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잠시 후 현우가 계약서에서 발을 치웠다.
나는 구겨진 종이를 주워 들었다. 손목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현우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참, 하나 더 있어.”
걸음이 멈췄다.
“네 아버지가 넣어준 지분, 이번 계약에 담보로 묶었어.”
천천히 돌아봤다.
“……뭐라고요?”
“투자 못 받으면 같이 넘어간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걸…….”
현우가 라이터를 켰다.
“네가 안 가면 계약 깨지고, 회사 넘어가면 너희 집도 같이 끝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럼 아버지는요? 수술은…….”
“그것도 알아서 해야겠지.”
아버지는 다음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현우는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남자 몇 번 만나주면 회사도 살고 네 아버지 수술도 시킬 수 있어.”
그가 나를 힐끗 바라봤다.
“선택 잘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안에서 계약서만 구겨졌다.
***
밤 열한 시가 넘어서야 현관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소파 끝에 앉아 있던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현우였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현우의 뒤로 젊은 여자가 따라 들어왔다.
민서라.
스물두 살. 현우의 회사에서 몇 번 마주쳤던 인턴이었다. 복도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던 얼굴이었다.
그런 서라가 오늘은 헐렁한 원피스 위에 현우의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한 손에는 큰 캐리어까지 끌고 있었다.
하룻밤 묵으러 온 사람의 짐이 아니었다.
“여보, 이게…… 무슨 일이에요?”
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라의 캐리어를 받아 현관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서라야, 조심해. 바닥 미끄러워.”
낯설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지난겨울 내가 욕실에서 미끄러져 발목을 다쳤을 때도 현우는 병원에 혼자 다녀오라고 했었다.
서라가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회사에서 듣던 호칭인데 내 집에서 듣자 이상하게 낯설었다.
서라는 미안한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있었다. 그런데 현우의 재킷은 벗지 않았다. 오히려 벌어진 옷깃을 손으로 여며 제 몸에 끌어당겼다.
“왜…… 여기 온 거예요?”
“한지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어깨가 먼저 움츠러들었다.
현우가 저렇게 내 이름을 부르면 그다음에 무엇이 오는지 내 몸은 알고 있었다.
“애 몸 조심해야 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저는 그냥…….”
말끝이 흐려졌다.
“당분간 여기 있을 거야.”
“여기서요?”
“그래.”
“하지만 여보, 갑자기 이러시면…….”
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현우는 금세 서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서라야, 앉아 있어. 오래 서 있으면 힘들잖아.”
“괜찮아. 오빠.”
서라가 대답했다가 내 쪽을 힐끗 바라봤다. 마치 실수했다는 듯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죄송해요, 사모님.”
왜 나한테 사과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현우에게 오빠라고 부른 것 때문인지, 그의 재킷을 입고 내 집에 들어온 것 때문인지.
서라가 소파에 앉자 현우는 쿠션까지 끌어다 허리 뒤에 받쳐주었다.
“많이…… 아픈가요?”
서라가 조심스럽게 아랫배 위로 손을 가져갔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훑었다.
현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임신했어.”
귀에서 웅 하는 소리가 났다.
“……네?”
“임신했다고.”
아직 눈으로 알아볼 만큼 배가 나오지는 않았다.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린 끝에 겨우 물었다.
“아이 아빠가…… 누구예요?”
현우가 나를 쳐다봤다.
“당연히 나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임신시켰다.
그리고 그 여자를 직접 이 집까지 데려왔다.
