알아차릴 사람이 아니었다.한기범은 곧 표정을 가다듬고 다정하게 대답했다.“아무거나 괜찮아. 네가 먹고 싶은 걸로 시켜.”나는 한기범이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건 집밥임을 알고 있었다. 밥솥에서 갓 지은 따뜻한 흰쌀밥에 담백한 채소와 기름기 많지 않은 갈비탕 같은 국물이면 더 좋았다.한기범은 입맛이 까다롭고 가리는 게 많으며 위장도 매우 예민한 사람이다.이 세상에서 한기범의 음식 취향을 세세하게 외우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파, 생강, 마늘을 싫어했고 참기름도 먹지 않았으며, 내장이나 가시 많은 생선은 질색했다.어떤 채소는 최대한 담백하게 해야 하고, 어떤 음식은 조금 진하고 감칠맛 나게 해야 했다.나는 그런 자잘한 식습관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고 맞춰 줬다.예전에는 한기범이 며칠 연속 밖에서 회식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토하고 설사하곤 했다.그럴 때마다 내가 간단한 반찬 두 가지와 국 하나만 차려 줘도, 그의 위장과 기분을 달랠 수 있었다.하지만 한기범은 내 노력과 정성을 한 번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돈을 벌어 이 집을 먹여 살리고 있었으니까.그러니 내가 그를 챙기는 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다.물론 한기범에게 이지혜는 달랐다.이지혜는 부잣집 아가씨였고, 그녀의 손은 다이아몬드보다 귀한 것이니 부엌일은 물론 밥도 못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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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엄마는 그동안 이 결혼 생활에서 늘 내가 한기범을 이해하고 맞춰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다.엄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물어볼 때마다 늘 괜찮은 척 행복한 모습으로 연기했으니까.“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나 정말 잘 지내요. 기범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데요. 절대 고생 안 시켜요. 그리고 난 손해 보는 일은 안 해요.”엄마는 늘 내 말을 쉽게 믿었다.하지만 이제 눈앞에 드러난 잔인한 현실에 엄마는 완전히 무너졌다.“한 서방, 지금 이게 사람이 할 소리야? 자네 아내가 중환자실에 한 달째 누워 있는데 아무 관심도 없더니, 이제 와서 유치한 짓을 한다고 해?”생전 처음 듣는 엄마의 날카롭고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었다.기억 속에서 엄마는 언제나 다정했고 조금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하지만 그 사람이 지금은 나를 위해 이 세상과 싸울 듯 맞섰다.“한기범, 이 배은망덕한 놈아. 넌 내 딸의 남편 될 자격 없어.”한기범은 난생처음 듣는 욕설에 잠시 멍해졌다. 하지만 이내 그도 참지 않고 반격했다.“미쳤어요? 헛소리 그만 하세요. 설연이 어떻게 중환자실에 한 달이나 누워 있겠어요? 혼자 나랑 싸우는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어머님까지 끌어들여 연기하는 거예요? 정말 지긋지긋하네요.”한기범의 얼굴에는 믿기지 않는다는 기색이 조금 떠올랐다.하지만 그보다 더 짙은 건 비웃음과 의심, 그리고 짜증이었다.그제야 나는 남자가 얼마나 매정해질 수 있는지를 똑똑히 알았다.엄마 역시 한기범의 안하무인격인 태도에 완전히 격분했다.엄마는 목이 터질 듯 소리쳤다.“이 나쁜 놈아, 내 딸이 죽어서 귀신이 돼도 널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설연이만 그럴 줄 알아? 나도 죽어서 악귀가 되어서라도 너를 끝까지 저주할 거야.”한기범은 휴대폰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목덜미에 시퍼런 핏줄이 곤두섰다.“그만 하세요. 설연은 안 죽어요. 당장 나오라고 하세요. 죽을 거면 나랑 이혼부터 하고 죽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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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엄마는 한기범의 고함을 뒤로하고 단호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한기범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한때 곁에 있어 너무 당연해진, 빛바랜 사랑쯤으로 여겼던 내가 언젠가 그를 이렇게까지 흔들어 놓을 줄은.이지혜의 집으로 돌아온 한기범은 여전히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불안한 듯 집안을 서성거리며 끊임없이 웅얼거렸다.“성질이 점점 더 심해졌어. 감히 나를 이렇게 오래 무시해? 나를 피하는 거겠지. 이혼만큼은 피해 보려고 발악하는 거야.”“지설연, 네 약점이 뭔지 난 너무 잘 알아. 죽은 척까지 하다니. 내가 널 너무 만만하게 봤네.”나는 한기범의 옆에 서서 서글프게 웃었다.맞다. 내 약점은 어렵게 일궈낸 이 가정이자, 죽을힘을 다해 지켜 온 결혼이었다.나는 어렵게 맺어진 이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다.