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토요일 오후.
최기범의 한남동 저택은 차가운 침묵에 짓눌려 있었다.
아버지 최승현 회장의 생일이라 화목해야 마땅한 날이었지만, 집 안에는 싸늘한 냉기만 감돌았다.
아무리 성향이 맞지 않아도 피를 나눈 부모 자식 사이였기에 최기범은 선물도 정성껏 챙겨 왔고, 처음엔 성질을 죽인 채 자리를 지키려 했었다.
자신을 향한 부모님의 애정은 여전했으나, 식탁 위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금세 날 선 대화로 무너져 내렸다.
“자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너 하나뿐인데, 아비 생일날도 얼굴을 찌그러뜨리고는······ 쯧, 네 엄마가 일을 저질렀어도 너는 중심을 잡아야지.”
“······노력 중이에요.”JW엔터테인먼트 사내 식당.주원형은 억지로 강소희의 손목을 끌다시피 하여 식당 안으로 향했다.주원형 역시 입맛이 싹 달아난 상태였지만, 회사 임직원들과 소속 연예인들 앞에서 강소희의 옆자리가 여전히 자신의 몫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도 피할 수 없는 자리였다.“대표님, 나 진짜 지금 제정신 아니에요.”강소희는 숟가락을 힘없이 잡은 채 입술을 바짝 깨물었다. 정갈하게 차려진 식판 위 음식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녀의 서늘하게 식어버린 얼굴을 바라보는 주원형의 식도 너머로 공기가 유난히 시리게 얹혔다.“나라고 속이 편하겠어? 하지만 네 이미지를 생각해. 지금 구석에 숨어서 쭈그러져 있어 봐라. 당장 사람들이 너더러 뭐라고 수군대겠어?”그 말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강소희의 경직되어 있던 얼굴에 순식간에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어머, 그러네. 신하늘한테 밀려서 차준호한테 차인 시시한 여자가 나라니.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요.”천 개의 얼굴을 가진 여자답게, 강소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아무렇지 않게 국에 밥을 말았다.물론 복스럽게 음식을 넘길 위인은 아니었으나, 표정만큼은 화장품 CF를 촬영할 때처럼 생기와 여유가 넘쳐흘렀다.차준호가 이토록 파격적으로 신하늘의 손을 잡아줄 줄이야. 작년 말부터 치밀하게 세워두었던 김희주와의 연대와 계획이 산산이 부서졌음을 직감했다.대한민국의 모든 시선은 이제 떠오르는 태양인 신하늘에게 집중되어 있었고, 차준호가 던진 속보는 단순한 열애설 이상의 거대한 정치적·상업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어떻게 차준호는 이렇게 사람 뒤통수를 후려치는지.”주원형은 혀를 차며 제육볶음을 크게 한술 떠 입에 넣었다.“원래 차준호
[올해 뜨거워질 총선 열기의 신호탄은 세종동! 과연 유권자의 마음은?][정치 9단 막강 권력자 김희주와 신출내기 다크호스 신하늘! 폭풍의 격돌 예고!][TT 여론조사 결과 34% 대 32% 박빙! 중도층 표심이 최대 변수!][당대표를 노리던 김희주에게 치명타 입힌 신하늘! 경쟁당의 파격 영입 시도되나]아침이 되자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은 온통 내 이름으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아직 선거 시작도 하지 않았고, 선거인명부를 제출하지도 않았는데.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알림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면서도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듯 거세게 요동쳤다.어쨌든 그건 그거고 나의 일은 차질 없이 해야 했다.밤을 꼬박 새워 작성한 보고서를 최기범에게 제출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돌렸다.회사 피트니스센터 샤워실에서 씻고 나오는데, 나를 향하는 사원들의 시선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해진 상태였다.마치 톱스타 에스텔라를 바라볼 때나 감돌던 묘한 호기심과 경외심이 섞인 눈빛과도 닮아 있었다.어제 휴대전화 전원을 꺼둔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였다. 