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지하 서재에 가스 냄새가 번졌다. 달큰하고 낯선 냄새가 코끝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천천히 무겁게 눌렀다.
"창은 없고 환기구는 위로만 열려 있어. 30분이야."
도헌이 철문을 어깨로 밀었다. 한 번, 두 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열쇠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이어 구두 소리가 계단 위로 멀어졌다.
"강태성은 이미 올라갔어."
"그럼 여기 있는 건 우리 셋뿐이네요."
세아는 책상 위 서류 더미를 뒤지다가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은서의 손은 차가웠지만 떨리지 않았다.
"엄마. 이 방에 20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
"한 번. 그때는 문을 잠근 쪽이 나였다."
“……엄마가요?”
"강태성을 가두려고 했어. 실패했지만."
은서가 서류함 맨 아래 칸의 바닥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 녹슨 철제 손잡이가 숨어 있었다. 은서의 입가에 오래 묵은 웃음이 번졌다.
"그 사람이 못 믿은 게 딱 하나야. 이 계약서에는 제100조가 없다. 끝이 없는 계약이었으니까. 나는 20년 전에 제100조를 따로 써서 여기 숨겨 두었다."
세아가 손잡이를 당겼다. 얇은 비상 환기 덕트가 열렸다. 한 사람이 겨우 기어 나갈 폭이었다. 위쪽에서 희미한 바람이 내려왔다.
“20분 안에 셋이 나가야 해요.”
"남은 건 25분이야."
도헌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가 덕트 입구에 손을 짚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깨가 걸려. 나는 마지막이야."
"안 돼요."
"세아."
"같이 나가는 거예요. 순서는 엄마, 저, 당신."
"당신 먼저 올라가라고 하면 안 듣겠지."
"알면서 왜 물어요."
도헌이 낮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이었다. 은서가 먼저 덕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철제 벽을 타고 무릎과 팔꿈치가 긁히는 소리가 위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은서의 목소리가 울려 내려왔다.
"세아야. 계약서 원본을 챙겨라. 그게 있어야 강태성이 빠져나가지 못해."
"알아요."
세아가 책상 위의 서류철을 집었다. 마지막 장에는 오래전 은서가 남긴 빈칸이 있었다. 도헌이 그 빈칸을 보고 숨을 멈췄다.
“……여기가 제100조 자리야.”
"네."
"그럼 어머님이 20년 전에 쓴 문장이 여기."
"아니요. 엄마가 쓴 건 틀만 있어요. 제목이랑 번호만요."
은서의 목소리가 덕트 위에서 가늘게 울렸다.
"그 칸은 일부러 비워 뒀다! 내 문장은 나를 가두는 거였으니까. 다음 사람이 직접 써야 해!"
세아가 천천히 도헌을 돌아보았다. 가스 냄새가 점점 짙어졌다. 환기구 위에서는 바람 소리가 가늘게 갈라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부딪쳤다.
“5분만 주세요.”
"뭘 하려고."
"제100조요. 지금 써야 할 것 같아서요."
"세아, 지금은."
"지금 아니면 못 쓸 것 같아요."
그녀의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도헌은 한참 그 눈을 보다가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아버지의 이름이 새겨진 한진정밀의 펜이었다.
"쓰는 건 당신이 해. 서명은 같이."
세아가 펜을 받았다. 책상 위에 서류를 펼치고 빈칸 위에 펜촉을 올렸다.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가스 때문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도헌이 그녀 뒤에 서서 손을 겹쳤다. 두 사람의 손이 같은 펜 위에 얹혔다.
"읽으면서 써요. 소리 내서."
“……제100조.”
"응."
“100일째 밤, 갑과 을은 서로를 파기하지 않는다.”
펜촉이 종이를 긁었다.
"갱신하지도 않는다."
도헌의 숨이 목 뒤에 닿았다. 가스 냄새 사이로 그의 체취가 섞여 들어왔다. 세아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다만, 서로를 선택한 채로."
