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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화 빗장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17 00:13:42

· 작품 안내

 《다시 고른 낭군》은 고려풍 가상 왕조를 배경으로 한 여성향 회귀 로맨스 판타지입니다.

  실제 역사·인물·제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도성 외곽, 하가의 창고에서 쓰는 사패입니다."

백종길이 종이에서 눈을 떼며 말했다. 별당에는 서리와 이겸, 백우가 함께 자리해 있었다.

"정식 가문 문장은 아닙니다. 물건과 사람의 출입을 가르는 표식이지요. 예전에 군량과 마필을 대던 시절, 도성 창고들과 거래하며 익힌 겁니다."

"하가에 대해 아시는 건 얼마나 됩니까."

서리가 물었다.

"직접 오간 적은 없습니다."

백종길이 신중하게 답했다.

"다만 그 창고와 거래하던 상단 몇은 압니다. 서가에 마초를 대던 박가 객주가, 하가 쪽 창고에도 물건을 넣었을 겁니다. 그 밑에 수레꾼 패도 여럿이고요."

"벼슬이 낮은 집안이라 들었는데."

"그리 들었을 뿐입니다."

백종길이 선을 그었다.

"직접 확인한 바는 아니니, 아는 것과 짐작은 나눠 아뢰어야지요."

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확히 가르는 태도가, 오히려 믿음이 갔다.

"그 거래처들은 지금 어떻습니까."

백종길이 잠시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예전에 서가와 닿아 있던 데가 스물쯤 됩니다. 그중에 문을 닫은 곳이 넷이고, 주인이 바뀐 곳이 대여섯입니다."

"바뀐 곳은."

"새 주인이 누구 밑으로 들어갔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서가가 기운 뒤에 다른 집안으로 옮겨 앉은 데도 있을 테니까요."

백종길이 종이 한 장을 끌어다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그런 데는 이번에 건드리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저쪽에 소식이 먼저 갑니다."

"남는 곳은 몇입니까."

"예전 사람이 그대로 있는 데가 예닐곱쯤입니다."

백종길이 적은 것 중 셋에 표를 했다.

"그중에서도 하가 창고까지 닿는 곳은 박가 객주 하나입니다. 마초를 대던 집인데, 주인이 그대롭니다. 나이가 저보다 조금 아래고요."

"그 연이 지금도 닿습니까."

"닿긴 합니다만……"

백종길이 잠시 말끝을 흐렸다.

"서가에서 먼저 사람을 보낸 지는 오래됐습니다. 대감마님과 마님, 도련님들이 가시고 나서는, 저도 앞에 나설 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 연을, 다시 이어주십시오."

서리가 말했다.

"박가 객주뿐 아니라, 군량과 마필을 대던 다른 거래처들도 함께요. 서가의 이름으로."

이겸의 시선이 그 말을 하는 서리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서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서함으로 향했다. 그 안에는 오래도록 쓰이지 않은 목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가의 인장이 새겨진 물건이었다.

"……아기씨."

백종길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부름이었다.

목패를 향해 뻗던 서리의 손이 잠깐 멈췄다.

서리는 곧 손을 마저 뻗어 목패를 집어 들었다.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부친이 살아 있을 때부터 손을 타던 물건이었다.

서리가 그것을 들고 돌아와 앉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습니다."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압니다."

백종길이 답했다.

"쉬운 일이었으면 저를 부르지 않으셨겠지요."

서리가 목패를 앞으로 밀어놓았다.

"서찰마다 이 인을 찍어 보내십시오."

백종길이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다.

손끝이 한동안 그 위에 머물렀다. 닳은 모서리를 따라 한 번 훑고, 문양이 새겨진 자리에서 멈췄다.

마지막으로 이 문양을 손에 쥔 것이 오 년 전이었다.

그해 봄에 이것을 반납하고 물러났다. 다시 쥘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이 목패를 받아 간 사람이 대감마님이었다.

지금 내주는 사람은 그 딸이었다.

백종길이 허리를 숙였다. 별당에 처음 들어섰을 때보다 훨씬 깊은 예였다.

"명 받들겠습니다, 가주님."

이겸은 그 예가 깊어지는 순간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서찰은 그날 안으로 썼다.

백종길이 종이를 펴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름을 뭐라 쓰실 겁니까."

백우가 물었다.

"제 이름으로 씁니다."

백종길이 답했다.

"서가에서 왔다고만 하면 저쪽에서 누가 보냈는지부터 궁금해할 겁니다. 제 이름을 보면 그 사람은 압니다. 스무 해를 주고받은 사이니까요."

붓을 들었다가, 한 번 내려놓았다.

"안부부터 물으시게요."

백우가 말했다.

"안부부터 물어야지요. 오 년을 끊었다가 대뜸 일부터 꺼내면, 그건 사람 부리는 것이지 거래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백종길이 다시 붓을 들었다.

길지 않았다. 그동안 별고 없었는지, 아들은 장가를 들었는지, 그리고 청할 것이 하나 있어 사람을 보낸다는 것.