쏟아진 문자와 미확인 음성 메시지, SNS 반응은 폭발적인 수준이었다.단 한 번도 비공개로 전환한 적 없던 게시물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열띤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었다.Umm Umm UmmUm Um Um Um Um시시각각 서늘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발신자 제한으로 온 문자들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악담으로 내 마음을 베어냈다.정치판에는 얼씬도 말라는 경고부터, 주변 사람들을 생각해서 자중하라는 치졸한 협박까지. 글자마다 서슬 퍼런 독기가 뿜어져 나왔다.계속 설치다간 험한 꼴을 볼
그날 밤, 자정을 넘긴 시각.신하늘이 터트린 충격적인 파장 덕분에 도국은 예정에 없던 일정이 백지화되며 간만에 유쾌한 여유를 얻게 되었다.그가 발길을 옮긴 곳은 잠실에 위치한 이아준의 레지던스였다.JW 대표실에서 보쌈으로 든든히 배를 채웠음에도, 도국은 문을 연 24시간 분식집에 들러 맥주와 떡볶이, 순대, 튀김 따위를 포장했다.벅차오르고 기분 좋은 일이 생길 때면 어째서 이런 투박한 음식들이 먼저 떠오르는 걸까.어린 시절, 진심으로 행복했던 순간마다 늘 곁에 놓여 있던 음식들이라 그런지도 몰랐다.“나 어제도 최고의 하루였는데 오늘도 운수 좋은 날로 쳐야겠다. 도국이가 불쑥 찾아오다니, 하하!”도국이 이아준의 레지던스 경계를 넘어서자마자, 이아준은 그를 기꺼이 환대했다.거실 TV를 나지막이 틀어둔 채, 두 사람은 테이블 위에 맥주 캔과 떡볶이, 순대, 모둠 튀김 같은 서민적인 음식들을 펼쳐놓았다.“대표실에서 보쌈을 그렇게 먹고 왔는데, 이상하게 이게 또 당기더라고.”그 말에 이아준이 손가락을 튕기며 화답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나도 저녁에 스테이크를 썰긴 했는데, 떡볶이 들어갈 배는 따로 있지. 아무래도 나, L그룹을 생각보다 훨씬 빨리 집어삼키게 될 것 같다. 혼술이라도 할까 했어.”“잘됐네. 축하한다.”“지금 심정 같아선 팬티만 입고 잠실역 한복판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다니까, 하하!”도국은 맥주 캔을 내밀며 이아준을 향해 넌지시 입꼬리를 올렸다.이아준은 떡볶이 조각을 집어 먹으며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리더니, 도국의 맥주 캔에 제 캔을 가볍게 부딪쳤다.“몸 관리 끝판왕인 주원형 대표가 너랑 보쌈을 먹
차준호가 나를 위해 공식적인 연인이라 선언을 한다고?늘 내 뒤를 묵묵히 받쳐주고, 나를 품어 안을 때나, 심지어 차진철 회장 앞에서도 애매모호한 여지를 남기던 그였다.하지만 미래까지 함께할 수는 없다며 단단한 벽을 치던 남자가 이제 와서 나를 자신의 여자라고 세상에 밝히겠다니.나는 그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를 직시하며 크게 숨을 삼켰다. 그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대표님은 이 회사의 명운을 짊어진 분입니다. 굳이 그런 위험까지 감수하실 필요는 없습니다.”그러자 차준호가 한 발짝 바짝 다가서며 낮게 읊조렸다.“이대로 혼자 달려 나가다 멈춰 섰을 때, 내 여자라는 태그를 달아놓아야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테니까.”결국 이것 때문이었나.내가 또다시 홀로 남아 처참하게 짓밟힐까 봐. 판을 흔든 뒤 감당해야 할 그다음까지 그가 미리 걱정해 주는 건가.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길은 고마웠고, 모든 것을 걸고 지켜주려는 그의 중후한 헌신에 가슴이 울컥거릴 만큼 감격스러웠지만······.“너무 늦었네요, 대표님.”말을 마친 나는 서늘하게 돌아설 준비를 하였다.어차피 나를 온전히 안아줄 마음이었다면, 지난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확실히 내 옆에 서 주었어야 했다. 이미 다 지나버린 일이었다.내가 걸음을 옮기려 하자, 차준호가 전격적으로 일어서며 내 손목을 강하게 쥐어잡았다.“그래, 지독하게 늦었다는 거 알아.”억센 악력 뒤로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그러니 내가 이렇게 서두르는 거야. 일단 식사라도 제대로 마치고 가.
