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황궁 공보: 추모 미사에 참석한 황후가 황실의 뜻을 전했다.』
엘리네는 찻잔에서 손을 뗐다.
복도에서 쟁반을 든 시종이 지나갔다. 마리엔이 길을 비켜 주었다가 다시 문 곁에 섰다. 칼릭스는 그쪽을 보지 않고 엘리네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가 서재에 갔다는 건 누가 알려 드렸나요?”
“본궁에서 황후 폐하의 서명을 기다리느라 군무 보고가 늦어졌습니다. 제게도 대기하라는 전갈이 왔습니다.”
“그것만으로 제가 무엇을 봤는지 아신다고요?”
칼릭스가 찻주전자를 내려놓았다.
“그 지도는 제가 수도로 돌아오기 전부터 서재에 있었습니다. 북부에서 올린 보고에 첨부된 지도입니다.”
엘리네는 무릎 위의 봉투를 눌렀다. 종이 모서리가 손가락에 닿았다.
“제가 보지 않았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습니다.”
칼릭스는 곧바로 대답했다.
“보셨는지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아는 것처럼 말씀드린 건 제 잘못입니다.”
엘리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칼릭스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문밖에서 수행 기사가 자세를 바꿨다. 칼집 끝이 문틀에 닿는 소리가 났다. 엘리네가 고개를 돌리자 기사는 허리를 숙이고 뒤로 물러났다.
열린 문으로는 응접실 탁자까지 보였다. 차를 마시는 엘리네와 칼릭스를 가릴 것은 없었다.
엘리네는 봉투를 탁자 가장자리에 놓았다.
“봄 첫째 달 10일.”
칼릭스의 시선이 봉투에서 올라왔다.
“맞습니까?”
“예.”
“군사 3만도요?”
“예.”
엘리네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은 뒤 손잡이 방향을 바로 잡았다.
“노르덴은 동맹국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북부군 사령관이시죠.”
“그렇습니다.”
“그런 분이 제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뭔가요?”
칼릭스는 대답하기 전에 복도를 보았다. 빈 찻잔을 거두러 오던 시종이 문 앞에서 멈췄다.
“나중에 부르겠습니다.”
시종이 물러났다. 칼릭스는 문을 닫으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날 회색 고개를 넘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엘리네는 봉투 위에서 손을 뗐다.
“넘을 수는 있어요.”
칼릭스가 엘리네를 보았다.
“사람이 적고 짐을 버리면요. 하지만 돌아올 길까지 남아 있을지는 몰라요. 봄 첫째 달에도 그늘진 비탈에는 눈이 쌓여 있어요.”
엘리네의 말이 빨라졌다.
“햇볕이 드는 길만 보고 녹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굽이를 돌면 발을 디딜 자리부터 달라져요.”
“군사 3만은 짐을 버리고 갈 수 없습니다.”
“식량과 말이 있으니까요.”
“그 계절에 명령대로 넘으면 병사 열에 셋은 얼어 다칩니다.”
엘리네는 칼릭스의 군복 소매를 보았다. 손목 가까이에 실밥을 고친 자국이 있었다. 훈장은 그 위 가슴에 1개 달려 있었다.
“그 계산을 폐하께 올리셨나요?”
“올렸습니다.”
“답은요?”
“행군 일정을 맞추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엘리네는 찻잔을 더 들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전쟁을 반대하시는 건가요, 그 길을 반대하시는 건가요?”
칼릭스의 손이 탁자 위에서 멎었다.
“그 길로 병사를 보내는 명령을 반대합니다. 동맹을 깨고 노르덴을 치는 일도 막으려 합니다.”
“길을 바꾸면 찬성하실 수 있다는 뜻은 아니고요?”
“아닙니다.”
짧은 답이 돌아왔다.
엘리네는 찻잔 받침을 조금 밀었다. 잔 아래에 묻은 찻물이 둥글게 남아 있었다.
“제게는 노르덴이 고향이에요. 전하께는 막아야 할 행군이고요.”
“황후 폐하께서 저와 같은 이유를 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가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아도요?”
“예.”
문 가까이에서 마리엔이 겉옷을 고쳐 걸었다. 단추가 옷걸이에 닿아 작게 소리가 났다. 엘리네는 그 소리가 멎을 때까지 기다렸다.
