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붉은 장미는 언제나 한 송이였다. 그리고 그 옆엔 늘, 차가운 시체가 있었다.” 연쇄살인범. 그녀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학대당했고, 그 기억 끝에서 그녀는 죽이는 법을 배웠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완벽하게 사라지는 여자. 단지, 붉은 조화 한 송이만 남긴 채. 하지만. 다섯 번째 살인에서 그녀는 처음으로 실수를 한다. 경찰의 추격, 조여오는 덫. 도망치던 골목에서 마주한 낯선 남자. 그 순간, 그녀는 그에게 키스를 했다. 살아남기 위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단 한 번의 거짓된 입맞춤이었다. “우리, 결혼합시다. 1년만. 진짜 말고, 그냥... 아내 대행.”
View More지독하게 습한 밤이었다.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공기는 젖은 수건처럼 눅눅했고,
도로는 피와 기름, 거짓말로 반짝였다.
시아는 그를 죽이기 위해 웃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을 천천히 바르며,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을 확인했다.
"정말로 안 보고 싶었는데."
남자는 마지막까지 그녀의 이름을 몰랐다.
그건 늘 그랬다. 사랑이라 착각한 남자들의 입에서 그녀는 한 번도 누구였던 적이 없었다.
욕망, 환상, 우월감 그 안에서 그녀는 언제나 타인으로 소비됐다.
그러니 죽일 이유는 충분했다. 아니, 오히려 늦은 편이었다.
그는 알코올에 절어 있었고, 침대는 전보다 훨씬 더럽고, 욕망은 훨씬 뚱뚱해져 있었다.
시아는 그의 목을 꺾었다. 정확하게, 빠르게, 소리 없이.
그녀는 죽은 남자의 가슴 위에 늘 그러했듯 붉은 장미 한 송이를 조용히 올려놓았다.
조화였다. 시들지 않는 장미. 피처럼 번지지 않는...
"잘 자요, 쓰레기."
그녀는 뒷문을 열고 나가려다, 문득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현관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무거운 구두. 여러 사람. 무전기 소리.
‘…누가 올 리가 없는데.’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입력할 새도 없이 문 너머에서 누군가 외쳤다.
“경찰입니다! 당장 문 여세요!”
심장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아니, 그녀의 귓가에서 터졌다.
'왜. 왜 지금. 왜 오늘.'
시아는 창문을 열고 몸을 던졌다.
이층. 충분히 견딜 수 있는 높이였다.
무릎이 깨졌고, 손목이 비틀렸다.
하지만 뛸 수는 있었다.
그녀는 뒷골목을 타고 달렸다.
운동화 밑창이 벗겨지고, 발바닥이 피로 번졌다.
뒤에서 경찰이 외쳤다.
"여기서 멈춰! 움직이면 쏜다!"
'거짓말... 죽이고 싶으면 죽여.'
그녀는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숨이 더 급했다.
숨었다. 기어들었다.
낮은 환풍구, 쓰레기통 뒤, 폐간판 아래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처음으로 '죽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느꼈다.
'지금 죽으면 너무 비참하잖아.'
'이렇게...이대로...마무리할 수는 없어
그때였다.
그녀의 시야에 하얀 이어폰을 낀 남자가 들어왔다.
회색 후드티. 가방은 크고, 고개는 숙여져 있고.
피규어 캐릭터가 잔뜩 그려진 에코백을 메고 있었다.
정말이지, 이 모든 혼란 속에서 너무나 평범하고 무방비한 남자였다.
대체 무슨 소리를 들으며 저렇게 천진하게 걷고 있는 걸까.
그녀는 무심코 그를 향해 나아갔다.
그리고, 그의 팔을 붙잡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의 입술을 가져갔다.
정확히 깊고 순간적으로 남자는 그 충격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속삭였다.
"지금부터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이해 안 가도 좋아요. 그냥 움직이지 마요."
경찰이 쫓아왔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했다.
남자와 여자, 거리 한복판에서 입을 맞춘 연인처럼.
경찰은 잠시 멈췄다.
서로를 확인하듯. 주저함. 혼란. 시간이 흐르지 않는 틈.
