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유산은 모른 척, 이혼에 왜 눈물?

By:  보루비Ongoing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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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3개월 됐을 무렵 진윤슬은 누군가에게 납치당한다. 하지만 편애가 심한 남편과 가족들은 진윤슬의 여동생인 진세린의 생일 파티에 정신이 팔려 그녀의 절박한 구조 요청 전화를 끊어버린다. 결국 진윤슬은 폭우 속에 차갑게 버려진 채 유산의 고통을 겪는다. 그 후 회사의 수석 조향사 자리를 죽마고우인 진세린에게 주는 남편 문강찬. 설상가상 향수 레시피를 팔아넘겼다는 누명까지 쓰게 되면서 그녀가 피땀 흘려 만든 향수 시리즈를 진세린에게 넘길 수밖에 없게 되는데... 마음이 식을 대로 식어버린 진윤슬은 결국 결혼의 마침표를 찍는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났을 때 진윤슬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오리엔탈 향수 마스터로 거듭났다. 수많은 찬사와 함께 그녀 곁에 여러 스타일의 남자들이 몰려든다. 편애가 심했던 가족들은 뒤늦게 후회하며 그녀에게 용서를 빌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문강찬은 진윤슬을 찾아와 눈물을 머금고 재결합을 원한다. “내 목숨이라도 줄게. 날 한 번만 더 속여줘.” 하지만 모든 증여 계약서를 갈기갈기 찢어버린 진윤슬. “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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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다람시.

저녁 8시가 되자 번개가 칠흑 같은 하늘을 가르면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진윤슬은 얼음처럼 차가운 땅바닥에 웅크린 채 붉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걸 지켜봤다.

빗물에 퉁퉁 불어 하얗게 변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매만지며 연락처에 저장한 번호로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여자 기계음이 빗속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

“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결국 거센 빗줄기 아래 휴대폰 화면이 꺼져버렸고 아무리 눌러도 켜지지 않았다.

...

밤 9시, 도성 병원.

의사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

“환자분 유산했어요. 보호자한테 알렸나요?”

“알렸습니다. 그런데...”

간호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요?”

의사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가득했다.

“환자 보호자가 생일 파티 중이라 시간이 없다고...”

...

밤 11시 30분.

진윤슬은 하얀 조명 아래 투명한 링거액이 떨어지는 걸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병실 문이 열리더니 약간 피곤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윤슬.”

한 시간 전, 수술실에서 나온 진윤슬은 간호사의 연민 어린 시선을 받으며 휴대폰을 빌려 문강찬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 되면 와서 병원비 좀 내달라고.

그리고 그녀의 남편 문강찬이 드디어 나타났다.

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두 눈에 피로가 묻어있었다.

진윤슬은 눈가에 눈물이 고여 고개를 돌렸다.

“어디 아파?”

문강찬은 침대 옆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문자를 보고 급히 달려오긴 했지만 진윤슬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진윤슬은 갑자기 심장을 칼로 도려내듯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문강찬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다정한지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빗속에서 죽을 뻔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원래 이런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문강찬에게서 풍겨오는 술 냄새에 진윤슬은 속이 울렁거렸다.

“휴대폰이 고장 났어. 미안한데 병원비 좀 내줘.”

진윤슬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목소리가 다 갈라졌다.

다른 일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면 그때 다시 얘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강찬은 아내의 말투에 절제된 혐오감이 담겨 있다는 걸 느끼고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설명했다.

“오늘 세린이 생일이었어. 알잖아, 너도.”

진윤슬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이 진세린의 생일이라는 걸 당연히 알고 있었고 진세린에게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어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과 남편은 거의 밤새 그곳에서 파티를 즐겼다. 그 때문에 진윤슬이 고통에 몸부림칠 때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이었다.

“응. 알아.”

진윤슬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문강찬이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세린이 생일 파티에 너도 초대했는데 네가 오지 않고서는 왜 이제 와서 난리야?”

‘난리?’

그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진윤슬의 마음을 후벼팠다.

문강찬은 아무것도 몰랐다. 진윤슬이 납치당했다는 것도, 아이를 잃었다는 것도.

가슴 속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강찬 씨 말은 내가 일부러 입원했다는 거야?”

오랜 침묵에 숨이 턱턱 막혔다. 문강찬의 두 눈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지만 진윤슬은 그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걸 쉽게 읽어냈다.

