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멍하니 있다가 대답했다.“무슨 뜻이야?”‘갑자기 심미연의 일을 묻다니, 설마 어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단 말인가?’“예전에 심미연이 할아버지를 구했다고 하지 않았어요?”강지한이 물었다.“구체적으로 어떻게 된 일이예요?”“한번은 내가 길에서 쓰러졌는데 아무도 감히 앞으로 나서지 못했어. 그때 미연이 계집애가 나를 구한 거지.”아버지는 당시의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심미연에 다시 한번 고마워했다.“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죽었을 것이고, 지금까지 살지 못했겠지.”“어떻게 구했는데요?”강지한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심미연은 의술을 할 줄 알아.”할아버지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모르는 거야?”“말하지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알아요!”강지한은 눈을 반쯤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정말 미연이가 의술을 할 줄 안다고요?”두 사람이 3년 동안 함께 있었는데, 그는 그녀가 의술을 할 줄 안다는 것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강지한의 이런 물음에 할아버지는 갑자기 또 확실하지 않았다.“나도 확실하지 않아. 어쨌거나 내가 깨어났을 때 심미연만이 내 곁에 있었어. 옆에서 누군가 작은 소리로 미연이가 대단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고.”할아버지는 그때의 장면을 회상했다.그도 줄곧 심미연이 자신을 구했다고 단정했다.강지한은 입술을 감빨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심미연은 또 무슨 능력이 더 있어요?”할아버지는 또 그를 노려보았다.“네가 심미연의 남편이야. 3년 동안 동침했는데 넌 심미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나에게 무슨 낯짝으로 묻는 거야? 됐어, 묻지 말고 빨리 가!”심미연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안 후로 할아버지도 마음을 추스르는 중이었는데 강지한이 찾아와 이것저것 물어보니 또 마음이 괴로워졌다.“나는 단지 심미연이 죽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래요!”그래서 강지한은 심미연이 실종되기 전의 행적이 깨끗이 지워진 일을 할아버지에게 알렸다.할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져서 끊임없이 그를 재촉했다.“너 빨
“엄마, 정말 필요 없어요.”박유진은 말을 마치자마자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그는 아직 매우 허약하고 감정이 너무 격동되면 더 괴로웠다.“저 박 대표님이랑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자리를 비켜달라고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강지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미자는 서둘러 대답했다.“그래요, 지금 가긴 하겠지만 유진이가 방금 깨어나 몸이 허약하니 강 대표님이 자극하지 말아 주세요.”“명심하겠습니다.”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조심히 가세요.”박유진이 어머니에게 말했다.“두 사람 얘기 좀 나누고 있어요. 난 먼저 갈게요.”이미자는 인사를 하고 나갔다.병실 방문이 닫히자 박유진이 직설적으로 물었다.“미연이가 어떻게 죽었어요?”그는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면서 그녀를 구해냈는데 결국 죽었다니!그는 자신이 살아나지 말고 죽어서 그녀를 만날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했다.“바닷가에서 사라졌는데 구체적인 상황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강지한은 박유진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혹시 미연이와 짜고 거짓 죽음을 만든 후 박유진 씨가 대신 뒷수습을 하는 건 아니에요?”그는 이 말을 할 때 눈길을 잠시도 박유진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그는 박유진이 거짓말을 해서 그를 속이는지 확인하려고 했다.박유진은 심미연의 죽음을 생각하면 심장이 심하게 떨리고 아팠다. 강지한의 눈빛을 보면서 안간힘을 다해 느릿느릿 말했다.“그날 밤 잘나신 강지한 씨가 하마터면 미연이를 죽일 뻔했어요. 내가 아니었다면 미연이는 지금 이미 재가 되었을 거예요.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적어도 강지한 씨가 미연이를 지켜줄 거로 생각했는데 이렇게 죽일 줄은 몰랐어요. 이렇게 나를 찾아온 건 미연이가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거죠? 이렇게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니까?”