그 짧은 망설임 사이...그녀는 남자의 팔짱을 껴안았다.
"여보~! 치킨 먹으러 가기로 했잖아. 여기서 왜 멍 때려? 배고파 죽겠어."
남자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에게 이끌려 골목 너머로 사라졌다.
그 순간 경찰이 다가왔을 땐 그녀는 이미 그 남자에게 안겨 웃고 있었다.
"연인 분들이세요?"
남자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녀가 보낸 무언의 신호를 이해했다.
“…네. 와이프예요.”
식은땀이 흘렀다. 상황을 모르는 채 그저 그녀의 표정을 따라 연기한 남자.
경찰이 물러갔다.
차윤은 뒷골목 가로등 아래에 서서 천천히 입술을 닦았다.
입가엔 피가 맺혀 있었다.
누구의 피였을까. 그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남자는 마침내 말했다.
“…지금 이 상황 대체 뭐예요?”
그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 밑에 그늘이 진, 말간 눈동자.
세상에 물들지 않은 사람의 순진함.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로또 맞은 거예요. 이거 보통 사람한텐 안 오는 기회니까.
오늘 일은 그냥 잊어요. 아니면, 기억에 남겨도 돼요. 당신 마음대로."
"…저기..이게 대체 무슨..."
"오. 그쪽 혹시 결혼 안 했죠?"
"네…? 뭐요?"
"집은 있어요? 자가? 전세?"
"어…자취하고 있고요. 이번에 아파트 장만했어요. 월세 아니에요."
"좋네요. 그럼 우리 결혼할래요? 진짜로 하는건 아니고, 딱 1년만...아내 대행 같은 거...어때요?"
그녀는 정말로, 그 말이 장난이 아니었다.
남자는 웃었다. 처음엔 헛웃음이었고, 그 다음엔 혼란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그냥, 지금부터 난 당신의 아내예요. 아내 역할을 할 거예요. 잘해줄게요.
밥도 차려주고, 빨래도 하고…당신이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어요."
"…왜요?"
그녀는 한참 동안 조용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쪽이라면 날 안 죽일 것 같아서요."
그렇게 계약 없는 계약이 시작됐다.
죽음을 벗어나 삶으로 숨어든 여자와,
평범한 일상을 살던 남자 사이에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고, 거짓도 아니었다.
그저, 붉은 장미처럼 죽지 않고도 시들지 않는 위험한 냄새가 풍기는 하나의 연극이었다.
끝을 모른 채 시작된 서막이었다.
* * * * *
남자의 이름은 이도윤이었다.
게임회사에서 클라이언트 파트를 담당하는 중간 개발자.
야근은 잦고, 말수는 적고, 혼자 사는 38세.
평생 연애는커녕, 손도 잡아본 기억이 없었다.
그가 집에 들여본 여자는 어머니 외엔 없었다.
그마저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그런 그의 집에 차윤이 들어왔다.
“신발… 벗어요?”
도윤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집이니까요.”
대답은 했지만 신발을 벗는 동작이 어딘가 조용하지 않았다.
순서가 틀렸고, 자연스럽지 않았다.
마치 신발을 벗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처럼.
도윤은 그 낯섦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거실에는 1:1 사이즈의 리미티드 피규어가 있었고,
창가엔 고양이 발 모양 무드등이 놓여 있었다.
“혼자 사세요?”
“네. …이제는 둘이 됐네요.”
“…그런 말 안 하는 게 좋아요. 그쪽은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니까.”
“제가요?”
“그래요. 거짓말 못 하죠?”
“……네.”
시아는 그 대답에 작게 웃었다.
어쩌면 그게 처음 본 ‘진짜 웃음’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바로 샤워실로 들어갔다.
도윤은 거실에 앉아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아직도 현실 같지 않았다.
몇 시간 전까지 그는 야근하고 있었고, 갑자기 여자에게 키스를 당했고,
그 여자는 경찰을 피해 나타났고, 지금 자기 집에서 샤워 중이다.
'이거… 게임 시나리오도 아니고.'
도윤은 혼잣말처럼 생각했다.
물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그녀가 나왔다.
그녀는 그의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사이즈였다.