가슴이 너무 아픈 나머지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됐으나 문강찬은 진윤슬을 이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 얘기했다간 싸울 거라는 걸 알아차린 문강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병원비 낼 테니까 푹 쉬어. 김 닥터도 금방 올 거야.”

김해인은 산부인과 의사였다. 진윤슬이 임신한 후로 줄곧 김해인에게 진료를 받았다.

“강찬 씨, 혹시...”

진윤슬은 갑자기 아이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언니.”

그때 문이 열리면서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윤슬이 하던 말을 멈췄다.

진세린이 핑크 롱 원피스 차림에 검은 긴 머리를 틀어 올렸고 머리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왕관을 쓰고 있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언니, 괜찮아?”

진세린이 다가오자 진윤슬은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다시 삼켰다. 그녀를 본 순간 받지 않은 수많은 전화와 비가 내리는 추운 밤에 죽을 뻔했던 느낌이 다시금 떠올랐다.

원망과 증오가 저도 모르게 치솟았다.

“아직 안 죽었어.”

진윤슬의 목소리가 싸늘하기만 했다.

진세린이 눈물을 글썽거렸고 두 눈에 죄책감이 가득했다.

“미안해. 생일 파티에 강찬 오빠를 부르지 말았어야 했는데.”

진윤슬은 눈을 감았다. 몸이 아팠고 마음도 지쳤다.

“세린이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문강찬은 눈살을 찌푸리며 진윤슬의 말투에 불만을 드러냈다. 진윤슬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실 진윤슬은 원래 진씨 가문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고 귀국한 지 얼마 안 된 진세린을 더욱 꺼렸다.

귀국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벌써 여러 번이나 싸웠다.

진세린이 겁먹은 얼굴로 계속 말했다.

“언니, 무엇보다 아이가 중요하잖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앞으로는 오빠랑 거리를 둘게.”

“내가 임신한 걸 알고 있었구나.”

진윤슬의 얼굴에 옅은 조롱이 맴돌았다.

진세린은 귀국 후 쩍하면 문강찬을 불러냈다.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입술을 깨문 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세린아, 나가 있어. 윤슬이랑 얘기 좀 할게.”

문강찬이 진세린을 달래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고 낮은 목소리로 당부했다.

“언니랑 싸우지 마. 아이를 가진 몸이잖아.”

그러고는 아쉬운 듯 여러 번이나 뒤돌아보고 나서야 나갔다.

남편을 올려다보는 진윤슬의 눈빛이 싸늘하고 슬펐다.

병상에 누워있는데도 남편의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진세린의 생일 파티를 망치려고 못된 생각을 했다고 단정 지었고 결국 다른 여자가 말리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세린에게는 부드럽던 문강찬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변했다.

“진윤슬, 우리 일에 세린이를 끌어들이지 마. 세린이는 너한테 잘못한 게 없어.”

대놓고 진세린을 감싸자 진윤슬은 고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두 사람이 부부로 산 지 3년이었다. 처음에는 계약 결혼이었지만 나중에는 진심으로 마음을 주었다.

전에는 문강찬도 그녀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진세린이 귀국하고 나서야 문강찬이 3년 동안 그녀에게 마음을 조금도 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는 모든 다정함을 진세린에게만 주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진윤슬은 포기하지 않으면 행복한 날이 올 거라고 순진하게 믿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마음을 조금도 녹이지 못했다.

“강찬 씨, 우리 이혼해.”

진윤슬은 링거를 올려다보면서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마음만은 무척이나 굳건했다.

사실 진세린이 돌아왔을 때부터 이혼 생각이 들었지만 이 감정에 미련이 남아 망상을 품었다.

문강찬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냉랭했던 표정이 살짝 누그러졌다.

“임산부가 감정 기복이 심하고 쓸데없는 생각도 많이 한다는 거 알아. 그런데 윤슬아, 세린이는 네 동생이야. 우리 아무 사이 아니야.”

진윤슬이 고개를 돌리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배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없어, 이제.”