만약 그가 혼수상태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전력을 다해 심미연을 구했을 것이다.그랬으면 심미연은 죽지 않았을지 모른다.하지만 이 세상에 만약이란 건 없다. 모든 것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강지한은 오랫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정말 그 당시 그 일의 배후에 이런 진상이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미연이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 부모의 시달림 속에서 살아왔어요. 미연이의 성격은 매우 강인했죠. 조그마한 어려움에 부딪히면 죽어야 하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란 말이에요. 나는 미연이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 타살이라고 의심하고 있어요.”박유진의 몸은 원래 허약했는데 단숨에 이렇게 많이 말하니 얼굴색은 창백해지며 숨도 거칠게 몰아쉬었다.강지한은 몸 옆에 늘어뜨린 두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누군가 솜뭉치를 막은 듯 숨쉬기조차 어려웠다.그가 박유진을 찾아온 것은 심미연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인데 박유진이 오히려 심미연이 타살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할 줄 어찌 알았겠는가.그는 갑자기 자신의 세력이 지금 이 순간 유난히 우스워 보인다고 느꼈다.천군만마를 쥐고 있다 자부하는 그가 심미연을 구할 수는 없다니.“또 무엇이 알고 싶어요? 내가 아는 걸 모두 알려줄게요.”박유진은 강지한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좀 편해졌다.심미연의 죽음을 혼자 괴로워할 수는 없으니 강지한도 함께 괴로워하자는 마음이었다.“상처를 잘 치료해요. 박유진 씨의 병원비는 전액 무료예요.”이 말을 한 후 강지한은 그냥 가버렸다.박유진은 어수선한 그의 걸음걸이를 보았다.“심미연의 장례식은 언제예요?”그가 물었다.강지한은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정신을 가다듬고 나서야 조용히 말했다.“시체를 찾지 못했으니 아직 살아 있을 거예요.”장례식이 치러지면 심미연은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고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예전에 심미연이 곁에서 잠들었을 때 그는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느끼지 못했다.지금 곁에 심미연이 사라지고 나서야 그는 하루가 일 년 같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웠다.“미연이가 살아있을 때도 잘해 주지 않더니 이미 죽었는데 갑자기 사랑하는 척하는 거예요?”
이노 하이브, 대표사무실.강지한이 서류를 보고 있을 때 성무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육현성 씨가 구치소에 갔어요. 변호사도 동행했는데 온지유 씨를 꺼낼 생각인 것 같아요.”강지한은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는데 눈빛은 예전과 다름없이 차가웠다.“어떻게 해야 할지 내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되겠지?”성무진은 잠깐 생각을 하고 또 말했다.“육현성 씨와 이씨 가문 아가씨가 약혼 준비 중입니다.”강지한이 눈썹을 실룩이며 물었다.“이씨 가문이 허락했어?”“이세훈이 차기 선거에 출마하면 한 단계 승진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현재 이씨 가문은 자신의 이미지를 돌보기 위해 혼인이 절실해요. 한씨 가문은 경성의 세가인데 한유나 씨의 아버지는 정계에서 이세훈보다 지위가 높죠. 이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혼인은 강자들이 손을 잡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육씨 가문은 4대 가문 중 하나로서 돈이 많은 것은 확실해요. 이씨 가문과 육씨 가문이 혼인하는 것은 자신의 뒤에 이동 돈 창고를 놓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만약 이세훈이 지지가 필요하다면 육씨 가문은 반드시 돈을 댈 거예요. 육씨 가문이 이씨 가문과 혼인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육씨 가문의 사생아와 관련이 있을 거예요. 육현성은 든든한 후원자가 필요해요. 필요할 때 도울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배경이죠.”성무진은 한숨을 내쉬며 강지한의 표정을 살폈다.강 대표님이 어떻게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비록 강 대표님은 항상 돈이 많지만 만약 다른 세 가문이 손을 잡는다면, 1대 3의 국면에서 반드시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강지한은 눈빛이 더욱 차가워지며 목소리도 쌀쌀하게 변했다.“그럼 보성 사찰의 주지 스님을 찾아 양가의 결혼 길일을 보여주도록 해.”성무진은 곧 알아차리고 전화를 걸어 다른 사람에게 가서 처리하라고 분부했다.“심미연의 자료는 찾았어?”강지한이 또 한마디 물었다.“일부 알아냈는데 메일로 보내줄게요.”성무진이 말했다.“할아버지 쪽에서 신하린과 연락했대?”강지한이 다시 물었다.성무진은 그