“…….”
"이 계약서를 찢는다."
글씨가 끝나자 도헌의 손이 그녀의 손을 아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찢는다고."
"계약서가 없어도 있는 관계면, 그게 진짜잖아요."
“…….”
"당신이 처음에 그랬죠. 종이 한 장이 사람을 묶을 수는 없다고. 그건 틀린 말이었는데, 오늘은 맞는 말이 됐어요."
도헌의 눈가가 붉어졌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서명했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세아가 종이 한쪽 모서리를 잡았다. 도헌이 반대쪽을 잡았다. 눈이 마주쳤다.
"셋 세고."
"하나."
"둘."
"셋."
찢어지는 소리가 지하실 안에 길게 울렸다. 오래 묵은 종이가 갈라지며 먼지가 일었다. 두 사람이 손에 쥔 조각은 각각 반쪽이었다. 도헌이 자기 쪽 조각을 접어 세아의 손바닥에 놓고,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 쥐었다.
"반쪽은 당신이 가져."
"당신 건요?"
"여기."
그가 반대쪽 조각을 가슴 주머니에 넣었다. 심장 위였다.
바로 그때 위쪽에서 둔탁한 진동이 번졌다. 철문 바깥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두 대, 세 대. 그리고 누군가 문을 부수는 쾅 소리와 민재의 목소리.
"형! 안에 있어? 최 이사님이랑 경찰 왔어!"
"여기야!"
도헌이 소리쳤다. 철문이 뜯겨 나가며 먼지와 빛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가스가 환기구 쪽으로 빨려 나갔다. 세아는 다리가 풀려 도헌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가 그녀를 안아 올렸다.
"숨 쉬어. 천천히."
“……엄마는.”
"위에 계셔. 최 이사님이 받으셨어."
그가 계단을 두 칸씩 올랐다. 세아는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 어깨 너머로 올라가는 불빛을 보았다. 새벽이 밝아 오고 있었다.
오전 9시, 병원 VIP 병동.
강태성은 현행범으로 연행됐다. 홍기범도 새벽에 공항에서 붙잡혔다. 소식은 오전 뉴스 속보가 되어 퍼졌고, 병원 복도 TV에서는 '태성그룹 회장 체포'라는 자막이 반복됐다.
한도식 회장과 이은서는 같은 병실에서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은서가 죽 한 숟갈을 떠서 한 회장의 입 앞에 가져갔다. 노인이 투정하듯 고개를 돌렸고, 은서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20년 동안 나누지 못한 아침이었다.
세아는 문틈으로 그 모습을 오래 보다가 소리 없이 문을 닫았다.
복도 끝에서 도헌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마에 새 거즈를 붙이고 셔츠 소매를 걷은 채였다. 그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세아가 그 손을 잡았다.
"어머님 아버님은."
"웃고 계세요."
"다행이다."
"서준."
세아가 그 이름을 부르는 건 둘만 있을 때뿐이었다. 며칠 전 새벽, 그가 처음 건넨 본명이었다. 강도헌이 아닌, 강서준.
"응."
"고마워요. 끝까지 같이 나가 줘서."
"그건 내가 할 말이야."
그가 그녀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끌었다. 7층 버튼을 누르고 문이 닫히자, 도헌이 그녀를 거울 쪽으로 가만히 밀었다.
"여기서요?"
“1분이야. 7층에서 1층까지.”
“……CCTV 있는데요.”
"이 엘리베이터는 내 병원 거야."
"권력 남용이에요, 대표님."
"계약서 찢었으니까 위반할 조항도 없어."
"그건 궤변인데요."
"궤변이 맞는 게 재벌의 특권이야."