밤새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눈을 뜰 때마다 낯선 천장과 침대 옆에 놓인 무설탕 캔디가 보였다.진이건은 대체 언제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걸까.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침대에서 일어났다.두꺼운 커튼 사이로 아침 햇살이 스위트룸 바닥을 길게 가르고 있었다. 밤에는 미처 보지 못했던 한강과 빌딩 숲이 통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였다.휴대전화를 확인하니 백림유통 전략기획팀 단체방에 오전 회의 자료가 쌓여 있었다.출근해야 했다.문제는 옷이었다.어제 입고 온 옷으로 출근할 수는 없었다. 집에 들러야 하나 생각하며 옷장을 열었다가 손이 멈췄다.처음 보는 옷들이 걸려 있었다.크림색 실크 블라우스와 짙은 네이비 재킷,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스커트.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내가 회사에서 자주 입는 스타일이었다.서랍에는 새 스타킹과 속옷이 포장된 채 들어 있었고, 아래에는 검은색 펌프스까지 놓여 있었다.재킷 안쪽의 사이즈를 확인했다.내 사이즈였다.구두도 마찬가지였다.어젯밤 욕실에 놓여 있던 화장품과 샴푸, 침대 옆 캔디가 차례로 떠올랐다.이제는 옷까지.호텔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이 옷들도 진이건 대표님이 준비한 건가요?”“네, 고객님.”“제 사이즈는 어떻게 알았죠?”잠깐의 침묵 끝에 조심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대표님께서 직접 전달해주신 사항이라 저희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전화를 끊고 한동안 옷장을 바라봤다.현우는 내가 무슨 옷을 입는지조차 관심이 없었다.그런데 어제 처음 만난 남자는 내 구두 사이즈까지 알고 있었다.결국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었다.전부 몸에 꼭 맞았다.거울 속 모습은 평소 출근할 때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누군가 내 옷장을 오래 들여다보고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잠시 후 호텔 직원의 안내를 받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두꺼운 카펫이 발소리까지 삼키는 복도 끝, 일반 투숙객과 분리된 다이닝룸의 문이 열렸다.높은 창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흰 테이블보 위에는 은빛 커트
휴대전화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커다란 손이 먼저 그것을 낚아챘다.진이건이었다.그는 현우의 폭언이 담긴 화면을 보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봤다.그 침묵이 견디기 힘들었다.“……봤죠?”“안 봤습니다.”“거짓말하지 마세요.”“당신 남편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는 문자까지 훔쳐보지 않아도 아니까.”낮고 차가운 목소리였다.나는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숨을 픽 터뜨렸다.“그래도 100억이나 줬잖아요. 그 돈이 제 몸값이라면서요.”“아닙니다.”단호한 대답이었다.“그럼 뭔데요?”이건이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왔다.검은 셔츠 아래 단단한 가슴과 넓은 어깨가 눈앞을 가득 채웠다. 한 걸음만 더 오면 몸이 닿을 거리였지만, 그는 정확히 거기서 멈췄다. 짙은 체향이 좁아진 기류를 타고 밀려들었다.“백현우가 당신을 버리게 만든 가격.”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무슨 뜻이에요?”“얼마를 주면 자기 아내까지 내놓을 인간인지 궁금했습니다.”등줄기가 서늘해졌다.“그래서 시험한 거예요?”“확인한 겁니다.”“사람을 돈으로요?”“백현우는 돈으로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한 인간이니까.”나는 할 말을 잃었다.이건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우가 돈을 선택할 거라는 걸. 그리고 내가 버려질 거라는 것도.갑자기 이 남자 역시 무서워졌다.나는 가방을 움켜쥐었다.“……갈게요.”이건은 막지 않았다.“어디로?”문으로 향하던 발이 멈췄다.“그건 제가 알아서 해요.”“백현우가 있는 집으로?”대답하지 못했다.돌아갈 곳이라고 떠올린 곳이 결국 그 집뿐이었다. 나를 100억에 팔아놓고 몇 번 자주는 게 뭐가 대단하냐고 말한 남자가 기다리는 곳.뒤에서 이건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그가 내 옆을 지나 문을 열었다.“가고 싶으면 가요.”열린 문 너머로 조용한 복도가 보였다.그런데 이건이 직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카드키 하나를 올려놓았다.“아니면