내가 그토록 소중히 가꿔온 인연을 한기범은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이지혜가 급히 다가와 한기범을 달랬다.“기범 씨, 화내지 마세요. 몸에 안 좋아요. 설연 씨도 기범 씨가 저랑 같이 있다는 걸 아니까 속상해서 그러는 거예요.”“저번에 저를 밀어서 넘어뜨린 것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을 거예요. 정 안 되면 제가 설연 씨한테 가서 사과할까요?”그녀는 일부러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연약한 척 한기범의 품으로 파고들었다.한기범은 이지혜를 안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기분 나빠해? 곧 죽을 거라잖아.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가 어떻게 죽겠어? 내 생각엔 죽어도 나랑 이혼은 안 하겠다는 거야.”한기범은 분하다는 듯 중얼거리다가 이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표정을 굳혔다.한기범이 자신을 안은 팔을 풀자 이지혜는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기범 씨, 이런 사소한 일로 화내지 마세요. 이미 늦었으니까 이제 자요. 기범 씨, 오늘은 소파 말고 그냥 침대에서 같이 자요.”이지혜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무슨 뜻인지는 굳이 깊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이지혜가 먼저 유혹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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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한기범은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나는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늘 깡마르고 왜소했던 탓에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자주 놀림과 괴롭힘을 당했다.아이들은 내 작은 키를 가지고 놀리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아빠 없는 애라느니, 친아빠한테도 버림받은 꼬맹이라느니 하며 비웃었다.엄마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저 묵묵히 참아내는 법만 배웠다.엄마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고 싶어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커서 좋은 학교에 들어간 뒤에야 마침내 더는 괴롭힘을 당하지 않게됐다.하지만 늘 참고 맞춰 주는 성격은 이미 버릇되어 고쳐지지 않았다.나는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았고, 나 자신을 숨길 때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그렇게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대학 생활을 끝내고, 평범하고 존재감 없는 그런 여자가 됐다.회사에 들어가니 나의 이런 성격은 독이 되었고, 이용당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모두가 꺼리는 힘든 일은 늘 내 몫이었고, 사교성이 없고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법을 몰랐던 나는 남이 저지른 잘못까지도 내가 뒤집어쓰기 일쑤였다.한기범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그는 유일하게 대표 앞까지 찾아가 사실을 똑바로 말해 주고 내 억울함을 풀어 준 사람이었다.키가 아주 크고 덩치가 좋은 것도 아니었고, 남들을 압도할 만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불의를 못 참는 성격 하나만으로 직장 내 괴롭힘을 보고 넘기지 못해 나를 위해 나섰다.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억울하게 해고당할 위기에서 벗어난 그날, 한기범은 작은 케이크까지 사 와서 환하게 웃으며 축하해 줬다.“앞으로 또 억울한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네 편 들어 줄게.”나는 아직도 한기범이 그 말을 할 때 반짝이던 눈빛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그를 사랑하게 됐다.한기범이 나를 그저 친구로만 생각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 역시 마음을 꼭꼭 숨긴 채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의 곁에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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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과거의 추억에서 빠져나온 한기범은 피로가 몰려온 듯 침대 위에서 옷을 입은 채로 잠들었다.호텔에서는 밤마다 뒤척이던 사람이 이 침대에서는 아주 평온해 보였다.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한기범은 가사도우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찾아온 가사도우미 아주머니는 일솜씨도 빠르고 입담도 좋은 사람이었다.