세아가 웃음을 터뜨리다가 그의 입술에 막혔다. 도헌의 손이 허리를 감았다. 6층, 5층. 숫자가 내려가는 동안 입맞춤은 깊어졌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넥타이를 움켜쥐고 당겼고, 그의 손이 블라우스 자락 아래로 들어와 맨살 위 척추를 따라 느리게 쓸었다. 4층에서 세아의 숨이 목 안에서 끊겼다. 3층에서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이자 하나 더 쌓였어.”
"복리죠."
"응. 복리."
2층에서 입술이 떨어졌다. 이마를 맞댄 채 숨이 엉켜 있었다.
"지금 내린다고 생각하니까 무섭네."
"왜요."
"내려서 현실로 돌아가면, 당신이 나를 선택한 게 꿈일까 봐."
"꿈이면 이렇게 심장 소리가 시끄럽겠어요?"
도헌이 웃었다. 지친 얼굴 위로 오랜만에 소년 같은 웃음이 번졌다. 문이 열렸다. 간호사 한 명이 서 있다가 두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도헌이 평평한 목소리로 인사하고 걸어 나갔다. 세아가 그 뒤를 따랐다. 한 걸음 걷자 그녀의 귓불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도헌이 앞서 걷다가 고개를 돌려 낮게 웃었다.
그날 밤 10시, 세아의 집.
오랜만에 자기 집에서 샤워를 하고 나온 세아는 거실 불을 켰다가 멈췄다.
책상 위에 못 보던 서류가 놓여 있었다.
흰 봉투가 아니라 두꺼운 가죽 표지의 계약서였다. 겉면에는 아무 글씨도 없었다. 세아의 심장이 한 번 가라앉았다. 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표지를 넘겼다. 첫 장에는 단 한 줄이 인쇄되어 있었다.
[제1조. 이 계약서는 100일 안에 읽혀야 한다.]
발신인도 서명란도 없었다. 다만 맨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다.
[찢어진 계약서는 새 계약서의 첫 장이다.]
세아는 오래 그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에서 도시 불빛이 천천히 깜빡였다. 그녀의 손이 주머니 속 반쪽짜리 계약서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 조각이 손끝에서 아주 미세하게 따뜻했다.
사진 속 여자의 입꼬리는 세아가 매일 거울에서 보던 각도였다."……이 사진, 어디서 찍은 거예요.""병실 천장 모서리에 달려 있던 구형 카메라예요. 3년 동안 아무도 열어 보지 않은 저장 장치에서 제가 꺼냈어요."서윤은 아침 일찍 안가 거실에 와 있었다. 최 이사가 문을 열어 주었다고 했다. 잠을 못 잔 얼굴이었지만 목소리는 담담했다. 도헌은 세아 옆에 앉아 말없이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세아의 손을 감싸 쥔 채 놓지 않았다."그날 저는 스물여섯 살 간호사였어요. 최 이사님이 넣어 준 자리였고요. 맡은 일은 하나였어요. 한도식 회장님 곁에서 이상한 일이 생기면 막는 것.""그래서 막았어요?""반만요."서윤이 사진 속 링거대를 손끝으로 짚었다."쓰러지신 직후 회장님 링거에는 이미 약이 들어 있었어요. 홍기범의 사촌이 처방한 거였고, 오래 투여하면 심장이 멈추는 종류였어요. 저는 그걸 알아챘고, 밤 2시에 병실 불을 껐어요. 그런데."그녀가 말을 멈추고 세아를 보았다."그 어둠 속에서 회장님이 제 손목을 잡으셨어요."세아의 숨이 얕아졌다."의식이 있으셨어요. 말은 못 하셨고요. 눈으로, 손가락 힘으로 저한테 신호를 보내셨어요. 약을 빼지 말라고. 빼면 홍기범이 알아챈다고. 대신 심장을 멈추지 않을 만큼만, 수치를 낮춰서 계속 흘려 보내라고.""……왜요.""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판단하셨으니까요. 강태성이 한진정밀을 삼키는 동안 딸이 먼저 위험해지지 않도록, 가장 약한 사람으로 보여야 한다고."도헌이 낮게 숨을 삼켰다. 세아의 손이 그의 손 안에서 떨렸다."그러니까 아버지가 직접.""링거를 바꾸라고 시킨 사람은 한도식 회장님이에요. 저는 3년 동안 그 약의 양을 조절하면서, 회장님이 깨어날 날을 기다렸어요.""그 3년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거죠. 은서 어머니도요.""은서 여사님은 알고 계셨어요. 제가 아니라 회장님께 직접 들으셨대요. 눈을 뜨고 처음 하신 말씀이, 세아한테는 아직 말하지 말라는 거였고요.
