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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초대장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8 20:09:47

『황궁 공보: 북부군 추모 미사에 황실의 예를 갖춘다.』

서쪽 담 밖 창에는 불이 없었다.

엘리네는 창문 걸쇠에서 손을 떼었다. 겨울 첫째 달 9일 아침이었다. 마리엔이 탁자에 잔을 놓고 커튼을 마저 걷었다.

“오늘은 바깥이 좀 맑아요.”

“길에 눈은?”

“밤에 치웠대요. 본궁에서 서쪽 문까지요.”

엘리네는 의자를 밀어 넣었다. 조약 사본은 서류함에 넣어 잠갔지만, 서재에서 본 날짜를 적은 종이는 아직 책 아래에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마리엔이 문밖에서 봉투를 받아 왔다. 황실 문장이 아닌 대공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대공 저택에서 왔어요. 답을 기다리신대요.”

엘리네는 잔을 내려놓았다.

봉투 안에는 초대장과 참석 절차를 적은 종이가 들어 있었다. 초대장 아래에 칼릭스 아르벤의 이름이 보였다.

『북부군 전몰 병사 추모 미사에 황후 폐하를 모십니다.』

장소는 대공 저택에 딸린 예배당이었다. 미사 뒤에는 참석한 유족들에게 차와 식사를 낸다고 적혀 있었다.

엘리네는 따로 붙인 종이를 펼쳤다. 황실을 대표할 황족 한 사람의 참석을 요청했으며, 황제의 일정은 본궁에서 확인을 마쳤다는 내용이었다.

“폐하께서도 가시니?”

“오신 분께 물어볼까요?”

“아니. 시종장에게 확인해 줘. 내가 가면 어떤 절차가 필요한지도.”

마리엔이 나간 뒤 엘리네는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뒷면에는 다른 글이 없었다. 초대장에도 미사에 관한 말만 있었다.

도서관에서 칼릭스는 단둘이 있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늘은 유족과 장교들 앞에서 엘리네를 맞겠다는 초대였다.

엘리네는 초대장을 탁자에 놓았다.

잠시 뒤 시종장이 마리엔과 함께 들어왔다. 손에는 이미 펼쳐 본 일정표가 들려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참석하지 않으십니다. 황후 폐하께서 가신다면 황실의 헌화도 함께 맡아 주시면 됩니다.”

“참석하지 않으면요?”

“황실 이름으로 꽃만 보내게 됩니다.”

엘리네는 초대장에 적힌 유족 접대 순서를 다시 읽었다.

“제가 갈게요.”

“수행 인원을 정하겠습니다.”

“마리엔도 데려갈 거예요.”

시종장은 일정표에 표시했다. 엘리네는 기다리는 전령에게 전할 답을 적었다. 황후의 인장을 찍자 시종장이 종이를 받아 갔다.

마리엔은 옷장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회색 옷으로 꺼낼까요?”

“장식이 적은 것으로.”

“머리 장식도 빼고요?”

엘리네는 거울 앞에 놓인 보석함을 닫았다.

“핀만 있으면 돼.”

◊

황후궁 문 앞에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마리엔이 치맛자락을 받아 주었다. 엘리네는 마차에 오르기 전 본궁 쪽을 보았다. 서재가 있는 창 아래로 시종들이 오가고 있었다.

수행 기사가 마차 문을 닫았다.

“대공 저택까지는 서쪽 문을 쓰겠습니다.”

엘리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가 움직이자 무릎 위의 초대장이 조금 밀렸다. 마리엔이 손을 뻗기 전에 엘리네가 잡았다.

“봉투에 넣어 드릴까요?”

“괜찮아.”

종이 모서리에 손가락이 눌렸다. 엘리네는 초대장을 접힌 자리에 맞춰 접었다. 칼릭스에게 무슨 말을 할지 정하지 못한 채 봉투에 넣었다.

서쪽 문에서는 마차가 잠깐 멎었다. 문지기가 수행 명단을 확인하고 길을 열었다. 담 밖에는 걸어서 저택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털모자를 쓴 남자가 곁의 노인에게 팔을 내주고 있었다.

마리엔이 창가에서 몸을 물렸다.

“사람이 많네요.”

“예배당에 다 들어갈 수 있을까.”

저택 입구에 이르자 시종이 문을 열었다. 예배당으로 이어진 길에는 눈을 쓸어 낸 자리가 보였다. 가장자리에는 모래가 뿌려져 있었다.

칼릭스는 예배당 문 앞에 서 있었다.

군복에는 훈장 하나만 달려 있었다. 엘리네가 내리자 칼릭스가 고개를 숙였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엘리네가 발을 옮기려는데 마차 바퀴 옆에 얼음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오십시오.”

