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라제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방 안은 고요했다.그는 문턱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마치 자신이 찾아온 곳이 맞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처럼 보였다. 넓은 방 안에는 복잡한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높은 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희미한 조명이 대리석 바닥 위로 어둑하게 내려앉아 있었다.방 가장 안쪽에는 한 남자가 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움직이지도, 서두르지도 않았지만, 그 존재감만으로도 이곳의 중심이 누구인지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강렬했다.알리저.제국의 황태자.라제는 별다른 말없이 앞으로 다가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춰 선 그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를 내밀었다. 시종이 재빨리 그것을 받아 알리저에게 건넸고, 알리저는 별다른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것을 받아 들었다.알리저가 서류의 내용을 읽는 동안 몇 초의 침묵이 흘렀다. 그의 시선은 빠르게 움직였지만, 그가 보고 있는 내용이 자신에게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내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가며 의미를 알기 어려운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그러니까…”그가 손에 든 종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또 새로운 사람을 찾았군.”목소리는 가벼웠고, 마치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내는 것처럼 들렸다.라제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꼿꼿한 자세로 서서 침착함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짧게 대답했다.“예.”잠시 말을 멈춘 그는 조금 더 조심스러운 어조로 덧붙였다.“하지만 이번에는… 그 여인과 결혼을 하고 싶어 합니다.”그 말에 알리저의 움직임이 멈췄다.천천히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정확히 라제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전보다 훨씬 뚜렷한 관심이 담겨 있었다.“결혼?”마치 두 사람의 대화에서 그 단어 자체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처럼 알리저는 천천히 되물었다.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그거… 흥미롭군.”알리저는 의자에 몸을 더욱 편안하게 기대었다. 이제 서류는 그저 손에 들려 있을 뿐, 더 이상 제
셀렌은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멈췄다.그녀의 앞에는 웨딩드레스가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방의 거의 대부분을 가득 채운 드레스들은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흰색과 아이보리색, 은빛처럼 보이는 부드러운 색감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드레스의 천은 바닥에 닿을 만큼 길게 늘어져 있었으며, 섬세한 레이스와 지나치게 완벽한 바느질로 장식되어 있었다. 마치 각각의 드레스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게 될 한 여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그녀에게는 그 어느 것 하나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셀렌은 천천히 드레스 사이를 걸었다. 손끝이 그중 하나의 천에 잠시 닿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었지만, 그녀는 곧바로 손을 거두었다. 이 모든 것은 아름다웠지만 텅 비어 있었다. 그녀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이곳에 아무것도 없었다.“고르세요.”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했지만 무시할 여지를 주지 않는 목소리였다.셀렌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다. 마치 눈앞의 드레스들이 자신의 시야를 가로막는 벽에 불과하다는 듯했다.“마음에 드는 걸로.”몇 초가 흐른 뒤에야 그녀가 대답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무덤덤한 목소리였다.“마음에 안 들어요.”설명은 없었다. 말을 부드럽게 만들려는 노력도 없었다.그저 거절이었다.뒤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다가오는 발걸음이었다. 점점 그 존재감이 가까워지더니 마침내 그녀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멈췄다.“하나도요?”렉산이 물었다. 마치 그저 평범한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가벼운 말투였다.셀렌은 침묵했다.더 이상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고, 이윽고 렉산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여전히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렇다면 전부 태워 버리세요.”셀렌이 곧바로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왜요?”질문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렉산은 그 질문이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단순하