황제가 듣는다면 지도에서 본 날짜보다 이 대화를 먼저 물을 터였다. 문을 열어 두어도 말까지 밖에서 들을 수는 없었다.
“제게 뭘 원하시나요?”
“그 지도만으로 노르덴에 급히 소식을 보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엘리네가 등을 폈다.
칼릭스는 손을 들어 막지 않았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았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황후 폐하의 편지는 본궁을 거칩니다. 군사 계획을 알았다는 사실부터 드러납니다.”
“제 편지가 어디를 거치는지도 아시는군요.”
“황족의 서신 절차는 같습니다. 제 편지도 검인을 받습니다.”
엘리네는 마리엔을 보았다. 마리엔은 두 손을 모은 채 복도 쪽을 향해 있었다.
서류함에 넣어 둔 조약 사본이 떠올랐다. 밤새 읽어도 편지를 보낼 길은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사람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탁자 건너에 앉은 사람도 아르벤의 황족이었다.
“전하께 소식을 맡기겠다는 말씀은 드리지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오늘 들은 말을 믿겠다는 뜻도 아니에요.”
“확인하셔도 됩니다.”
“무엇으로요?”
“북부군에 내려온 행군 준비 명령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꺼내 보이면 수행하신 분들도 군무 이야기를 나눴다는 걸 알게 됩니다.”
칼릭스는 군복 안쪽에 손을 넣지 않았다.
엘리네는 열린 문을 보았다. 수행 기사가 복도 끝 시종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리엔은 그 사이에 서 있었다.
“지금 보여 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예.”
“하지만 앞으로 제게 하실 말씀이 있다면, 아시는 것과 짐작하시는 것을 나눠 말씀해 주세요.”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엘리네는 봉투를 집었다. 장갑을 끼려다 손가락이 안쪽 천에 걸렸다. 끝을 잡아당기는 대신 입구부터 펴서 다시 끼웠다.
칼릭스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기다렸다. 엘리네가 장갑의 단추를 잠근 뒤에야 의자를 물렸다.
“오늘은 돌아가겠어요.”
“모시겠습니다.”
“응접실 앞이면 충분해요.”
칼릭스는 걸음을 멈췄다.
“알겠습니다.”
엘리네가 문으로 향하자 마리엔이 겉옷을 들었다. 칼릭스는 탁자 곁에 남아 있었다. 옷깃을 여미는 동안에도 엘리네는 그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로 나오자 식당에서 그릇을 거두는 소리가 들렸다.
◊
마차 앞에는 예배당에서 보았던 여자가 서 있었다. 마리엔이 식당까지 모셔다드린 여자였다.
동행한 남자가 털모자를 벗었다. 여자는 손에 쥔 꾸러미를 외투 안으로 넣으려다 엘리네를 보고 멈췄다.
“식사는 하셨어요?”
“예. 남은 빵도 가져가도 된다고 해서요.”
여자가 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 종이 틈으로 빵 끝이 나와 있었다.
곁의 시종이 말했다.
“돌아가시는 분들께 드리고 있습니다.”
엘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의 장갑 끝에는 실이 묶여 있었다.
“고치셨네요.”
“식당에 앉았던 분이 묶어 줬습니다. 집에 가서 꿰매라고요.”
여자가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엘리네는 웃으며 인사한 뒤 마차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마리엔이 맞은편에 앉았다. 마차가 저택을 벗어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쪽 문에서 수행 명단을 확인하는 동안 엘리네는 창밖을 보았다. 문지기가 종이에 표시한 뒤 기사를 향해 손을 들었다.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공주님, 차가 입에 안 맞으셨어요?”
“왜?”
“거의 안 드셔서요.”
엘리네는 장갑의 단추를 풀었다.
“생각할 게 있었어.”
마리엔은 더 묻지 않고 초대장이 든 봉투를 받아 들었다.
황후궁 앞에 마차가 멎었다. 현관에 있던 시종이 걸어 나와 귀환 시각을 적었다. 엘리네는 그 펜 끝을 잠깐 보았다.
오늘 엘리네가 어디에 갔는지, 언제 돌아왔는지가 종이 위에 남았다.
◊
방에 들어오자 마리엔이 겉옷을 받아 갔다.
