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비는 예보 없이 내렸다.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그 잔잔함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오래 붙잡았다.도시는 잠시 속도를 늦추고, 그 틈으로 감정이 스며들었다.도진은 카페를 나서며 우산을 펴지 않았다.비를 맞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고, 차라리 지금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느꼈다.정리되지 않았지만,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이수와 헤어진 뒤 그는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한 블록을 더 걸어 사람이 드문 골목 끝에서 잠시 멈췄다.심장이 이유 없이 빨라졌다가, 이내 다시 제 속도를 찾았다.조금만 더…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조금만 더 천천히.조금만 더 조심스럽게.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현의 이름이었다.도진은 한 박자 늦게 전화를 받았다.“지금 통화 괜찮아요?”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네.”도진은 짧게 대답했다.“잠깐 볼 수 있을까요. 회사 근처예요.”요청이었지만, 이미 결정된 일정처럼 들렸다.도진은 비를 한 번 더 바라봤다.“지금 가겠습니다.”현은 로비의 창가에 서 있었다.유리 너머로 내리는 비를 보며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렸다.도진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고개를 들었다.“와줘서 고마워요.”현이 말했다.“무슨 일이신가요.”도진은 서두르지 않았다.두 사람은 근처의 조용한 바에 들어갔다.낮은 음악과 비가 섞인 소음이 대화를 보호해 주는 공간이었다.현이 먼저 잔을 들었다.“이수 씨랑… 오늘 만났죠.”도진은 잠시 멈췄다가 솔직하게 답했다.“네.”그 대답은 부정도 변명도 아니었다.현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그러나 곧 정리된 얼굴로 그는 말을 이었다.“전, 이수 씨를 오래 지켜봤어요.”현의 목소리는 감정이 섞이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눌려 있었다.“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할 때 얼마나 신중한지도 알고요.”도진은 듣고만 있었다.“그래서 더 궁금해졌어요.”현이 잔을 내려놓았다.“도진 씨는 그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지.”질문은 정중했지만, 피할 수 없을 만큼 직접적이었다.도진은
아침은 전날 밤의 감정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밀어내며 시작되었다.도시는 늘 그렇듯 약속과 일정으로 스스로를 단단히 묶어두고,사람들 또한 그 질서에 아무렇지 않게 몸을 맞췄다.도진은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밤새 거의 잠들지 못했지만, 피곤함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이상하리만큼 맑은 정신이었다.어제 이수가 보낸 짧은 메시지 하나가 그를 그 상태로 만들었다.-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요.그 문장은 감사의 표현이었지만,도진에게는 ‘아직 괜찮다’는 신호처럼 들렸다.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그러나 함부로 밀어도 안 되는 문.그는 그 거리감이 오히려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게 만든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이수는 아침 햇살이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눈을 뜬 순간부터 머릿속에는 어제의 장면들이 차례대로 떠올랐다.도진의 표정. 현의 메시지.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침묵.그 침묵이 누군가를 상처 입히지 않았을지 그녀는 잠시 생각했다.그러나 이수는 그보다 더 솔직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아직은 어느 쪽에도 확답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도진에게 느끼는 안정감.현에게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집중과 압박.그 둘은 전혀 다른 형태였지만, 둘 다 그녀의 일상 안으로 확실히 들어와 있었다.이수는 휴대전화를 들어 잠시 망설이다가 도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오늘 혹시 잠깐 시간 괜찮으세요?그 문장은 약속을 정하자는 말도, 의미를 묻는 말도 아니었다.그저 마주 앉을 여지를 남기는 문장이었다.잠시 뒤, 도진에게서 답장이 왔다.-네. 편하신 시간에 말씀 주세요.이수는 그 짧은 답장을 읽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마치 어떤 결정을 이미 절반쯤은 내려버린 사람처럼.현은 회사 회의실에서 보고서를 넘기며 집중하는 척을 하고 있었지만,실제로는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어제 이수에게 보낸 메시지와 그에 대한 답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
밤은 도시의 소음을 한 겹 덮어두고 그 위에 다시 생각을 올려놓는 시간이었다.낮에는 흘려보냈던 감정들이 밤이 되어서야 제자리를 찾는 것처럼.도진은 집 안의 불을 모두 끈 채 창가에 서 있었다.유리 너머로 보이는 불빛들은 질서정연했지만,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오늘 하루 동안 자꾸만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카페에서, 비 오는 거리에서, 그리고 마지막에 이수가 남긴 그 눈빛.부탁도 아니고, 확답도 아닌 시선.그건 ‘지금 여기까지는 와도 된다’는 조심스러운 허락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자신이 언제부터 사람의 눈빛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보게 되었는지기억해보려 했지만, 생각은 끝까지 닿지 않았다.대신 가슴 안쪽에서 설명할 수 없는 무게가 천천히 자리 잡았다.그는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가 이번에도 내려놓았다.