머리는 젖어 있었고, 물방울이 턱 아래 떨어졌다.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죠. 지금은… 피곤해요.”
“…어, 네. 방 하나 비어있어요.”
“거기요?”
“네. 옆방이요.”
그녀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거실 불을 끄며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날 밤, 도윤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옆방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건 단순한 정적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불길한 침묵.
그는 문틈을 살짝 열어보았다.
차윤은 침대에 똑바로 누워 있었다.
양손을 가지런히 배 위에 올린 채, 죽은 사람처럼.
눈은 감고 있었지만 그 얼굴엔 고요한 미소가 떠 있었다.
이상했다. 너무 이상했다.
다음 날, 아침 7시.
도윤이 부엌에 나와 물을 끓이려던 순간 시아가 먼저 일어나 있었다.
손에는 식칼이 들려 있었다.
“…그거 왜 들고 있어요?”
도윤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윤은 칼을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 이거요? 아침 뭐 해줄까 하고 꺼낸 거예요. 계란은 있던데. 파는 없고.”
“…그, 네. 라면이라도 괜찮은데.”
“당신 입맛에 맞게 해줄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익숙한 동작으로 계란을 깼다.
어딘가 기계적인 손놀림. 정확하고 빠르지만, 감정은 없었다.
“라면이라해도 맛없을 수도 있어요.”
“괜찮아요. 누가 해주는 건 처음이라서요.”
그녀는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진짜로요?”
“네.”
“…왜죠? 당신, 그렇게까지 모쏠처럼 안 생겼는데.”
“혼자 있는 게 편했거든요.”
“그럼..내 아내가 되려고 하는건데요?”
“……당신이 살아남기 위해 그랬다잖아요.”
“…….”
“그럼 그 이유면 저한테도 충분한 것 같아요.”
그녀는 말없이 라면을 휘저었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식사가 끝난 후, 도윤은 출근 준비를 했다.
“오늘은 일찍 퇴근할게요. 저녁 같이 드실래요?”
“당신, 나한테 반했어요?”
“아니요. 그냥 누군가가 집에 있다는 게 처음이라서요. 그게 싫지 않아서요.”
그녀는 웃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했다.
“…저녁, 고기 먹고 싶어요. 많이. 배 터지게.”
“소고기요?”
“돼지고기. 구워서. 김치랑.”
“네. 그렇게 할게요.”
도윤이 출근한 뒤, 그녀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모니터, 키보드, 책상, 게임 피규어. 침실엔 베개가 두 개나 있었다.
하나는 여분처럼 새것이었고, 한쪽엔 먼지가 거의 없었다.
그녀는 도윤의 책상 앞에 앉아 그가 켜놓은 모니터 속 게임 캐릭터를 바라봤다.
피가 없는 전사. 검을 든 여전사. 화면 속엔 빛이 가득했다.
그녀와는 정반대였다.
그리고 처음으로 자신이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은 죽음을 몰라. 나는 그걸 입고 살아.'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망했네… 여기 너무 조용해서 피 냄새가 묻는다.”
밖은 햇빛이 따갑고, 세상은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쫓는 그림자가 조용히, 서서히, 이 집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그리고 그림자가 이 집에 닿기 전에 자신이 먼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것을.
