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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보이그룹 ‘에테르’의 팬
은은한 조명이 떨어지는 테이블 위로 예쁜 음식들이 세팅되기가 무섭게, 네 명의 여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의 가방 안을 주섬주섬 뒤지기 시작했다.각자의 취향이 잔뜩 묻어나는 색색의 화려한 탑로더에 고이 모셔둔 각자의 최애 포토 카드와, 꼬물거리는 작은 솜인형들이 식탁 중앙의 허공을 점령했다. 밥을 먹기 전, 커피를 마시기 전, 심지어 어딘가를 방문해 기록을 남길 때도 절대 빠져선 안 되는 그녀들만의 성스러운 의식.
이른바 '예절샷' 타임이었다.
남들이 보면 그저 다 큰 어른들의 유치한 손장난이라 비웃을지 모르겠지만, 덕질하는 여자들, 즉 빠순이들에겐 숨 쉬는 것만큼 매우 중요한 절차였다.
"이번 굿즈, 퀄리티 진짜 미쳤어, 그치?“
지갑을 털어 구매해 온 다양한 굿즈들이 들어있는 종이백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는 여자들.
"완전 대박! 퀄 좀 올라갔다고 드럽게 비싼게 문제긴 하지만. 소속사 놈들, 양심은 다 엇다 팔아먹었는지 몰라.“
다소 높은 가격으로 측정된 것이 불만이었지만, 뱉어내는 워딩과는 다르게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가득한 여자들이었다.
"진짜 등골이 휜다, 휘어~. 하, 그렇다고 안 살 수도 없고.“
매번 비슷한 종류의 굿즈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오빠들의 얼굴은 항상 바뀌어 들어가 있으니, 그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운 빠순이들이었다.
"뭐, 언니들 못 산거, 내가 하나씩 사줘?"
가장 여유로운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울려 퍼지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쏠렸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단박에 커진 눈으로 잔뜩 기대감으로 가득 찬 표정.
너와의 관계,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 라는 눈빛과 함께 말이다.
찰칵, 찰칵.
열심히 예절샷을 찍고, 누군가 대표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려 태그를 마친 뒤에야 시작되는 본격적인 식사 시간. 맛있게 음식을 먹으면서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대화의 주제는 단 하나였다.
바로, 7인조 아이돌 [ 에테르(Aether) ].
[에테르]는 올해로 데뷔 5년 차에 접어든 보이그룹이었다. 피 말리는 오디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거쳐 살아남은 자들로 구성된 팀이었는데, 초반에는 서바이벌 특유의 처절한 서사와 꽤 자극적인 인기로 탄탄한 팬덤을 구축했지만, 워낙 난다 긴다 하는, 자고 일어나면 쏟아져 나오는 괴물 같은 아이돌 그룹들의 홍수 속에서 현재는 그저 '현상 유지'를 하며 먹고 살 정도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룹이었다. 하지만 이 네 여자들에게 에테르는 그 어떤 월드스타보다도 치명적이고 절대적인, 일상의 유일한 마약이었다.
"하아... 우리 시우, 그냥 미쳤다. 어제 골반 돌리는 거 봤어?"
하윤이 제 몫의 파스타를 돌돌 말다 말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시선 끝엔 에테르의 센터격이자 메인 댄서, 리드 래퍼인 이시우(26살)의 포카가 놓여 있었다. 짙은 쌍꺼풀에 화려한 이목구비, 그리고 왼쪽 눈 밑에 콕 박힌 매력점까지 완벽한 남자.
이런 시우를 최애로 둔 이하윤(28살)의 본업은 무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이현그룹 R&D 선행연구팀의 주임 연구원이었다. 명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까지 속전속결로 딴 엘리트. 사실, 원래대로라면 박사 과정까지 밟을 계획이었지만, 시우의 춤선을 본 순간, 하윤은 과감하게 그 루트를 틀었다. 덕질을 하려면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만 한다는 완벽한 빠순이적 사고가 장착된 이유였다.
"이거 봐봐. 우리 태윤이 모에화 제대로 됐지? 강아지가 늑대인 척 하는 거 봐봐. 아, 나 미쳐, 진짜."
시은이 핸드폰 액정을 불쑥 들이밀며 맞장구를 쳤다. 화면 속에는 인디언 보조개가 쏙 들어간 강아지상, 에테르의 리더이자 리드 보컬 강태윤(27살)의 사진이 떠 있었다. 차분하고 책임감이 강하지만, 화가 나면 제일 무섭다는 외유내강의 표본.
최시은(28살) 역시 만만치 않은 흠 없는 현생을 자랑했다. 그녀는 약학대학을 수료하고 대학병원의 근처 약국에서 일하는 페이 약사였다. 당초 메이저급 제약회사 입사를 목표로 시작한 전공이었으나, 덕질에 눈을 뜬 순간, 그녀는 단박에 깨달았다. 덕질에는 돈도 많이 벌고, 시간 빼기도 수월한, 페이 약사가 최고라는 것을.