엘리네는 책상 앞에 앉았다. 추모 미사 초대장을 서류함에 넣으려다가 손을 멈췄다.
“마리엔, 지도 보관한 서랍 열쇠 좀 줘.”
마리엔은 옷을 걸고 허리의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어느 장 꺼내 드릴까요?”
“내가 볼게.”
엘리네는 열쇠를 받아 서랍을 열었다.
노르덴에서 가져온 지도들은 보관함 안에 끈으로 묶여 있었다. 그 앞에는 빈 종이와 압지가 있었다. 엘리네는 종이를 치우고 지도 묶음을 꺼냈다.
서재의 지도에서 본 길을 확인할 생각이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붉은 화살표가 닿았던 곳은 탈로였다.
책상에 묶음을 놓고 끈을 풀었다. 맨 위에는 노르덴 서쪽 산길을 그린 지도가 있었다. 엘리네는 종이 귀퉁이를 눌러 펴고 다음 장을 넘겼다.
강 상류. 남쪽 골짜기. 왕도로 이어지는 길.
손이 멈췄다.
엘리네는 넘긴 지도를 다시 앞으로 가져왔다. 겹친 종이가 있는지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벌렸다.
“공주님?”
“잠깐만.”
종이를 낱장으로 떼어 책상에 늘어놓았다. 자리가 모자라 잉크병과 펜 받침을 옆 탁자로 옮겼다.
6장이었다.
엘리네는 지도의 뒷면까지 뒤집어 보았다. 낡은 종이가 접힌 선을 따라 들렸다. 손바닥으로 누르자 다시 평평해졌다.
“다른 곳에 옮겨 둔 지도 있어?”
“아니요. 이 서랍 말고는 안 넣었어요.”
“최근에 종이를 정리할 때는?”
“빈 종이만 앞에 맞춰 놨어요. 끈도 안 풀었는데…….”
마리엔이 책상 가까이 왔다.
엘리네는 서랍을 끝까지 당겼다. 안쪽 벽과 바닥을 살피고 압지 아래도 확인했다. 접힌 종이 한 조각도 없었다.
“어느 게 없어요?”
“회색 고개에서 노르덴 쪽으로 내려가는 길.”
마리엔이 지도들을 차례로 보았다.
엘리네는 빈자리에 손을 놓았다. 7장은 노르덴에서부터 같은 순서로 묶어 두었다. 없어진 지도는 고개와 탈로 사이의 길을 그린 장이었다.
그 장에는 길이 갈라지는 곳과 물을 구할 수 있는 자리를 적었다. 눈 때문에 큰길을 쓰지 못할 때 내려갈 산길도 있었다.
엘리네는 남은 지도 하나를 집어 빛에 비췄다. 종이 끝에 눌린 자국이 보였다. 오래 묶어 둔 끈 자국이었다.
끈은 다시 묶여 있었다. 아까 풀었을 때 매듭이 낯설다고 느끼지 못했다.
마리엔이 서랍 앞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을 살피던 손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제가 잠그는 걸 잊었나 봐요.”
“마리엔.”
“오늘 나가기 전에 서랍을 만졌어요. 공주님 장갑 찾느라고요. 제가 그때…….”
말끝이 끊겼다. 마리엔이 입술을 다물었지만 눈가에 물기가 맺혔다.
엘리네는 지도를 내려놓았다.
“잠갔어. 내가 봤어.”
마리엔이 고개를 들었다.
“겉옷 가져오기 전에 네가 열쇠를 돌렸잖아. 닫힌 것도 손잡이를 당겨 봤고.”
“그랬어요?”
“응. 열쇠를 주머니에 넣는 것까지 봤어.”
엘리네가 손수건을 건넸다. 마리엔은 받기만 하고 눈에 대지 않았다.
“그럼 누가…….”
“아직 몰라.”
엘리네는 마리엔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고는 남은 지도를 다시 포갰다. 서랍에 넣지 않고 책상 위에 두었다.
“없어진 건 이 장뿐이야. 다른 물건이 없어졌는지는 같이 확인하자.”
마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서류함과 작은 상자를 열어 보았다. 편지와 인장은 그대로였다. 은 컴퍼스도 안감 위에 놓여 있었다. 엘리네는 접는 자가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뚜껑을 닫았다.
