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생은내맘대로
내 약혼자 유승진에게는 이상하리만치 철저한 원칙이 하나 있었다.
밤 9시가 넘으면, 누구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우리 사이가 가장 뜨거웠던 때조차 예외는 없었다.
시계가 9시를 가리키는 순간, 유승진은 언제나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한번 귀가가 늦어진 날이 있었다.
누군가 계속 뒤따라오는 기척에 겁이 난 나는 다급히 유승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걱정이 아니라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나이가 몇인데 그래? 다른 사람 생활 패턴도 좀 존중해 줘. 끊는다.]
결국 그날 나는 혼자 지구대에서 진술을 마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유승진은 나에게 괜찮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그저 원칙이 철저한 사람일 뿐이라고.
오늘, 우연히 그의 노트북을 쓰게 되기 전까지는.
핸드폰과 연동된 통화 내역 속에서 이상한 기록 하나를 발견했다.
밤 9시부터 다음 날 아침 9시까지.
꼬박 12시간.
하루도 빠짐없이.
그것도 무려 5년 동안 이어진 통화였다.
상대는 낯선 사람도 아니었다.
유승진 어머니의 제자이자, 그의 연구조교.
화면을 바라보는 동안 온몸을 버티고 있던 힘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다리가 저릴 때까지 한참을 앉아 생각에 잠겼던 나는 말없이 노트북을 닫았다.
그리고 유승진과 함께 구청에 가서 하기로 했던 혼인신고 일정도 취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