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세자가 남문을 빠져나간 지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궁은 더 조용해지는 대신 어딘가 미세하게 결이 달라진 숨결을 품기 시작했다.말발굽이 사라진 자리 위로 묘한 적막이 내려앉았고,그 적막은 곧 전각과 회랑을 서서히 훑으며 사람들의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다.저하가 궁을 비웠다.그 사실 하나만으로 궁은 스스로 다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한다.명목상 모든 권한은 대비전에 모이고,대비가 손짓 하나 하면 내명부와 대신들이 들썩인다.그리고 이수는 그 흐름 안에서 자신에게 향하는 미세한 시선의 무게를 더 분명하게 느끼기 시작했다.밤이 깊어도 궁녀들은 잠들지 못한 채 등불 아래에서 속삭였다.“세자빈마마께서… 저하를 배웅하셨다지요?”“예…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다 하옵니다.”“마마의 마음이 어떠하실지…짐작조차 어렵사옵니다.”그 속삭임은 조심스러웠지만소문이라는 형태로 이미 궁의 벽 사이를 스며들기 시작했다.이수는 자신의 처소에서 차가 식어가는 것도 잊은 채 밤을 버티고 있었다.온전히 혼자가 된 이 시간, 그녀의 마음은 낮보다 더 깊은 흔들림을 드러냈다.'저하의 말이… 계속 가슴 속을 떠나지 않사옵니다. 그대를 멀리 두는 것이 더 두렵소.'그 말은 거절도, 고백도 아닌 어떤 묘한 감정의 결을 가졌고그만큼 이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세자의 감정이 점차 선을 넘는다는 것을 이수는 알고 있었다.그러나제가 단 한 걸음이라도 물러서면 누군가는 다시 다치게 되겠지요.그 불안한 예감이 그녀의 심장을 죄듯 움켜쥐었다.도진은 남문에서의 마지막 정비를 마친 뒤 조용히 궁 안으로 돌아왔다.그는 말에서 내리며 손아귀를 천천히 폈다 쥐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전투를 앞둔 사람조차 이렇게 심장이 어지럽게 뛰지는 않는다.그의 마음을 흔든 것은 전투가 아니라 남겨둔 사람 때문이었다.'빈마마의 얼굴… 오늘따라 유독 어둡고 고단해 보였습니다.'그가 보호해야 한다고 믿는 존재가 누군가의 시선과 권력의 바람 속에서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칼을 든 적을 마주할
밤을 완전히 삼키지 않은 어둠이 궁궐의 처마 끝에서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변고의 소식이 조정으로 퍼져 나간 뒤, 궁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였고,모든 발걸음이 소리를 삼킨 채 급박하게 전각을 오갔다.이수는 동궁전에서 한참 떨어진 회랑 끝에서 멈춰 선 채 밤공기를 마셨다.그 공기엔 습기보다도 오늘 하루 누적된 감정의 무게가 더 많이 서려 있었다.'저하께서… 이 밤에 궁을 떠나신다.'이수는 그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세자가 궁을 비우는 일은 드물었다.더구나 변고의 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밤길을 서둘러 떠나는 일은 그만큼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었다.그러나 이수의 마음을 더 깊이 잡아당긴 것은 떠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었다.'그 말들… 그 눈빛…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그대가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더 두렵소.”그 말은 이수의 가슴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그 말이 품고 있는 감정,그 말이 앞으로 불러올 결과,그 말이 가져올 위험모든 것이 겹쳐져긴 밤의 한가운데에서이수는 고요히 흔들리고 있었다.동궁전 앞에서는 출궁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움직임이부딪히는 갑옷 소리마저 숨기려는 듯조용하고 질서 있게 이어지고 있었다.도진은 그 중심에 있었다.그의 동작은 군더더기 없이 정확했고손끝 하나 흔들리지 않았지만,이수와 마주한 뒤 생긴 마음속의 파문은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듯했다.병사 둘이 다가와 보고했다.“경, 남문 쪽 준비 완료되었사옵니다!”“말 또한 모두 배치 되었으니 저하께서 명 내리시면 곧 출궁 가능하옵니다!”“좋다.”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러나 짧은 대답과는 달리 그의 시선은 잠시 머물렀다.남문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는 동안,그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빈마마께서는…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실까.'그는 고개를 흔들어 자신의 감정을 억눌렀다.무관의 마음은 임무 앞에서 한 치의 흔들림도 있어서는 안 된다.그런데 오늘