마리엔이 책상 아래를 살피는 동안 엘리네는 풀어 둔 끈을 집었다. 끝이 끊어지거나 닳은 곳은 없었다.
“제가 시종에게 물어볼까요? 오늘 이 방에 들어왔는지요.”
엘리네는 끈을 지도 옆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묻지 마.”
“찾아야 하잖아요.”
“먼저 서랍을 봐야겠어.”
엘리네는 의자를 옆으로 밀었다. 서랍의 손잡이를 잡고 닫았다가 열쇠를 돌렸다. 끝까지 돌아갔다.
손잡이를 당겨도 서랍은 열리지 않았다.
열쇠를 반대로 돌리자 걸쇠가 풀렸다. 움직임이 막히는 곳은 없었다. 엘리네는 열쇠를 빼고 마리엔에게 촛대를 부탁했다.
마리엔이 불을 가까이 가져왔다.
엘리네는 몸을 낮춰 자물쇠 입구를 살폈다. 테두리에 촛불이 비쳤다. 손톱으로 가장자리를 짚고, 걸쇠가 들어가는 자리도 들여다보았다.
나무가 뜯기거나 쇠가 휜 곳은 없었다. 가느다란 긁힌 자국조차 보이지 않았다.
엘리네는 손바닥에 놓인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억지로 연 게 아니야. 열쇠로 열었어.”
(9화 끝)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5일, 새벽 예배당을 개방한다.』엘리네는 창 아래에 기대 놓은 판자를 다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저택 지붕의 불은 더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서 다른 신호를 보내도 뜻을 전할 수 없었다. 같은 불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는 말을 나눌 자리가 생기지 않았다.“답한 거지요?”문 옆에 있던 마리엔이 물었다.“응.”“한 번 더 해 볼까요?”“아니. 여기까지.”엘리네는 등불을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 저택의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창에 오래 서 있지는 않았다. 마리엔이 판자를 치우는 동안 종이를 서랍에 넣고 열쇠를 돌렸다.계단을 내려가자 문지기가 창을 닫으러 올라왔다. 엘리네는 문지기에게 인사를 받고 침실로 향했다.다음 날에도 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는 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에는 군무청에서 원본 대조가 늦어진다는 통지만 왔다. 엘리네는 통지를 읽고 날짜 옆에 작은 점을 찍었다.마리엔이 빈 쟁반을 들며 말했다.“예배당에 다녀와도 될까요? 내일 쓸 초를 받았다고 확인해 달래요.”엘리네는 펜을 내려놓았다.“새벽에도 문을 열어?”“첫 종 전에 열어요. 대공 전하도 그때 오신대요. 사람들이 모이기 전에 기도하고 가신다고요.”“그럼 내일은 내가 갈게.”마리엔이 쟁반을 내려놓았다.“공주님도요?”“응. 초를 잘 받았는지 내가 확인하면 되잖아.”◊겨울 첫째 달 25일, 엘리네는 옷깃의 단추를 끝까지 잠갔다.마리엔은 외투의 끈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22일, 서쪽 담의 순찰을 강화한다.』“알아요. 감정 의견에도 재상께 확인을 청할 내용이 있어요.”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서 손을 뗐다.에스텔의 부채가 손바닥 안에서 돌아갔다. 꿰맨 끝을 살피던 눈이 다시 엘리네에게 향했다.“그럼 아버지께서도 곧 읽으시겠네요.”“같은 사본을 보셔야 해요. 다른 지도로는 제가 잰 곳을 확인할 수 없으니까요.”에스텔은 입술을 다물었다. 문밖으로 나가기 직전, 부채를 접어 손잡이를 쥐었다. 이번에는 고친 곳을 누르지 않았다.마리엔이 문을 닫았다. 복도에서 치맛자락 끄는 소리가 멀어졌다.칼릭스는 감정 의견을 서류 사이에 넣었다. 엘리네의 이름이 적힌 면이 안쪽으로 들어갔다.