"나 이번에 팬싸 갈 때, 해성이가 갖고 싶다던 무선 헤드셋 가져 갈 거야. 벌써 사놨어."
채아가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에 테이블이 잠시 숙연해졌다. 부러움에 대한 침묵. 에테르의 막내이자 보컬, 비주얼 담당인 김해성(24살). 팀 내 최장신이라 '자이언트 베이비'라 불리며, 무대 위에선 치명적인 척하지만 툭하면 넘어지는 허당 멤버였다.
해성에게 온 마음을 주며 그를 잔뜩 앓고 있는 박채아(25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두른 진짜 부잣집 딸내미였다. 부모님에게 증여받은 주식의 시세 차익과 배당금으로 덕질 자금을 충당하는, 이 바닥의 모든 빠순이들의 롤모델이자 워너비. 돈이 차고 넘치는 덕에 매번 팬 사인회의 문턱을 스스럼없이 넘나들어, 이미 팬덤 내에선 이름만 대면 아는 '성덕 네임드 팬'으로 통했다.
"아, 나, 어제 올린 릴스, 채민이한테 하트 받았잖아."
재희가 질 수 없다는 듯 자랑스럽게 외쳤다. 그녀의 최애 윤채민(25살)은 리드 댄서이자 서브 래퍼였다. 엄청난 친화력에 유행까지 민감해 멤버 중 SNS를 가장 활발히 하는 인물이었다.
작은 디자인 회사를 다니는 심재희(26살)는 특유의 금손 능력을 살려 커스텀 주문 제작 알바까지 투잡을 뛰고 있었다. 버는 돈은 꽤 쏠쏠했지만, 덕질에 너무 진심인데다, 본인을 꾸미는 일에도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붓는 탓에 입버릇처럼 '통장이 텅장 됐다'며 늘 징징거리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덕질을 그만 둘 생각은 추어도 없지만 말이다.
이들 외에도 에테르에는 메인 비주얼이자 서브 보컬인 서도현(27살), 팀의 곡을 도맡아 쓰고 있는 메인 프로듀서 겸 메인 래퍼 한지한(24살), 시원한 가창력의 메인 보컬 백연우(25살)가 있었다.
중학교 동창인 하윤과 시은을 주축으로, 네 사람은 에테르의 첫 단독 콘서트에서 우연히 만나 인연을 맺었다. 자라온 환경도, 직업도, 성격도, 심지어 각자가 앓고 있는 최애도 모두 달랐지만, 어쩌다 보니 기가 막히게 마음이 맞아서 함께 덕질을 하는 덕질 메이트가 되었다.
팬들의 주 서식지인 X(구 트위터)에서도 각자의 멤버별 네임드로 불릴 만큼 덕질에 진심인 여자들. 게다가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딱 맞게도, 네 명 모두 시선을 확 잡아끄는 예쁜 외모를 자랑해, 에테르 멤버들조차 은근히 주시하고 있는 팬 무리 중 하나였다.
치열하고 숨 막히는 현생을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이 세상에서, 각자의 일터에서는 완벽한 '일코'를 하고, 공연장과 오프라인 스케줄에서는 누구보다 열정적인 빠순이로 변신하며 은밀한 이중생활을 즐기는 그녀들.
하지만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던 그녀들의 현생과 덕판 사이에서, 이제 곧 아슬아슬하고도 짜릿한 균열이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 현생의 남자친구로스쿨 모의재판 일정을 소화하느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수트를 빼입은 건우였다. 하루 종일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일까. 운전석에 몸을 기대자마자 지독한 피로감이 미친 듯이 몰려왔다. 시동을 켠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던 찰나, 차량의 블루투스와 연결된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려 댔다.
[ 백현민 ].
센터페시아 화면에 뜬 발신자를 확인한 건우의 짙은 눈썹이 까딱 움직였다. 이 시간에 이 형이 웬일이지? 건우는 나른한 손짓으로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받았다.
"어, 형."
--"야, 차건우. 너 지금 이하윤이랑 연락 되냐?"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현민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다분히 '빡친' 기색이 역력했다.
'하… 이 기집애가 또...'
현민의 물음에 상황 파악이 단박에 끝난 건우의 잘생긴 미간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나 오늘 수업이 풀이라서 아직 핸드폰 확인도 못 했어. 왜? 시은이 누나 연락 안 돼?"
--"하, 씨발, 이 기집애가 오늘 하루 종일 방해 금지 모드 해놓고 전화도 카톡도 다 씹고 앉았어."