한기범이 부탁한 대로 썩은 음식부터 치운 뒤 아주머니는 집 전체를 청소하기 시작했다.베란다로 가서 이미 말라 죽은 화분들을 본 아주머니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아내분이 정말 생활을 사랑하셨나 봐요. 이 화초들이랑 작은 화분들 좀 보세요.”아주머니의 손길이 누렇게 말라 버린 잎사귀를 스쳐 지나가자 내 마음도 저릿하게 아팠다.한기범을 향한 미련보다 내가 온 마음을 쏟았던 이 식물들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참 아깝네요. 전에는 정말 정성으로 키우셨을 텐데.”한기범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더니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 사람은 이런 걸 가꾸는 걸 좋아했어요.”한기범의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자 아주머니는 입을 다물고 청소에 집중했다.베란다를 닦은 뒤에는 옷장을 정리하러 갔다.그런데 옷장 문을 열자 아주머니가 다시 감탄했다.“제가 이 일을 오래 했지만 이렇게 정돈 잘된 옷장은 처음 봐요.”옷장을 가득 채운 옷들은 밝은색에서 어두운색으로, 봄옷부터 겨울옷까지 한기범의 생활 습관에 맞춰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한기범은 집에서 옷을 찾느라 헤맬 일이 없었다. 오늘 무엇을 입을지, 내일은 무엇을 입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속옷부터 신발, 양말까지 내가 전부 정리하고 어울리게 맞춰 놨으니까. 그는 아무것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한기범은 옷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자신의 흐트러진 차림새를 내려다봤다.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그는 뭔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침실 밖으로 나갔다.침실 정리를 끝낸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향했다.냉장고 문을 연 아주머니가 또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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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엄마는 이제 한기범에게 더할 말조차 없었다.엄마는 차갑게 대답했다.“자네는 설연을 볼 자격 없어.”한기범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거짓말하지 마세요. 더는 속이지 말라고요. 설연이 나오라고 하세요.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래요? 설연이가 죽을 리 없어요. 절대 그럴 리 없다고요.”엄마 역시 참아왔던 분노를 터뜨렸다.“그럴 리 없다고?”엄마도 감정이 격해졌다.“내 딸이 내 눈앞에서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아직도 설연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해? 한기범, 난 설연이 편히 가게 해줄 거야. 다시는 네 놈의 그 추악한 얼굴을 내 딸이 보지 못하게 할 거라고.”엄마는 전화를 끊고 떨리는 손으로 한기범의 번호를 차단했다.한기범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주먹을 꽉 쥐고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급히 집을 뛰쳐나갔다.나는 그를 따라 차에 올라탔다.또 이지혜를 찾아가려는 줄 알았는데 한기범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병원에 들어서자마자 중환자실이 어디냐고 묻고, 지설연이라는 환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제가 그 사람 남편입니다. 혹시 여기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까요?”간호사는 초조해하는 한기범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봤다.“정말 환자분 남편이세요? 남편이신데 아내분이 어느 병원에 계신지도 모르신다고요?”간호사는 그를 사기꾼이나 수상한 사람으로 의심했다. 결국 경비를 불러 한기범을 병원 밖으로 내보냈다.한기범은 차로 돌아와 핸들을 세게 내려쳤다.나는 이 정도로 창피를 당했으니 이제는 좀 포기하는 줄 알았다.‘대체 왜 이래? 인제 그만 서로 놓아주자. 나도 조용히 떠날 수 있게 내버려 줘.’하지만 오늘따라 한기범은 평소와 다르게 행동했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했다.“안녕하세요. 신고하려고요. 제 아내가 실종됐습니다.”전화 속 한기범의 목소리만 들으면 마치 정말 내 안전을 걱정하는 사람 같았다.나는 그게 우습고도 황당했다.이혼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서야 자신에게 아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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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한기범은 경찰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손을 떨더니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설연이를 만나야겠어요. 