“엄마, 나 화장실 가고 싶어요. 잠깐만 기다려요.”어린 소년은 고개를 들어 옆에 있는 예쁜 여자를 바라보며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가, 출구에서 기다릴게.”여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는데 얼굴에는 미소를 짓고 있어 유난히 아름다웠다.“알았어요.”소년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캐리어를 밀고 화장실로 갔다.“심태하, 캐리어 이리 줘.”여자가 그를 불렀지만 아이는 이미 멀리 가고 있었다.여자는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세 살짜리 아이가 담도 크고 아이디어도 많다.그녀가 출산 후 우울증이 가장 심했을 때 아이가 그녀에게 희망과 힘을 주어 그녀를 살아남게 지탱했다.이 3년여 동안, 그녀는 줄곧 하늘이 그녀에게 이런 아이를 준 것에 감격해 왔다.심태하는 캐리어를 밀며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며 입으로는 계속 소리쳤다.“앞에 있는 여동생, 잠깐만!”결국 화장실 앞까지 쫓아가서 앞의 소녀를 따라잡았다.“꼬마야, 너 이름이 뭐야?”심태하는 숨을 헐떡이며 예쁜 큰 눈으로 눈앞에 공주처럼 차려입은 소녀를 바라보며 마치 이 아이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강렬한 익숙함을 느꼈다.소녀는 그를 보고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누구야? 나는 너를 몰라.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말을 거는 낯선 사람은 모두 나쁜 사람들이랬어.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했어!”소녀는 말을 마치고 몸을 돌려 갔다.심태하는 얼른 손을 뻗어 여자아이를 붙잡았다.“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 심태하라고 해. 우리 어머니는 심미연이라고 하는데 너의 이름은 뭐야?”소녀는 망설임 없이 그의 말을 받았다.“나는 강상미라고 해.”목소리가 부드럽고 귀여워 유난히 듣기 좋았다.“너의 이름을 알았으니 이제부터 우리는 친구야. 그럼 내가 너에게 작은 선물을 줄게. 상미야, 나 좀 기다려 줘.”심태하는 쪼그리고 앉아 트렁크를 열고 작은 토끼 인형을 꺼내 강상미의 손에 건넸다.“이건 우리 엄마가 여동생을 위해 준비한 건데 너에게 줄게.”아버지는 그에게 여
심태하는 아파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벌리고 여자의 팔을 깨물고 욕했다.“미쳤어요?”이렇게 세게 잡으면 손목이 부러질 것이다.다시 생각해 보니 다행히 자신이었다. 조금 전 그 어린 여동생이었다면 얼마나 아팠을까.“강상미, 누가 물어뜯고 욕하라고 했어!”여자는 심태하의 얼굴을 받쳐 들고 험상궂은 눈빛으로 심태하를 바라보았다.“빨리 나에게 사과해! 그렇지 않으면 이따가 너를 작은 방에 가둘 거야!”심태하는 크게 울기 시작했다.“살려줘요. 이상한 아줌마가 사람을 죽여요!”그가 목청을 높여 소리치자 곧 사람들이 에워쌌다.“이렇게 예쁜 아이에게 어떻게 손을 댈 수 있어!”“아이에게 이렇게 모질게 굴다니, 틀림없이 친자식이 아닐 거야!”“어떤 계모들은 정말 독해. 며칠 전에 뉴스에서 한 계모가 아이를 세탁기에 넣고 씻는 것을 보았어!”몰려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들은 여자는 화가 나서 심태하를 찢어 버리고 싶었다.“강상미, 너 오늘 해 보자는 거야?”돌아간 후 혼내주기로 했다.“계속 손을 놓지 않는다면 아동 학대로 고소할 거예요!”심태하는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에워싸고 구경하는 것을 보고 용기를 냈다.여자는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계집애가 오늘 무슨 약을 잘못 먹었기에 감히 나와 맞서는 거야!”화가 난긴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손을 놓았다.누군가가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면 그녀가 3년 넘게 유지해 온 부드럽고 착한 이미지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었다.‘그건 안 돼!’심태하는 자유를 얻자 그녀를 힘껏 걷어차더니 캐리어를 끌고 재빨리 사람들 속을 비집고 도망쳤다.그는 먼저 엄마를 찾아 여동생을 구하러 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심태하는 단숨에 출구로 달려가 엄마가 어디 있는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덥석 안았다.“와, 우리 아들 키 컸네. 잘생겼어!”심태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응하고 통통한 팔뚝으로 황급히 여자의 목을 안았다.“양엄마, 왜 왔어요?”“나도 왔어.”그때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리자 심태하는 기