진윤슬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찬 씨, 우리 아이 이제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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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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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빈
너무너무재미있어용ㅇ
2025-09-18 19:58:4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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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빈
너무너무재미있어요.
2025-09-18 19:58:2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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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실이
재미있음 여주 고구마 백개 답답함 흔한소재 할머니 건강으로 협박하면 거의 만사 OK 키워준 할머니 물론 중요해요 할머니 때문에 여주 인생이 없어요
2025-09-14 06:39:48
3
100 Chapters
제1화
다람시.저녁 8시가 되자 번개가 칠흑 같은 하늘을 가르면서 장대비가 쏟아졌다.진윤슬은 얼음처럼 차가운 땅바닥에 웅크린 채 붉은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걸 지켜봤다.빗물에 퉁퉁 불어 하얗게 변한 손가락으로 휴대폰을 매만지며 연락처에 저장한 번호로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여자 기계음이 빗속에서 계속 울려 퍼졌다.“연결이 되지 않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되며 삐 소리 후 통화료가 부과됩니다.”결국 거센 빗줄기 아래 휴대폰 화면이 꺼져버렸고 아무리 눌러도 켜지지 않았다....밤 9시, 도성 병원.의사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밤의 고요함을 깨뜨렸다.“환자분 유산했어요. 보호자한테 알렸나요?”“알렸습니다. 그런데...”간호사가 말을 잇지 못했다.“그런데요?”의사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가득했다.“환자 보호자가 생일 파티 중이라 시간이 없다고...”...밤 11시 30분.진윤슬은 하얀 조명 아래 투명한 링거액이 떨어지는 걸 멍하니 올려다보았다.병실 문이 열리더니 약간 피곤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진윤슬.”한 시간 전, 수술실에서 나온 진윤슬은 간호사의 연민 어린 시선을 받으며 휴대폰을 빌려 문강찬에게 문자를 보냈다. 시간 되면 와서 병원비 좀 내달라고.그리고 그녀의 남편 문강찬이 드디어 나타났다.하얀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두 눈에 피로가 묻어있었다.진윤슬은 눈가에 눈물이 고여 고개를 돌렸다.“어디 아파?”문강찬은 침대 옆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는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문자를 보고 급히 달려오긴 했지만 진윤슬에게 어떤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진윤슬은 갑자기 심장을 칼로 도려내듯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문강찬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다정한지 직접 보지 않았더라면, 빗속에서 죽을 뻔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원래 이런 차가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문강찬에게서 풍겨오는 술 냄새에 진윤슬은 속이 울렁거렸다.“휴대폰이 고장 났어. 미안한데 병원비 좀 내줘.”진윤슬은 너무도 지친 나머지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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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문강찬은 진윤슬이 고통스럽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이불을 덮어주었다.“푹 쉬어. 이따가 또 올게.”그는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아내와 더는 언쟁하고 싶지 않았다.“진윤슬, 너 또 세린이 괴롭혔지?”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벽에 부딪혔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훤칠한 남자가 성큼성큼 들어왔는데 진윤슬과 닮은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시선이 진윤슬의 창백한 얼굴에 닿은 순간 잠깐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거센 질책이 이어졌다.“오늘 세린이 생일인 거 뻔히 알면서 이 밤에 난리를 피워? 우리 기분 잡치게 하려고 작정했어?”진태호는 침대에 누워있는 진윤슬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불같이 화를 냈다.“온 집안이 시끄러워야 속이 시원해?”그는 진윤슬이 진세린의 생일 파티를 망치려고 일부러 아픈 척한다고 확신했다.진윤슬이 주먹을 꽉 쥐었다. 병상에 누워있는 그녀를 보면서도 친오빠라는 사람은 왜 아프냐는 둥 병원에 왜 왔냐는 둥 쏘아붙였다.마음속에 씁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아픈 것도 날을 골라가면서 아플 수 있어?”진윤슬이 싸늘하게 받아쳤고 갈라진 목소리에 조롱이 가득했다.