말을 걸고 싶은 마음과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지금은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하고 싶었다.이수는 침대 위에 앉아 노트북을 켜 놓고 있었지만 아무 글자도 입력하지 못하고 있었다.커서는 깜박였고, 그 깜박임이 마치 재촉처럼 느껴졌다.글은 늘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어떤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그녀는 노트북을 덮고 등을 대고 누웠다.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숨을 고른다.도진의 말이 머릿속에서 자꾸만 반복됐다.-변해도 괜찮습니다.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선언처럼 들렸고, 그래서 더 마음을 흔들었다.이수는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상처받는 일이 아니라 상처를 주는 일이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누군가에게 기대가 된다는 것.그 기대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비가 그친 뒤의 공기가 차갑게 밀려들었다.“조금만 더…”이수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작게 중얼거렸다.“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그 말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그녀 스스로도 확실하지 않았다.현은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라
비는 도시를 균등하게 적셨다.누구에게도 편을 들지 않는 얼굴로,그저 위에서 아래로 같은 속도로 떨어질 뿐이었다.도진과 이수는 카페를 나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말이 없었지만 침묵은 무겁지 않았다.오히려 말이 필요 없는 종류의 시간에 가까웠다.비에 젖은 보도블록 위에서 이수의 발걸음이 잠시 느려졌다.“도진 씨.”그녀가 불렀다.목소리는 낮았고, 조심스러웠다.“아까 말한 것… 변해도 괜찮다는 말.”도진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쉽게 한 말은 아닙니다.”“알아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서 더 묻고 싶었어요.”잠시 숨을 고른 뒤 그녀는 말했다.“그 말의 끝에는 어디까지가 들어 있는 건가요.”도진은 비를 맞은 채 서 있었다.우산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다.이 질문 앞에서 보호막은 의미가 없었다.“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입니다.”그는 담담하게 말했다.“좋은 결말이 아니어도, 적어도 도망치지는 않겠다는 뜻입니다.”이수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런 사람을…”그녀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믿어도 되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그건 제가 증명해야 할 문제겠죠.”도진의 말은 설명도, 다짐도 아니었다.그저 현재형의 사실에 가까웠다.이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존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시각,현은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었다.불을 끄지 않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비가 내리는 도시는 이상할 정도로 차분해 보였다.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사람의 마음은 도시처럼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회의실에서의 이수. 그녀의 눈빛. 선명하게 긋던 선.저를 선택의 대상으로 두지 않는 것.그 문장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그건 거절이었지만 완전한 단절은 아니었다.현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애매함.그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이수에게도, 도진에게도 연
아침은 어제의 밤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버렸다.젖어 있던 거리도, 흐트러졌던 마음도 출근 시간의 소음 속에서 억지로 정리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정리된 것은 없었다.이수는 엘리베이터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어제보다 달라진 것은 없었지만, 어제와 같은 얼굴이라고도 말할 수 없었다.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표정은 그보다 한 박자 늦게 따라온다.회사에 도착하자 이미 몇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출판 일정, 인터뷰 요청, 그리고, 현의 이름이 적힌 회의 요청 메일.이수는 마우스를 쥔 손을 잠시 멈췄다.거절할 이유도, 미룰 이유도 없었다.그래서 더 불편했다.오후 세 시, 가능하신지요.그 문장은 업무적인 예의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이수는 알고 있었다.이 만남이 업무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도진은 체육관 한쪽에 서 있었다.샌드백을 친 것도 아니고, 러닝머신 위에 오른 것도 아니었다.그저 운동을 하다 말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몸은 충분히 단련되어 있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요즘 들어 집중이 흐트러지는 순간이 잦아졌다.이유는 명확했다.이수.그녀와의 대화, 그녀가 남긴 말,그리고 말하지 않은 것들.도진은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가 다시 넣었다.연락하고 싶은 마음과 참아야 한다는 판단이 서로를 밀어내고 있었다.그때, 메시지가 도착했다.-오늘 오후에 잠깐 볼 수 있을까요.이수였다.도진은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았다.-네. 시간 말씀 주세요.답장을 보내고 나서 그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선택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현은 회의실에 앉아 있었지만 자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머릿속에는 어젯밤의 장면이 계속해서 재생되고 있었다.나란히 걷던 두 사람.짧은 거리. 그러나 그 사이에 흐르던 공기.현은 그 공기를 잘 알고 있었다.그건 관심이나 호기심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고 있다는 증거였다.회의가 끝나자 그는 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회의 시간, 변동 없겠져?.”“네.”이수의 대답은 담담했다.“