현민은 결국, 꾹꾹 눌러 담았던 화를 더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전도유망한 IT 스타트업 CEO이자 최시은의 동갑내기 남자 친구인 백현민(28세). 서늘한 눈매와 어울리지 않게 묘하게 귀여운 구석이 있는 그는, 정부 고위 간부인 부모님을 둔 덕에 알짜배기 정보를 쥐고, 좋은 머리를 이용해 사업 수완을 제대로 발휘하는 찐 금수저였다. 사실, 뼛속까지 보수적인 현민과 자유로운 영혼 그 자체인 시은은 상극 중의 상극이었다. 하지만 물과 기름처럼 매일 티격태격하면서도 징그럽게 붙어먹으며 침대가 부서져라 짐승처럼 사랑을 해대는 지독하고 피곤한 커플이랄까.
--"하, 진짜… 사람을 붙이든가, 위치 추적 앱이라도 깔든가 해야지, 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짜증 섞인 투덜거림을 뱉어내는 현민.
"일단 끊어봐. 나도 하윤이한테 연락해 볼게.“
--"어, 그래, 끊는다."
현민과의 짧은 통화를 마친 건우는 조수석에 던져둔 가방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꺼내 들었다. 화면을 켜자, 부재중 전화 몇 통과 수십 개의 메신저 알림이 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먼저 확인한 통화 목록에는 자신이 기대했던 ‘이하윤’의 이름은 없었다.
"하, 이것 봐라...?"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샜다.
혹시나 싶어 문자를 뒤져봤지만, 은행이나 기관에서 온 스팸들 뿐. 노란색 메신저 앱을 열어봐도 현민을 포함한 지인들의 단톡방 알림과 쓸데없는 연락들이 전부였다. 건우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차건우, 스물여섯. 로스쿨 3학년생으로 올해 졸업을 코앞에 둔 예비 법조인이었다. 어릴 적 통통하고 귀여웠던 꼬맹이의 흔적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면서 젖살이 빠지고 골격이 굵어졌다. 그러더니 어느새 턱선은 베일 듯 날카로워졌고 이목구비는 또렷하고, 굵은 선을 자랑하는 사내가 되었다. 그의 날 것 그대로의 외모는 미치도록 위험한 퇴폐미를 풍기며, 숱한 여학우들의 아래를 젖게 만들만큼 섹시했다.
아, 성격이 매우 개차반인게 문제이긴 했지만.
지 잘난 맛에 사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놈. 전국구 단위의 사업체를 굴리는 다이아 수저 아버지의 뒷배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는 태생 자체가 오만하고 싸가지 없는 수컷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안하무인 맹수를 통제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바로 6년째 연애 중인,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두 살 연상의 여자 친구 이하윤이었다.
어쩌다보니 오로지 이하윤에게만 길들여진 이 지독한 소유욕의 수컷은, 점점 날이 가면 갈수록 통제 불능이 되어가는 제 여자친구의 그 지긋지긋한 '빠순이 짓' 때문에 아주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건우는 거칠게 키패드를 열어 익숙한 단축 번호를 꾹 눌렀다.
신호음은커녕 아무런 멘트도 없이 통화가 뚝 끊어졌다. 아까 현민이 말했던 대로, 방해 금지 모드를 해놓았을 때 나타나는 좆같은 현상이었다.
"하, 이걸 진짜 집에 가둬놔야 돼?"
안 그래도 하루 종일 팽팽하게 긴장하느라 피곤해 뒤지겠는데, 예상치 못하게 훅 치고 들어온 이 여자의 도발에 참을 수 없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뭐, 그래, 일반인이 잘생긴 아이돌을 좀 좋아할 수도 있다고 치자. 뭐, 그냥 건전한 취미 생활로 치부하고, 좀 과하구나, 정도로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 편할 일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하윤이나 최시은이, 어딜 내놔도 절대 꿀리지 않는 스펙과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이었다.
지들이 물고 빠는 그놈의 [에테르] 오빠들 -- 잘생기면 무조건 오빠라나 뭐라나, 씨발 -- 에게 예뻐 보이겠다고 체력 관리며 몸매 관리는 어찌나 독하게 해대는지, 참으로 그 정성에 눈물이 난다 싶을 정도였다. 어디 그뿐인가.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을수록 농염해지며, 묘한 색기까지 줄줄 흘러넘쳐서, 바깥 세상에 내놓기 불안해 미칠 노릇이었다.
차건우의 전체 인생에서 여자는 오직 이하윤 하나뿐이라고 몸과 마음에 새기며 살아왔건만, 그녀가 툭하면 저지르는 이 은밀한 일탈들은, 예민한 건우의 이성을 끊어놓기에 아주 완벽한 조건이었다. 어쩌면 이 여자가 자신의 잠재된 가학적인 소유욕을 발정 나게 하려고 안달이 난건진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그녀의 전화번호가 담긴 단축 번호를 꾸욱 눌렀지만, 귓가에 맴도는 건, 여전한 적막함과 동시에 끊어져버리는 차가운 기계의 반응이었다.
“하, 진짜 그놈의 위치 추적 앱을 깔든가 해야지, 원...”