밤은 아직 완전히 내려오지 않았지만, 궁은 이미 밤처럼 고요했다.변고의 소식이 궁궐 깊숙이 전해진 뒤로 모든 사람의 발걸음이 조심스레 줄어들었고,속삭임마저 가늘게 떨리며 공기 속으로 숨어들었다.동궁전에서 나왔을 때 이수의 마음은 온통 복잡한 물결로 가득 차 있었다.저하의 말들이 아직도 가슴 안에서 온기를 잃지 못하고 있었다.“그대가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 더 두렵습니다.”그 한 줄은 지켜야 할 규범보다도,감춰야 할 감정보다도 더 깊게 박혀 이수를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 말이 잔잔한 고백처럼 들릴지라도 궁의 현실은 그 고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세자의 마음 한 조각이 그녀에게 더 깊어질수록 그 감정은 언젠가 불길처럼 번져 누군가의 목숨을 삼킬 수 있었다.그것이 누구인지, 이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오늘… 무언가가 달라졌다.'그 변화가 시작점이라면 아마도 자신일 것이다.저녁 종각이 멀리서 울릴 무렵,동궁전 바로 바깥의 회랑에서는 서슬이 차오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도진은 잠시도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한 채 경계 구역을 오가며 병사들의 위치를 점검하고 있었다.남쪽 성책에서의 변고는 단순한 소란이 아니라 확실히 조정이 긴급하게 움직일 이유가 될 만한 사건이었다.병사 하나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그에게 보고했다.“경! 저하께서는 곧 조정 회의에 들 것이오며그 전까지 동궁전의 경계를 배로 늘리라 명하셨사옵니다!”도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다. 동궁전 남측 회랑엔 정예병을 우선 배치하라. 움직임이 있거든 즉시 보고하라.”“예!”병사가 물러나자 도진은 잠시 숨을 골랐다.그러나 숨은 조금도 고르지지 않았다.그의 안에는 오늘 하루 내내 이어진 감정의 흔들림이 아직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빈마마께서 하신 말씀… 경에게도, 저하께도,'누구에게도 이롭지 않다.그 한 줄은 도진의 가슴을 깊게 찌르고 지나갔다.그녀는 자신을 지키려 했고 세자를 지키려 했고 궁의 균형마저 지
급보가 전각을 가르며 지나간 뒤,동궁전의 문이 닫히자 하나의 숨결이 꺼진 듯한 적막이 찾아왔다.이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세자의 마지막 말이 마치 실처럼 가슴에 걸려조금만 잡아당겨도 울음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감정이 혼란 속에 섞인 것만 같았다.'저하의 마음을… 언젠가 듣게 하시겠다고….'그것은 고백이 아니었다.그렇다고 충성의 말도 아니었다.그 사이 어딘가, 빈이 감당해서는 안 되는 감정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이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그러고 나서야 전각 안에 서 있는 자신이 얼마나 오래 굳어 있었는지 깨달았다.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회랑 바깥에 서 있던 궁인이 놀란 듯 들고 있던 등을 떨어뜨릴 뻔했다.“아… 빈마마! 저하께서 급히 나가시고…빈마마께선 이제 어찌하실지…”이수는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걱정하지 마라. 동궁전을 정돈하고 너희 볼 일을 보거라.”궁인은 안도의 숨을 돌리며 물러났다.그러나 그 눈길 속에 말하지 못한 불안이 서려 있는 것을 이수는 알아보았다.'소첩 하나로 인해 궁이 이리 흔들릴 수 있는 것이었나….'그 생각이 오늘 내내 이수의 마음을 놓아주지 않았다.회랑을 따라 걷는 동안, 세자와 도진 사이의 긴장,대비의 경고, 궁인들의 시선, 조정의 급보까지모든 것이 하나로 얽혀 이수의 발밑을 천천히 무너뜨리는 기분이었다.그 시각, 동궁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도진은 궁의 경계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그의 시선은 늘 전방을 향해 있었지만오늘만큼은 마음속 어디선가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올라왔다.'