저녁이 내려앉은 도시는 낮보다 더 솔직했다.빛은 많았지만, 그 빛 아래 숨길 수 없는 그림자들이 각자의 발밑에 또렷이 드러나 있었다.이수는 카페를 나와 천천히 걸었다.현과의 대화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상태로 가슴 한켠에 남아 있었다.중요한 인연.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그러나 중요하다는 이유만으로 머물 수 없는 자리도 있다는 걸이수는 너무 오래 살아오며 배웠다.휴대전화가 진동했다.도진이었다.-어디 계세요?-제가 가도 될까요.이수는 한참을 서서 화면을 바라봤다.답장은 간단했지만 그 한 줄이 오늘 밤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집 근처예요.-잠깐이면 괜찮아요.보내고 나서 이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이 만남이 어떤 의미가 될지 아직은 모른 척하고 싶었다.도진은 차를 몰며 라디오도,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았다.도시는 익숙했고 길도 알았다.집중해야 할 것은 길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었다.이수와 단둘이 마주하는 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그러나 이번은 달랐다.이제 그는 모른 척할 수 없었다.이 끌림이 우연도, 단순한 호감도 아니라는 것을.차를 세우고 그녀를 발견했을 때, 도진은 본능적으로 숨을 고르며 차에서 내렸다.“오래 기다리셨어요?”“아뇨.”이수가 고개를 저었다.“방금 나왔어요.”둘 사이에는 차가운 공기와 말하지 않은 말들이 같이 서 있었다.도진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이수도 그 옆에 나란히 섰다.“오늘…”그가 입을 열다 말고 잠시 멈췄다.“힘드셨죠.”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말이었다.이수는 작게 웃었다.“힘들지 않은 날이 더 드물죠.”그 대답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긴 시간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잠시 후, 도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현 대표를 만나신 건가요.”이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피하지 않았다.“네.”그 짧은 대답에 도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괜찮으세요?”이번에는 이수가 되묻는 차례였다.도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가늘게 떨리는 결이 있었다.그 떨림은 이수만 느낀 것이 아니었다.도진 역시 자신 안에서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는 이 날은 너무 이르고, 운명은 아직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둘의 발걸음이 나란히 복도를 따라 이어질 때비 온 뒤의 햇빛이 천천히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의 긴 선처럼 이어 붙였다.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동시에 이미 모든 것이 시작되고 있었다.전각 앞에 도착했을 때, 하늘은 이미 낮빛
아침 햇살이 기와 위를 얇게 훑으며 지나갔다.비가 그치고 얼마 되지 않은 궁의 공기는 습기와 햇빛이 뒤섞여 묘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이수는 도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 걷고 있었다.비단 치마가 발목에 스치는 소리가 궁의 긴 복도에 조용히 흩어졌다.걸음을 옮길 때마다 종종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이 낯선 인생의 첫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느껴졌다.도진은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돌바닥 위에 닿는 그의 발걸음은 군더더기 없이 단정했다.앞서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가 평생 검을 들어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기압
아직 한 마디도 들은 적 없는 사람.이름조차 모르는 남자.하지만 왜인지 모르겠는 떨림이 그의 모습과 함께 가슴 위로 올라왔다.‘저 사람…’그녀는 이유 없이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그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는 다른 무사들과는 달랐다.기세라기보다, 결이 있었다.그 결은 단단하고 곧았지만 어딘가에 오래된 상처를 품은 듯한 분위기였다.한편, 세자의 곁에 서 있어야 할 자리에 그는 정확히 서 있었다.세자 현. 오늘 그녀가 첫 인사를 올려야 할 사람.혼례를 올릴 예비 남편이자, 나라의 중심이 되어갈 사람.그러나 지금
도진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소문은 이미 들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들으니 사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세자가 혼례를 치르는 문제는 나라 전체의 일이며 궁 전체가 흔들리는 날이었다.“좌상댁의 영애라 하더군.”이현이 덧붙였다.“예, 저하.”도진은 짧게 대답했다.그 이상의 말을 할 권리는 그에게 없었다.하지만 그 순간 전각의 문 밖에서작은 물방울 하나가 지붕 끝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촛불이 그 작은 소리에 반응하듯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그리고, 그 흔들림과 동시에 도진의 머릿속 어딘가가이유 없