건우는 거친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차를 몰았다. 원래 같았으면 당장 이하윤의 오피스텔로 쳐들어가 그녀가 집에 올 때까지 살벌하게 대기를 탔겠지만, 오늘은 얌전히 자신의 집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예 이런 식으로 각을 잡고 연락까지 완벽하게 차단했다는 건,
'오늘 하루는 신나게 즐길 테니, 절대 방해하지 마라’
는 그녀만의 무언의 통보이기도 했다.
뭐, 여기서 혼자 씩씩대고 스트레스를 받아봤자 결국 제 손해라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이성적인 차건우는, 아주 빠르게, 그리고 억울하지만 곧 패배를 인정했다.
하, 현생에 이렇게 잘난 남자 친구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객관적으로 자기보다 한참 인물이 떨어지는 것 같은 그 '시우'인지 뭔지 하는 딴 놈한테 푹 빠진 자신의 여자 친구가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씨발, 허구한 날 미치도록 보고 싶으니, 진짜 돌아버릴 노릇이었다.
“내가 씨발, 변호사 시험만 합격해 봐라.”
건우는 핸들을 꽉 쥔 채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순진한 내 여자의 등골을 빼먹는 저 기생오라비 같은 새끼들, 싹 다 뒷조사해서 뼈도 못추리게 확 다 털어버릴 테니까.
#2 눈에 띄는 ‘에테르’의 빠순이들
방해 금지 모드를 켜두긴 했지만, 알림창에 즉각적으로 뜨는 숫자 '1'은 결코 숨길 수가 없었다.
[부재중 전화 2통]
발신자는 역시나 자신의 연하 남친 차건우였다. 화면을 지긋이 내려다보던 하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해... 살짝 쫄리긴 했다. 이 일탈의 결과가 어떨지 뻔히 보이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더 이상 폰이 울리지 않는 걸 보니, 빡친 것을 억누르고 그냥 집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오늘 로스쿨에서, 그 빡센 모의재판 수업이 있었다는 것이 신의 한수라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후우... 오늘은 조용히 자자, 건우야...'
하윤은 조용히 핸드폰을 엎어두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다음 달에 있을 [에테르]의 단독 콘서트 팬 이벤트 논의를 위해 모인 자리였다.
막대한 자본력을 가진 채아가 통 크게 통째로 대관한 변두리의 예쁜 카페 안. 그곳엔 시은, 채아, 재희를 비롯해 꽤 많은 다수의 팬덤 핵심 인원들이 모여 열띤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이 네 사람은 팬 이벤트를 주최하는 스태프는 아니었지만, 팬덤 내에서 SNS 화력이 어마어마한 ‘네임드’들이었다. 글과 사진으로 여론을 주도하고 팬들을 결집시키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역할이다 보니, 이런 굵직한 행사 회의에도 종종 초대를 받곤 했다.
"야, 백현민 지금 완전히 개빡친 것 같은데?"
시은이 주위의 시선을 피해 슬며시 다가와, 하윤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 새끼는 맨날 빡치는 게 주요 업무 아니냐?"
하윤이 콧방귀를 뀌며 피식 웃었다.
그녀들은 [에테르]의 초기 입덕 멤버로, 그들의 팬덤 내에서 꽤 유명 인사였지만, 오프라인의 개인적인 신상은 철저하게 숨기고 다녔다. 워낙 눈에 띄게 화려한 미모 탓에 어쩔 수 없이 노출되는 얼굴과 나이, 그리고 두루뭉술하게 얼버무린 직업 정도가 전부였다. 뒤에서 눈에 불을 켜고 집착하는 지독한 남자 친구들의 존재는 더더욱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팬덤 내에서는 이들을 향한 뒷말들이 무성할 수밖에 없었다.
'저 얼굴로 왜 정상적인 연애를 안 하고 기를 쓰고 덕질을 하는가?'
'오빠들 한번 꼬셔보려고 작정하고 덤벼든 거 아니냐?‘
‘그냥 머리에 든 것도 없이 오빠들한테 미친 쌍년들 같다.’
'그냥 단체로 미친 여자들.‘
‘아, 모르겠고, 그냥 재수없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 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질투 어린 소리쯤이야 가볍게 무시해 주는 게 네임드의 품격이라 생각하며 그녀들은 굳건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느 정도 이벤트의 가닥이 잡히고, 구체적인 실행 방향을 두고 한창 목소리가 커지며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였다. 모두의 시선이 회의를 이끄는 총대에게 집중되어 있던 찰나.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렸다.
"...어?"
누군가의 짧은 탄성을 시작으로, 웅성거리던 카페 안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구로 향했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개인 스케줄을 마치고 온 듯, 풀 헤메코를 한 [에테르]의 멤버인 태윤과 채민이 서 있었다.
"꺄아아아악-!!"
"미쳤어! 어떡해!“
“와, 씨, 대박!!!”