도윤은 조용히 문을 닫았다.현관의 잠금장치가 덜컥, 소리를 내며 닫히는 소음이 낯설게 들렸다.집 안은 고요했다. 너무 고요했다.마치 이 공간이 애초에 두 사람의 삶을 품었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시아가 떠난 자리. 그녀의 신발이 사라졌고, 화장대 위에 늘 가지런히 놓여 있던 립스틱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욕실 선반에 걸려 있던 칫솔도 없었다.심지어 세탁기에 돌려놓은 속옷조차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정말, 다 가져갔네.”도윤은 멍하니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그녀의 체취는 아직 집안 곳곳에 남아 있었다.시트에 남은 은은한 향수 냄새,냉장고 안에 덩그러니 남은 그녀가 사다 놓은 맥주 두 캔,테이블 구석에 놓인, 그녀가 메모하다 마른 포스트잇 한 장.그는 손끝으로 그것을 집어들었다.글씨는 없었다. 단 한 줄도 쓰이지 않은 노란색 메모지.그녀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이별이란 단어조차 남기지 않은 채.시간이 흐를수록, 도윤은 점점 자신의 감정이 무뎌지는 걸 느꼈다.슬픔도, 분노도, 허무함도 하나로 뭉개진 채,그저… 그녀가 남긴 공백만이 그의 시간을 갉아먹고 있었다.회사는 이미 휴직계를 냈다.출근할 수 없었다. 아니, 출근해도 버틸 수가 없었다.그녀가 앉았던 식탁 자리에 불 꺼진 채로 앉아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결국 폰 화면을 내려놓았다.그는 컴퓨터를 켰다.이상하게도, 그가 마주한 모니터 화면이 이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출구처럼 느껴졌다.‘너를 기억해야겠다.’‘그렇지 않으면, 나는 끝없이 무너질 것 같으니까.’그날 밤, 도윤은 한 줄씩 코딩을 시작했다.초라한 비주얼 노벨 형식의 미니 게임.게임 속의 주인공은 이름 없는 여자였고,그녀는 아무 말 없이 어느 날 그의 삶에 들어왔다가 또 조용히 떠났다.그녀가 했던 말, 웃었던 얼굴, 화냈던 목소리.그 모든 기억을 대사로, 스프라이트로, 배경 이미지로 옮겨 담았다.“그쪽도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텐데?”“1년만 딱. 진짜 결혼은 아니니까.
서울 시립병원 중환자실.흰 커튼 너머, 폐소독기의 알람이 조용히 울렸다 꺼졌다.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그 누구도 다급하지 않았다.이미 알고 있는 싸움의 끝이었기에.백시아. 호흡기와 링거에 의지해 겨우 생명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상태는‘회복 불가’.의학적으로 더는 시도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의사는 조용히 말했다.그 곁에, 도윤이 앉아 있었다.하루 전까지 그를 감시하던 경찰은 모두 물러났다.그는 참고인에서 ‘무관한 일반인’으로 변경되었고, 어떠한 진술도, 증언도 거부했다.“그 여자를 압니까?”조진혁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를 천천히 저었을 뿐이었다.“그 사람… 모릅니다.”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도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 곁을 지켰다.밥도 거의 먹지 않았고, 잠도 들지 못한 채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한 번이라도. 정말 한 번만이라도. 그녀가 눈을 뜨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며“시아야…”“이름이었구나. 처음으로 네가 말해줬던…”“나는 아직도 그날 생각해. 그 황당했던 첫 키스. 그리고, ‘로또 맞았다 생각하라던’ 그 말.”“넌 나한테 재앙이었어. 그런데 왜 이렇게도 그리운 거야.”그는 이마를 침대에 붙인 채 조용히 울었다.그로부터 며칠 후, 진혁은 권재석의 사망 이후 경찰 내부 인사에 대한 수사 결과를 정리했다.“강력 4팀장 박주한, 서울서부서 강력계 이윤석, 경기남부 정보계 신영우 모두 권재석의 라인에 있었던 인물들입니다.”그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했다.대가성 수사 조작, 사망자 수 조작, 피의자 고문.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시아’라는 이름은 한 줄만 언급되었다.[모든 기록은 소거되었으며, 그녀의 존재는 사라졌음.]그날 저녁, 진혁은 경찰서 자신의 사무실 책상 서랍에서 작은 메모 하나를 발견했다.그 종이는 누군가의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고, 다 적지도 못한 글자들이 삐뚤게 흘러내리고 있었다.[나는 괴물이에요. 그게 끝까지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맨 마지