설연이가 죽을 리 없어요. 유산이라니, 어떻게 유산을 해요? 우린 5년 동안 아이도 안 생겼는데. 분명 절 속이는 거예요. 또 연기하는 거라고요.”그는 당장이라도 경찰서 밖으로 뛰쳐나갈 기세였다.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경찰들이 한기범을 바닥으로 제압하고 수갑을 채웠다.바닥에 납작 엎드린 한기범은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설연이를 만나게 해 줘요. 설연이가 죽는다는 거 못 믿어요. 그럴 리가 없어요.”나는 붉게 충혈된 한기범의 눈과 일그러진 얼굴을 바라보며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내가 죽으면 당신은 이 결혼에서 해방될 수 있잖아. 이지혜와도 마음껏 함께할 수 있고. 그런 결말이면 더 좋지 않아? 당신이 원한 거잖아.’‘그런데 왜 기뻐하지 않지? 왜 조금도 만족스러워하지 않은 얼굴이야?’경찰들이 한기범을 억누르는 동안 그의 처절한 절규가 경찰서 안을 가득 메웠다.그러다 갑자기 한기범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한기범은 한순간에 온 힘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몸부림을 멈췄다.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설연이를 만나게 해주세요. 설연이를 만나게 해 달라고요. 설연이가 죽을 리 없어요. 믿을 수 없다고요.”“설연아, 인제 그만 나한테 화내.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 사과할게, 응?”그의 말과 함께 억눌린 울음소리가 섞여 나왔다.나는 믿을 수가 없어 쪼그리고 앉아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한기범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는 힘없이 흐느끼면서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경찰을 바라봤다.“한 번만 만나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얼굴 한 번만 보면 돼요. 설연은 안 죽어요. 설연이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요? 그러니까 안 죽는다고요.”경찰이 그런 요구를 쉽게 들어줄 리 없었다.만약을 위해 그들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실관계를 확인했고, 각지의 CCTV를 뒤져 내 행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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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결국 한기범의 소원은 이루어졌다.엄마가 마음이 약해져 그의 요구를 받아준 것은 아니었다.엄마는 한기범이 나를 간접적으로 죽게 만든 진짜 원인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그와 직접 대면해 따져 묻기로 했다.“네가 설연을 밀었어? 네가 내 딸을 이렇게 만든 거야?”엄마는 중환자실 안에 누워 있는 나를 가리키며 울먹였다.“한기범, 똑바로 봐. 내 딸 보고 제대로 말해.”양손에 수갑을 찬 한기범은 병상 위의 나를 보자마자 또 눈물을 쏟았다.나는 예전에는 이 남자가 이렇게 눈물이 많은 사람인지 몰랐다.며칠 동안 나는 그가 우는 모습을 수도 없이 봤다.대체 어떻게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는 걸까.한기범의 눈물은 정말 끝이 없는 것 같았다.그는 나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유리창 앞으로 달려갔다.하지만 경찰이 그를 붙잡고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한기범은 초췌해진 내 모습을 보자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설연아. 빨리 눈을 떠봐. 네가 연기한 거라고, 날 속인 거라고 말해. 설연아, 이러지 마, 네가 죽으면 나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죽어도 난 너랑 이혼 안 해. 설연아.”나는 미친 듯이 소리치는 한기범을 보며 잠시 멍해졌다.‘며칠이나 갇혀 있던 탓에 정신이 이상해진 게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예전에는 입만 열면 이혼하자고 억지 부렸잖아.’엄마는 한기범이 또 연기한다고 생각해 더욱 분노했다.“넌 네 아이를 죽이고 네 아내를 죽게 만들고도 아무렇지 않게 그 이지혜라는 여자랑 여행을 다녔어. 넌 인간도 아니야. 예전에 설연이가 목숨 걸고 널 구했는데, 넌 결국 설연을 죽인 살인마가 된 거라고.”엄마는 그날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엄마의 허락을 얻기 위해 나는 내가 한기범을 위해 얼마나 미친 짓을 했는지 엄마에게 전부 털어놓았었다.내가 죽어가는 이 순간 그 비밀이 드러나게 될 줄은 몰랐다.한기범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그는 눈을 크게 뜨고 엄마에게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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