빈마마…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계실까.'그는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약간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궁인 몇 명이 도진의 앞에서 지나가며 작게 수군거렸다."경의 얼굴이 왜 저리 굳어 있지.""아까는 빈마마와도 함께 있던 것 같던데…""혹여… 무슨 소문이라도"도진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그러나 곧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발을 내디뎠다.그의 움직임은 흔들리지 않았
동궁전으로 향하는 회랑은 유난히 길어 보였다.발걸음이 빠른 것도 아닌데 마치 땅이 조금씩 뒤로 미끄러져 거리만 늘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이수는 끝내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궁인을 따라 걸었다.'저하께서… 왜 이 시각에 소첩을 찾으셨을까.'대비전에서의 일도 무섭게 빠른 속도로 전해졌을 것이다.궁의 귓속말은 바람보다 더 빨리 움직였다.그리고 그 바람은 결국 세자의 마음을 건드렸을 가능성이 있었다.회랑 끝에서 동궁전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안에는 세자가 있었다.그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늘 곧고 점잖았던 그의 기운이 지금은 조용하고 깊은 물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궁인은 이수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문을 닫았다.바람이 끊기자 방 안의 공기는 더욱 단단히 굳은 듯했다.세자는 잠시 이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 서서 밖으로 기울어가는 햇빛을 바라보고 있었다.그 침묵이 말보다 더 무거웠다.이수는 조심스레 앞으로 걸어갔다.“저하를 뵙사옵니다.”그녀의 목소리가 넓은 전각 안에서 천천히 흩어졌다.잠시 뒤, 세자가 돌아섰다.그의 눈빛은 무엇인가를 오래 참고 있던 사람의 눈빛이었다.“빈.”그 한 마디에는 부름 이상의 감정이 있었다.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오늘 하루가 남긴 흔적이 깊게 깔려 있었다.이수는 눈을 들지 못한 채 고개를 낮췄다.“…저하께서 소첩을 찾으셨다 하여 급히 달려왔사옵니다.”세자는 그녀를 한동안 바라보다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그 발걸음은 고의적으로 조심스러워 보였다.다만 조심스러움 속에 말하지 못한 긴장도 함께 있었다.“대비전에서는 무슨 말씀을 들었습니까.”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않았다.하지만 그 물음이 얼마나 오래 고민 끝에 나온 것인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이수는 조용히 대답했다.“…궁의 바람이 심상치 않다 하셨사옵니다.”세자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궁의 바람.”그는 낮게 되뇌었다.“그 바람이… 무엇을 향하고 있다 들었습니까.”이수는 답을 망설였다.그러나 침묵은 결국
전각 사이로 햇빛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는 시각,이수는 아직도 대비전에서 들었던 말이가슴 안을 천천히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궁중의 바람은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의 발걸음을 향해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누군가의 마음을 먼저 건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소문이 된다.그리고 오늘, 그 바람은 너무 빠르게 불기 시작했다.회랑을 지나던 그녀의 걸음이 조금 느려질 때,어디선가 조용히 들려오는 기척이 있었다.그 기척은 날카롭거나 무례하지 않았고,오히려 누군가가 말하지 못한 걱정을 안고 다가오는 듯한 온도를 가졌다.“빈.”이름이 아닌 호칭, 그 안에 담긴 존중과 조심스러움이 한 번에 귀에 닿았다.이수는 천천히 돌아보았다.그곳에는 도진이 서 있었다.햇빛이 그의 어깨를 스쳤지만 그늘이 눈가에 걸려 감정은 읽히지 않았다.그러나 그 침묵 속에는 묻고 싶은 말, 근심,그리고 말하지 않은 충성까지 모두 섞여 있었다.