칼릭스는 손을 내미는 대신 시종에게 마차 발판을 옮기게 했다. 엘리네가 내려설 자리가 넓어졌다.

마리엔이 뒤따라 내렸다. 칼릭스는 두 사람이 모두 길 위에 선 뒤 예배당 안으로 안내했다.

◊

예배당 앞자리에는 작은 의자가 따로 놓여 있었다.

엘리네는 그 자리에 앉았다. 뒤쪽에서 외투를 벗는 소리와 의자를 당기는 소리가 났다. 마리엔은 벽 쪽에 섰고, 칼릭스는 통로 건너편의 장교들 곁으로 갔다.

제단 옆에는 이름을 적은 책이 펼쳐져 있었다.

엘리네는 책장이 들리지 않도록 양쪽에 놓인 문진을 보았다. 종이 아래까지 이름이 이어져 있었다.

미사가 시작되자 뒤쪽 소리가 잦아들었다.

사제는 북부에서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을 위해 기도했다. 엘리네는 무릎 위에 손을 모았다. 앞에 앉은 여자의 장갑 끝이 해져 있었다. 여자는 기도가 끝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눌렀다.

헌화할 차례가 되었다.

엘리네는 시종에게서 꽃을 받았다. 통로에 서자 앞줄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앉아 계세요.”

엘리네가 손을 낮추자 몇 사람이 다시 앉았다. 제단 앞에 꽃을 놓고 물러서는 동안 뒤에서 지팡이 끄는 소리가 들렸다.

장갑 끝을 만지던 여자가 의자 옆에 서 있었다. 발치에는 떨어진 손수건이 있었다. 여자는 허리를 굽히려다가 의자 등받이를 잡았다.

엘리네가 먼저 손수건을 주웠다.

“여기 있어요.”

여자는 손수건을 받으려다 엘리네의 얼굴을 보았다.

“황후 폐하.”

엘리네는 손수건이 바닥에 닿았던 쪽을 안으로 접어 주었다. 여자가 두 손으로 받았다가 한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손가락이 엘리네의 장갑을 붙잡았다. 여자는 곧 놓으려 했다.

“제가 그만…….”

“괜찮아요.”

엘리네는 잡힌 손을 빼지 않았다. 여자의 손목에는 외투 소매가 조금 짧았다.

“앉으실까요?”

여자가 의자를 더듬었다. 엘리네는 곁의 의자를 당겨 앉았다. 뒤따라온 시종이 걸음을 멈췄다.

여자는 손수건을 무릎에 놓았다.

“아들이 보내 준 장갑입니다. 예배당에 올 때만 끼는데, 여기가 자꾸 풀려서요.”

여자가 엄지로 장갑 끝을 문질렀다.

“집에서 고쳐 올걸 그랬습니다.”

“실이 빠진 곳은 따로 묶어 두는 게 좋아요. 그대로 당기면 더 풀리더라고요.”

“폐하께서도 아십니까?”

“수를 놓다가 실을 잘못 당길 때가 있어요.”

여자가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입가가 조금 올라갔다가 멎었다.

옆자리 사람이 자리를 비키려 하자 엘리네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는 놓았던 손을 다시 잡았다.

“이름 적은 데를 보고 왔습니다. 글씨를 몰라서 찾아 달라고 했어요.”

“찾으셨어요?”

“예. 손으로 짚어 주더군요.”

엘리네는 펼쳐진 책을 보았다. 곁에 선 부관이 유족에게 책의 한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콧수염 아래로 입술을 다문 채, 상대가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다시 보고 싶으시면 함께 가요.”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봤으니 됐습니다.”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엘리네는 손바닥을 돌려 여자의 손을 받쳤다. 시종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황후 폐하, 다음 순서가…….”

엘리네는 시종을 보았다.

“잠깐 기다려 주세요.”

시종이 뒤로 물러났다. 칼릭스는 통로 건너편에서 장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네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다가오지는 않았다.

여자는 손수건을 접고 펴다가 말했다.

“식사를 준다는데 혼자 가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저쪽 문으로 가시면 돼요. 함께 오신 분은요?”

“먼저 자리를 알아보러 갔습니다.”

마리엔이 눈을 맞추자 엘리네가 식당 쪽을 보았다. 마리엔은 바로 문으로 가서 안을 살폈다. 잠시 뒤 돌아와 여자의 곁에 몸을 낮췄다.

“동행하신 분이 문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여자가 그제야 엘리네의 손을 놓았다.

“오래 붙잡았습니다.”

“천천히 일어나세요.”

엘리네는 여자가 지팡이를 짚을 때까지 곁에 앉아 있었다. 마리엔이 팔을 받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갑 손바닥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엘리네는 주름을 펴지 않고 두 손을 모았다.