순식간에 카페 안은 이성을 잃은 여자들의 비명소리로 가득 찼다. 가끔씩 이렇게 팬 서비스 차원으로 불쑥 나타나는 서프라이즈성 이벤트. 에테르라는 보이그룹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 1군 아이돌이 아니기에 가능한 기적이기도 했다. 아마도 SNS를 눈팅하던 채민이, 팬들이 모여 있다는 모임 장소를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쳐들어온 모양이었다.
뭐, 내 최애가 아니면 어떠하리. 내가 온 마음을 다해 덕질하는 그룹의 멤버가 당장 눈앞에 나타났는데! 소녀 떼로 돌변한 여자들은 온갖 환호와 감탄, 행복에 찬 아우성을 질러댔다.
그 순간, 시은의 머릿속에 가득 차 있던 '개 빡친 백현민을 어떻게 달래주지?'라는 걱정도 그야말로 새하얗게 날아갔다. 태윤이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스스로 뇌세포를 포맷해 버린 것이다.
"우리 루미들, 고생이 많네."
태윤이, 특유의 다정한 눈웃음을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꺄악! 태윤아!!"
"미쳤어, 진짜!“
“아, 귀여워!!!”
여기저기서 또다시 터져 나오는 환호성.
"이렇게 모여 있으니까 우리 루미들 너무 예쁘다. 우리 사진 한 장 찍을까? 내 인스타에 올리게."
채민이 능청스럽게 자신의 핸드폰을 치켜들었다. 채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산전수전 다 겪은 성인 여자들은 꺄르르 웃으며 수줍은 소녀떼로 변신, 그가 시키는 대로 옹기종기 자리를 잡고 한껏 예쁜 포즈를 취했다.
하, 이런 게 바로 덕질의 참맛이 아니겠는가. 화면으로만 보던 내 아이돌을 이렇게 가까이서, 그것도 사적인 공간에서 마주할 때면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
달콤한 꿈같은 시간은 짧았지만, 함께 사진을 찍고, 커피와 디저트까지 역조공을 받은 루미들.
사랑하는 자신의 팬들을 행복하게 했다는 것에 만족감을 느낀 두 사람은 아쉬워하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이내 대기하고 있던 카니발에 올라타 사라졌다.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진지했던 회의장은 흥분의 도가니로 변해버렸다. 종종 있는 서프라이즈였지만 그 파급력은 매번 엄청났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오빠들이니까. 그저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벅차오르고 행복해지는 게 빠순이의 숙명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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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완전 내 취향."
소속사 연습실로 돌아가는 차 안. 몸을 깊숙이 기댄 채민이 아랫입술을 혀를 핥으며 비죽 웃음을 흘렸다.
팬들 중에는 유독 눈에 띄게 예쁜 여자들이 꽤 있었다. 굳이 자주 보지 않아도 뇌리에 콱 박히는 얼굴들. 심지어 계속 보다 보면 묘하게 끌려서 자꾸만 시선이 가는 팬도 존재했다. 숨 막히게 예쁘고 색기가 넘치는 여자들. 그런 여자들이 자신들을 미치도록 원한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짜릿했다.
지금, 채민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예쁘고 색기 넘치는 팬 중 한 명이 바로 '마이슈'라는 아이디를 쓰는 팬이었다. 시우의 애칭인 '슈'를 따서 '나의 슈'라는 뜻을 가진 시우의 골수팬. 본인의 팬이면서 자신의 직캠만을 찍어주면 참 좋았겠지만, 애석하게도 타 멤버의 팬이라는 사실이 늘 꽤 아쉽긴 했다.
하지만 볼 때마다 짜릿함을 안겨주는 여자. 세 살이나 많은 누나라지만, 벗겨놓고 침대 위에서 뒹굴거릴 때 나이 따위가 무슨 상관이람. 아, 만약에 이 여자가 자신의 팬이었다면,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힐 수 있지 않았을까, 묘한 아쉬움이 고개를 들었다.
채민의 눈빛이 몽롱하게 짙어졌다.
채민의 옆자리 앉아 창밖을 보던 태윤 역시 속으로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팬사인회에도 몇 번이나 발걸음을 했던 '에테르테태'. 태윤의 닉네임인 ‘테디베어’와 ‘태윤’의 앞 글자만 딴 아이디를 쓰는 그녀는 채민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마이슈'의 절친이기도 했다.
그녀는 굉장히 밝고 에너지가 넘쳐서 늘 기억에 남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게 예쁜 외모 덕분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동안 몰래몰래 다른 걸그룹 멤버들과 몸을 섞고 연애를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아이돌 그룹의 리더로서 ‘내 돈줄이자 성역인 팬’과의 연애는 절대 건들여서는 안 되는 영역, 스스로 세워둔 금기 중의 금기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눈꼬리를 휘며 자신을 향해 웃어 보이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저 입술을 씹어 먹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심지어 '저 여자랑 사귀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저 여자랑 침대 위에서 뒤엉켜 즐기면 얼마나 짜릿할까...' 하는 위험천만한 호기심이 마음 한구석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랫도리의 묵직함은 덤이었고 말이다.