이수는 조용히 예를 갖추었다.“경이… 어찌 이곳에.”도진은 고개를 숙였다.“빈마마께서 대비전으로 향하실 때 얼굴빛이 좋지 않으시기에…혹여 무슨 일일까 염려되었사옵니다.”그의 말은 규범을 지키고 있었지만,말 사이에 스며 있는 감정은 규범으로는 감출 수 없었다.이수는 시선을 잠시 떨구었다.“…경의 염려는 고맙사오나 궁의 눈이 점점 다가오는 듯하니오늘만큼은 가까이 서지 않으심이 경에게도 이롭사옵니다.”도진의 눈빛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끝내 말로 드러내지 않았다.“빈, 대비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사옵니까.”그 물음은 조심스러운 동시에 필사적인 느낌이 있었다.꼭 알아야 한다기보다, 알지 못하면 빈을 지킬 수 없을 것 같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그러나 이수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었다.“대비마마께서는 궁이 소첩을 주시하고 있다 하셨사옵니다.”도진의 표정이 굳었다.“저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사옵니까.”이수는 한숨을 아주 가늘게 내쉬었다.“저하께서는… 그대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 염
귓가에 닿은 목소리는 위로인지, 반가움인지, 그리움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도진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사람들의 시선도, 사인회장도, 현실도 그에게는 모두 멀어졌다.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대답 대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올렸다.그리고, 정말로 오래 기다린 사람에게 하듯 조용히, 그러나 확신 있게 입맞춤을 했다.그 순간 도진의 다리가 풀렸다.머리가 가벼워졌다.심장이 너무 크게 뛰었다.세상이 기울었다.그는 휘청이며 앞으로 쓰러졌다.이수의 손이
비는 오후 내내 흐릿하게 내리고 있었다.도심의 커다란 유리 건물들은 회색 안개 속에서 윤곽이 무뎌져 있었고,사람들은 비를 피해 우산을 들고 바삐 움직였지만,이제 막 내리기 시작한 냄새는 오히려 공기를 맑게 정돈하고 있었다.도진은 백화점 입구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늘 그렇듯, 아무 계획 없이 들른 곳이었다.욕망도, 필요도 없이 그저 시간이 남아서 들어오는 곳그의 삶은 지루할 정도로 완벽했고, 어떤 자극도 오래 머물지 않았다.비가 어깨를 적셔도 그는 대수롭지 않았다.몇 백 년 동안 수없이 맞아온 비였다.어떤 비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달빛은 기와 위에서 희미하게 번졌고,바람은 소리 없이 건물의 모서리를 스쳤다.도진은 이수의 처소에서 멀어질수록오히려 마음 한가운데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자리 잡는 걸 느꼈다.그 감정은 단순한 경계심이 아니었다.호위무사로서 세자빈을 지키려는 의무감도 아니었다.그것은 그녀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가슴을 묘하게 죄어오는 부끄러울 만큼 인간적인 감정.도진은 발걸음을 멈췄다.그는 무사였다.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욕망을 절제하며, 의무를 지키기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그런 그가 오늘 하루 동안
현은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그 시선은 단순한 명령자의 시선이 아니었다.오랜 우정과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으나,그 밑바닥에는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균열이 보였다.“마마의 밤이니만큼… 혹 무슨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을 더 살펴보아라.”명분 있는 명령이었다.그러나 그 말 속에는 ‘왜 네가 여기에 있었느냐’는 질문보다도 더 깊은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도진은 눈을 내렸다.“…예, 저하.”그는 마지막으로 이수를 향해 아주 조심스럽게 인사를 하고 문 밖으로 사라졌다.그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동안 방 안의 공기는 다시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