다른 곳에서는 더욱 차가운 침묵 속에서 상황이 움직이고 있었다.라제는 방 한가운데에 꼿꼿하고 차분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마치 이 복잡한 상황조차 처음부터 자신이 세워 둔 계획의 아주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한 기색이 없었고, 태도에서도 망설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앞을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황궁으로 가야 한다.”낮은 목소리였지만, 남아 있던 모든 대화를 멈추게 하기에는 충분했다.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고,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가 말을 꺼내는 방식만으로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논쟁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제이는 그에게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 있었다. 그는 잠시 라제를 바라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당신이 무엇을 하려는 것이든.”제이가 차분하게 말했다.“우리는 당신을 따를 겁니다.”라제는 시선을 옮겨 방 안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그러다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듯 잠시 시선을 멈춘 뒤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너희 중 몇 명은 이곳에 남아 있어야 한다.”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무덤덤했다.“누군가는 공작 부인을 지켜야 하니까.”짧은 침묵이 흘렀다. 얇은 침묵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분명하게 느껴졌다.“제가 남겠습니다.”뵤른이 망설임도 없이 앞으로 나섰다. 다른 사람이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도 않았다.순간 모든 시선이 뵤른에게 향했다.에릭은 미간을 찌푸리며 뵤른을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히 확신하지 못한 표정이었다.“정말 괜찮겠어?”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뵤른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네.”짧은 한마디였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부인의 안전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을 겁니다.”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훨씬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곧장 제이를 향했을 때, 더 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제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피로가 얼굴
하지만 디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마주 바라볼 뿐이었다.방금 자신의 아내가 납치됐다고 말한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한 시선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다.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말하지 않은 대답이 오히려 더욱 분명하게 느껴졌다.뒤를 이은 침묵은 이전보다 훨씬 무거웠다.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움직이는 사람도 없었다.마치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무언가를 억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알덴이 천천히 검을 내렸다.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드러난 현실을 자신의 생각이 따라잡으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게 사실이라면…”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다시 디리안에게 향했다. 이번에는 달랐다.더 이상 단순히 상대를 판단하는 시선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무언가를 고려하고 있는 눈빛이었다.“그렇다면 이건 더 이상 사소한 일이 아니군.”디리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말없이.그러나 그 침묵 뒤에는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조차 없는 결의가 있었다.그곳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누군가를 데려오기 위해서였다.앞으로 무엇을 마주하게 되더라도.디리안은 마침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하나하나 천천히 순서대로, 마치 모든 사건이 아직도 그의 기억 속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것처럼 설명했다.셀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순간부터, 외면할 수 없었던 불안감, 그리고 무모한 결심을 하고 바다를 건너 결국 이곳까지 떠밀려오게 된 일까지.그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다.빠뜨린 것도 없었다.아내를 잃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차분하게, 아니, 지나치게 차분한 태도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그리고리는 한마디도 끼어들지 않고 들었다.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은 점점 굳어졌고, 이마에는 단단한 주름이 하나둘 깊어지기 시작했다.한편 처음부터 차가운 태도
“말해 봐라.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디리안?”그 목소리였다.디리안은 위협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를 알아보았기에 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숙부…?” 그가 낮게 내뱉은 그 한마디만으로도 방 안의 분위기가 달라졌다.그리고리는 디리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조카가 이런 모습으로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온몸은 젖고 더러워진 데다, 자신들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른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그건 제가 물어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디리안이 대답했다. 아직 호흡이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다시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숙부께서는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그리고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화가 나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복잡한 무언가가 그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었다.“내가 이미 너에게 편지를 보냈다.”그가 말했다.“남쪽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거든.”그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설마 그 편지를 받지 못했다고 하지는 않겠지.”디리안은 입을 다물었다.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마치 드러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억누르는 듯했다.