“당신 남편이 당신을 어디까지 내게 넘겼는지.”진이건의 손끝이 계약서의 마지막 조항 위에 멈췄다.나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몇 번 눈을 깜빡이고 나서야 빽빽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계약 기간: 1년][투자자는 계약 기간 동안 한지아에게 공식·비공식 동행 및 별도 일정을 요청할 수 있으며, 백현우는 이에 일절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그 아래 조항을 읽는 순간 숨이 멎었다.[백현우는 배우자로서 한지아에게 행사하던 독점적 동반 및 사적 관계에 관한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며, 투자자와 한지아 사이에 통상적인 부부관계에 준하는 사적·육체적 관계가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부부관계에 준하는.사적·육체적 관계.아무리 법률 용어로 감싸도 무슨 뜻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나는 마지막 줄까지 내려갔다.서명란에는 십 년 가까이 봐온 익숙한 글씨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백현우.손끝에서 감각이 사라졌다.오늘 저녁 한 번이 아니었다.현우는 앞으로 1년 동안 내가 진이건과 밥을 먹고, 함께 다니고, 심지어 잠자리를 가져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서명했다.자기 아내를.다른 남자에게.“현우 씨가…… 이걸 직접 읽었어요?”“내 앞에서.”고개를 들자 이건은 어느새 와인잔을 내려놓고 있었다.느슨하게 기대고 있던 큰 몸도 앞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검은 셔츠 아래 넓은 어깨가 가까워지자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압박감이 느껴졌다.하지만 그는 내게 손을 뻗지 않았다.흔들리는 내 손과 구겨지는 계약서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변호사가 동석한 자리였습니다. 조항 하나씩 확인하고 직접 서명했습니다.”나는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이게 무슨 뜻인지도 알고 있었냐고요.”“알고 있었습니다.”“어떻게 확신해요?”이건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길게 뻗은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한 번 천천히 접혔다. 표정은 여전히 차분했지만 눈빛은 조금 전보다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본인이 확인했으니까.”심장이 내려앉았다.“뭐를요?”그가
잘못 본 줄 알았다.다시 읽었다.한 번 더.하지만 숫자는 달라지지 않았다.손끝이 서서히 차가워졌다.현우가 내게 말했던 금액의 열 배였다.그는 회사가 당장 망한다고 했다. 직원들 월급도 줄 수 없고 거래처까지 줄줄이 무너지면 자신도 끝이라고 했다.그래서 나 하나만 참으면 된다고.그 말을 믿었다.그런데 눈앞의 금액은 회사를 겨우 살려놓기 위한 돈이 아니었다.나는 계약서를 움켜쥔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이건은 내가 충격받을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듯 태연하게 와인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잔을 내려놓은 손가락에는 작은 떨림조차 없었다.“처음에는 회사 정상화에 필요한 돈을 요구하더군요.”그가 내 앞의 계약서를 손끝으로 돌렸다.“내가 조건을 하나 걸었더니 백현우가 액수를 다시 불렀습니다.”그 손끝이 계약서 한가운데서 멈췄다.내 이름이 적힌 곳이었다.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나예요?”“당신입니다.”그는 부정하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태연해서 더 무서웠다.“왜…… 왜 하필 저예요?”이건의 눈이 가늘어졌다.그의 시선이 내 눈에서 입술로, 다시 목선을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숨기려는 기색조차 없었다.갖고 싶은 것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이었다.“하필이라.”낮은 웃음이 흘렀다.그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자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진 것 같았다.“내가 원한 건 처음부터 한지아 씨였는데.”손끝이 굳었다.“우린 오늘 처음 만났어요.”그 순간 이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흥미롭게 여기는 듯한, 묘하게 여유로운 미소였다.그는 설명해주지 않았다.그 침묵이 대답보다 더 불길했다.나는 계약서를 움켜쥐었다.“그럼…… 나는 얼마에 팔린 건가요?”이건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짙은 눈동자가 정확히 나를 향했다.“100억.”숨이 멎었다.백억.사람에게 붙어서는 안 되는 숫자가 내 이름 옆에 붙어 있었다.손에 쥔 계약서가 바스락거렸다.“남편이…