진태호가 경멸과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됐어. 아픈 건 아픈 거고 세린이 좋은 마음으로 보러 왔는데 왜 울렸어?”조금 전 밖에서 진세린이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굳이 묻지 않아도 진윤슬이 울린 게 틀림없었다.‘넌 늘 이런 식이지. 말마다 가시가 돋쳐 있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한테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진윤슬의 시선이 진태호의 뒤에 있는 진세린에게로 향했다. 두 눈이 붉어진 채 가여운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오빠, 언니 때문이 아니야. 내... 내 눈에 모래가 들어갔나 봐.”이런 설명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아니나 다를까 진태호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진윤슬, 파렴치한 생각 따위 집어치워. 우리 진씨 가문은 너한테 빚진 거 없고 세린이도 너한테 빚진 거 없다는 걸 명심해.”“오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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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또 쇼하네.”진태호는 콧방귀를 뀌고는 땅에 쓰러진 진윤슬을 내려다보았다.“진윤슬, 켕기는 게 있으니까 기절하는 척하는 거지? 여기 병원인 거 잊었어? 의사가 보면 바로 알아.”문강찬이 진윤슬을 안아 올렸다. 정말 깃털처럼 가벼웠다.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최근 진윤슬을 거의 보지 못해 이렇게나 살이 빠진 줄도 몰랐다.“의사 불러올게.”진태호는 진윤슬의 거짓말을 폭로하려는 듯 밖으로 나갔다.바로 그때 병실 문이 열리더니 간호사가 들어왔다.진윤슬이 유산했는데도 옆에 보호자가 없어 약을 갈아야 하는 시간을 간호사가 직접 기억했다. 마침 진윤슬도 수액 한 병을 다 맞았다.그런데 진윤슬의 상태와 손등의 피를 보자마자 간호사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즉시 비상벨을 눌렀다.“선생님, 29번 환자 의식이 없어요. 응급 처치가 필요합니다.”곧이어 복도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고 의사와 간호사 몇몇이 달려와 진윤슬을 둘러쌌다.의사는 진찰 후 진윤슬을 응급실로 옮겼다.문밖에 있던 문강찬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고 심장도 빨리 뛰었다.그때 진태호의 무심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간호사님, 쟤 지금 연기하는 거니까 이렇게 호들갑 떨 필요 없어요.”그 말에 간호사가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환자분이 아픈 척하는 건지 아닌지, 그쪽이 우리보다 더 잘 알아요?”진윤슬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른 문강찬이 물었다.“대체 어디가 아픈 겁니까?”“환자분 유산했어요.”간호사는 짧게 대답한 후 급히 응급실로 들어갔다.복도에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진세린이 중얼거렸다.“언니 어쩌다가 유산했지?”문강찬이 넋을 잃은 얼굴로 서 있었다. 조금 전 진태호의 말을 들은 후 진윤슬이 흥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휴대폰을 꺼내 비서에게 오늘 밤 있었던 일들을 자세히 알아보라고 문자를 보냈다.진태호가 중얼거렸다.“유산했다고? 설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문강찬이 고개를 들어 진태호를 싸늘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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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곧이어 사진 몇 장이 도착했다.사진 속 문강찬은 검은색 고급 정장 차림에 가슴에 정교한 행커치프를 꽂고 있었다. 그리고 진세린은 우아한 드레스에 머리를 틀어 올린 채로 문강찬의 팔짱을 끼고 있었는데 부드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그야말로 선남선녀가 따로 없었다.진윤슬은 칼로 도려내듯 가슴이 아팠다. 아내는 유산으로 병원에 누워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은 다른 여자와 향수 대회에 참석했다.그리고 진세린이 입은 드레스는 딱 봐도 고급스러움이 흘러넘쳤고 값비싸 보였다.이 드레스는 진윤슬이 향수 대회 때 입으려고 예약했던 전투복이었다. 임청아가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한 것이었는데 보름이나 걸려 완성했다.며칠 전 임청아는 진윤슬에게 드레스가 다 완성되었다고 알렸다. 갑자기 일이 생기지 않았다면 진윤슬은 어제 옷을 찾으러 갔을 것이다.그런데 지금 진세린이 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생각할 것도 없이 문강찬의 짓임이 틀림없었다.진윤슬은 이를 악물고 침대에서 일어나 임청아에게 문자를 보냈다.[지금 갈 테니까 호텔로 드레스 한 벌 보내줘.]임청아가 답장을 보냈다.[알았어.]30분 후 진윤슬은 향수 대회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했고 임청아가 호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진윤슬의 모습을 보자마자 임청아가 화들짝 놀랐다.“윤슬아,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진윤슬은 숨기지 않고 유산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임청아가 분노를 터뜨렸다.“쓰레기 같은 것들, 감히 널 괴롭혀? 가자. 내가 복수해줄게.”