11시 48분.문서고의 스탠드 불빛이 서윤의 얼굴 반쪽을 비췄다. 초침 소리가 방 안을 천천히 갉아 먹었다. 세아는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도헌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재촉하는 눈이 아니었다. 무슨 말이 나와도 받아 내겠다는 눈이었다."서준.""응.""저, 오늘 아침에 거짓말했어요."도헌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계약서에 새로 나온 건 없다고 했는데, 있었어요. 새벽에 혼자 거실에 나가서 읽었어요. 어머니가 강태성의 서재에서 낳은 아이가 있다는 문장이요. 그게 이 사람이라는 걸, 저는 이 문을 열기 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요.""…….""말하지 못한 건, 당신이 또 혼자 감당하려 할까 봐서예요. 당신 삼촌의 핏줄이 얽힌 일이니까. 제가 먼저 정리하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게 잘못인 줄 알면서도."말을 끝내자 가슴이 텅 비었다. 도헌은 한참 그녀를 보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화난 숨이 아니었다. 오래 참았던 것이 빠져나가는 소리였다."고마워.""……네?""말해 줘서. 그리고 나를 지키려고 거짓말했다는 거, 알아. 그래도 다음엔 같이 정리하자. 나는 당신이 혼자 짊어지는 게 제일 무서워.""그럼 서준 차례예요."세아가 그의 소매를 놓지 않은 채 말했다."서윤 씨가 그랬잖아요. 당신이 먼저 말할 비밀이 있다고."도헌이 시선을 내렸다. 시계는 11시 55분을 가리켰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3년 동안 잠을 못 잤다는 말, 사실이야. 그런데 한 가지를 빼고 말했어. 당신이 입사하기 전 3년 동안, 나는 한 달에 두세 번 당신 집 앞에 차를 세웠어."세아의 숨이 멎었다."가까이 가진 않았어. 올려다보기만 했어. 4층 창문에 불이 켜져 있다가 꺼지면, 그때서야 눈을 조금 붙일 수 있었어. 당신이 어디 사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아버지를 되찾으려고 어떤 얼굴로 3년을 버텼는지, 전부 알고 있었어. 그러면서도 나는 당신 앞에 나서지 못했어.""……그럼 처음 만난 날 저를 알아본 게.""