“원본 대조를 청하겠습니다.”“제가 확인해야 할 것이 생기면 알려 주세요.”“공식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그 말에 엘리네는 문을 보았다. 문지기의 그림자가 아래 틈에 걸려 있었다.“네. 그렇게 해 주세요.”칼릭스가 일어섰다. 마리엔이 문을 열자 복도에서 기다리던 시종이 몸을 바로 세웠다. 칼릭스는 엘리네에게 예를 갖춘 뒤 시종과 함께 나갔다.엘리네는 빈 의자를 당겨 넣었다. 칼릭스가 앉았던 자리는 에스텔이 고른 의자보다 멀었다. 지도 사본이 사라진 탁자에는 잔 받침과 자국만 남았다.◊겨울 첫째 달 22일 오후, 황후궁 문지기가 방문 명부를 펼쳤다.엘리네는 응접실로 가려다 걸음을 멈췄다.“누가 왔나요?”“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지난 방문 기록을 본궁에 올리라는 분부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황후궁에서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엘리네는 접던 자를 탁자에 내려놓았다.“지도 감정 중이에요. 들어와요.”에스텔은 문지기가 비켜서기도 전에 문턱을 넘었다. 붉은 치맛자락이 의자 옆을 스쳤다. 마리엔이 자리를 권하자 에스텔은 칼릭스와 엘리네 사이에 놓인 의자를 골랐다.“비밀은 아니었나 보네요. 두 분 다 아무것도 감추지 않으시니.”“공식으로 청한 감정입니다.”칼릭스가 답했다. 에스텔은 앉으며 부채를 펼쳤다.“그런데 궁 안에는 벌써 말이 돌던데요. 북부군 사령관께서 황후 폐하의 수놓는 시간을 빼앗으셨다고요.”엘리네는 펜 옆의 천을 접었다. 조금 전 찻잔 손잡이에 댔던 천이었다.“오늘은 수를 놓지 않았어요.”“그럼 대공 전하께서 시간을 잘 고르셨군요.”에스텔의 부채가 멎었다. 부채 위로 보이는 눈은 칼릭스가 아니라 탁자를 향해 있었다. 펼친 지도, 행군 수첩, 감정 의견을 적던 종이까지 차례로 살폈다.마리엔이 찻잔을 가져왔다. 에스텔은 빈 쟁반을 옆으로 밀게 하고 의자를 탁자 가까이 당겼다.엘리네는 지도 모서리에 걸린 잔 받침을 옮겼다.“차는 이쪽에 둘게요. 종이에 닿으면 곤란해서요.”“폐하의 자수보다 귀한 물건인가 봐요.”“젖으면 다시 재야 해요.”엘리네는 접는 자를 지도 아래에 나란히 놓았다. 에스텔이 보려던 종이를 덮지는 않았다. 감정 의견에는 축척이 맞지 않는다는 말과 확인한 구간이 적혀 있었다.그 옆의 기록 대조 목록에는 아직 빈 칸이 많았다.“무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지도 감정을 진행한다.』칼릭스는 축척을 적은 종이 옆에 행군 수첩을 놓았다.“짧아 보이는 거리를 누구에게 보여 주려는 걸까요.”엘리네는 지도 아래의 글씨를 다시 보았다. 축척을 몰라도 길이 멀다는 사실은 걸어 보면 알았다. 병사를 이끌고 고개를 넘은 사람에게는 오래 숨길 수 없는 잘못이었다.“직접 가지 않는 사람일 거예요. 종이에 적힌 숫자로만 길을 보는 사람.”“출발을 허가하는 쪽이군요.”칼릭스가 수첩을 넘겼다. 길 이름 아래로 숙영지와 식수터가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그중 길게 지운 줄을 보았다. 먹을 덧칠했어도 먼저 적은 글씨 끝은 남아 있었다.“이건 왜 지우셨어요?”“물이 얼었습니다. 겨울에는 쓸 수 없는 곳입니다.”“지도에는 그대로 있어요.”“예. 이 사본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엘리네는 얇은 종이에 그 자리를 표시했다.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다음 숙영지까지 더 가거나 물을 싣고 가야 했다. 어느 쪽이든 지도에 찍힌 점만 보고 정할 일은 아니었다.“짧다고 믿으면 무엇부터 줄이나요?”칼릭스가 펜대를 내려놓았다.“식량입니다. 말먹이도 줄입니다. 수송 수레와 짐말의 수를 정할 때도 거리를 씁니다.”