그녀는 흥분한 임청아를 붙잡았다. 발 벗고 나서주는 임청아에게 고마웠지만 어떤 일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나 먼저 옷 갈아입을게. 이따가 메이크업 좀 부탁해.”“알았어. 윤슬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네 옆에 있어.”진윤슬은 임청아의 도움을 받아 드레스를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한 다음 간단하게 머리를 묶었다. 자신의 모습이 괜찮은지 확인한 후 임청아의 팔짱을 끼고 연회장으로 향했다.향수 대회는 업계의 큰 행사로 매년 개최된다.문산 그룹의 수석 조향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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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종업원이 쇼핑백을 받아 들자 진윤슬이 한마디 덧붙였다.“이 드레스 2억이 넘는 거라 중고로 팔아도 1억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원하면 집에 가져가도 돼요.”종업원은 흥분한 나머지 두 눈이 다 반짝였다.“감사합니다.”그러고는 진윤슬의 마음이 바뀔까 봐 쇼핑백을 꽉 쥐고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1억은 종업원에게 있어서 반평생을 모아야 겨우 모을 수 있는 돈이었다. 공짜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진세린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는데 금방이라도 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았다.진윤슬이 종업원에게 드레스를 주면서 중고라고 말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참을 수 없었던 진세린은 눈물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숙인 채 뛰쳐나갔다.“세린아.”문강찬은 진윤슬을 싸늘하게 쏘아보고는 바로 뒤쫓아갔다.진윤슬은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윤슬아.”임청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팔짱을 꼈다.오늘 일이 금세 소문이 퍼질 것이다. 진세린이 망신당하긴 했지만 문강찬이 진세린을 뒤쫓아간 것 또한 진윤슬에게는 매우 굴욕적인 일이었다.“괜찮아. 가자.”진윤슬은 가슴을 당당하게 펴고 걸어 나갔다.호텔 문 앞으로 나온 후 진윤슬은 임청아에게 사과했다. 임청아가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만든 드레스를 버린 건 그녀의 마음을 짓밟은 거나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렇다고 그 드레스를 다시 가져가기에는 마음이 찜찜했다.“그런 말 하지 마, 윤슬아. 예전에 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쯤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어.”임청아의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옷이 아니라 내 목숨도 너한테 줄 수 있어.”“무슨 헛소리야, 그게.”진윤슬은 재빨리 그녀의 손을 잡았다.“우리 같이 잘 살아야지.”임청아는 기어이 진윤슬을 병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출발하기도 전에 검은색 벤틀리가 문 앞에 멈춰 섰다.누군가 다짜고짜 진윤슬의 손목을 붙잡은 바람에 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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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문강찬은 베개를 가져와 진윤슬의 등 뒤에 받쳐 주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려 탄탄한 팔뚝을 드러냈다.그러고는 침대 머리맡에 놓인 보온 도시락을 열어 죽을 그릇에 담았다.맛있는 음식 냄새가 공기 중에 퍼지자 진윤슬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가 손을 뻗어 그릇을 잡으려는데 문강찬이 그릇을 들면서 침대 옆에 앉았다.“내가 먹여 줄게.”그의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웠다.진윤슬은 순간 멍해졌다. 진세린 때문에 갈등이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내가 알아서 먹을게.”진윤슬이 거절했는데도 문강찬은 서두르지 않고 숟가락을 진윤슬의 입가에 천천히 가져갔다.그 모습에 진윤슬이 얼굴을 찌푸렸다. 문강찬의 속마음을 정말 알 수 없었다. 차 안에서는 진윤슬이 진세린을 괴롭혔다고 질책하면서 사과하라고 하더니 지금은 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분했다.‘혹시 차 안에서 했던 말이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을 자극했나?’진윤슬이 숟가락에 담긴 하얀 죽을 보며 말했다.“할 얘기 있으면 그냥 해.”문강찬의 깊고 검은 눈동자에 부드러움이 감돌았다.“아이 일은 내가 잘못했어. 최대한 만회하고 싶어.”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한 태도였다.진윤슬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고 가슴속 울분이 끓어올랐다.‘만회? 어떻게?’숟가락에 담긴 죽이 갑자기 역겨워졌다.“입맛 없어. 안 먹을래.”“투정 부리지 마.”문강찬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아직도 세린이를 좋아한다면 두 사람을 위해 내가 양보할게. 우리 좋게좋게 헤어지자.”진윤슬이 진지하게 말했다.문강찬은 죽 그릇을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진윤슬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두 사람은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처음에 우린 계약 결혼을...”