다 쓰고 나서 인을 찍었다.

찍기 전에 손이 잠깐 멈췄다.

오 년 만이었다.

답이 온 것은 이틀 뒤였다.

박가 객주는 서찰을 들려 보낸 자를 통해 날짜와 자리를 정해 왔다. 백종길이 그 자리에 나갔고, 돌아온 것은 저물녘이었다.

"뵙고 왔습니다."

백종길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어떠셨습니까."

"반가워는 하더군요."

말끝이 조금 눌려 있었다.

"다만 곧바로 그러마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서리가 그 말을 받았다.

"무엇을 물었습니까."

"영안공부인의 뜻이 맞느냐고 먼저 물었습니다."

백종길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다음에는, 영안궁에서도 아는 일이냐고 물었고요."

예전에는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서가에서 왔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무엇이 필요한지만 말하면 되었고, 뒤에 누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자리는 없었다.

묻는 쪽은 늘 서가였다.

백종길은 그 자리에서 잠깐 대답을 골랐다.

목패를 품에서 꺼내 보이지는 않았다. 꺼내 보였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래서 뭐라 답하셨습니까."

"부인의 뜻이 맞고, 영안궁에서도 아는 일이라 했습니다."

백종길이 답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영안공께서는 아직 그러시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서리가 고개를 들었다.

"깨어나신 것을 모르더군요."

백종길이 말했다.

"제가 그 자리에서 말했습니다. 이미 일어나셔서 영안궁 일을 직접 보고 계시다고요."

"믿던가요."

"처음에는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백종길이 짧게 웃었다.

"차를 두 번 더 채우고 나서야 말이 달라졌습니다."

"그자가 몸을 사린 것을 나쁘게 보지는 마십시오."

백종길이 덧붙였다.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지금 서가가 어떤 자리인지는 도성 사람이면 다 압니다. 영안공과 혼례하셨다는 것도 알고, 그 집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도 어림잡고 있고요."

"그렇겠지요."

서리가 답했다.

목소리에 상한 기색은 없었다.

"서가의 이름만으로 문이 열리던 때는 지났습니다. 그건 저도 압니다."

"……"

"지금 제게 있는 것으로 열면 됩니다."

영안공부인이라는 자리도, 깨어난 이겸도, 지금은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서가의 이름만으로 되게 만들면 되었다.

백종길이 잠시 서리를 보았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해보겠다 했습니다."

백종길이 답했다.

"당장 크게 손을 잡자는 것은 아니고, 우선 하가 창고 쪽 드나드는 것을 알아봐주기로 했습니다. 제 수레가 거기 들어가니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요."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수레패 쪽도 물어보겠다 했습니다. 거기까지는 하겠답니다."

"값은 어찌하기로 했습니까."

"아직 말이 없었습니다."

백종길이 답했다.

"그쪽에서 먼저 꺼내지 않았으니, 저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셈은 무엇이 나온 뒤에 하는 것이 낫습니다."

백종길이 종이를 접었다.

"그 이상은 제가 청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더 청하면 다음에 청할 것이 없어집니다."

"잘하셨습니다."

서리가 답했다.

"한 번에 다 열 생각은 없습니다."

백종길이 물러가고, 서리와 이겸, 백우 셋이 남았다.

"박가 객주 쪽 수레꾼들이 하가의 창고를 드나든다면, 그 흐름만 살펴도 창고 안 사정을 알 수 있겠군요."

백우가 말했다.

"거래를 명분으로 삼는 것이니, 저쪽에서 의심할 이유도 적다."

이겸이 덧붙였다.

"우리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해."

"다만 시간이 걸립니다."

백우가 말했다.

"객주가 발을 넓히는 데도, 물자를 대는 척 오가는 데도."

"기다리면, 저쪽이 먼저 움직입니다."

서리가 답했다.

그 말끝에 더 붙이는 설명은 없었다. 이겸은 잠시 서리를 바라보다가, 더 캐묻지 않았다.

박가 객주가 하가 쪽을 알아보기로 한 뒤 사흘째였다.

백종길이 다시 별당으로 들었다.

"박가 객주 쪽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백종길이 말했다.

"하가의 창고에서 물건과 사람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저희 서찰이 닿기 전부터였답니다. 어젯밤에는 아예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백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희가 움직이는 걸 보고 닫은 것이 아니군요."

"아닙니다. 그 전부터 치우고 있었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백종길이 덧붙였다.

"하가와 거래하던 다른 창고 두 곳도, 비슷한 시기에 조용히 정리됐다고 합니다. 같은 수레패가 드나들던 곳들이라, 박가 객주도 소문을 들었다 하더군요."

이겸의 표정이 굳었다.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곳을 동시에."

"예."

서리는 그 말을 곱씹었다. 하가 혼자 몸을 사린 것이라기엔, 너무 여러 곳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하가가 문을 열어주었다 해도,"

서리가 낮게 말했다.

"그 문의 열쇠를 쥔 자는, 따로 있겠군요."

진유의서랍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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