조만간 열릴 대면 팬싸에서 그녀들을 다시 마주하길 내심 기대하며, 두 사람을 태운 카니발은 연습실을 향해 매끄럽게 나아갔다.
마이슈 = 이하윤
에테르테태 = 최시은
이 두 여자는 현실의 잘난 남자친구들을 본의 아니게 기만하며, 아이돌의 이성마저 흔들어놓을 만큼 확실히 독보적이고 위험하게 눈에 띄는 매력적인 여자들임이 틀림없었다.
“하아... 씨발... 존나 좋아... 하아... 하아...”퍽- 퍽- 퍽-“읏... 으으으읏.... 하아읏...”덜컹- 덜컹- 덜컹-차건우와 이하윤은.아일랜드 식탁 앞에서 열심히 뒤치기 중이었다.*건우의 퇴근 시간에 맞춰.앞치마를 입고 간단한 간식을 준비하던 하윤이었다.막 퇴근한 건우는.“어, 왔어? 씻고 와. 오늘 샌드위치 만들었어.”앞치마를 입고 분주하게 주방을 왔다 갔다 하는 하윤을 보자마자.“하아... 씨발, 꼴리네...”나지막이 입술을 씰룩이더니.곧장 하윤을 향해 돌진했다.싱크대 앞에서.간단하게 그릇을 정리를 하던 하윤을.뒤에서 홱- 끌어안은 건우는.“하아... 이하윤 냄새 너무 좋아.”평소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제 머리를 박고, 그녀의 체향을, 자신의 폐부에 가득 담았다.“씻고 와, 빨리. 배고프잖아.”늘 퇴근 후 행하는, 그만의 루틴이었기에 그녀는 의심 한 톨 없었다.그런데.“빨리 씻고 오... 아, 야, 너...!”그녀의 허리춤으로 느껴지는 묵직하고 단단한 그의 물건.이미 풀발기 상태로 하윤의 허리춤을 잔뜩 부비고 있었다.“놔... 이거, 놔. 차건우! 놓으라고.”하윤이 발버둥을 쳤다.훗.놓겠냐고. 차건우가.“하아... 씨발, 바로 넣는다.”“야, 야! 이 미친 새끼야! 이거 놔! 놓으라고!”그녀의 뒤에서.한 팔로는 그녀를 꽉 끌어 안고, 한 손은 이미 빠르게 그녀의 잠옷 바지와 팬티를 한 번에 벗겼다.그리고 자신의 수트 바지와 드로즈 팬티까지.그는 아주 빠르게, 제 발밑으로, 거추장스러운 지성인의 품격을 벗어던졌다.“하... 하지... 마...”하윤은 계속해서 버둥거렸지만.이미 발정이 나버린 제 연하남친 차건우를 결코 막을 수 없었다.그는 하늘 높이 올려다보는 제 좆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그녀의 구멍에 맞춰 지분거렸다.다급했던 말과는 달리.그는 바로 삽입을 하지 않았다.제 여자가 충분히 젖어야 한다는 것 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그녀의 두 다리를 살짝 벌리게
“아니, 씨발. 이태현이 결혼하는데 내가 왜 포토라인에 서야 되냐고?!”건우는.잔뜩 뿔이 났다.“그것도 이유경이랑 나란히 서서? 하, 씨발, 짜증나게.”다음 주 결혼식을 앞둔 이태현이.드디어 카르텔 멤버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약간 수척해진 모습이었지만.재벌가의 자제답게.여전히 우아하고, 단호하며, 멋있는 모습이었다.“그럼 이유경이랑 같이 들어가라는 거야? 하, 존나 짜증나네.”징징.지금 이 룸 안에서.입을 열고 있는 이는.차건우 밖에 없다.모두들.징징거리며 핏대를 올리는 저 핏덩이에게.한 마디씩 할 법도 한데.그저 피식- 웃으며 술잔만 빙빙 돌렸다.그도 그럴 것이.언제부턴가 로펌의 대표 이미지가 되어버린 차건우와 이유경은.가끔 본업을 내팽개치고,이런 저런 행사에 참여를 해야 할 만큼 바빠졌다.이런 쓰잘데기 없는 관심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차건우라.심지어, 이유경에 대해 좋은 마음이 없는 차건우라.안 그래도 요즘 행보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이태현의 결혼식 조차에서도, 로펌을 대표하여 사진에 찍혀야 한다고 하니 빡이 칠 수 밖에 없을 터였다.더 화가 나는 건.여전히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소문들이었다.이유경의 예비 남편, 차건우.해오름 로펌의 후계자, 차건우 변호사.어쩌면 이런 일련의 모든 것들이.차건우를 제 사위로 삼고 싶은, 로펌 대표의 크나큰 빌드업 일지도 몰랐다.이런 걸 보면, 이유경의 아버지는.차건우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싶고.그 험한 꼴을 당한 이유경도.거부하거나 뿌리치지 않고 즐기는 것을 보면.확실히 또라이가 맞는 듯 했다.“그럼... 나... 지하 주차장에서 시은이랑 같이 올라가?”하윤이 건우를 보며 물었다.“오빠가 사람 붙여줄게.”태현이 하윤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뭔 소리야. 나랑 같이 들어가야지.”건우는 태현을 한 번 노려보곤, 이내 하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나는... 막... 사진 그렇게 찍히고... 그런 거... 싫어.”“..........”하윤의