아침 햇살이 침실 커튼 틈으로 가늘게 들어왔다.세아는 눈을 뜬 채 천장을 보고 있었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에 거실에서 읽은 문장들이 눈을 감을 때마다 떠올랐다. 언니. 엄마. 강태성의 서재에서 낳은 아이.옆에서 도헌이 몸을 뒤척였다. 팔이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시트 아래 맨살에 닿는 체온이 어젯밤 그대로라서, 세아는 숨이 조금 아팠다. 그의 가슴이 등에 맞닿아 있었다. 심장이 천천히 뛰는 것이 피부로 전해졌다."……깼어?"잠긴 목소리가 목덜미 위로 떨어졌다. 낮고 느린 진동이 살갗 위에서 울려, 세아의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방금요.""거짓말.""네?""당신 숨이 안 잔 사람 숨이야. 새벽 3시에 한 번 일어났고."세아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도헌은 눈을 감은 채 그녀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손바닥이 척추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그녀의 숨이 얕아졌다. 허리 끝에서 멈춘 손이 한 번 머뭇거리다가, 다시 천천히 올라왔다."계약서 봤지.""……네. 다시 한번 읽었어요. 새로 나온 건 없었고요."반은 사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입안이 썼다. 세아가 도헌에게 직접 거짓을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말해야 해. 하지만 동생이라는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말하면 이 사람은.'도헌이 눈을 떴다.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훑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눌렀다. 아주 느리게, 도장을 찍듯이. 그 입술이 어깨선을 따라 목으로 올라왔다."서준, 아침부터.""아침이라서.""출근해야 하는데.""알아. 그래서 5분만.""5분이 5분으로 끝난 적 있어요?""없지."그가 낮게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돌려 마주 보게 했다. 아침 빛이 그의 어깨와 가슴 위를 길게 가르고 있었다. 세아의 시선이 그 위에 머물렀다. 어젯밤 자신의 손톱이 남긴 가느다란 붉은 줄이 어깨뼈 쪽에 남아 있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보지 마요.""당신이 남긴 거잖아.""그러니까요.""자랑스러운데."도헌의 손
새 계약서의 표지는 가죽 냄새가 났다.세아는 거실 불을 켠 채로 한참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기 전까지 책상 위는 분명 비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한가운데에, 누군가 자를 대고 놓은 것처럼 반듯하게 계약서가 앉아 있었다.젖은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목덜미를 타고 내려갔다. 세아는 그 서늘함이 소름인지 물기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녀는 휴대폰을 들어 도헌의 번호를 눌렀다.신호음이 한 번 울리기도 전에 그가 받았다."세아.""자고 있었어요?""3년 만에 자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밤이야. 무슨 일이야.""새 계약서가 왔어요. 제 집에요."수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그 짧은 정적 안에서 세아는 그의 표정을 보았다. 눈썹이 내려앉고, 턱이 굳고, 이미 몸이 문 쪽으로 돌아서 있는 사람의 얼굴을. 이어 의자 끌리는 소리, 열쇠 소리, 구두 소리가 빠르게 겹쳤다."문 열지 마. 15분.""대표님 집에서 여기까지 10분이잖아요.""7분.""신호는요.""신호는 내 사정이야."전화가 끊겼다. 세아는 휴대폰을 쥔 채 웃음을 삼켰다. 무서운 와중에도 웃음이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깨에 걸려 있던 무게의 절반이 내려앉은 것도 사실이었다.그는 정말 7분 만에 왔다.인터폰 화면에 비친 그는 코트도 걸치지 않은 셔츠 차림이었고, 머리칼은 바람에 흐트러져 있었다. 문을 열자 도헌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세아의 시선이 그의 가슴께에서 멈췄다."……단추가 한 칸씩 어긋났어요.""지금 그게 중요해?""중요해요. 대표님이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그게 제일 확실한 증거니까요."도헌은 대답 대신 집 안으로 들어서 창, 베란다, 욕실, 옷장을 차례로 열어 확인했다. 발소리가 낮고 빨랐다. 모든 곳을 본 뒤에야 그가 그녀 앞에 돌아와 두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이 뜨거웠다."다친 데 없지.""없어요. 계약서만 있어요.""만