새벽 4시 10분.철문이 두 번 열리고, 경비 조명이 천천히 꺼졌다.백시아는 수갑과 족쇄를 찬 채, 검은색 호송복을 입고 교도소 밖으로 걸어나왔다.숨이 흰 안개처럼 입 밖으로 터졌다.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주차장엔 군용 트럭에 개조한 호송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조수석 쪽 문이 열리고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처음 보는 인물. 하지만… 시선을 마주한 순간, 백시아는 알아차렸다.“조직이 보낸 놈이네.”남자는 대꾸 없이 뒷문을 열어 시아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말하지 마. 어차피 넌 오늘 이송되지 않아.”문이 닫히고 엔진이 켜졌다.하지만 차는 정문으로 가지 않았다.5분. 10분.방향이 달랐다.위치는 남쪽이어야 했지만, 차는 서쪽 외곽도로로 빠지고 있었다.백시아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수갑의 연결고리를 비틀었다.몇 주간 준비해온 작업.징벌동 안에서 손톱 틈으로 감춰 들여온 얇은 와이어.그녀는 미세하게 철사를 회전시켜 고리를 푼 뒤, 손을 묶은 채 정좌했다.숨이 천천히 빨라졌다.“이 차 안에서 죽을 수도 있겠군.”“하지만 적어도 누굴 죽이기 위해 나가는 건 아니야.”그 시각, 도윤은 눈을 가린 채 철제 의자에 묶여 있었다.재석은 탁자에 앉아 작은 나무상자를 하나 꺼냈다.상자 안엔 여섯 개의 지문이 찍힌 카드.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비어 있었다.“이제 너 하나만 남았어.”“이걸로 금융 거래도 되고, 신분 세탁도 돼.이 여섯 명 모두 내 밑에서 움직이다 필요 없어져서 죽인 놈들이지.”그는 마지막 지문칸을 톡톡 두드렸다.“이 칸엔 백시아가 들어올 거였어.”“하지만, 네가 바뀌었지.”도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얼굴은 푸르고, 입술은 터 있었지만 눈동자만은 살아 있었다.“당신은 끝이 없는 사람 같네요.”“사람을 고르고, 이용하고, 망가뜨리고, 그러고도 아무 일 없단 듯 숨 쉬죠.”“하지만 그 여자는, 그 망가짐 속에서 어떻게든 사람답게 살아보려 했어요.”“그게 제가 그녀를
서울중앙지법 사무국.경수 변호사는 묘한 웃음을 띠며 서류 한 장을 넘겼다.“사형 일정 재검토 신청서입니다.단, 피고인 측 변호인 사임 이후 공식적인 변론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되는 건 이례적이지만 배경은 충분하죠.”그의 책상 위엔 두꺼운 서류철.그 안엔 정리된 피고인 백시아의 정신 감정 결과와 5건의 살인사건, 그리고 그녀가 저지른 범행 장면을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스틸 컷들이 담겨 있었다.이 모든 걸 정리해 넘긴 사람,권재석.그는 백시아의 사형 집행을 앞당기기 위해 로비와 여론전을 동시다발적으로 벌이고 있었다.그의 이유는 간단했다.“감정이 생기면, 괴물도 사람이 돼버리거든.”“그 전에 죽여야 돼. 진짜 괴물이 되기 전에.”그 시각, 교도소.시아는 이령과의 약속대로 자신의 최초 살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 넘겼다.다섯 건의 공식적인 범행 외에 언급조차 되지 않았던 여섯 번째,혹은 첫 번째로 불러야 할 그 사건.“열여섯. 계부였어.”“한 번도 말한 적 없었지. 그 누구에게도.”이령은 묵묵히 들었다.“경찰한테 넘기면, 무죄를 주장할 근거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시아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난 무죄가 아니야. 그 인간을 죽인 것도, 그 이후 다섯 놈을 죽인 것도 내가 선택한 거였으니까.”“그냥, 이제 내가 쥐고 있는 칼자루가 누굴 향하고 있는지만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거야.”도윤은 그날, 자신의 책상 위에 경고성 사진 한 장이 놓인 걸 발견했다.사진 속엔 시아가 수감복을 입고 걷고 있는 모습,교도소 담장 바깥에서 몰래 찍은 저해상도 사진.“누구지… 누가 이걸…”진혁은 이 사실을 접하자마자 경찰 내부를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우리 안에도… 조직과 손잡은 놈이 있어.”“그리고 너, 이제부터는 진짜 조심해야 해. 백시아가 가진 정보가 조직의 숨통을 쥐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그 여자를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다 너에게 달려 있어.”그날 밤, 시아는 교도소 창살 너머로 달을 올려다봤다.눈 아래 붉게 그은 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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