에테르 첫 유닛 활동의 첫 날.지난 월드 투어 이후, 오랜만의 공식 스케줄이라.네 명의 멤버는, 녹화 시간 훨씬 이전부터 바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하윤아. 도시락 업체 연락 받았어?”“응. 시간하고 장소 다시 한 번 더 체크했고... 음료는?”“그거 나중에 픽업하러 가야 돼. 총 29잔 맞지?”“응. 많기도 많네.”“그러니까. 재희랑 채아, 몇 시에 온 댔지?”“8시.”“그럼, 넷이서 충분히 들겠는데?”“응. 괜찮겠지?”에테르 유닛 멤버들보다.이 덕질하는 빠순이 여자들이 더 바빴다.오늘 사녹은.새벽 사녹이다.새벽에 하는 사전 녹화는.아주 오~~~랫동안 에테르 멤버들의 무대를 볼 수 있어서 좋다.하지만.루미들의 체력을 많이 요하는 시간대라.현생을 살다 온 루미들이에겐 다소 러프한 덕질 중 하나였다.그래도 상관없다.이 사녹을 위해.오로지 우리 에테르를 응원하기 위해.단단하게 체력을 기른 빠순이들이니까.에테르 멤버들에게 조공하기로 한 도시락과 샐러드, 그리고 음료 및 간식 한 가득을 벤치 위에 고이 모셔두고 재희와 채아를 기다리는 하윤과 시은이었다.그런데.“여보세요? 아, 네. 네. 네? 아... 아, 네... 근데... 이게 너무 많아서... 아, 진짜요? 아... 네... 여기가 어디냐면요...”시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통화를 이어갔다.한참을 통화하던 시은이 전화를 끊고 하윤을 보았다.“둘만... 오라는데?”“어? 둘만?”“응...”“하아...”뻔했다.사랑에 빠진 두 수컷이.제 팬이고 나발이고 없이.그저 얼굴 한 번 더 보겠다고 하윤과 시은을 대기실로 넣으려 하는 것.“그래서...”“응. 스탭 보낸대.”“재희랑... 채아는...”“연락해야지. 내가 전화할게.”“응.”시은이, 재희에게 전화를 거는 사이에.저 멀리서 두 명의 남자 스탭이, 그녀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그렇게.두 여자는 다시 한 번 더.무대 뒤 대기실.에테르 멤버들이 있는 백스테이지에 입성했다.******
“이야, 이태현. 드디어 장가가는 거야?”“눈물 겨운 순애보 영화 찍다, 혼자 늙어 죽을 줄 알았더니.”“그래도 형이... 마음 다잡아서 다행이지, 뭐.”‘HERA’의 프라이빗 룸, 모임 날.오늘은.이태현 없이, 6명만 모였다.“뭐, 태현이 연락 받은 사람 없어?”경훈이, 멤버들을 쭈욱 둘러보며 물었다.여전히.그 친한 카르텔 놈들에게조차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그.그의 소식은.그저 각자의 현생 뒷골목에 돌아다니는 찌라시나, 공식 기사에서만 확인할 뿐이었다.“아... 잘 지낸대.”하윤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개새끼가. 결혼할 새끼가, 남의 여자한테만 연락하고 있어, 씨발놈이.”건우는.걱정 반, 분노 반.욕설을 짓이겼다.제 전화는 받지도 않으면서, 하윤이에게는 연락을 했다 하니.짜증이 치밀어 오르면서도.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이태현, 하, 진짜. 아니, 진짜 하윤이 너한테만 연락한 거야?”시은이 역시 어이없다는 듯 말을 뱉었다.“응. 잠깐 통화했어.”하윤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말을... 아껴야 했다.그날의 일은.찐친인 시은에게도, 제 남자친구인 차건우에게도.절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었다.그를 위해서라도.자신을 위해서라도.그날 밤의 사건은.철저히 두 사람만의 비밀이 되어야만 했다.정신이 나가버린.이성의 끈을 자신도 모르게 끊어버린.자신의 폭주를 미안해 하며.이태현은.건우에게는... 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하윤 역시.건우에게 말 할 생각이 없었다.그저 은밀하게.두 사람만의 비밀로.무덤까지 들고 가기로 했다.“뭐... 하윤이라도 연락 받았으면 됐지.”“그래. 잘 지낸다니까, 다행이다.”경훈과 주환이 서로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놓았다.“그럼... 우리 결혼식에서 보나?”“그래야 되지 않아? 약혼식은 가족끼리 한다던데?”현민의 물음에 하윤이 대답했다.그날 밤.그를 달래고.그녀가 들을 수 있었던 얼마 되지 않은 정보였다.“아니, 약혼하고 얼마