그 시각 JW엔터테인먼트 소속사 대표실. 때아닌 신하늘 사건의 파장으로 인해 긴급 비상 회의가 소집되었다.강소희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지 않았다. 굳이 신하늘 같은 밑바닥이 조금 꿈틀거렸다고 소속사 전체가 비상이라니.“대표님, 대체 이게 무슨 난리예요?”“소희 씨, 지금 보통 큰일이 아니야. 신하늘 때문에. 김희주 똥물이 우리한테 튈 거야.”김희주가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에 강소희는 내심 자나 깨나 바라던 숙원이 이루어진 듯 쾌재를 부르던 참이었다. 누구보다 김희주의 몰락을 열렬히 바라온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세종동 서쪽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최기범과 가까이 지내면 오물이라도 묻는다는 듯 벌레 취급하던 여자였다.최기범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짝사랑했다는 이유 하나로, 온갖 수모와 멸시를 준 악녀 중의 악녀가 김희주였는데.최기범을 멀리하기만 하면 부와 인기를 모두 안겨주겠다며 주원형 대표에게 파격적인 지원을 퍼붓고, 정치적 입김을 넣어 강소희의 입지를 다져준 것 역시 김희주였지만 하나도 반갑지 않은 세월이었다.“이를 어쩌죠, 대표님? 큰일이네요, 정말.”옆에 있던 김훈까지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건지.“김희주가 힘을 잃고 무너지면 그게 우리 소속사에 경사가 아닌가요? 그동안 그 여자가 얼마나 내 피를 말리게 했는데요. 쯧!”사실 주원형 대표 역시 김희주에게 또 연락이 왔다며 부들부들 떨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입맛대로 본인이 속한 정당의 행사에 불러내고, 강소희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은근한 협박과 압박을 일삼던 김희주가 아니었던가.“소희 씨,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진짜 문제는····&m
이아준은 방금 자신이 들은 말이 현실이 맞는지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이왕춘 회장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만큼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언제나 이아준의 경영 능력을 시험하듯 날 선 시선으로 엄격하게 평가해 왔다. 십만 명이 넘는 임직원과 그 가족들의 생계, 나아가 대한민국 경제 전반을 흔들 수 있는 자리였기에 회장의 선택은 지독하게 신중했다.“올봄이요?”그런 그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판을 움직이고 있었다.“내 지분 전체, 4월 초에 네 앞으로 전부 넘겨주마.”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이아준은 늘 복수라는 칼을 품은 채 L그룹을 제 손으로 집어삼키는 것을 인생의 단 하나뿐인 목표로 삼아왔다.아버지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인이었음에도 이왕춘의 반대로 내쳐졌던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가 죽음에 임박해서야 뒤늦게 혈육을 찾겠다며 악착같이 자신을 거두어들였던 늙은 너구리 같은 이왕춘.단 한 번도 아버지의 온기를 느껴보지 못한 채, L그룹이라는 거대한 지옥 굴에 들어와 지난 십 년 동안 견뎌내야 했던 핍박과 수모를 아준은 단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그래서일까. 지금 이 순간 그의 심장은 폭발할 듯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이건 조금 놀랍네요, 할아버지.”여유로움을 가장한 시선으로, 이아준은 그동안 자신을 벌레 취급했던 나지란과 이아정을 물끄러미 건너다보았다.“아······ 아버님······.”발끈하며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도 모자랄 나지란과 이아정마저 넋이 나간 채 입만 벌리고 있었다. 이 역시 뜻밖의 광경이었으나
난 차준호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오전에 회사에 들른 뒤 자료를 챙겨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향했다.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은 진창에 처박힌 내 마음처럼 흐릿했다.가던 중에 벨이 울려 확인하니 반가운 도국이었다.-하늘아, 어디야?요즘 부쩍 날 챙겨 주는 도국과 이아준이었다. 회사 일로 바쁜 날 염려해 주는 동시에 고민이 있는 엉망인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여러모로 신경 써주니 고맙기만 했다.“바쁜데, 뭘 또 전화까지. 난 병원 가는 길.”-어제도 밤새 게임같이 해 놓고 피곤하겠네.“오늘 3시 출근이라 늦잠 잤어. 참,
무슨 그런 거짓말을.내 머릿속에선 운명 교향곡이 요동쳤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한 거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수면 부족과 카페인의 부작용일까. 평소 차분함과 다혈질이 공존하던 내 감정은 이미 균형을 잃은 지 오래였다.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물은 엎질러졌다.“재미있네. 나는 신 비서를 좋아하지도, 사귈 리도 없을 텐데?”차준호는 내 말을 믿지 않았는지 코웃음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난 목에 닿은 펜던트를 무의식적으로 만지다가, 그의 손길이 닿았던 순간이 떠올라 몸을 떨었다.이걸 그가 크
사람들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유령처럼 떠돌던 이름의 실체.신하늘, 신 비서. 차준호는 누워 있는 내내 의식의 수면 아래에서 울리던 그 이름이 내심 신경 쓰였다.하지만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실체를 마주한 순간, 관자놀이가 끊어질 듯 욱신거리며 지독한 두통이 밀려왔다.그녀의 이름 세 글자가 왜 이토록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거슬리게 긁어내리는 걸까. 기묘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졸졸 쫓아다녀 철벽만 치기 바빴던 강소희랑 같이 사고가 났다니. 하지만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한 톨의 아쉬움도 일지 않았다.대신 눈앞의 신하늘
기자를 상대하는 동안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카메라 앞에서 당당해지고, 브리핑하거나 질문에 응답하는 순간에도 능숙 능란해져 있었다.차분한 척, 완벽한 듯, 긴장감이 첫날보다는 옅어졌다. 사람은 역시 학습의 동물이라고 무슨 아나운서가 된 양 나는 그리 기자들을 상대했다. -차준호 대표님이 대화가 가능하다던데. 확실히 강소희와 사귀는 사이가 맞는지 확인하셨습니까? 답변 부탁드립니다!“차준호 대표님께서는 일체 사생활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회사 측에서도 이번 사건은 아는 바가 없습니다.”-언제 CH에서는 공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