진윤슬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알아. 우리 3년 계약을 맺었고 이제 3개월 남았어.”그녀는 코끝이 찡해졌고 입을 열었을 때 이미 목소리가 쉬어있었다.거래로 시작한 결혼이었지만 진윤슬은 이 관계를 진심으로 대했다. 문강찬을 남편으로 생각했고 평생을 함께할 가족으로 생각했다.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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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3년 전에는 약혼자가 싫다고 내게 떠넘기더니 귀국해서는 내 남편을 빼앗으려 하고 있어요. 이게 언니를 생각하는 건가요?”진윤슬이 비꼬듯 말했다.“그런 거라면 난 감당 못 하겠어요.”“너...”“쉬고 싶으니까 이만 나가주세요.”진윤슬은 더는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렸다.씩씩거리며 문 앞까지 간 주아란이 또 한마디 했다.“할머니가 너 보고 싶대. 몸이 좀 괜찮아지면 할머니 보러 와.”진윤슬은 마음속에 아무리 원망이 많아도 할머니라는 두 글자만 들으면 모두 눈 녹듯 사라졌다.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뚝뚝 흘렸다.가슴속 슬픔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이를 잃은 그녀에게 그들은 괜찮냐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단지 진세린이 울었다는 이유로 찾아와 질책했다.‘내 아이가 세린이의 눈물보다도 못했구나...’진윤슬은 간신히 마음을 진정했다. 눈이 시큰거렸고 퉁퉁 부어 있었다.잠시 후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유산한 사실은 말하지 않았고 출장 중이라 집에 돌아가면 보러 가겠다고 했다.할머니는 크게 기뻐하며 몇 마디 당부했다. 손녀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찬 말들이었는데 상처투성이가 된 진윤슬의 마음에 위로가 되었고 따스함이 스며들었다.그녀가 병원에 입원한 보름 동안 문강찬도 병원에서 함께 지냈다. 사소한 일까지 손수 챙기며 그녀를 돌봤다.닥터 김해인이 진윤슬의 건강 상태를 살펴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대표님은 정말 한결같이 좋은 남자예요.”지금까지 그 어떤 여자와도 스캔들이 난 적이 없었고 심지어 곁에 있는 비서조차 남자였다.그리고 세상 물정 모르는 재벌 2세, 3세들과 달리 깨끗한 사생활을 유지하는 귀한 품덕을 지녔다고 칭찬했다.진윤슬은 김해인에게 문강찬의 한결같은 마음이 향하는 곳이 그녀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고 그저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결과는 어떤가요?”진윤슬이 화제를 돌렸다.검사 결과를 확인한 후 편안했던 김해인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해졌다.“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진윤슬은 문득 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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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진윤슬이 문강찬의 손을 뿌리치고 비웃듯이 말했다.“괜찮아. 강찬 씨는 여기서 친구나 챙겨. 나 때문에 두 사람 사이가 껄끄러워져선 안 되잖아.”사실 속으로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볼일이 있다고 한 게 진세린을 만나러 오는 것이냐고.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뻔한 일로 스스로 상처받을 필요는 없었다.문강찬도 물러서지 않았다.“같이 가.”진윤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조금 전 한바탕 소란을 피운 터라 다정한 척할 필요도 없었다. 어쨌거나 이 결혼의 진실은 너무나 초라하니까.다리가 불편한 박순옥은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보냈다. 그런데 진윤슬이 왔다는 소리에 지팡이를 짚고 나왔다.진윤슬은 서둘러 할머니를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입을 떼기도 전에 벌써 눈시울이 붉어졌다.“할머니...”목이 메어 할머니의 다리에 얼굴을 묻었다.박순옥은 손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진윤슬은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눈물을 닦은 다음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할머니가 보고 싶었어요.”“싱겁긴. 할미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보러 오면 될 것을.”박순옥이 한숨을 내쉬었다.사실 진윤슬이 억울한 일을 당해 속상해서 이렇게 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은...박순옥의 시선이 문 앞에 서 있는 문강찬에게로 향했다.문강찬이 들어와 인사를 건네자 박순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뭐라 하지 않고 진윤슬에게만 말했다.“아주머니한테 갈비탕을 끓이라고 했는데 다 됐는지 가서 봐줄래?”진윤슬이 순순히 주방으로 향한 다음 박순옥은 문강찬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나이가 지긋한 목소리가 엄숙해졌다.“그때 다른 가족들이 너랑 윤슬이를 결혼시키려 했을 때 사실 난 반대했었어.”문강찬이 시선을 늘어뜨리고 두 손을 무릎에 얹었는데 누가 봐도 혼나길 기다리는 모습이었다.박순옥이 말을 이었다.“이제 세린이가 돌아왔으니 딱 한 가지만 물을게. 