--“전화 해봤어?”“응, 해봤는데... 안 받아.”--“전화도... 없고?”“응. 너는?”--“안 받아.”“.............”구체적인 찌라시가 돌아다니던 중.며칠 뒤.공식 기사가 떴다.이현그룹 회장의 3남 이태현 상무와 대정그룹 최성구 회장의 차녀 최수아의 약혼 기사가.그 기사 이후로.이태현은 세상에서 잠시 사라졌다.카르텔 멤버들의 연락은커녕, 회사에도 나오지 않았다.아마도 언론의 접근을 막기 위한.재벌가의 미봉지책일 터였다.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그저 기다리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묘하게 섭섭한 건 왜인지.--“내 전화... 잘도 받고 싶겠다.”건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그래도... 계속 해 봐. 너랑... 제일 오래 됐잖아.”두 사람이 꼬꼬마 시절 때부터 맺은 인연이다.거의 20년 우정.--“응... 혹시라도 전화 오면...”“응. 너한테 연락하라고 해?”--“아니. 측은지심으로 이태현한테 넘어가지 말라고.”“어?”--“너 내 거야. 이태현이 아무리 불쌍해도 못 줘. 안 줘.”“..........”아무도 따라갈 수 없는.늘 예상하기 힘든.차건우식 소유욕.--“오늘 사무실에서 밤새야 돼. 자기 전에 전화 해.”“고생하네, 차변호사님.”--“전화 못 받을 수도 있어.”“응. 그럼 카톡 남기...”--“계속해. 내가 받을 때까지 해. 그냥 잘 생각하지 마. 목소리 들려주고 자.”“..............”--“대답.”“진심이야?”--“알았어?”“............”--“대답하라고.”“응... 알았어...”--“이하윤, 사랑해. 너 내 거야. 알지?”“응... 그래...”차건우는.미친 게 틀림없다.이하윤이라는 여자에게 제대로 미쳐버린 미친놈.“오케이. 날짜랑 시간 더블체크 했고. 우치와는 내일 오나...?”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아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확인을 하느라 바쁜 하윤은.이번 에테르 유닛 컴백에 도시락 조공을 하기로
딸칵- 딸칵-마우스를 감싸고 있는 건우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확인해야하는 ‘VIP 전용 사설 정보지’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암호화된 PDF 파일로 전송되는 정재계 고급 찌라시.구독료가 수천만원에 달하는, 찐또배기 블라인드 리포트였다.클릭 후. 암호 입력.그리고 마우스의 스크롤을 내리는 건우의 눈에는 진지함이 가득했다.그러다.천천히 마우스 스크롤을 쓸어 내리던 그의 검지 손가락이 어느 부분에서 딱 멈췄다.[ 이현그룹 이경호 회장 3남, 대정그룹 최성구 회장 차녀와 약혼식 임박 ]건우는 큰 제목 밑으로 빽빽하게 적혀 있는 활자들을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이현그룹 이경호 회장의 셋째 아들, 이태현.이경호 회장은, 자신의 3남 1녀 중, 막내인 이태현을 꽤 많이 아끼는 편이었다.수려한 외모에, 뛰어난 학습력, 무엇보다 전혀 가볍지 않은 묵직한 무토 같은 그의 성향을 높게 샀다.재벌가의 자제로서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이회장의 자랑거리였다.이회장이 이태현을 아끼는 데에는 태현의 순종적인 면도 한 몫 했다.자신의 아버지의 말이라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이회장이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하지만.결혼에 있어.사업 확장을 위한 완벽한 장기 말에 있어.이태현이 조금씩 삐걱거렸다.그의 반항이.시작되었다.자신이 장기 말로 쓰인다는 것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다.이태현은 지독하게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거스를수 없는 그깟 운명 따위에 대한 미련이 아니었다.그저.조금만 더, 조금만 더...자신의 결혼을 늦추고 싶어 했다.“하아...”건우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터졌다.태현은 여전히.자신의 카르텔 멤버들에게 대정그룹의 차녀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입을 뻥긋하지 않았다.그냥.매주 주말마다.관심 없는 여자들과 선을 보고 있다는 것 말고는.“여기에 뜰 정도면...”건우가 보고 있는 이 VIP 전용 블라인드 리포트에 올라올 정도라면.이미 내부에서 어느 정도 일이 진척되었음을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