“많은 일이 있었습니다.”그가 마침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그 대답은 완전하지 않은 채 허공에 머물렀다.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그리고리는 조카가 평범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기에 충분했다.그들 뒤에 있던 검을 든 남자가 마침내 앞으로 걸어 나왔다.발걸음은 차분했고, 절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방 안으로 더욱 무거운 압박감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그는 그리고리의 곁에서 걸음을 멈췄다.시선이 그리고리에게서 디리안에게로 옮겨갔다.단순히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관찰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마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무언가까지 읽어내려는 듯했다.“스승님.”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
디리안의 의식이 천천히 돌아왔다.처음에는 그저 어둠뿐이었다.그러다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고 뒤섞인 목소리들이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그리고 마침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낯선 얼굴들이었다.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다.디리안은 아직 호흡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주변을 날카롭게 훑었다. 좀처럼 완전히 잠들지 않는 병사의 본능이 그대로 깨어난 듯, 온몸에 경계심이 가득했다.그의 곁에는 마테오와 다섯 명의 부하들이 이미 먼저 의식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은 채 경계하는 태도로 디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공작…”마테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디리안은 그들을 잠시 돌아보며 모두 무사한지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저들은 누구지?”목소리는 차갑고 경계심으로 가득했다.마테오가 짧게 대답했다.“저희를 도와준 어부들입니다.”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발의 남자가 조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단단했고, 오랜 세월과 바다에서의 삶이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우리는 항구 근처 해안가에서 살고 있소.”남자가 말했다.“당신들은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소. 배는 부서졌고, 이곳까지 떠밀려왔지.”디리안은 한동안 그를 바라보았다. 상대의 속을 읽으려 하고,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피로와 경계심뿐이었다.“고맙습니다.”디리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우리를 구해줘서.”노인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시선이 더욱 날카로워졌다.“우리가 당신들을 구했다는 걸 알고 있는가?”디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기억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는.”잠시 침묵이 흘렀다.어부들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노인이 마침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오늘 아침은 셀렌에게 유난히 다르게 느껴졌다.아침 식사 시간에 디리안이 성 안에 있는 것도 드문데, 같은 식탁에 앉아 있는 건 더더욱 흔치 않았다.평소라면, 그가 집에 있더라도 서재나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셀렌은 다가가는 일을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무엇을 하든 그는 불편해할 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가슴의 상처는 그녀의 발걸음을 묶었고, 노력하려던 마음을 멈추게 했다.“…오늘 할머니와 어머니가 오실 거다.”디리안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셀렌은 그를 바라보며 차분히 물었다.“내가 아직 회복 중이라
그날 아침, 공기는 유난히 차가웠다. 평소처럼, 셀렌은 디리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제는 익숙했다. 그는 집에 머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때의 셀렌은 그가 성의 업무로 바쁘다고 믿으려고도 했었지만, 진실을 알고 난 지금 남은 것은 혐오뿐이었다. 마음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지만, 셀렌은 시간이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 거라 스스로를 다독였다.그러나 그날 아침은 더 무거웠다.공작 저택에 그녀의 아버지, 모로 백작이 예고 없이 찾아왔기 때문이었다.“도대체 비베니에에게 무슨 말을 한 거냐?”백작의 목소리는 압박적이었고 비
식당의 공기가 얼어붙었다.셀렌의 말은 한겨울의 칼바람처럼 떨어져 비베니에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고, 디리안은 마치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놀란 듯 굳어 있었다.“이건… 너답지 않아.”디리안이 낮게 중얼거렸다.셀렌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나는 오히려 놀라운데? 이제야 당신이 날 보기 시작했다는 게.”비베니에가 급히 끼어들었다.“그런 말을 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아?”셀렌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녀를 봤다.“나는 그냥 너희들의 방식에 맞추는 중인데? 왜 불편해하는 건데?”비베니에는 당황해 벌떡 일어나 도망치듯 방을 나
‘방금 유산했다고?’‘헛소리라고?’비베니에는 굳어버린 표정으로 불쾌함을 억눌렀다. 디리안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떼어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비베니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입술이 억눌린 분노로 휘어졌지만, 곧 미묘한 미소가 올라왔다. 만약 셀렌이 아까 말한 게 진심이라면… 그녀에게는 공작 부인이 될 기회가 확실히 더 가까워진다는 의미였다.“비베니에 공작 부인…”그녀는 그 칭호를 음미하듯 속삭였다. 교활한 미소가 꽃피듯 번졌고, 가볍게 웃으며 디리안을 뒤따랐다.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