심태하는 그제야 방금 그 여자를 만났던 상황이 생각나서 얼굴을 가리켰다.“화장실 입구에서 이상한 아줌마를 만났는데 저를 끌고 가면서 욕하더니 제 얼굴을 꼬집으며 내가 남자아이의 옷을 입었다고 핀잔했어요.”그는 강상미를 만난 일은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또 여동생을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심미연은 깜짝 놀라며 급히 물었다.“그 아줌마 어떻게 생겼어?”“그 아줌마는 못생겼어요! 늙다리 도깨비 같았어요!”심태하는 그녀에게서 당한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올라 그녀가 예쁘다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심미연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심태하는 나이는 어리지만 작은 원한이라도 반드시 갚는 성격이니 누가 그를 괴롭히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하지만 그 여자가 심태하를 왜 욕하고 꼬집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박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돌렸다. 방금 그도 주의하지 않았는데 그때야 뽀얀 얼굴에 붉은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너희들 먼저 차에 타. 나 전화하고 올게.”박유진의 표정이 엄숙해졌다.심미연은 그가 틀림없이 그 여자를 조사하러 갔으리라는 것을 알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후 캐리어를 밀고 신하린과 함께 황급히 떠났다.심태하는 순순히 신하린의 목을 껴안고 나른하게 물었다.“엄마, 우리 어디 살아요?”“아니면 나랑 살래?”신하린은 얼른 말을 받았다.심미연이 웃으며 말했다.“너 내가 지금 아주 부자라는 걸 잊었지? 집이 마음대로 살아도 될 정도로 많아.”신하린도 따라 웃었다.“맞아, 우리 명의의 디자인 회사, 로펌이 참 많지. 나도 부자였어.”3년 전, 심미연은 그런 방식으로 경성을 떠났다. 신하린은 그녀가 정말 죽은 줄 알고 혼자 오랫동안 슬퍼했다.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아이의 사진을 담은 메일을 받았다.그때에서여 그녀는 비로소 심미연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이어서 두 사람은 연락이 닿았고그녀는 심미연에 관한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심미연은 그녀에게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
그녀는 2년 동안 여러 가지 신분을 만들어냈다.그러나 이것들을 그녀는 아직 신하린에 알리지 않았다.“그럼 좋지.”신하린은 한숨을 돌렸다.“너와 이진영 사이는 지금 어때?”지난 3년 동안 신하린은 그녀에게 이진영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그러나 그녀는 뉴스에서 이진영에 관한 기사를 많이 보았다.이씨 가문과 한씨 가문의 혼인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유나의 아버지가 갑자기 일인자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후 한유나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나중에 한유나도 무슨 이유인지 연구소를 떠났다.1년도 안 되어 한유나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금수저에서 불쌍하고 초라한 여자로 변했다.그런데도 이씨 가문은 줄곧 파혼을 제기하지 않았다.전에 그녀는 몰래 한유나의 아버지에 대한 일을 조사한 적이 있다.그러나 이 일에 관한 내막은 비밀에 부쳐져 그녀도 알아낼 수 없었다.바로 이러하므로 그녀는 이 일이 더욱 의심스럽다고 느꼈다.그는 심지어 이런 변고가 이진영과 관련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했다.“이미 오랫동안 안 만났어.”신하린은 이 말을 할 때 마음이 평온했다.그녀와 이진영 사이는 이미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고 결말은 없을 것이다.그래서 3년 동안 이렇게 질질 끌었어요.“그럼 무슨 생각이야? 다른 타산은 있어?”어쨌든 그녀는 신하린이 행복을 찾기를 바랐다.“나는 지금 남자를 만나는 것보다 돈 버는 게 더 재미있어.”신하린은 말을 마치고 조용히 웃었다.“남자를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그녀의 품에 안긴 심태하가 갑자기 입을 열고 묻자 신하린은 말문이 막혔다.세 살짜리 아이가 중점을 잘 알고 있으니 참 대단하다고 탄복했다.심미연은 이미 심태하의 이런 화법에 익숙해져 담담하게 설명했다.“그냥 연애한단 말이야.”신하린은 세 살짜리 아이가 연애가 뭔지 어떻게 알겠다고 생각했다.“알겠어요.”심태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아빠가 바로 엄마가 만나는 남자예요.”심미연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아니, 아니야. 그런 적 없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