지하 서재에 가스 냄새가 번졌다. 달큰하고 낯선 냄새가 코끝을 타고 올라와 머리를 천천히 무겁게 눌렀다."창은 없고 환기구는 위로만 열려 있어. 30분이야."도헌이 철문을 어깨로 밀었다. 한 번, 두 번.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 너머에서 열쇠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이어 구두 소리가 계단 위로 멀어졌다."강태성은 이미 올라갔어.""그럼 여기 있는 건 우리 셋뿐이네요."세아는 책상 위 서류 더미를 뒤지다가 어머니의 손목을 잡았다. 은서의 손은 차가웠지만 떨리지 않았다."엄마. 이 방에 20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죠.""한 번. 그때는 문을 잠근 쪽이 나였다."“……엄마가요?”"강태성을 가두려고 했어. 실패했지만."은서가 서류함 맨 아래 칸의 바닥판을 들어 올렸다. 그 아래에 녹슨 철제 손잡이가 숨어 있었다. 은서의 입가에 오래 묵은 웃음이 번졌다."그 사람이 못 믿은 게 딱 하나야. 이 계약서에는 제100조가 없다. 끝이 없는 계약이었으니까. 나는 20년 전에 제100조를 따로 써서 여기 숨겨 두었다."세아가 손잡이를 당겼다. 얇은 비상 환기 덕트가 열렸다. 한 사람이 겨우 기어 나갈 폭이었다. 위쪽에서 희미한 바람이 내려왔다.“20분 안에 셋이 나가야 해요.”"남은 건 25분이야."도헌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가 덕트 입구에 손을 짚어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어깨가 걸려. 나는 마지막이야.""안 돼요.""세아.""같이 나가는 거예요. 순서는 엄마, 저, 당신.""당신 먼저 올라가라고 하면 안 듣겠지.""알면서 왜 물어요."도헌이 낮게 웃었다. 이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사람이었다. 은서가 먼저 덕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철제 벽을 타고 무릎과 팔꿈치가 긁히는 소리가 위로 올라갔다. 어둠 속에서 은서의 목소리가 울려 내려왔다."세아야. 계약서 원본을 챙겨라. 그게 있어야 강태성이 빠져나가지 못해.""알아요."세아가 책상 위의 서류철을 집었다. 마지막 장에는 오래전 은서가 남긴 빈칸이 있었다
새벽 4시 40분, 강태성의 저택 뒷담."엄마는 여기로 가셨어요."세아가 가리킨 곳은 정원 끝의 낡은 와인 저장고 문이었다. 도헌이 낮게 물었다."어떻게 알아.""어릴 때 엄마가 자주 그린 그림이 있었어요. 계단 아래 문이 하나 있는 집. 그때는 상상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민재가 건넨 마스터키가 자물쇠에 들어가자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문 안쪽은 석조 계단이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폭이었다. 도헌이 먼저 내려가고 세아가 그의 셔츠 자락을 쥐고 뒤따랐다. 열 계단쯤 내려갔을 때 위에서 구두 소리가 났다. 경비였다.도헌이 돌아서서 세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계단 옆 오목한 벽감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맞닿았다.“……숨 쉬지 마.”"쉬어야 사는데요.""작게."세아의 등이 서늘한 돌벽에 닿았고, 앞은 그의 체온이 눌렀다. 도헌의 숨이 이마 위로 떨어졌다. 그녀의 손이 갈 곳을 잃고 그의 가슴 위에 얹혔다. 심장이 손바닥 아래서 거칠게 뛰었다. 불빛이 계단 위를 한 번 훑고 지나갔다. 두 사람은 굳은 채 서로의 숨소리만 들었다.“……서준.”"조용히.""심장 소리가 너무 커요.""당신 거야, 내 거야.""모르겠어요. 겹쳐서."경비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그런데도 도헌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의 엄지가 그녀의 턱선을 따라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어둠 속에서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 머물렀다."지금 이게 얼마나 미친 짓인지 알아?""알아요.""어머님이 저 아래 계신데.""그러니까 더, 지금 아니면 못 할 것 같아서요."세아가 먼저 입술을 올렸다. 소리를 죽인 입맞춤이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허리 뒤에서 위로 올라와 블라우스 아래 맨살 위에 닿았다. 손바닥이 등을 따라 천천히 오르내리자 세아의 숨이 목에서 끊겼다. 그가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소리 내면 안 돼."“……그럼 막아 줘요.”그가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억눌린 숨이 서로의 입안에서 섞였다. 그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