◊

유족들이 식당으로 옮겨 간 뒤에도 예배당 문은 열려 있었다.

엘리네는 제단 옆 책 앞으로 갔다. 위에서부터 이름을 읽다가 다음 장으로 손을 옮겼다. 종이가 넘어가지 않았다. 문진을 먼저 치워야 했다.

곁에 다가온 칼릭스가 문진을 들어 주었다.

엘리네는 책장을 넘겼다.

“가족이 오지 못한 분들도 있나요?”

“있습니다. 길이 멀거나, 소식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분들 이름도 여기 있는 거죠?”

“확인된 이름은 모두 적었습니다.”

엘리네는 마지막 줄까지 보고 손을 거두었다. 칼릭스가 문진을 제자리에 놓았다.

예배당 밖에서 시종이 엘리네의 겉옷을 들고 기다렸다. 마리엔은 아직 식당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차를 준비했습니다.”

칼릭스가 말했다.

“유족들과 함께 마시는 건가요?”

“황후 폐하께는 응접실에 따로 준비했습니다. 수행 시녀가 돌아오면 안내하겠습니다.”

엘리네는 초대장이 든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미사 뒤의 접대까지 적힌 공식 일정이었다. 엘리네가 차를 마시고 돌아가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누구와 어느 방에 머물렀는지는 황궁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보게 될 터였다.

엘리네가 예배당 출입문 쪽으로 걸었다. 시종들이 두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다.

“문을 열어 두어도 될까요?”

칼릭스가 먼저 물었다.

“응접실 문 말입니까?”

“예. 복도에서 안이 보이도록요.”

엘리네는 시종의 팔에 걸린 겉옷을 보았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해 주세요.”

식당 문에서 마리엔이 나왔다. 엘리네가 기다리자 마리엔은 걸음을 재촉하다가 치마를 정리했다.

“편히 앉으셨어?”

“네. 수프도 받으셨어요.”

엘리네는 그제야 응접실로 향했다.

◊

응접실 문은 복도 쪽으로 열려 있었다.

마리엔이 엘리네의 겉옷을 받아 문 가까이에 걸었다. 복도에서는 시종들이 빈 쟁반을 들고 오갔다. 그중 한 사람이 찻주전자를 놓고 물러났다.

칼릭스는 엘리네가 앉은 뒤 맞은편으로 갔다.

탁자 하나가 두 사람 사이에 놓였다.

찻잔 옆에는 꿀과 우유가 있었다. 엘리네는 잔 손잡이를 잡지 않고 초대장을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칼릭스가 주전자를 들었다.

찻물이 잔에 찼다. 칼릭스는 잔을 엘리네 쪽으로 밀어 놓고 자신의 잔에도 차를 따랐다. 설탕 집게는 건드리지 않았다.

“오늘 온 분들은 모두 북부군 가족인가요?”

“예. 수도에 살거나 이곳까지 올 수 있는 분들입니다.”

“멀리 있는 분들에게도 같은 소식이 가나요?”

“주둔지에서 따로 자리를 마련합니다. 명단을 확인하는 일도 그곳에서 합니다.”

엘리네는 장갑 끝을 벗겼다. 여자가 잡았던 손바닥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장갑을 나란히 놓자 마리엔이 가져가려 했다.

“여기에 둘게.”

마리엔은 손을 거두고 문 쪽으로 물러났다.

엘리네는 차를 마셨다. 잔을 내려놓는 동안 칼릭스는 기다렸다. 도서관에서는 짧게 답하고 먼저 물러났던 사람이었다.

“황제 폐하께도 초대장을 보내셨나요?”

“본궁에 먼저 보냈습니다.”

“오지 않으실 걸 알고 계셨고요?”

칼릭스는 잔에 댔던 손을 뗐다.

“참석이 어렵다는 답을 받았습니다.”

엘리네는 더 묻지 않았다. 복도에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가 응접실 앞을 지나갔다. 마리엔이 문밖을 잠깐 확인했다.

찻잔을 받침에 내려놓자 작게 소리가 났다.

칼릭스는 엘리네 앞에 놓인 꿀그릇을 조금 옆으로 옮겼다. 두 사람 사이에서 가려졌던 탁자 면이 드러났다. 지도도 서류도 없었다.

엘리네는 빈 곳을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나요?”

칼릭스의 시선이 엘리네에게 멎었다. 문 가까이에 마리엔이 서 있었고, 복도 건너편에는 엘리네를 수행한 기사가 보였다.

칼릭스가 목소리를 낮췄다.

“폐하께서 서재에서 무엇을 보셨는지 압니다.”

(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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