네 생각은 어때?”문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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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진윤슬은 칼로 도려내듯 가슴이 아팠다. 모두들 그녀의 탓이라고 몰아가자 순간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저를 가르친 적도 없잖아요.”진윤슬이 코웃음을 쳤다.집에 돌아온 후로 그들은 항상 진윤슬과 진세린을 비교했다. 그녀가 진세린보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또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다고 생각했다.하지만 왜 그런 차이가 생겼는지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교양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너...”진성국은 화가 치밀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말 좀 아껴.”문강찬이 진윤슬의 손을 잡았다.“이만 가자.”그런데 진윤슬이 그의 손을 가차 없이 뿌리쳤다. 얼굴을 붉힌 김에 깔끔하게 해결하는 게 나았다.진윤슬이 문강찬에게 물었다.“그날 내가 왜 밖에 있었는지 알아?”문강찬은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조사해봤지만 진윤슬이 직접 운전해서 나갔다는 것만 알아냈다. 혹시 그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는 걸까?진윤슬은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마음이 아프지만 이제 와서 뭘 어쩌겠는가?진윤슬이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누가 나한테 전화 와서는 강찬 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병원 가는 길에 납치를 당했어.”문강찬이 흠칫 놀랐다.‘납치를 당했다고? 그런데 왜 지금까지 얘기 안 한 거지? 허 비서는 왜 또 알아내지 못한 거고?’“어디서 거짓말이야?”진태호는 코웃음을 치며 전혀 믿지 않았다.“납치당했다면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데?”진윤슬은 억울함과 슬픔에 북받치는 눈물을 참아내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아무도 내 전화를 받지 않는 걸 보고 납치범들이 나한테 몹쓸 짓을 하려 했었는데 내 아이가 날 지켜줬어.”그녀는 손바닥으로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아이의 존재가 아직도 느껴지는 듯했다.“납치범들이 내 배를 걷어찬 바람에 아이는 유산됐고 내가 피를 흘리는 걸 보더니 그냥 길에 버려버렸어.”만약 아이가 없었다면 이미 그 사람들에게 몹쓸 짓을 당했을 것이다.결국 진윤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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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24절기 향수 시리즈는 진윤슬이 직접 하나하나 연구하고 개발한 것이라 절대 다른 사람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그러니 가장 싫어하는 사람에게 넘겨준다는 게 말이 되는가?“난 지금 너랑 상의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야.”문강찬의 깊고 어두운 두 눈에 얼음이 서려 있었다.“회사 나가기 싫으면 그냥 계속 집에 있어.”그러고는 위층으로 올라갔다.진윤슬은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마음속의 균열이 점점 커져 결국에는 황폐해졌다.그녀는 실망감이 가득한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식탁 위에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는데도 입맛이 하나도 없었다.한참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가 팔을 만졌다. 6월인데도 날씨가 아직 쌀쌀했다.“사모님.”도우미가 담요를 가져다줬다.“대표님께서 사모님이 몸을 차갑게 굴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진윤슬이 고개를 숙이자 눈가가 촉촉해졌다.문강찬은 진세린 때문에 그녀를 회사에서 내쫓았고 아이까지 잃게 만들었다. 이젠 그녀의 피땀까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려 했다.정말 잔인하기 그지없었다.“사모님, 괜찮으세요?”도우미는 진윤슬이 눈물을 뚝뚝 떨구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대표님은 사모님을 이렇게나 아끼시는데 사모님은 왜 행복해 보이지 않지?’“괜찮아요. 이만 정리하세요.”진윤슬은 담요를 꽉 움켜쥐고 지친 몸을 이끌면서 방으로 돌아갔다.한 시간 후 휴대폰이 쉴 새 없이 울려댔고 수많은 문자가 쏟아져 들어왔다. 모두 진세린이 연구 개발팀에 합류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는 내용이었다.진윤슬은 한참을 확인한 후에야 진세린이 연구 개발팀을 임시로 맡게 되었다고 문강찬이 직접 발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연구 개발팀에 갑자기 낙하산 인사가 내려오자 직원들은 모두 당황해하며 회사에서 무슨 결정을 내린 건 아닌지 추측했다.진윤슬이 단톡방에 문자를 남겼다.[저 곧 퇴사합니다.]어차피 이혼할 것이고 이혼 후에 퇴사해야 할 테니 그저 모든 게 앞당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그녀는 휴대폰으로 사직서를 작성해 인사팀에 보낸 다음 사람들의 연락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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