손은 거뒀지만, 진이건은 물러나지 않았다.내 바로 앞에 선 큰 몸이 시야를 절반쯤 가리고 있었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그의 시선은 소매 아래로 감춘 내 손목에 오래 머물렀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굳이 묻지 않아도 안다는 눈이었다.나는 손목을 등 뒤로 감췄다.그제야 이건이 몸을 돌렸다.“앉아요.”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곧바로 의자를 빼놓았다.그제야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이 넓은 호텔 최상층에서 누구도 진이건에게 두 번 묻지 않았다. 그가 눈길을 주면 직원이 움직였고, 손가락 하나를 들면 멈췄다.명령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명령을 따르는 게 너무도 당연한 사람 같았다.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곧 직원들이 움직였다. 하얀 접시가 차례로 놓이고 은색 커트러리가 정돈됐다.구운 흰살생선과 아스파라거스, 자극적인 소스를 쓰지 않은 파스타.마지막 직원이 내 앞에 탄산수를 내려놓고 이건의 잔에 와인을 따르려 했다.이건이 손가락을 가볍게 들었다.“그쪽은 그대로.”직원이 곧장 와인병을 거뒀다.나는 탄산수 잔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식탁을 훑었다.이상했다.생선에는 내가 싫어하는 소스가 빠져 있었고, 아스파라거스는 끝부분이 바삭하게 구워져 있었다. 파스타에도 버터나 크림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내가 집에서도 자주 먹던 방식이었다.우연이라고 하기에는 하나같이 정확했다.포크를 잡으려던 손이 멈췄다.“제가 술 안 마시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이건은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대답 대신 내 앞의 접시를 한번 내려다봤다.그 시선을 따라가던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술만이 아니었다.“설마…… 음식도?”“입에 맞을 겁니다.”확신에 찬 말투였다.마치 이미 여러 번 내 식탁을 본 사람처럼.나는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저에 대해 알아봤어요?”이건이 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필요한 건 전부.”순간 그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됐다.회의실에서 처음 마주쳤다고 생각했던 남자.그런데
차가 멈춰 선 곳은 도심 한가운데 자리한 고급 호텔이었다.유리문 너머로 샹들리에 불빛이 쏟아지고, 검은 대리석 바닥 위로 사람들이 조용히 오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계약서에 적혀 있던 문장이 다시 떠올랐다.‘상대방이 요청할 경우, 지정한 장소에 머문다.’“도착했습니다, 손님.”기사가 문을 열자 차가운 밤바람이 밀려들어 남색 원피스 자락을 흔들었다.나는 가방끈을 움켜쥔 채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은 곧장 나를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프라이빗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층수를 알리는 숫자가 올라갈수록 심장도 점점 빠르게 뛰었다.띵.문이 열렸다.긴 복도 끝, 단 하나의 커다란 문 앞에서 직원이 멈춰 섰다.“대표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벽면을 가득 채운 통유리창이 눈에 들어왔다.도시의 야경이 발아래로 펼쳐진 넓은 공간.그 한가운데 한 남자가 창밖을 향해 서 있었다.검은 셔츠에 같은 색 정장 바지. 재킷은 소파 등받이에 무심하게 걸쳐져 있었다.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나는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진이건.회의실에서는 제대로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그는 컸다. 현우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이건은 그보다 확연히 커 보였다. 넓고 반듯한 어깨 아래로 검은 셔츠가 군더더기 없이 떨어졌다.짙은 눈썹 아래 자리한 눈매는 길고 깊었다. 쌍꺼풀 없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 곧게 뻗은 콧날과 선명한 입술.잘생겼다는 감상보다 선뜻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남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그런데 이상했다.차갑기만 하던 그의 눈빛이 나를 발견한 순간 미세하게 흔들렸다.이건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목선을 따라 내려간 시선은 남색 원피스를 천천히 훑은 뒤 다시 내 눈으로 돌아왔다.노골적이지는 않았지만 집요했다.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원피스 자락을 움켜쥐었다.“한지아 씨.”낮고 묵직한 목소리였다.회의실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안녕하세요.”겨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