“길이 짧으니 적게 싣고 가도 된다고요.”“돌아오는 길까지 짧게 잡게 됩니다.”엘리네는 자를 들어 처음 쟀던 구간에 댔다. 지도에서는 5센티미터였다. 적힌 축척대로 계산한 거리보다 실제로 가야 하는 길이 길었다.“가는 동안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8일, 전시 지도의 검토를 청한다.』군무청에서 온 청원서에는 보급 계획서의 사본 목록이 붙어 있었다. 엘리네는 아침 식사를 물리고 봉투를 열었다.『황궁 지도 전시회의 오류에 관한 감정을 청합니다. 북부군 사령관 칼릭스 아르벤.』지도 기사가 옮겨 그린 선과 군무청이 보관한 원본을 대조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엘리네가 전시장에서 지적한 부분도 적혀 있었다. 아래에는 방문 허가를 기다린다는 문장이 붙었다.마리엔이 빈 찻잔을 거두다 물었다.“위층으로 모실까요?”“아니. 응접실에 탁자를 비워 줘.”엘리네는 첨부 목록을 다시 읽었다. 군사 지도 사본, 전시 지도 가장자리의 본, 길 이름 대조표. 물건마다 군무청의 반출 인장이 찍혀 있었다.지도 감정을 청하는 서류였다. 황후궁에 칼릭스가 드나들 이유도 거기에 적혀 있었다.“문은 닫지 말고, 너와 시녀 한 명이 함께 있어 줘.”마리엔이 찻잔을 내려놓았다.“누가 뭐라고 할까 봐요?”“무슨 일을 했는지 누구나 알 수 있게 하려는 거야.”엘리네는 허가란에 서명했다. 펜촉을 닦은 뒤에는 서랍에서 접는 자와 은 컴퍼스를 꺼냈다. 남은 산길 지도는 가져가지 않았다.빠진 장이 있던 자리는 빈 종이로 구분해 두었다. 엘리네는 그 종이가 그대로 있는지 확인하고 서랍을 잠갔다.◊응접실 문 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났다.“칼릭스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엘리네는 창가에서 돌아섰다. 칼릭스는 문턱 앞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외투는 벗어 맡겼고, 손에는 가죽 지도통과 서류 묶음이 들려 있었다.“황후
『황궁 공보: 겨울 첫째 달 17일, 북방 보급안을 검토한다.』탁자 다리를 누르던 엘리네가 손을 뗐다. 마리엔이 지도 묶음을 올려놓으려 하자 엘리네는 창에서 먼 쪽을 가리켰다.“그쪽에 두자. 창을 열어도 종이가 날리지 않게.”천을 벗기고 지도 모서리에 자를 얹었다. 바닥을 닦은 물이 마를 때까지 둘은 탁자를 움직이지 않았다.그 뒤로도 탁자는 같은 자리에 있었다. 엘리네는 지도실을 나설 때마다 다리가 놓인 곳을 확인했다.◊군무청 서기가 보급 계획서를 펼쳤다. 칼릭스는 가죽 지도통을 의자 옆에 세워 두고 장갑을 벗었다.창 아래에 놓인 난로에서는 장작 타는 소리가 났다. 서기는 난로 쪽에 말려 두었던 종이를 가져와 계획서 끝에 붙였다.“창고별 수량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물량은 따로 표시했습니다.”칼릭스는 의자에 앉지 않고 첫 장을 읽었다.『봄 첫째 달 10일 출정. 병력 3만. 회색 고개 경유.』그 아래에 밀가루와 말먹이, 겨울옷 수량이 적혀 있었다. 칼릭스는 출정 날짜를 손가락으로 짚었다가 다음 장을 넘겼다.“행군 일수는 어디 있습니까?”“노정표에 있습니다.”서기가 묶음에서 종이를 찾아냈다. 칼릭스는 그것부터 탁자 가운데로 옮겼다.벨모르에서 북부 요새까지 이어지는 선 옆에 숙영지가 적혀 있었다. 요새 위쪽부터는 표시가 드물었다. 회색 고개를 넘은 뒤 노르덴 쪽 마을에서 보급을 받는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현지 보급을 약속한 문서도 있습니까?”서기는 종이 끝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첨부된 것은 없습니다.”“요청한 기록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